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1화 – 새로운 세계
검과 마법이 지배하는 세계.
그 세계에는 많은 국가들이 나름대로 힘을 키워 나가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은 시발점이 된 사건은 어느 산속, 아무도 신경도 쓰지 않던 곳에서 일어났다.
다른 세계의 인간이 이곳에 방문했던 것이다. 그 또한 다른 세계에서 마법에 의해 추방된 인물. 그는 자신이 살던, 익숙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그의 고향은 송나라, 아니 무림(武林)이란 곳이었다.
새로운 세계
“쿵!”
순간적으로 지상 위 2장(약 6미터) 거리에 검은색 원반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한 물체가 떨어졌다. 약간 불그스름한 황색을 띠는 덩어리였다. 그 덩 어리는 땅바닥에 처박히자 튀어 오르듯이 몸을 일으켰다. 사람이었다. 완전히 벌거벗은 사내는 맨손 격투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먹이를 노리는 맹호 (猛虎)처럼 살기 띤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이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약간 짙은 눈썹으로 인해 강인해 보이는 얼굴.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또, 그렇게 못생긴 것도 아닌 그런대로 봐 줄 만한 얼굴이었다.
묵향(墨香)은 혈교(血敎)의 무리들과 싸우던 도중 갑자기 주위에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잠시 후 지독한 어둠의 폭풍 속으로 떨어져 내렸던 기억을 상 기하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여기가 어딘지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놈들은 뭔가 해괴한 술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어딘가로 날려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어딘가’라는 점 때문에 그의 마음은 약간 복잡해졌다. 어떻게 자신의 부하들과 합류해야 하는 고민은 둘째 치고, 지금 이곳이 어딘지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 곳인지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묵향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산과 골짜기뿐 아무런 위험도 느껴지지 않았다. 묵향은 천천히 끌어올렸던 기를 다시 가라앉히고 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어디쯤인지 알아야 돌아가지. 순간적으로 하늘을 날아온 것인가? 이해가 안 가는군. 거기다 옷은 어디 간 거야? 또 내 검과 비수는? 제길 돌아 버리겠네… 어쨌든 일단은 민가(民家)를 찾아서 옷부터 구하고, 여기가 어딘지나 알아본 다음 돌아갈 궁리를 해야겠어.”
묵향은 길도 없는 숲 속을 경공술(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술)을 전개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옷을 홀랑 벗고 경공술을 펼치는 것은 그로서는 난생 처 음해 보는 경험이었다. 이윽고 삼림 지대(地帶)가 나타나자 묵향은 곧바로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삼림 지대에서는 나무 밑으로 달려가는 것보다 나무 위쪽의 가지들을 밟고 가는 게 덜 귀찮기에 묵향은 그 방법을 애용했다.
거의 두 시진(네 시간) 정도 달렸을까…………. 하지만 아직도 삼림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배가 고파진 묵향은 달리기를 멈추고 나무 아래로 내려 갔다.
‘뭐라도 잡아먹어야 해. 그리고 가죽이라도 벗겨서 입으면 그래도 좀 낫겠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묵향의 눈(目)에, 아니 눈이라기보다는 기(氣)에 무언가 생물이 포착되었다. 묵향은 그쪽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큭! 뭐 저렇게 생긴게 있지?”
묵향이 보기에 그놈은 정말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의 10척(약 3미터)의 장신에 부리부리한 눈알, 털은 없었지만 초록색이 나는 징그러운 가 죽, 거기에 기괴하게도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있었고, 한쪽 손에는 거대한 돌도끼를 들고 있었다. 가죽으로 대강 아랫도리를 가린 것을 보면 꽤나 지 능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놈은 묵향을 바라보더니 뭐라고 떠들어 댔다.
“크르르르… 호비트인가? 크르르르… 배고픈데 잘됐군…….”
물론 이 말은 그 괴물 족속의 고유 언어였기에 묵향으로서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묵향은 곧바로 그 퍼런 놈의 행동에서 그 뜻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퍼런 놈은 거대한 돌도끼로 위협하며 묵향을 향해 다가왔다.
