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19화 – 절망스러운 나날들
절망스러운 나날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닮은꼴의 두 사람은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악! 도대체 저 애는 누구에요? 어쩜 저렇게 나하고 닮을 수가 있죠? 아유, 재수 없어.”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식탁으로 다가오는 다크를 보고는 비명을 지르는 라나…………. 하지만 곧이어 그녀의 앞에는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 아 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헐렁한 옷에 생긴 것에 어울리지 않는 검을 차고는 털썩 앉았다.
“닥쳐, 사람 처음 보냐?”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가스톤?”
가스톤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되긴? 다크가 마법에 걸린 모습이지.”
“그런데 어떤 마법에 걸렸기에 내 모습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가스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저주를 받고는 저 모양이 된 것이니 결코 좋은 뜻은 아니었다. 축복을 받고 저렇게 바뀌었다면 몰라도.. 하여튼 뱀이나 개구리, 또는 지독한 병이 든 사람 따위가 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긴 했지만, 라나에게 곧이곧대로 사정을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하긴, 다크는 평상시에도 라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귀찮게 생각했고, 또 함부로 대해 왔으니까 저게 최악의 저주가 될지도……………. 어쩌면 함 께 있으니까 더 싫어했는지도 모르지. 나도 저 라나란 애는 별로인데…
“밥 먹고 나서 다크의 몸에 맞는 옷을 좀 사야겠어. 저렇게 큰 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미디아?”
“알았어요. 내가 데리고 가서 옷을 사 입히죠.”
미디아와 함께 걷고 있는 다크를 모든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나게 큰 헐렁한 옷에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있는 걸 보고, 얼굴은 예쁘지만 아무래도 반쯤 미친 여자 앤 줄 알았던 것이다.
“뭘 찾으십니까?”
상인 특유의 느물거리는 미소를 피워 올리며 옷 가게 주인이 말했다.
“저 아이한테 맞는 옷.”
그러자 다크가 예쁜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덧붙였다.
“남자 옷!”
미디아는 다크를 잠시 바라봤다. 아무리 알맹이는 그래도 껍데기는 귀여운 여자 아이인데 남자 옷을 입혀도 될까? 하는 걱정과 또 다크에게 여자 옷 을 입히는 게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 미디아는 막무가내로 말했다.
“어떤 게 저 애한테 맞는 여자.옷이죠?”
그러자 주인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소녀를 애써 외면하며 손짓했다.
“저기 있는 옷들이에요.”
미디아는 그중에서 예쁜 옷 한 벌을 들고는 반항하는 다크를 끌고 옷 갈아입는 곳으로 갔다. 계속 다크가 옷을 벗지 않으려고 반항하자 미디아가 다 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속 반항하면 기절시키고 벗긴다.”
그러자 다크의 저항이 멈췄다. 사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반항이나 조금 할 수 있을까 용병으로서 다져진 미디아와 격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분노를 머금은 눈으로 쏘아보는 다크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미디아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크의 옷을 모두 벗겨 버렸고, 속옷부터 착 실하게 입히기 시작했다. 이래서 힘이 없는 자는 서럽다니까………….
예쁜 치마와 블라우스를 걸친 다크를 데리고 나오는 미디아의 손에는 여섯 벌의 옷과 여자용 속옷들이 들려 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세탁을 하기 도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속옷은 여러 벌이 있어야 했다. 미디아는 옷 가게에서 나오면서 이전에 다크가 입었던 옷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길, 두고 보자.”
분한 듯이 다크가 그 커다란 눈으로 쏘아보며 말하자 미디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거기 여자용 여행복도 두 벌 넣었으니까 돌아가서 그걸로 갈아입고 비무라도 한번 해 볼래?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이야.”
“좋아.”
두 사람은 서둘러서 여관으로 돌아간 다음 준비를 갖췄다. 미디아는 먼저 뒤뜰로 나갔고, 곧이어 간편한 여행복으로 갈아입은 다크가 나왔다.
