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8화 – 모험의 시작

모험의 시작

다크는 침대 위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고, 팔시온은 다크에게 검술 좀 가르쳐 달라고 조르다가 통하지 않자 밖에서 혼자 간단한 수련을 했다. 그리 고 가스톤은 다크가 앉은 맞은편 침대에 드러누워 옆에 놔둔 땅콩을 집어 먹으며 뭔지는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다른 일행들은 오지 않았기에 방 안은 조용했다. 여관의 방은 큰 편이었고, 세 명이 묶을 수 있는 방에 무예 수행자 패거리가 투숙하고, 여자들 을 위해서도 3인실을, 그리고 나머지 3인실을 빌려 가스톤과 팔시온, 다크가 함께 묵었다.

계단이 쿵쾅거리며 엄청난 덩치를 가진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책을 읽고 있던 가스톤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미카엘이 돌아온 줄 알았던 것이다.

“하여튼 무예 수행한다는 녀석들은 예의도 모르는지 일부러 사나운 척 쿵쾅거리며 남의 이목을 끈다니까.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이때 문이 덜컥 열리며 웬 낯선 인물이 들어왔다. 흔히 볼 수 있는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ur : 철판을 두들겨 만든 갑옷)를 입은 엄청난 덩치를 가진 인물이었는데, 갈색의 눈매가 싸늘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를 보고 가스톤이 의문을 표시했다.

“무슨 일이시오?”

그때 그 의문의 방문객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 사람들이 맞냐?”

그러자 그 남자의 뒤쪽에서 작은 여자 애의 머리가 튀어나오며 말했다.

“예, 맞아요.”

라나였다. 라나의 확인을 받은 그 남자는 가스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정중히 말했다. 그 남자가 가스톤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을 때 가 스톤은 상대의 덩치와 은근히 흘러나오는 마나에 질려 버렸다. 그리고 그 남자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덩치를 가진 젊은 기사가 한 명 더 있었다. 아무리 팔시온이나 미카엘 같은 덩치 큰 놈들과 어울려 다닌다고는 하지만, 이런 덩치가 낯선 인물이라면…………. 그것도 정신적으로 의존할 만한 팔시 온 같은 우군도 없을 때 나타났다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조금은 소심한 가스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면 파티에서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 저쪽 침대에 앉아 있다는 것뿐………….

“라나를 구해 주셨다구요.”

“예, 하지만 뭐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가스톤은 ‘우연히’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했다. 혹시 귀찮은 일에 얽히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었으니까.

“라나에게 도난당한 물건이 뭔지는 들으셨겠지요?”

“예.”

“그렇다면 그게 사악한 마법사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위험한지도 잘 아시겠군요.”

“어느 정도는….”

“그렇다면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그 말에 가스톤은 난감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 저희들은 그냥 여행자들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목숨이 몇 개나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팔시온의 말로는 상대방에 그 래듀에이트급의 인물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건 그들의 뒤에는 어떤 국가가 후원한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실력으로 끼어든 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계속 말을 건네 오자 난감해진 가스톤은 실례인 줄 알지만 잠시 상대의 말을 중단시켰다.

“잠깐만요, 저는 파티의 리더가 아닙니다. 리더를 불러다 줄 테니까 그와 의논하시죠.”

그런 다음 창가로 가서는 뒤뜰에서 혼자서 용을 쓰고 있는 팔시온을 향해 외쳤다.

“야, 팔시온. 빨리 올라와 봐. 급한 일이야.”

조금 지나자 쿵쾅거리며 땀에 젖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팔시온이 올라왔다. 역시 근육질은 근육질들끼리 있어야 균형이 잡혀 보인다. 팔시온은 슬쩍 눈길로 낯선 사람들을 가리키며 가스톤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가스톤도 상대의 정체는 알지 못했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네가 리더니까 알아서 해.”

그러자 그 덩치 큰 사내가 팔시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 리던가요? 드래곤 하트를 찾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없겠소? 사례는 충분히 하겠소.”

“아마도 가스톤이 말했을 텐데요. 상대편에는 그래듀에이트가 몇 명인가 있습니다. 사실 뒷구멍으로 하는 일이니 그 정도 실력자가 많지는 않겠지 만,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된다고 봐야겠죠. 저희 파티가 어떤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는지 라나에게 못 들으셨나요? 무예 수행자 세 명, 수련 마법사 한 명, 신관 한 명, 용병 한 명, 모험가 두 명─팔시온은 다크를 모험가에 넣었다―이오. 더군다나 지금 목적지인 샤헨에 도착한 상태니 다음 여행에는 몇 명이나 따라나설지 아무도 모르죠. 이 전력으로 아직 정체도 모르는 그 강한 놈들과 싸우란 말입니까?”