‘이게 말로만 듣던 영물(物신령스런 생물, 잡아먹으면 내공 증진에 효험이 있다)인 모양이군. 아직 연수가 덜 차서 말은 못 하는 모양이지? 평생 영약, 영물은 먹어 본 적도 없었는데…………. 크크크. 말년에 이게 웬 횡재(橫財)냐. 거기에 잘 말려 놓은 가죽 옷까지 입고 있군.’
묵향은 그놈의 심장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곧바로 지풍(指風)을 날렸다. 역시 그놈은 덩치만 컸지 동작은 굼떠서 그대로 지풍이 격중되 었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색 피가 튀면서 몸에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묵향은 그놈의 상처가 눈에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는 것을 보 고는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력은 별 볼일 없는 영물이라서 그런지 상처 회복 속도는 끝내 주는군. 그렇다면 이거 한번 받아 봐라.’
곧이어 묵향의 공격이 시작됐다. 묵향은 그대로 손을 횡으로 쫙 그었고, 그의 손에서는 퍼런 강기(剛氣)가 반월형으로 상대에게 날아갔다. 상대는 몸 통이 그대로 두 토막이 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곧 아물어 버렸다. 정말이지 신경질 날 정도로 재생력이 좋았다.
이때 묵향의 머리에는 과거 무림에서 괴이한 무공을 익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한 재생력을 가진 고수들과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은 재생력 이 너무나 좋았기에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서, 상대적으로 작은 상처를 남기게 되는 칼로는 잘 죽지도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순간 묵향의 손에서는 다시금 강기가 뿜어져 나갔고, 그 목표는 놈의 목이었다. 묵향은 상대의 목이 강기에 베어지는 순간 몸 을 허공에 날려 왼발 뒤꿈치로 상대의 머리를 깨부숴 버렸다. 퍼런 녀석의 목은 재생해서 붙을 시간도 없이 타격을 받다 보니, 반쯤 터져 나간 채 2장 반(약 7.5미터)쯤 떨어진 나무에 맞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목을 잃은 그 퍼런 녀석은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놀랍게도 쓰러진 퍼런 녀석의 목에서는 녹색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묵향은 제일 먼저 놈의 엉성한 가죽 옷을 벗겼다. 막상 벗겨 놓고 보니 너 무 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가죽 옷을 죽 찢어서는 대강 몸에 두른 후 그 녀석을 발로 뒤집어 앞부분
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루루루・・・ 내단, 내단…….”
묵향의 손이 푸른빛을 띠며 놈의 배를 쭉 훑어 내리자 곧장 피가 튀며 배가 갈라졌다. 퍼런 놈은 죽었는데도 계속 재생을 하는 바람에 내단 찾는 일 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묵향은 내단에 대한 집념을 떨쳐 내지 못했다.
내단은 영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기를 정제하여 한 곳에 쌓아 두는 것으로서 그걸 먹으면 엄청난 내공 증진의 효과가 있었다. 그렇기에 묵향 은 이 하늘이 내려 주신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사실 묵향은 내단 따위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부하들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묵향은 상당한 시간을 들여 퍼런 놈의 뱃속을 샅샅이 뒤집어 보고야 이놈에게는 내단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기랄! 내단이 없다니……………. 아직 어려서 그런가? 할 수 없지. 이럴 줄 알았으면 후배들을 위해서 좀 더 살게 놔두는 건데. 이왕 죽였으니 요기나 하 는 수밖에…………. 영물은 내단 말고 고기를 먹어도 힘이 솟는다고 하지 않던가? 흐흐흐.”
묵향은 주위에서 나뭇가지들을 모아서는 손가락 끝에 양강(陽)의 기를 끌어올렸다. 곧이어 손가락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뿜어 대기 시작 했고, 그렇게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그리고 저쪽에 꿈틀거리는 그놈의 팔을 가져다가 굽기 시작했다. 재생력이 좋아서 그런지 잘 익지 않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통 고기들보다 익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는 것뿐 뭐 별다른 게 없었으니까.