무릎 위까지 오는 가죽 반바지를 입고 그 위에 무릎 약간 아래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어 가죽 반바지를 가리는 것이 보통 여자용 여행복이다. 스커트 안에 반바지를 입는 이유는 맨살로 말을 탔다가 잘못하면 가죽(?)이 벗겨지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으로 나타난 다크는 샤벨을 쭉 뽑았다. 그걸 보고 미디아도 내로우 소드를 뽑아 들었다. 둘은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에 미디아는 ‘겨우 저 체구로… 하는 마음에 큰 공격을 했지만 다크가 살짝 피하면서 반격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몸이야 엉망이라도 예전의 그 엄청났던 기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미디아는 예전에 처음 검을 배울 때 사용했던 무식한 검법, 즉 ‘마구 휘두르기’ 검법을 사용했다. 저런 한 수 하는 자들은 보통 카운터를 노리기 마련…………. 힘은 형편없지만 기술이 엄청난 자를 상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마구잡이로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들어오는 공격에 다크는 계속 뒤로 밀렸다. 반격을 하려고 해도 재빨리 상대의 빈틈으로 찔러 넣을 근력이 부족했 다. 상대가 큰 기술을 써서 빈틈이 크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라도 있는데, 얄팍한 기술로 연속 공격을 퍼부어 대니 그걸 막는 것만 해도 벅찼고,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무는 5분 정도 더 지속되다가 다크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검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끝났고, 다크는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신의 방 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신의 몸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감만 남았으니…………. 이 상태라면 복수는커녕 지금의 라나처럼 짐밖에 안 되는 처지였다.
다크는 미디아에게 박살 난 후 가스톤과 마법에 대해 토론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대에 개발된 마법을 위한 언어인 룬어 학습에 들어갔다. 어쩌면 이놈 의 저주란 걸 자신이 마법을 익혀 부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전에 썼던 마법은 다크가 천재라서 가능했었던 게 아니라 북명신공의 도움으로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이 다. 그렇기에 룬어 단어나 몇 개 외울 수 있었을까 하나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두세 시간 만에 때려치우고 말았다.
점심때가 되자 그들은 식당으로 갔고, 급사 여자 아이가 주문받은 음식을 가져와서 각자에게 나눠 주었다. 반주로 시킨 술을 가져와서 차례로 나눠 주다가 급사가 물었다.
“갈렛슈는 누가 시킨 거예요?”
“내가……………”
급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대답한 사람을 바라봤다. 아직 솜털도 못 벗은 게 확실한 예쁜 계집아이가 그 독한 술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갈렛슈 는 토리아에서 생산되는 과실주를 증류한 술로 알코올 순도가 50퍼센트에 달하는 지독하게 강한 술이다. 어른도 그걸 한 병을 못 마시는데, 새파란 계집아이가…………….
“너 몇살이니?”
“충분히 나이 먹었으니까 줘.”
그러면서 다크는 주위를 둘러보며 원군을 청했다. 그러자 지금 현재 다크의 정신 상태를 충분히 감안하고 있는 미디아가 다크 편을 들어 줬다. “그거 이리 줘.”
급사는 미디아에게 술과 잔 한 개를 건네준 다음 물러섰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도 과연 그 꼬마 애가 술을 마실 것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도 두 잔도 못 마시고 인사불성이 될 게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귀찮은 여자가 물러나자 다크는 미디아에게서 술과 잔을 건네받은 후 한 잔 가득 따랐다. 보통 갈렛슈는 큰 잔의 아래쪽에 얄팍하게 따른 후 조금씩 마시는 게 정석인데, 그걸 잔 가득히 채우는 걸 보고 미디아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거 억수로 독한 술이야. 그렇게 잔뜩 따르면 안 돼!”
다크는 예쁜 얼굴에 단호한 표정을 띠며 말했다.
“상관없어.”
