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21화 – 다크의 위기

다크의 위기

“아저씨, 포도주 한 병 주세요.”

예쁜 여자 애가 약간은 술에 취한 것 같은 어조로 말하자 상점 주인이 물었다.

“설마 네가 마시려고?”

그러자 그 여자애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듯 순진하게 미소 지으며 완강하게 부인했다.

“설마요. 아빠 심부름이에요.”

“그래, 착한 아이구나. 여기 있다. 5실버 22타라다.”

여자 애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했다. 그리고 상점에서 나오자마자 병뚜껑을 따고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크아, 달콤하고 쌉싸름한 게 죽여주는데………….”

그녀는 비틀거리며 사람이 별로 안 다니는 골목길로 들어가, 작은 상자에 걸터앉아 계속 술을 마셔 댔고, 반 병쯤 마신 후에는 거의 맛이 간 상태가 되었다.

이때 길 앞을 지나가던 패거리들 중 하나가 혹시 골목길 안에서 키스하는 장면이라도 훔쳐볼 수 있을까 살짝 들여다보다가 술 취한 예쁜 여자 애를 발견하고는 일행에게 손짓을 했다.

“저것 봐!”

“이야… 꽤 예쁜데…..?”

“관둬라. 어린 애잖아.”

“어린 애는? 저 정도면 다 큰 거라구.”

그중 한 녀석이 소녀에게 다가가서는 슬쩍 말을 걸었다.

“이봐, 맛있니?”

“그러어엄, 아아주 아아주 조오오아.”

완전히 혀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오자 그 녀석의 눈에 음침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봉 잡았다’하면서……

“더 좋은 거 있는데, 같이 가자.”

“더 조오은 거어? 가레이슈?”

“그래, 갈렛슈도 있지. 응? 같이 안 갈래? 흐흐흐…………….

그러자 옆에 있던 놈이 끼어들었다.

“이봐, 여기서 해치우지 어디로 가자는 거야?”

“이런 예쁜 애를 이런 곳에서 먹는다는 건…………. 거기다 완전히 맛이 갔는데, 좀 더 분위기 좋은 데서 즐긴 후 노예상한테 팔아 버리자구. 아마 못 받 아도 2백 골드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거기다 칼까지 차고 있는데? 여행객인 모양이야. 뒤탈도 없을 거고……………”

“하긴…….”

그들은 슬쩍 소녀의 허리에서 검집을 벗겨 무장 해제를 시키고 나서, 인사불성인 그녀를 부축하듯 끌어안고는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기 맞아?”

“예, 금방 술 취한 금발머리 여자 애를 부축해서 데리고 갔다고 하던데요?”

미카엘의 물음에 기가 찬다는 듯 지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미카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런 나쁜 새끼들…………. 모두 죽여 버리겠어.”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반쯤 부서진 폐가의 문짝을 단숨에 박살 내고 미카엘이 뛰어들었을 때, 이미 세 놈은 제정신이 아닌 여자 애의 옷을 다 벗겨 놓고 누가 먼저 할 것인지 한참 제비를 뽑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못된 놈들! 죽엇!”

퍽 퍽 퍽!

우람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미카엘은 많이 봐 줘야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젊은 남자 셋을 그야말로 개 패듯 패기 시작했고, 뒤따라 들어

온 지미도 그놈들을 지근지근 밟았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화풀이를 다 끝낸 지미와 미카엘이 씨근덕거리면서 인사 불성인 다크의 나신(裸身) 위에 옷을 덮어 주고 있을 때 들이닥친 라빈의 분풀이 상대도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크가 갑자기 없어져 버린 덕분에 시드미안 경 일행은 모두들 밖으로 뛰어나가 “금발머리의 예쁜 여자 애 못 봤어요? 키는 이만한데”하면서 여태껏 밤거리를 뛰어다녔던 것이다. 지금껏 마음 졸였던 것까지 합쳐서 라빈이 이미 기절해 버린 세 녀석들에게 한참 스트레스를 풀고 있을 때, 헐레벌떡 뛰어온 미디아도 실내의 정경을 보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야, 모두 밖으로 나가. 그리고 지미, 너!”

“예?”

“내가 나갈 때까지 저 녀석들 정신 차리게 만들어 놔. 다크에게 옷 입히고 나가서 아예 죽여 버릴 테니까.”

여태껏 보지 못했던 분노에 찬 미디아의 표정에 질린 지미가 얼른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 앙……. 벌써 아침이야?”

비실비실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목욕탕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녀를 보고 지미와 라빈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그 사건…, 그걸 통해서 지미와 라빈은 미디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도대체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팰 수 있다니……………. 여자가 그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 을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이다.

미디아는 정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그 녀석들을 두들겨 팬 다음 다크를 안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정작 정조를 상실할 위험에 처했던 당사자는 그 사 건의 전모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은 마도 왕국 알카사스로 떠날 준비에 바빠 모두 이리저리 짐을 챙기고 물건을 구입하느라고 바빴다. 그들이 떠나려고 할 때쯤 다크는 또 다시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지미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 여자 애를 안고 나오자 팔시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큰둥하게 물었다.