“왜 내가 이런 부탁을 여행자인 여러분께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겠지만, 나는 여러분의 실력을 믿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거요. 도대체 어 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네 파티는 그래듀에이트가 끼어 있을 게 확실한 적들로부터 라나를 구해 냈소. 왜 그래듀에이트가 끼어 있을 거라고 확 신하느냐 하면, 그 마차의 호위대를 지휘한 인물이 알렉스 시드미안, 내 동생이었기 때문이오. 그 녀석은 2년 전에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얻은 뛰어 난 기사였소. 어찌 됐건, 호위 대원들 시체 주위에는 32명의 회색 갑옷을 입은 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소. 그중에 마법 때문에 죽은 자도 있더군. 그 리고 어떤 자는 머리가 터져서 죽은 자도 있었고, 어떤 자는 갑옷과 함께 몸통이 두 토막이 난 사람도 있었소. 정말 대단한 실력의 검사가 당신들 중 에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여기까지 말한 상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다시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소개를 하지요. 나는 트란 근위 기사단의 그라드 시드미안이라고 하오. 사실상 놈들이 어느 정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기에, 비밀 유 지를 위해 나만 올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당신들과 함께 간다고 해도 안 되겠소? 그리고 저기 있는 스미온 엘시란도 젊긴 하지만 뛰어난 기사요.” ‘트란 근위 기사단’이란 말이 나오자 가스톤과 팔시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각 국가마다 유명한 기사단 외에 근위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 근위 기사단이라면 그 국가 최고의 엘리트들만을 엄선해서 만들어 놓은 최강의 기사 집단이다. 그렇기에 그 구성원은 모두 다 그래듀에이트급.

여기 조그마한 왕국인 트루비아의 경우 총 2천여 명의 기사들 중 34명만이 그래듀에이트 자격시험에 통과했다. 또 그 귀한 그레듀에이트들 중에서 ‘트란 근위 기사단’의 멤버로 뽑히는 영예를 받은 기사는 단 네 명.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국가에서 개입하실 생각이라면 기사단에서 사람을 뽑아다가 직접 하셔도 될 텐데 왜. •?”

그 말에 시드미안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드래곤 하트를 도난당한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있기에, 정규 기사단을 동원하여 난리를 칠 수는 없지 않겠소. 놈들이 눈치를 채는 것은 둘째 치고,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소. 코린트 제국에서 드래곤 하트의 도난 사실을 안다면 본국이 얼마나 심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 또 도둑놈 들도 머리가 있다면 트루비아의 기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최대한 신경 쓸 거요. 나는 근위 기사인 만큼 각종 행사에 많이 참가해서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소.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기는 힘드니, 당신들이 앞장서서 수소문을 하고 내가 그 뒤를 받치겠다는 것이오. 또 당신들 쪽에 모험가가 두 명 이나 있으니 추격에는 훨씬 유리할 것이 아니겠소?”

“흐음…….”

팔시온은 오랜 시간 궁리를 해야만 했다. 뒤에서 이들이 받쳐 준다면 위험도는 많이 줄어든다. 거기에 성공한다면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그럴듯한 제안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저 혼자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일행이 다 모였을 때 같이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좋아. 그럼 내일 다시 오겠소.”

“아닙니다. 내일은 너무 늦어요. 결론이 나면 오늘 저녁에라도 떠나야 하거든요.”

“알겠소. 그럼 해질녘에 다시 오겠소.”

이때 가스톤이 문을 나서려는 그라드 시드미안 경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잠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히 그런 차림으로 다녀 봐야 눈에만 띌 뿐이죠.”

“딴은 그렇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술하고 안주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가스톤은 곧 음식을 장만해 왔고, 모두들 예전에 있었던 추억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드미안 경은 남은 두 명의 ‘모험가를 찬찬히 훑어봤다. 팔시온은 모험가답게 장대한 체구와 우람한 근육질이었고, 거기에다 40킬로그램은 족히 되어 보이는 호화로운 바스터 소드(Burster Sword)를 지 니고 있었다. 바스터 소드는 파괴검이란 말에 어울리는 마상용(馬上用) 장검으로 보통 말안장에 매어 두었다가 기마전에서 사용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이자는 그 외의 다른 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팔시온이란 이름의 모험가는 바스터 소드만을 전적으로 사용하는 대단한 힘과 기술 의 소유자임이 확실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저쪽 구석에 앉아 있는 다크라 불리는 자. 팔시온과는 달리 근육질의 몸매가 아니었으며 허리에는 얄팍한 여성용 검 샤벨을 차고 있었다. 검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봤을 때는 마법사처럼 보이지만, 방금 전 이 파티에는 마법사가 한 명뿐이라고 했다. 눈앞에 있는 가스톤 이라는 사람이 마법사임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힘보다는 속도 위주의 검법을 구사하는 인물인가? 하지만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거대한 몬스터와 도 상대해야 하는 모험가 생활에서 저런 파괴력이 형편없는 검을 사용하는 걸 보면 저 검의 파괴력이 아마 상상 이상인지도…………….