다크는 그대로 한 모금 꿀꺽 마신 후 잔을 내려놓으며 심하게 기침을 했다. 정말 엄청 독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침내는 그걸 다 뱃속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그래 봐야 한 잔이었지만………………
귀여운 여자 애가 백주 대낮에 그 독한 술을 들이켜는 걸 보고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 테이블로 집중되었다. ‘과연 저 한 병을 다 마실 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한 잔을 깨끗이 비운 다크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 일부러 취하자고 마시는 술이니 점잔 빼면서 마신 것도 아니었고, 또 원체 독한 술이라서 그런지 그 술기운에 몸이 견뎌 내지를 못했다. 정신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잔을 마시기 위해 헛손질을 해 대던 다크는 그대로 오믈렛이 담겨 있는 접시 에 얼굴을 박으며 곯아떨어졌다. 미디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다크의 얼굴을 오믈렛 접시에서 들어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은 후에 방으로 안고 올라갔다.
혹시나 저술을 몽땅 다 마시는 괴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꼬마 애를 비웃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에서 내려온 미디아는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시드미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다크는?”
“괜찮아요. 그냥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것뿐이에요. 침대에 눕혀 놓고 내려왔어요. 아무래도 그 일이 엄청난 충격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러자 지미가 미디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만약 제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아마 미쳐 버릴 거예요. 내가, 저런 덩치 작은 꼬마 애로…………….”
그러자 모두들 지미와 라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확실히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의 길을 걷고 있는 지미의 거대한 근육질 체구와 근육이라고는 거의 붙어 있지 않은 날씬한 라나의 체구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가스톤이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설마, 그렇다고 미치기까지 하겠어?”
“아니에요, 가스톤은 이해를 못 하시겠죠. 마법사니까…………. 마법이란 것은 정신력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 체력이나 근력과는 상관없죠. 하지만 저희 같은 무사는 다르다구요. 제 체격이 라나처럼 된다면 저는 제가 가진 갑옷부터 검까지 모두 새로 바꿔야 해요. 그걸 휘두를 힘이 없기 때 문이죠. 믿어지지 않는다면, 라나, 이거 한번 들어 볼래?”
그러면서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롱 소드를 뽑아서 라나에게 건네줬다.
롱 소드는 원래가 한 팔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검이다. 그렇지만 그 길이는 1미터, 폭 4센티미터, 무게가 자그마치 3킬로그램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롱 소드보다 더한 검도 있는데…………. 무사들이 한 팔로 버틸 수 있는 최대 무게를 가정해서 만들어진 배틀 소드(Battle Sword)가 그것 이다. 이건 무게가 5킬로그램이나 나간다.
아무튼 10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바스타드 소드를 한 팔로 휘두르는 괴물도 있으니, 그에 비하면 배틀 소드는 꽤나 무사들 팔의 근력을 생각해서 만 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여자가 휘두를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다. 당당한 덩치의 여자 용병인 미디아의 경우에도 검은 2킬로그램짜리 내로우 소드, 방패 는 엄청난 돈을 주고 구한 와이번 비늘로 만든 걸 착용하지 않는가? 거기에다 한술 더 떠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다크네라는 마법 장갑까지 끼고 있 을 정도니…………….
그 검을 받아든 라나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고 무게를 어떻게든 버티려고 용을 쓰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다크의 충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린 것에 대한 충격…………. 생리적인 변화는 둘째 치고 오래도록 단련된 자신의 육체가 일순간에 쓸모없는 육체로 바뀌 어 버린 것이다.
모두 동료의 불행에 침울해 있자 팔시온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꽤 찾아봤는데도 답이 없는데요. 아무래도 놈들은 의도적으로 여기서 흔적을 지운 것 같은데.
팔시온의 말에 안토니가 의견 한 가지를 내놓았다.
“신전에 알아보면 어떨까요?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에서 신탁을 들어 보면 어느 정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요?”
“글쎄, 어쨌든 그 방법밖에는 없군. 여기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이 어디에 있나?”
“잠깐 기다려 보세요. 이봐요!”
