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5화 – 백일취주(百日醉酒)

백일취주(百日醉酒)

“어서 오십시오, 천도왕(王) 수석장로님.”

미리 기별을 받았는지 설무지 군사가 뛰어나오며 여지고 수석장로를 반가이 맞이했다. 설무지가 군사라는 직위에 있지만, 수석장로와 차석장로가 군사라는 직위 보다 낮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이외다, 군사.”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사혈천신(蛇血天神) 장로님은?”

“그는 부교주님이 명하신 대로 포섭자 명단을 들고 고루혈마(枯?血魔), 지옥혈귀(地獄血鬼)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소. 이미 몇 명 포섭했다는 보고를 들었소.” “각 분타에서 쓸 만한 무사를 뽑는 임무는 누가 맡고 있습니까?”

“음희(淫)와 사망혈매(死亡血梅)가 하고 있소. 사망혈매는 혈화궁 출신이니 정보에 뛰어나, 제대로 된 선발을 기대할 수 있을 거요.”

“몇 명 정도 뽑으실 건지요?”

“3천 명 정도로 하라고 지시해 놨소. 장인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들만 추려 뽑았지만, 그 안에 끼어든 건 어쩔 수가 없소. 조심할 수밖에…….”

“홍진 막주가 거처를 마련해 뒀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쪽으로 이동시켜 주십시오. 또 하나 주의해 주실 게 있는데…….”

“무엇이오?”

“좌외총관은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지고 장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으응? 꼭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그와 원수를 졌다는 초류빈이라는 자가 그분의 수하로 들어와 있습니다. 잘못하면 칼부림이 날 수도…….”

“알겠소. 외총관에게 주의를 주지.”

설무지는 다시금 처음에 의논하던 것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허허, 수하들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들이 확실히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만 있다면, 쓸 곳은 아주 많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새로이 정비된 조직에서 만묘서생(萬妙書生) 진천악(陳岳)이 보내오기 시작한 돈이 엄청나지 않소?”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죠. 참, 부교주님께서 찾으셨습니다.”

“부교주님의 상처는?”

상처 얘기가 나오자 설무지는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거의 치료되긴 했지만.. 호승심(好心)만 앞세울 뿐, 자신의 안위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하시니 천도왕 수석장로께서 말씀 좀 잘해 주십시오. 수석장로님 외에 그분께 직언을 올릴 만한 인물은 과거 흑풍단 시절의 친구들뿐이라서 말입니다.”

“알겠소. 지금 어디 계시오?”

“후원에 계십니다. 참,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아마도 도움이 될 겁니다.”

설무지가 내미는 물건을 받아 들고 천도왕 여지고 수석장로는 흰옷자락을 날리며 후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섰다. 묵향은 후원에 핀 꽃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마화가 묵향의 시커먼 등판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서 오게나.”

“안녕하셨습니까?”

“보다시피 별로 안녕하지는 못하다네. 상처도 쑤시고 등판도 좀 쑤시는 것 같군.”

이렇게 격식을 따지지 않는 강자의 밑에 있을 때는 편리한 점이 많이 있다. 마교에서는 교주의 지근거리에 설 때 무기를 꼭 풀어 놓아야 하지만 이 정도 무공 차이 가 난다면 그 법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자만심 강한 묵향이 구태여 그런 걸 따지지 않기도 했지만, 원체 예절 방면으로는 무지한 인물이기에 다소 격식에 어긋나 더라도 그냥 넘어가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잘못을 포용하는 자신감도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묵향은 언제나와 같이 깨끗이 세탁한 흑색 옷을 입고 묵혼검을 비스듬히 허리 뒤로 차고 있었다. 다만 그 흑색 옷 사이로 가슴을 칭칭 감고 있는 하얀 붕대가 드러 나 보인다는 점이 평상시와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할까…….

묵향은 여지고 장로를 이끌고 마루로 올라섰다.

“반가운 친구가 왔는데, 차를…, 아니 술을 좀 가져와라.”

그러자 마화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몸도 안 좋으시면서 무슨 술이에요? 차를 드세요. 수석장로님도 차를 드실 거죠?”

마화는 여지고 장로를 노려보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살기와도 같은 무형의 압력을 느끼며 여지고 장로는 짐짓 두려운 듯, 또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 며 마화의 태도에 장단을 맞췄다.

이런 식으로 수하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아 본 마교의 고수는 없었다. 여지고 장로는 마화가 수하로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묵향을 깊이 생각하고 있음을 느 꼈다.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도 했다. 마교란 공포와 광기에 의해 유지되는 단체. 수하들에게 공포를 통한 존경은 받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는다는 건 도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화가 차를 준비하라고 시비를 부르러 나가자 묵향이 이때다 싶은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길, 상처는 거의 다 나았는데 저 야단이야.”

“그래도 저는 부교주님이 부럽습니다.”