맛은 별로였지만 배를 두둑하게 채우고, 남은 고기를 싸든 묵향은 다시 경공을 전개했다. 몇 날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일직선으로 계속 달리 다 보면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나올 테니까……………
해가 지기 직전에 묵향은 삼림 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들풀이 우거진 초원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다가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발길을 멈췄다. “제기랄, 인적(人)이 안 보이는군. 오늘은 이쯤에서 쉬고 내일 또 달리기로 하지.”
탈마(脫魔)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식량까지 준비된 상황에서 모닥불을 피울 리는 없다. 모닥불 따위를 피워 봐야 그 불빛을 보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 들밖에 더 모이겠는가. 묵향은 벌렁 드러누워 가져온 고기를 씹으며 밤하늘을 쳐다봤다.
공기도 맑고, 촉촉한 습기를 안고 있는 시원한 밤바람도 불어오고, 별들도 많고, 달들도 밝고………….
“헉!”
묵향은 벌떡 일어나서 하늘을 바라봤다. 눈까지 비볐는데도 변함이 없었다. 이번에는 꼬집어도 보고·
“으윽, 제기랄! 꿈은 아닌데…………. 달이 두 개가 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저건 뭐지?”
묵향이 아무리 부인을 해도 하늘 위에 떠 있는 달들…………. 하나는 중원에서 보던 달만 하고 또 하나는 그것보다 조금 작았다. 그 달들의 숫자는 변함 이 없었다. 꿈이 아니라면 저쪽에 보이는 조그만 달은 없어져야 하는데 말이다.
묵향이 떨어진 곳에서 대단히 먼 곳에, 면적은 제법 넓었지만 그 국토의 90퍼센트 이상이 산이라서 경제 사정이 별로 좋지 못한 크라레스 제국이 있 었다. 원래 크라레스 제국은 지금보다 세 배쯤 더 넓었고, 비옥한 크로나사 평야를 가지고 있어 매우 풍요롭고도 아름다운,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였 다.
크라레스 제국은 이웃의 코린트 제국과 동맹하여 그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강대한 아르곤 제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곤 제 국의 황제가 갑자기 광신도가 되어 버렸는지 크로노스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아르곤이 정신없는 동안 코린트는 크라레 스 제국을 기습했고, 크라레스 전 영토의 80퍼센트나 되던, 비옥한 크로나사 평야를 차지해 버렸다.
코린트가 군사적으로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습까지 당하고 보니, 크라레스 제국은 완전히 박살 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멸망 하는 사태라도 막아 보자는 일념으로 바운스고르 5세는 비옥한 크로나사를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제안했다.
코린트로서도 크로나사 평야를 제외한 쓸모없는 대지를 차지하기 위해 장기적인 전쟁을 벌이기에는 군사력의 소모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고는 그 조 약에 찬성했다. 비옥한 크로나사 평야를 차지해 풍족해진 코린트는 30년도 지나지 않아 내전으로 전력이 약화된 아르곤을 제치고 세계 최강의 대국 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현재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는 크로돈. 과거에는 여름 궁전이 위치하고 있던 황제의 여름 휴양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작은 별장처럼 지어진 아름다운 궁전의 한 방에는 수려하게 생긴 30대 정도의 젊은이가 식사 중이었다. 그의 몸은 상당히 건장했고, 꽤나 근육질이었다. 또 그 근육이 거저 다져진 게 아님을 인식시키듯 그의 허리에는 매우 호화로운 바스타드 소드가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도저히 왕궁에서 먹는 음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각종 채소와 약간의 돼지고기를 넣고 푹푹 끓인 스프, 검은 호밀빵, 우유, 그리고 여러 가지 채소만 듬뿍 넣고 쇠고기는 조금만 넣은 채소볶음이 전부였다.