팔시온이 부르자 멧돼지처럼 생긴 우람한 덩치의 주인이 다가오며 그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더 필요하신게 있습니까?”
“맥주 두 잔 더 주시구, 여기 근처에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이 있습니까?”
“아, 별로 멀지 않습니다. 그 신전은 수도 내에 있죠.”
주인은 맥주를 가지러 가 버렸고, 일행들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아직도 이 근처를 배회하는 이유는 이곳이 트루비아와 사이가 좋 지 않은 토리아이기 때문이다. 또 작은 도시에 들어갈 때는 문제가 될 게 없지만 수도로 들어가려면 아무래도 성문에서 신원 조사를 좀 더 철저히 할 게 뻔했다.
“그냥 돌아가면 어떨까요? 샤헨에 가도 아데나 신전은 있잖아요.”
“안 돼.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어떻게 해서든 수도에 들어가서 신탁을 받아야 해. 어쩔 수 없이 많이 알려진 우리 일행은 안 될 테니, 팔시온, 자네가 좀 해 주겠나?”
“저도 국적이 트루비아라 좀…………. 참, 미카엘 자네가 가지.”
“좋아, 자네가 가기 싫다면 뭐…………….”
“참, 그리고 다크하고 라나도 데려가. 라나! 너도 여기 아데나 신전을 한번 구경하고 싶지 않냐?”
“예, 좋아요.”
“그럼, 미디아. 아까는 다크 때문에 외출했지만 지금 보니까 라나도 옷이 별로 좋지 않은 거 같은데, 라나 옷도 한 벌 좀 사 주겠나? 그냥 여행하는 데는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신전에 갈 건데 신경을 좀 써야지.”
“그러죠. 가자! 라나.”
라나는 좋다고 미디아를 따라나섰고, 그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드미안이 말했다.
“신탁을 받은 후에는 어디로 여행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 라나를 여기 떼 놓고 가자구.”
시드미안의 제안에 팔시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또 따라오다가 그놈들에게 잡히면 누가 책임을 질 겁니까?”
“아예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자 안토니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법이 좀 과격해도 상관없을까요?”
“상관없어!”
“그럼 기억을 봉인시켜 버리죠. 저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서 일부 기억만 봉인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체 기억을 봉인해야만 하는데…, 그러면 그 아 이가 기억이 봉인된 동안 누가 돌봐 줄 건가요?”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기억을 봉인해 버린 다음에 아데나 신전에 맡기면 되겠지. 그럼 그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 물론 한 1년 동안은 기억을 되 찾아 주지 말라고 부탁도 하면서 말이지.”
“그게 좋겠군요. 그런데 다크는?”
“다크는 당연히 저주 건 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데리고 가야지. 그리고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도 물어봐야 할 거고…………. 어쩌면 거 기 있는 고위 사제들은 그걸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미카엘과 그 추종자들, 안토니, 라나, 다크는 토리아의 수도인 크로멜로 향했다. 크로멜은 그들 일행이 묵고 있는 ‘지레온’이란 작은 마을에서 멀지 않았기에 그날 저녁때면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들이 수도로 떠나기 전, 시골에서는 구하기 힘든 잡다한 것들을 빽빽하게 적은 종 이쪽지하고 돈까지 일행들로부터 건네받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크로멜로.”
“그런데 쟤는 왜 데리고 가는 거죠?”
다크가 저쪽에서 안토니와 떠들고 있는 라나를 가리켰다.
“그야 아데나 신전으로 가는 길이니까 인사도 시킬 겸해서 데리고 가는 거지.”
그들은 점심때가 가까워졌을 무렵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약간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드미안이 국경을 벗어나면서 다크에게 만들 어 준 트루비아의 신분증명서를 이곳 적국에서는 쓸 수 없었기에 다크는 마법사 길드에 갈 때는 성벽을 넘어 다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 힘을 쓸 재주도 없었고, 또 신분증명서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여자가 되었기에 그 신분증명서와 최소한의 유사점도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 다.
