묵향 4권 17화 – 강자의 자리
강자의 자리
거대한 연무장(練武場)에는 높은 단상이 마련되었고, 그 중간에 호화로운 호피 의자를 놓았다. 단상의 앞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그중 일 부는 튼튼한 강철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 외에 부상자들은 그들의 뒤에 앉아 있었고, 무릎 꿇고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당한 인물들은 제일 뒤쪽에 누워 있었 다. 그리고 그들을 포위하는 듯 또 다른 고수들이 무장을 한 채 그들의 양옆에 도열해 서 있었다.
묵향은 검은 비단에 황금빛 용과 은빛 호랑이가 싸우는 형상이 수놓인 호화로운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와 단상 위의 호피 의자에 앉았다. 이 호화로운 옷은 마 교의 교주가 즉위식을 할 때 단 한 번 입는 옷으로, 식이 끝나면 불살라져 그 짧은 생명을 마쳤다. 이 값비싼 옷을 태우는 것은, 마교의 교주가 되기 위해 많은 경쟁자 들을 물리치며 피를 흘렸지만 이제 더 이상의 혼란은 없기를 바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행위였다.
“삼면인마 장로!”
소무면 장로는 부름을 듣고 천천히 일어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대는 본좌를 도와 마인의 길을 함께 할 것으로 믿네. 검을 가져오라.”
수하 하나가 소무면 장로가 평소에 애용하던 검, 즉 그가 장로로 즉위하면서 교주에게서 받았던 검을 가져와 묵향에게 바쳤다. 예로부터 마교에서는 교주의 신물 (信物)인 수라마검(修羅魔劍)만은 못하지만 그에 준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무기 아홉 가지를 선택하여 장로의 신물로 삼았다.
그것은 교주가 즉위할 때, 또는 새로운 장로가 임명될 때마다 다시 받게 된다. 새로운 교주가 즉위할 때가 되면 장로들은 자신이 가진 무기를 반납했고, 그것은 즉 위식 때 다시 지급되었다. 이때 새로운 교주에게서 무기를 하사받지 못한다는 것은 장로에서 해임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소무면 장로는 새로운 교주에게서 검을 받아 들어 그것을 소중히 허리에 찼다. 묵향은 그 모습을 잔잔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자네에게는 예전과 같이 수라마참대를 맡기겠네.”
“감읍할 따름입니다.”
묵향은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소무면 장로에게서 시선을 돌려 무영신마를 바라봤다. 무영신마는 장인걸이 집권한 후 두각을 나타내어 자성만마대의 대주가 된 신 진고수였다. 무영신마는 개인적인 무공의 성취에 있어서는 조금 떨어졌지만 병서를 많이 읽은, 마교 고수로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 덕분에 이번에 벌어진 집단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물론 그 때문에 묵향 쪽에서는 단단히 고생을 했지만 말이다.
무영신마는 장인걸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기 직전까지 외곽 호위 무사들과 자성만마대를 통솔하여 흑풍대와 혈전을 벌였다. 자성만마대 개개인의 무공은 흑풍 대보다 훨씬 윗줄에 놓였지만, 흑풍대는 각종 공격 및 방어 장비를 충분히 갖춘 상태였기에 간신히 평수를 이룰 수 있었다.
좀 더 오랜 시간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인원과 개개인의 무공이 월등히 우세한 무영신마 쪽의 승리로 결판이 났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치열한 사투 끝에 어 느 정도 우위를 차지했을 때 장인걸이 탈출했다는 보고를 접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전투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수하들을 이끌어 재빨리 전장을 이탈했다. 무릇 정예라는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 무리는 그 진격과 후퇴, 특히 후퇴할 때의 속도가 엄청나다. 관지는 상대가 총공세를 취할 듯 진을 전개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일순 당황했다. 그들이 후퇴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챈 관지는 재빨리 묵향에게 전령을 보냈다.
묵향은 무영신마가 거느린 자성만마대를 포획하기 위해 재빨리 천랑대를 파견했고, 힘들게 그들을 찾아냈다. 만약 자성만마대보다 윗줄에 놓이는 천랑대를 파견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사히 장인걸과 합류했을지도 몰랐다.
묵향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영신마를 바라봤다. 장인걸의 탈출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앞에 포박되어 있는 무영신마였던 것이다. 자성만마대를 잡기 위해 묵향은 천랑대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장인걸을 추격하는 포위망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그사이로 장인걸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무영신마는 묵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과 어쩌면 수하들의 목숨까지도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장인걸 교주를 향한 의리는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관지와 천리독행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자네 덕분에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말이야.”
자신의 마음속까지 꿰뚫을 듯 쏘아보는 묵향의 강렬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무영신마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럴 수는 없었기에 그의 등 뒤 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기왕에 죽을 것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에 꿋꿋함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묵향은 빙긋이 웃더니 그에게도 장로의 신물을 건넸다.
묵향은 정통 마공을 익힌 인물들은 대부분 받아들였다. 혁무상 장로만 빼고. 그는 오마분시(五馬分屍)당하는 것으로 긴 생애를 마쳤다.
장인걸이 탈출에 성공했기에 사사혈시마대를 비롯한 장인걸이 키운 고수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그리고 장인걸의 혈족들 또한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다. 혈족을 살
려 두지 않는 것이 마교의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교주의 탄생으로 인해 부와 권력이 상승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목숨을 바친 자 또한 수없이 많았다.