그가 한참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다. 50세는 넘었고 60은 안 되어 보이는 얼굴에, 마법 사들의 공식 복장인 로브(Robe)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인 듯했다. 그는 젊은이가 식사를 끝내고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걸 보면서 조용 하지만 뭔가 감정이 억눌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폐하, 제국의 안위는 폐하의 건강에 있사옵니다. 제발 좀 기름진 식사를 하시옵소서. 웬만큼 사는 백성들도 이 정도는 아니지, 이것보다는 더 잘 먹사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토지에르 경. 이 산골로 쫓겨난 후 대 제국 코린트에 복수한답시고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있는데, 어찌 백성들이 이 정도 식사라도 할 수 있단 말이
오? 또 이 정도 식사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나 혼자서 잘 먹고 잘살자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지 않소? 돌아가신 선황 폐하께서도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소. 또 그걸 실천하셨구요. 내가 선황 폐하의 말씀대로 실천했다고 해서 내 건강이 나빠진 게 또 뭐가 있소?” “그래도 폐하께서는 모든 백성들의 희망이시옵니다. 좀 더 몸을 생각하시옵소서.”
“자자, 그 이야기는 그만 두시구려. 내가 한 끼 잘 먹을 돈을 절약하면, 백성 수십 명이 한 끼 요기할 돈이 되오. 나는 쓸데없이 낭비를 하고 싶지 않 소.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오?”
토지에르 경은 침중한 안색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코린트에서 사신을 보낸다고 하옵니다. 아마도 국경 부근의 산적과 몬스터 토벌을 위해 군사력을 쓰라는 말이겠지요. 그 녀석들 자기 군사력은 쓰 지도 않고…….”
그러자 젊은 황제는 늙은 신하를 따뜻한 어조로 위로했다.
“너무 상심 마시오. 뭐 그런 일을 한두 번 당했소? 선황 폐하께서 그놈들의 간계에 빠져서, 그게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까지 하셨잖소. 내가 제위에 오른 게 여덟 살 때였으니, 흐음…, 벌써 28년 전에 있었던 일이군. 그때 이후로 그놈들은 본국이 힘을 기르지 못하게 갖은 방법을 동원 해 오지 않았소? 산적과 몬스터 토벌이야 군사 훈련도 되니 뭐 일석이조지.”
묵향은 토끼나 사슴 비슷하게 생겼는데 염소처럼 뿔이 붙어 있는 짐승들을 사냥하면서 4일 밤낮을 달리고서야 사람이 만들어 놓은 도로(道路)를 볼 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한 시진(두 시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언덕 위에 통나무로 만들어 놓은 색다른 모습의 집이 한 채 있었다. 집이 색다른 건 둘 째 치고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 하나만 보고 사람이 살고 있을 거란 생각에 묵향은 그 집을 향해 달려갔다.
똑똑.
그러자 안에서 열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애가 문을 살짝 열고는 밖을 바라봤다. 아이는 괴상한 가죽 쪼가리를 걸친 묵향의 행색을 보고는 놀라 서 물었다.
“와, 몬스터를 만났어요? 옷이 왜 그래요?”
‘이런・・・・・・’
묵향으로서는 가장 큰 문제에 봉착한 순간이었다. 꼬마 애의 생김새가 자신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 어찌 보면 요괴라고 생각이 들 만큼 깜찍하게 생겼다. 그 덕분에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지만… 생각해 보면 달이 두 개인데, 사람이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이 아니라 파란머리에 갈색 눈이라도 이상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참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꼬마 애 가 떠드는 소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아이는 인간인 것 같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나?’
난감해하는 묵향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아마도 묵향이 가만히 있자 어머니를 데려온 모양이다. 그녀 또한 묵향으로서는 본 적이 없는 색다른 옷 을 입고 있었다. 통이 넓은 긴 치마에 천으로 만든 이상하게 생긴 걸 옷 위에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하게 생긴 것에는 허연 가루가 묻어 있었 는데, 묵향이 보기에는 밀가루가 아닌가 싶었다.