그러자 묵향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말로만.. 침대에서 눈을 뜬 후에 저 녀석의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아나? 거기에다 중간 중간에 대답을 해야 하는 질문을 던져 대니 청각을 마비시킬 수도 없고. 으윽, 호위를 바꿔 달라고 관지한테 부탁하든지 원……. 요즘은 저놈의 잔소리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마누라도 아닌 게 잔소리만 늘어가지고……. 요즘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구. 거기다 본좌가 더 신경질 나는 건 마화의 행태를 주변의 모든 놈들이 부추기고 있다는 거야. 직접 말하면 될 걸 가지고 왜 마화가 잔소리 를 하도록 옆에서 충동질하냐 이 말이지, 제길.”

여지고 장로는 묵향의 푸념을 들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묵향의 성질을 알고 있는 인물들 중에 그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강심장이 본교에 존재할까? 이번 암습에 대해 직접 말은 못하겠고 속에서 열불이 끓기는 끓으니, 대신 마화를 충동질하며 응원한 것이겠지.

그런 면에서 성질이 괄괄하고 화통한 여걸인 마화는 묵향과 합류한 마인들에게 아주 유명했고, 꽤나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다. 원래가 이런 잔소리는 부인이 해야 하지만 부인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묵향은 마화의 말은 웬만하면 참고 견뎌 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침공 작전은 어찌 되고 있는가?”

“지금까지 네 개의 문파를 비밀리에 복속시켰습니다. 오랜만의 일거리라서 그런지 한중평이 신이 난 모양이더군요. 또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일거리기도 했구요.” “관지는?”

“그런대로 잘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잘되었군. 흑풍대는 기병대니까 평지에서는 대단히 큰 전력이 될 수 있네. 거기에 집단전을 교육받은 것은 흑풍대뿐이잖은가? 총단을 공격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네.”

그러더니 묵향은 품속에 손을 넣어 편지를 꺼냈다.

“이 편지를 한번 읽어 보겠나?”

“…..”

여지고 수석장로가 편지를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묵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떤가?”

“군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물론 이간책이라고 하지. 장인걸이 잔머리를 굴려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게 확실해.”

“그럼 저에게 원하시는 답은 뭡니까? 저는 이런 쪽으로는 잘 모릅니다. 그냥 단순한 무인일 뿐.

이때 마화의 뒤를 따라 시비가 들어와 두 잔의 차를 공손히 놓고 돌아갔다. 여지고 수석장로는 찻잔의 뚜껑을 열고는 향기를 감상한 후 천천히 맛을 음미하더니 놀 랍다는 듯이 말했다.

“용정차로군요. 대단히 잘 끓인. 부교주님의 취향이 날로…….”

“무슨 소리야? 용정차는 또 뭐고. 차는 그냥 대강 마시면 되지 뭔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자네도 마화를 닮아가나? 원…….”

묵향은 퉁명스레 한소리한 후 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가 그대로 꿀꺼덕 삼켜 버렸다. 이런 무식한 인물이 마시기에는 너무 좋은 차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마화 가 뒤쪽에서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좀 무식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대로 내려오는 장군가의 여식이다. 오랜 군무 덕에 그놈의 예절이 많 이 희석되기는 했어도 기본은 남아 있는 것이다.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마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지고 장로는 마화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탁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부교주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러네.”

“알겠습니다.”

마화가 자리를 뜨자 여지고 장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흐흐흐, 차 말고… 혹시 이거 드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여지고 장로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독하다 독하기로 소문난 백일취(百日醉). 원래 술 이름은 따로 있지만 은은한 국화향이 감도는 독한 술에 한약재까지 들어가

있어, 마시고 나면 뱃속까지 찌르르 울리는 게 특징이다. 여지고 장로가 술병을 꺼내자마자 묵향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찻잔 속의 용정차를 화원 에다가 부어 버리고 곧바로 잔을 들이밀었다. 역시 음흉한 미소와 함께.

“흐흐흐, 역시 수석장로는 본좌의 마음을 잘 아는군.”

“뭘요. 저는 심부름꾼 정도밖에 안 됩니다. 군사가 준비한 거니까요. 부교주께서 좋아하실 거라면서 가져가라고 하던데요?”

“역시……. 노부가 수하들은 아주 제대로 얻었지. 크, 저엉말 좋은 술이군.”

“그런데, 부교주님.”

“왜 그러나?”

“앞으로는 몸을 좀 생각해 주십시오. 춘약과 산공분, 거기에 몽혼약까지 중독이 된 상태에서 적을 상대하려 드시다니……. 부교주님께 의지하고 있는 저희들을 생각하신다면 적어도 그런 행동은 하시는 게 아니죠.”

“자네 같으면, 조금 힘들겠지만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포기하겠나?”

“…..”

“포기하겠냐구.”

“속하야 포기하지 않겠지요. 저한테야 딸린 식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부교주님께는 수천 명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알겠네. 앞으로는 주의하지. 하지만 그때 일을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야. 아주 재미난 대결이었다구.”

“그 자객에게 뭘 알아내셨습니까? 듣기론 생포하셨다고…….”

“아, 그 녀석 지금 지하 감옥에 떡이 되어 뻗어 있지. 살살 다루라고 했는데, 수하 놈들이 영 말을 안 듣는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한 잔 더 줘.”

“예, 너무 급하게 드시지 마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석장로는 잔 가득 백일취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