“어디서 찾았냐?”

“뒤뜰에서요.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신 모양이던데요? 빈 병이 굴러다니는 걸 보니…………….”

“제기랄, 이 녀석은 라나보다 더 하군.”

“그래도 라나보다는 나아요. 최소한 시끄럽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어쩌죠? 완전히 뻗어 버렸는데…………

잠시 궁리하던 팔시온이 단호하게 외쳤다.

“말 등에 묶어 버려. 어차피 점심때쯤 되면 깨겠지. 으휴, 술 취한 계집애는 정말 대책이 없구만….”

“으윽! 이건 뭐야?”

꽁꽁 묶여 있던 여자 애가 떠들어 대기 시작하자 팔시온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깼군…….”

그러더니 여자 애 쪽으로 자신의 말을 몰고 갔다.

“한숨 더 자지 그래?”

“이 자세로 잠이 오겠어?”

“그것도 그렇군.”

팔시온은 서둘러서 끈을 풀어 줬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에요?”

“아, 네가 잠든 사이에 이동 중이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말 등에 묶어 놓은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냘픈 여자 애를…, 나도 이 정도까지는 안 했는데………….”

“네가 여자냐?”

한참 말이 없던 다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마도 왕국 알카사스. 거기서 할 일이 있어.”

이때 뒤쪽에서 미카엘이 팔시온에게 소리쳤다.

“야! 마을은 멀었냐? 가까운 데 마을이 없으면 여기서 밥 먹고 가자.”

“저기 고개만 넘으면 마을이니까 조금만 참아.”

과연 고개를 넘자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그들은 곧 작은 식당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당당히 식당 안으로 들어서서 자리를 차지하고 주문을 해 대기 시작했다.

“오므라이스, 채소 스프, 그리고 갈렛슈 큰 걸로 한 컵 가득!”

열여섯 살 정도 먹어 보이는 급사 소년이 다크를 살짝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그 주문 내용을 듣고는 놀라서 물었다.

“그거, 그거… 너, 네가 마실 거야?”

“빨리 가져와.”

“너, 너는, 너무 어려서… 안 돼! 내가 주, 주인아저씨한테 혼난다구.”

“이런 꼬맹이까지 나를 몰캉하게 봐?”

고운 목소리기는 했지만 약간 언성을 높이며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다크를 보고 시드미안 경이 제일 먼저 지금의 사태를 눈치 챘다. 강렬 한 살기를 읽음과 동시에 시드미안의 몸은 튕기듯 움직였고, 다크의 샤벨이 매끄러운 발검 동작에 이어 소년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가까스로 잡을 수 있었다. 만약 다크의 힘이 조금만 더 셌다면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칼날을 생각하며 바짝 얼어 있는 급사 소년을 보고, 시드미안 경이 툭툭 쳐서 정신이 나게 만들었다.

“갈렛슈 큰거 한 잔 가득 따라서 빨리 가져와 죽고 싶지 않으면………….”

소년은 방금 일어난 그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녀를 힐끔거리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윽고 식사가 날라져 오자 다크는 그걸 약간만 먹고는 기침을 해 대면서도 갈렛슈 한 컵을 몽땅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일행이 식사 를 마칠 때쯤에는 완전히 뻗어 있었다. 다크가 픽 쓰러지자 시드미안이 그제야 일행들에게 말했다.

“다크의 칼은 지미 자네가 보관해. 아무래도 지금 저 정신 상태로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야. 사실 도움도 되지 않고………….”

“그러죠.”

“식사 끝났으면 이동하지.”

시드미안의 말이 떨어지자 지미는 다크의 몸에서 검집을 풀어내고, 다크를 어깨에 지고 가서 여태껏 해 오던 대로 말 등에 묶었다.

예쁜 여자 애를 말 등에 묶자 길 가던 사람들이 쭉 늘어서서는 의심스런 눈길을 지미에게 보내며 쑤군거렸다. 중간 중간에 인신매매가 어쩌구 하는 게 들리자 지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길, 쫄따구인 게 죄지.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니란 말이에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자기가 가만히 생각해 봐도 인신매매범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억울할 뿐이었다. “제길…….”

이때 저쪽에서 무장한 경비병 두 명이 다가왔다.

“당신, 통행증 좀 봅시다.”

“예?”

“이 애는 왜 묶는 거요?”

“우리 일행인데 술 취해서 완전히 뻗어 버렸으니 묶죠. 인신매매범 아니라니까요? 자, 봐요.”

모험가 일행으로 알카사스에 무투회 참석차 간다는 인증이 붙은 국경 통행증을 보고는 경비병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이 많으시겠수. 술 못 먹게 좀 두들겨 패 버려요. 어디 콩알만 한 게 벌써부터…………”

“휴, 팰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차마 때릴 데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