어쨌든 트루비아 태생이 아닌 미카엘이나 지미, 라빈은 그대로 신분증명서를 제시했고, 안토니 크로와는 팔시온의 신분증명서를 써 먹었다. 모험가 로서 일자리를 찾으러 왔다는…………. 그리고 귀여운 두 여자 애들은 쌍둥이 자매로 숲 속에서 만난 하프 엘프 고아들이며, 그냥 여행에 데리고 다닌다 고 소개했다.
아름다운 금발과 미모, 그리고 작은 체구를 살펴본 병사들은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들을 통과시켰다. 반쪽짜리 엘프니까 꼭 귀의 모양이 엘프를 닮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거기다 예쁘고 가냘프게 생겼으니 그 말이 사실이겠지 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아데나 신전에 가는데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 거예요?”
“그야 거기도 신전이니까 혹시 저주를 풀 수 있을까 해서지.”
“그러자고 가는 인원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물건도 살 게 많고, 또 안토니도 여기 볼일이 있어. 라나는 신전을 방문할 거고. 모두 이유가 있다구. 그러니 따지지 마.”
그들이 아데나의 신전에 도착해서 신탁받기를 원한다는 전갈을 넣고 한참을 기다리자 아름다운 여자 신관이 나오더니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신탁을 받고 싶으시다구요?”
“all.”
“어떤 신탁을?”
“신탁을 받고 싶은 것은 세 가집니다. 첫째는 사라진 드래곤 하트가 어디로 갔는지, 둘째는 저 아이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론 시 술자를 족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 아이에게 저주를 건 녀석의 행방이죠.”
저주라는 말이 나오자 그 신관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미카엘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엄청난 덩치의 사내들 틈에 쌍둥이처럼 닮은 여 자 아이 둘이 서 있었다. 그 둘을 찬찬히 살펴본 신관은 곧이어 둘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명은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색다른 것 들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 명은 그냥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미카엘에게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
“가엾게도 예쁜 아인데, 눈이 보이지 않는 저주를 받았나요?”
미카엘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벙어리가 되었나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본 여신관은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어떤 저주를 받았나요?”
“원래 남자였는데 여자 애가 됐어요.”
“예?”
그 신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모습을 보니 저주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어쨌든 60골드.”
“예? 60골드라니 무슨?”
“신탁을 의뢰하셨으니 돈을 주셔야죠. 한 건당 20골드예요.”
“저, 그럼 한 가지만 좀 묻겠는데요.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은 외국의 다른 신전들과 연결되어 있나요?”
“그건 당연하죠. 외국의 모든 신전들과 연결되어 있죠. 같은 아데나 여신님을 모시고 있으니까요.”
“그럼 코린트의 드로아 대신전과도 연결되어 있습니까?”
“예, 코린트에 있는 드로아 대 신전은 아데나 신전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 신전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그쪽과 연락을 안 할 수는 없지요.”
그 여사제가 말하자 미카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드래곤 하트를 찾는 일은 트루비아 왕실에서 부탁한 겁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드래곤 하트는 코린트의 드로아 대 신전에 있던 것을 트루비아 왕실에서 잠시 빌렸던 것이구요. 어쨌든 드래곤 하트가 트루비아 국내에서 없어졌으니, 트루비아 왕실이 발 벗고 나서서 그걸 찾고 있는 겁니다. 저 희들이 그 일을 위탁받았는데, 그걸 훔쳐간 놈들을 추격하는 중에 일행이 저주를 받는 불상사가 벌어진 거구요. 저기 두리번거리는 저 애가 드로아 대신전에 있었던 견습 사제지요. 그러니 공짜로 안 될까요?”
“저, 그건 제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대사제님과 의논을 해 봐야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참이 지나자 그 사제는 기품 있게 보이는 중년 여인과 함께 돌아왔다. 나이가 꽤 들어 보였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미녀였다. 미카엘은 그녀가 대사 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예 수련자 미카엘이라고 합니다.”