가죽을 대강 둘둘 말아 몸을 가리고서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한 남자를 보고, 꼬마 애와 같은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그 여인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집에는 남자가 없었기에 이 눈앞의 이상한 남자가 광기라도 부리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세요?”
“저 혹시, 제기랄… 이런다고 알아듣나?”
색다른 묵향의 말에 여인도 놀란 듯했다. 그 여인은 재빨리 아이를 자신의 뒤로 숨기면서 말했다.
“뭘 원하는 거죠?”
원래 부근에서는 다 같은 말을 쓴다. 서로 말이 다르면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 부근은 모두 다 이런 언어를 사용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이곳이 국경 지대라면 또 모르지만………….
하지만 묵향은 여태껏 지나왔던 곳을 되돌아 반대편으로 갈 생각은 포기했다. 왜냐하면 여기는 달이 두 개였으니까…………. 그 말은 곧 이곳에서 아무 리 돌아다녀도 중원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니까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실력을 닦는 게 무엇 보다도 우선적인 과제였다.
“저…, 여기서 지내면서 말 좀 배울 수 없겠소?”
“엄마, 저 사람 뭐라고 하는 거예요?”
“모르겠구나. 오크나 고블린도 아닌데, 이상한 말을 하네……………
모녀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묵향을 바라보며 쑤군거리자 묵향은 말로 해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묵향은 먼저 상대의 옷을 가리켰다가 자신의 가죽 옷을 가리켰다.
‘제발 좀 눈치 채라!’
몇 번 더 손짓을 해대자 여인은 그 남자가 옷을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 입던 옷 중에서 제일 낡은 걸 사내에게 가 져다 줬다. 묵향은 그걸 받아서는 집 뒤로 돌아가서 입었다. 좀 크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이나마 있는 게 어딘데……………. 옷을 입고 난 묵향은 주변을
휙 둘러본 다음, 저쪽에 패다가 놔둔 장작더미가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모녀의 의심스런 눈빛을 뒤로하고 묵향은 도끼를 들어 묵묵히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그래,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는 거야.”
갑자기 묵향이 장작을 패기 시작하자 의아했지만, 그의 행동으로 모녀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강도나 도둑은 아닌 거 같고, 옷을 얻어 입었으니 그 대가로 장작을 패는 건가? 어쨌든 말이 안 통하니 두고 볼 수밖에.
묵향이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천천히 장작을 패는데, 꼬마 애가 묵향의 곁으로 다가왔다. 묵향은 꼬마 애한테 이것저것을 물었다. 당연히 말이 안 통하니 손짓 발짓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묵향은 일단 자신이 쥐고 있는 도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뭐냐?”
꼬마 애는 한동안 묵향이 의도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끝내는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도끼.”
“엑스(ax)?”
“예, 도끼요.”
“그럼 이건?”
쌓아 둔 장작을 가리키며 물었다.
“장작!”
“파이어우드(firewood)?”
조금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꼬마 애를 데리고 다니며 근처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물어 댔고, 열심히 머릿속에 그 생소한 언어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몇 달이 지나 어느 정도 말이 통하게 된 후에는 펜과 종이를 구해다가 거기에 기록을 하며 외웠지만, 처음에는 무조건 머릿속에 쑤셔 넣는 도 리밖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묵향은 그들의 언어를 죽자고 익혔고, 서서히 그 결과가 드러났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그 집 주인과 남자 아이를 보고 묵향은 그가 사냥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 다 큼직한 활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 슴처럼 생긴 것 한 마리를 등에 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사냥꾼은 아내에게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정체모를 인물이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은 못마땅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데다가 꼬라지로 보아하니 뭔가 지독한 일을 당한 것 같기도 하고…………. 어 쨌든 옷 한 벌 얻어 입었다고 장작을 패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걸 보면 나쁜 놈 같지는 않아서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자 사냥꾼은 묵향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사냥꾼이나 그의 아내가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눈치 챈 묵향이 일부러 밤에 는 근처 숲에서 자고, 아침에나 돌아와서는 여러 가지 일을 거들어 주면서 말을 배웠던 것이다.