쭈글쭈글한 피부, 하나뿐인 퀭한 눈동자. 어디를 봐도 이제 죽을 날이 가까운 초로의 노인이었다. 이렇듯 한눈에 보기만 해도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인 물의 비파골에는 굵직한 쇠사슬이 꿰어 있었고, 하나뿐인 다리에도 굵직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허약해 뵈는 노인을 꼭 이렇게나 학대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의 지나온 삶을 아는 인물이라면 이런 조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할 것이 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중원 최강의 문파인 마교의 전 교주였기 때문이다.
묵향은 한때 태산과 같이 거대하고 태양과 같이 강한 존재로 우러러봤던 한 무인의 비참한 말로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묵향은 일부러 더욱 무뚝 뚝하게 말했다.
“오랜만이구려, 교주.”
교주는 환골탈태(換骨奪胎)했을 정도로 엄청난 수련을 쌓은 육체를 지니고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내공이 상실되면서 급속하게 노화가 진행되었다. 교주는 하 나뿐인 눈을 반쯤 감고 있다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시선을 돌렸다.
“쿨룩쿨룩, 자네로군. 이 꼴이 된 나를 보니 꽤 기분이 삼삼할 거야. 안 그런가?”
이렇게도 비참한 상황에서도 당당한 교주를 보며 묵향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묵향의 눈에 아주 오래전 당당했던 교주의 강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 지만 묵향의 미소는 곧이어 사라져 버렸다. 묵향은 슬픔이 묻어 있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소, 교주. 한때는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기도 했지만 말이오.”
“크흐흐흐, 쿨룩쿨룩! 자네는 언제나 정직했지. 그런 자네를 믿었어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네. 쿨룩, 왜냐하면 나 자신이 거짓투성이였기에, 상대방도 거짓투성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남을 속이는 자는 절대로 타인을 믿지 못하지, 쿨룩.”
묵향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교주의 지금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오. 내가 알고 있던 교주는 배신의 그 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정직했소.”
“크흐흐, 쿨럭쿨럭! 그래서 자네는 좀 더 배워야 하는 거야. 인간이란 것들은 간사하고 거짓을 좋아하지.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을 것 같으면 배신을 밥 먹듯 하는 거야. 지금의 내 꼴을 보면 알지 않나?”
“최소한 내가 보기에 교주는 그렇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교주의 자리를 나에게 물려주려고까지 했으면서 나를 경계했느냐는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 말에 교주는 공허한 웃음을 흘린 후 힘겹게 대답했다.
“허허허… 그걸 아직도 이해 못 하다니, 멍청한 친구군. 쿨룩! 나는 처음부터 자네나 장인걸에게 교주 자리를 물려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자네나 그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을 뿐이었지. 자네는 처음부터 교주가 될 욕심이 없었지만, 쿨룩쿨룩! 장인걸 녀석은 교활하게도 나를 멋지게 속였지. 카악, 퉤! 그놈 이 교주 자리를 욕심낸다는 사실을 본좌가 미리 알았다면 이 자리에 묶여 있을 놈은 장인걸이었을 거야. 대답이 되었나?”
“어느 정도는.”
“이제 궁금증이 풀렸다면 나에게 안식을 주게나. 그리고 저 친구에게도.”
교주는 사슬에 묶인 왼팔을 슬쩍 들여 자신 못지않게 참혹한 모습으로 묶여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더 이상 삶을 연장한다는 것은 나나, 저 친구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야.”
“교주는 살고 싶지 않소? 그전의 내공을 되살려 줄 수도 있소. 물론 신체적인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겠지만, 팔이나 눈, 다리가 없는 무사들도 알다시피 매우 많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교주에게 달린 것이겠지요.”
교주는 허옇게 변해 가는 머리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아니, 다 필요 없네. 백수의 왕 호랑이는 호랑이의 삶을 살아야 행복한 거야. 나에게 더 이상 구차한 삶을 강요하지는 말아 주게나.”
“장인걸은 죽지 않고 도망쳤소. 복수를 하고 싶지 않소?”
교주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건 자네에게 떠넘기기로 하지. 나를 교활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이 정도 세상을 살다 보면, 자연히 생겨나는 지혜니까 말이야, 쿨룩쿨룩. 이제 말하기도 힘 들군. 마지막은 자네의 손으로 해 주겠나?”
“잘 가시오, 교주.”
“자네도 잘 있게나.”
교주의 죽음은 순간적이면서도 평온한 것이었다. 묵혼검은 주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얼기설기 얽혀 있는 쇠사슬들과 함께 교주의 머리를 깨끗하게 몸통에 서 분리시켜 버렸다.
묵향은 묵혼검을 검집에 집어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연히 한쪽 구석에 떨어진 머리를 바라봤다. 잠시 후 묵향은 더욱 딱딱해진 음성으로 뒤에 서 있는 수하들에 게 명했다.
“율법대로 교주에 대한 예를 다하여 성대히 장사지내도록!”
“존명!”
“그리고 저분에게도 안식을 드려라. 한때 정도무림의 주인이셨던 분이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처리하도록!”
“존명!”
묵향이 돌아서서 세 발자국도 걷기 전에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