“오, 당신들이 드로아 대 신전에서 일을 의뢰받은 사람들인가요?”
“예.”
“드로아 대 신전에서 들은 말로는 시드미안 경이 그 책임자라고 하던데…………….
“그는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적국의 수도로 들어올 수가 없어 제가 부하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동료의 저주도 풀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
“저주에 걸린 사람을 볼 수 있을까요?”
“다크! 이리 와 봐.”
맵시 있는 여성용 여행복 차림을 한 아름다운 소녀가 그들에게 걸어오는 걸 보고 그녀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라나・・・군요.”
미카엘이 히죽 웃었다.
“예, 아시는 모양이죠?”
“물론 잘 알고 있어요. 1년 전에 드로아 대 신전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봤죠. 그런데 어쩌다가?”
“모르겠습니다. 저주를 받았는데,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흐음…….”
그 대사제는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다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축복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저주의 극성은 축복이었기에 웬만한 싸구려 저주의 경우 축복 한 방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복이 끝난 후에도 다크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꽤 고위급 저주에 걸리신 것 같군요. 이런 때는 그 시전자가 아니면 풀 수 없을 겁니다. 안 되면 그 시전자를 죽이든지, 또는 그 매개물을 찾아야겠 죠. 어쨌든 다크 씨의 모습을 보니 드로아 대 신전에서 부탁받은 일이란 걸 바로 알겠어요.”
“저기 라나도 데려왔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예.”
“라나! 두리번거리지 말고 이리 와라.”
라나는 재빨리 달려오더니 오랜만에 만난 그 여인에게 처음에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도 않아 그 여인에게 수다를 떠느라고 정 신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여정을 떠들어 대는 걸 참으며 듣고 있던 안토니가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는지 조용히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라 나는 자신의 수다에 도취되어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윽고 주문을 다 외운 안토니가 미카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미 카엘이 라나가 도망치지 못하게 꽉 잡았고, 안토니는 재빨리 라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시동어를 외쳤다.
“리멤버런스 실(Remembrance Seal : 기억 봉인)!”
안토니의 손이 약한 빛을 뿜자 또릿하던 라나의 눈동자가 멍청하게 풀려 버렸다. 이걸 보고 있던 대사제가 놀라서 외쳤다.
“당신들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안토니는 죄송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제님도 이 아이가 얼마나 말썽꾸러기인지 아실 겁니다. 처음 떠날 때 이 아이를 돌려보내고 떠났는데도 무턱대고 따라오다가 나쁜 놈들에게 사로잡혀 있는 걸 구출하기도 했죠.
그냥 돌려보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기에 기억 봉인을 한 겁니다. 저 애가 얼마나 말썽을 피웠으면 동료 하나가 저주를 받아 저 모양이 되었겠습니 까? 일단 이 아이를 이 상태로 1년만 좀 데리고 계셔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제한적으로 기억을 봉인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데리고 가서 드래곤 하트와 우리 파티에 관련된 기억들만 없애시든지요.
적들은 타이탄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파티에서 한 명도 안 죽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라구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라나 를 보호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대사제께서 우리들의 조치를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대사제는 그제야 얼굴 표정을 풀었다.
“알겠습니다. 저 아이를 떼 놓는 데 기억 봉인이라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면…………. 대신 나중에 저 아이를 드로아 대 신전으로 보내서 좀 더 제한적 인 기억 봉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라나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쨌든 신탁을 받으려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데………”
볼일 보시고 나중에 오세요.”