묵향은 정말 열심히 말을 익혔다. 밤에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말 배우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일단 의사가 통해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틈틈이 사냥도 하고, 장작도 패 주고, 여러 가지 잡일도 도와줬지만, 그것도 그냥 얻어먹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묵향에게는 반 시진(한 시간) 정도의 사냥이야 별로 시간이 아까울 게 없었고, 살수 생활을 거쳤던 고수에게 있어서 토끼나 사슴 정도 추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나마 이래저래 밥값을 해 주는 덕에 그 집 사람들도 묵향이 말을 배우는 것을 잘 도와줘서 빠른 시간 안에 말 을 배울 수 있었다.
쓸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젊은 황제에게 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의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단단한 근육질의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인물이었 다. 그는 크라레스 제국의 근위 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였다.
“어서 오시게, 론가르트 단장.”
“폐하,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코린트에 공녀를 2백 명이나 또 바쳐야 하는데…, 내 백성들을………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매년 있어 온 일이 아니옵니까? 그걸 없애려면 최대한 빨리 국력을 회복하여 코린트에 맞먹는 힘을 길러야만 하지요. 그 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쓰시면 몸이 못 견디옵니다, 폐하.”
그러자 젊은 황제는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공녀는 차출해 놨소?”
“예, 폐하. 일주일 후에 코린트로 떠날 것이옵니다.”
“가는 길을 철저히 호위하여 코린트 녀석들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게.”
10여 년쯤 전에 산적을 가장하여 코린트 정규군이 공녀들을 빼돌린 후 공녀를 보내지 않았다고 억지 트집을 잡았던 일이 있었다. 그때 2백 명의 공 녀를 또다시 차출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그 후로 크라레스 제국에서는 공녀나 공물의 호위에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소신이 직접 기사 1백 명을 이끌고 갈 것이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그럼 부탁하겠소.”
두 달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묵향은 이곳이 ‘트루비아’라는 작은 왕국이고, 여기서는 각 지방을 ‘귀족’이라 불리는 ‘영주’들이 다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루비아는 코린트라는 대 제국의 작은 속국이며, 이웃인 ‘토리아’ 왕국과 사이가 안 좋다는 것 등 자잘한 사실들도 주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몬스터’라 불리는 괴물들이 많은데, 지능은 사람보다 떨어지지만 그런대로 뛰어나 패거리로 행동하며 산적질을 한다는 것도 알 았다. 게다가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는 것도…………. 그래서 몬스터는 조심해야 한다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은 몬스터를 먹지 않는다는 거였 다.
묵향은 돼지 비슷하게 생겼지만 짤막한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며 ‘취익, 취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맛깔스럽게 생긴 녀석을 잡아다 주고서야 그 사 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구역질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녀에게는 오크를 가져다 버린다고 하고 숲 속에서 구워 먹어 버렸지만………….
쩝쩝… 역시 중화인들의 식성은 대단해… 두 다리 달린 놈으로는 사람을, 네 다리 달린 놈으로는 책상과 걸상을 제외하고는 다 먹을 수 있다는 그 막강한 식성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꽤나 말이 잘 통하게 된 타리아 블레어란 꼬마 애는 묵향과 꽤나 가까워졌다. 오빠나 아빠와는 달리 별로 힘도 안 들이고 슬슬 하는데도 나무 들이 쩍쩍 토막 나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타리아가 물었다.
“다크는 용병(傭兵)이에요?”
타리아는 ‘묵향’이란 발음을 할 수가 없었기에 처음에는 그냥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래서 묵향도 이곳에서 생활하자면 뭔가 이름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름인 ‘묵향’과 뜻이 약간은 비슷한 ‘다크(Dark)’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용병이 뭔데?”