일행은 돌아다니며 부탁받은 물건들을 사들였다. 또 안토니는 상처를 치료하는 약물인 포션이라든지, 여러 가지 약초, 각종 광석(鑛石) 가루 등을 사 러 다녔고, 나머지 일행들은 옷, 양말, 식량, 양념류 등 살 게 정말 많았다. 하기야 지금까지는 될 수 있으면 현지 조달을 하면서 그런대로 견뎌 왔지 만 대부분이 물가가 비싼 시골 지방으로 다녔기에 여행에 꼭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대도시에는 각종 물품이 대량으로 공급되었으므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많은 양을 살 수 있었다. 특히나 세련된 디자인의 옷이나 양말, 여행용 말린 고기포 따위는 시골에서 구하기 힘들었다. 마법에 관계된 물품이라면 더욱 구할 수 없었다.
덩치 큰 장정들이 떼거리로 돌아다니며 눈에 힘을 주고 거의 협박하다시피 흥정을 하니 물건도 꽤나 싸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다만 그들도 한 가지 부탁을 수행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미디아가 자신은 여기까지 오기 귀찮다고 속옷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자 옷 가게 앞에서 30분 정도를 서성거리다가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크에게 통사정을 했다. 하지 만 다크도 껍데기는 어떤지 모르지만 남자였기에 옷 가게로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절했다.
“제발 좀 사다 주라, 응?”
“내가 왜 여자 옷을 사러 들어가야 하죠?”
“제길! 너도 지금은 여자잖아. 너는 속옷 필요 없냐? 네 것 사는 김에 같이 사면 되잖아.”
“내 건 미디아가 그때 다섯 벌이나 구입해 줬어요. 더 이상 필요 없다구요.”
“그럼 그때 왜 자기 것은 안 사고 네 것만 사 준 거냐?”
“모르지요. 자기 말로는 그쪽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던데……………. 너무 촌스럽다나 어쨌다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사기는 해야 할 거 아냐?”
“그거야 미카엘 사정이죠. 내가 부탁받은 건 아니니까………….”
“제길, 이럴 줄 알았다면 물건을 먼저 사고, 라나의 기억을 봉인하는 건데…………. 좋아, 여기 써 놓은 거 사 오면……………
“사 오면?”
“앞으로 설거지하지 않아도 된다. 어때?”
미카엘의 웃는 얼굴을 다크가 예쁜 눈으로 쏘아보았다.
“말도 안 돼! 그냥 설거지하고 말래.”
다크가 끝까지 저항하자 미카엘은 전술을 바꿔 다크의 약점을 찌르기 시작했다.
“좋아. 정 그렇게 나오면 나는 너와 완전히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팔시온과 가스톤을 설득해 이번 모 험에서 손 떼게 만들 거야. 그럼 너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걸? 어여쁜 여자 애로. 자, 어떻게 할 거야?”
“제길! 좋아. 대신 설거지하고, 식사 당번까지 빼 줘. 좋아요?”
“그래 좋다.”
“쪽지하고 돈 내놔요.”
그렇게 해서 다크는 아름다운 여자 옷들을 전시해 놓은 옷 가게에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정말 예쁜 아가씨네…………. 뭘 찾아요?”
상점 안에는 여자들만 열세 명 정도가 우글거리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둘러보고 점원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다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사를 건네 오는 여자에게 쪽지를 건넸다.
“이거 주세요.”
“으응? 이거 꽤 고급 속옷인데……………. 조금만 기다려요.”
잠시 후 여자는 속옷들을 가져왔다.
“거기 쓰인 것들이에요. 그런데 그 치수대로라면 아가씨한테는 너무 클 텐데?”
“심부름이에요.”
“아, 예. 12골드 34실버예요.”
다크는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는 가게에서 나왔다. 들어가기 전에 놔뒀던 짐들이 몽땅 없어진 걸 보고 두리번거리던 다크는 그것들이 지미와 라빈의 짐 더미 속에 함께 들어 있는 걸 알았다.
“내 짐 내놔.”
사실 다크는 짐을 잘 지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자로 변한 후에는 남자들이 일부러 자신에게 짐을 안 주는 것을 느끼고 오기로 자청해서 지고 다녔던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너는 속옷만 들어. 괜히 힘없는 여자 애 부려먹는다고 사람들이 욕할 거 아냐?”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