“왜, 있잖아요. 돈 받고 고용되어 싸움질하는……….”
“아, 그게 용병이냐? 아니야. 나는 용병이 아니야.”
“그럼 뭐예요?”
“음, 그러니까 나는, 마교의 교주지.”
“마키오? 마키오가 뭐예요?”
“하하, 뭐 그런 게 있어. 그런데 지금은 길을 잃어버려서 먹고 살길이 막막하단다. 그리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묵향은 짐짓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그의 눈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또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그 친근했던 삶을 그리워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그걸 보고는 타리아가 약간 궁리를 하더니 대책을 떠들어 댔다.
“그럼 용병 길드에 가서 알아보지 그러세요?”
“용병 길드?”
“예, 용병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모두들 길드를 조직하거든요. 용병들이 모여 길드(조합)라는 조직을 만들고 길드에서는 용병을 원하는 사람과 또 일 없는 용병들을 연결해 주죠. 길드 사무소는 큰 마을에는 다 있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걸 주워듣는 데도 빠르구 요. 그러면 아마 돌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호오… 이거 좋은 정보를 알게 되었군.’
“그런데 여자 애가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용병은 남자들이나 하는 거잖아.”
“고리타분하게 무슨 말이에요? 여자 용병도 있다구요. 그리고 사실은 오빠가 용병을 하려고 했었거든요. 세상 구경하겠다구요. 가출했다가 얼마 가 지도 못하고 아빠한테 잡혀서 죽도록 맞았지만……..”
“하하하하, 알 만하다. 알 만해.”
황궁의 한쪽 구석, 마법사들이 기거하는 곳에서 뭔가 빛이 번쩍 하더니 곧이어 황성(皇城)이 흔들거릴 정도의 대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곧이어 그쪽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부상당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마법사들을 재빨리 부축하고는 치료를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신전에서 축복을 내린 ‘포션’이라고 불리는 성수(聖)가 매우 효력이 있는 치료약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포션은 가격이 비쌌지만 상처 치료에는 효과가 그만 이었다.
노마법사의 상처에 수련 마법사(修練魔法師:Mage)가 포션을 바르고 있는데 젊은 황제가 나타나서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토지에르 경, 무슨 일인가?”
노마법사는 황당함과 죄송함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실험이 실패했사옵니다.”
“흐음… 벌써 다섯 번째군……………. 과연 엑스시온을 새로이 만든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엑스시온. 타이탄(Titan)의 심장이었고, 타이탄이라는 강철 덩어리를 사람과 같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마법 장치였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 기는 매우 힘들었다. 특히나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엄청나게 강력한 엑스시온이었기에, 거의 90퍼센트 이상 완성되어 있는 설계도를 입수해 30 년에 가까운 시간을 연구했는데도 나머지 10퍼센트도 안 되는 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 하지만 성공할 수는 있사옵니다. 실물을 만들다가 사고가 난 게 아니라 자그마한 실험용 엑스시온을 만들다가 폭발했으니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옵니다. 어쨌든 점점 더 많은 자료가 쌓이고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휴우…, 대마법사(Wizard) 안피로스의 던전(일종의 마법 연구를 위한 비밀 실험실)을 발견했을 때 짐은 모든 게 끝난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 군…….”
그러자 마법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피로스의 던전에서는 그가 과거에 만들었던 엑스시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었고, 만년(晩年)에 생각했던 엑스시온에 대한 자료만 있었사옵니다. 안피로스도 이론만 세워 두었을 뿐, 실제로 만든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하지만 연구는 거의 90퍼센트 이상 진척되어 있었기에 소신이 감히 그걸 만들 어 볼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구요. 이제 거의 끝나 가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옵소서, 폐하.”
“알겠소, 경만 믿겠소. 그걸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줄 수만 있다면…, 10년, 아니 50년이라도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겠 소.”
황제의 눈에서 신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읽은 노마법사는 새로이 충성심을 다지며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하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