‘그렇다면 저 검은 마법검 같은 건가?’

마법검이라면 일단 설명이 된다. 마법을 쓸 수 있고 또 대단히 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떠벌

리는 가운데 가스톤이 술과 안주를 더 가지고 왔고, 방 안은 좀 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보통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많은 모험을 한 팔시온 과 시드미안 경이었고 나머지는 듣는 입장이었다.

웃고 떠드는 가운데 시간은 점차 흘러갔고, 이윽고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계단이 소란스럽게 쿵쾅거리며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나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미카엘이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어렵쇼? 우리가 나간 새 비겁하게 술 파티를 벌이다니………….”

미카엘은 가스톤이 들고 있던 잔을 빼앗아 한 잔 가득 담긴 술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알맞게 구워 놓은 고기포를 질겅거리며 화통하게 말 했다.

“이봐, 좋은 기회를 잡았어. 역시 여기는 수도라서 그런지 매주 일요일마다 경기장에서 대회가 열린다고 하더군. 트롤이나 뭐 그런 걸 혼자서 때려 잡으면 아주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더라구. 돈도 다 떨어져 가는데 아주 좋은 기회잖아.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샤헨 아카데미에서 무투회(武鬪會)가 벌어진대. 우승자는 상금이 자그마치 1천 골드라구. 그리고 매 경기당 승리 수당이 10골 드야. 본선 경기는 50골드고. 물론 상처 입으면 치료는 신전에서 공짜로 해 주고…………. 어때? 팔시온, 한몫 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잖아?” “괜찮군. 하지만 만만찮은 실력자들이 다 모일 텐데?”

“우승이야 못 해도 상관없지. 아무리 못 벌어도 2백 골드는 벌 수 있을 거야. 물론 재수 없어서 1회전에 그래듀에이트하고 붙으면 가능성이 없어지 지만…………. 그래도 여기는 양심적으로 그레듀에이트는 무조건 본선에 올려 준다고 되어 있더라구. 그때 그 망할 놈의 기다스 아카데미 무투회 때는 예 선 1회전에 그래듀에이트하고 붙어서 떡이 난 걸 생각하면…………… 으, 이 갈린다!”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친다는 듯 또다시 한 잔을 목구멍에 꿀꺽꿀꺽 쏟아 부은 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세상에 그래듀에이트 자격을 가진 기사를 예선전부터 싸우게 만드는 속셈은 뭐야? 그놈이 이길 게 당연한데! 그리고 그 알프레드 미트리에란 녀석 도 그래!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그 정도 실력의 기사가 할 짓이 없어 겨우 무투회 따위에 나오다니. 못된 녀석!”

미카엘이 한참 과거를 회상하다가 열이 뻗쳐 성질을 부리고 있을 때 미디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난데없이 웬 술 파티냐는 듯 휙 둘러보더니 입을 열 었다.

“모두 웬일이야? 방 안에서 술 파티를 하다니. 참,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용병 길드에 가 봤더니 안테로스 공국(公國)에서 용병을 모집한다 던데…… 혹시 같이 갈 사람 없어? 보수는 아주 후하다구. 월급은 한 달에 10골드, 실력만 좋다면 한 달에 30골드. 물론 숙식은 그쪽에서 해결해 주 고 말이야. 같이 갈래?”

미디아까지 도착하자 팔시온이 입을 열었다.

“이제 대충 다 모였으니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 미디아는 자리가 없으니 저쪽 침대 위에 앉아.”

그제야 낯선 사람들을 알아 본 미디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뭐야? 누구지?”

팔시온이 팔을 내저으며 미디아를 제지했다.

“우선 내 말부터 들어 봐. 뭔가 하면 우리들에게 한 가지 일거리가 떨어졌다. 며칠 전에 만났던 그 패거리들을 추격하여 어떤 물건을 회수해 오는 일 이지.”

팔시온은 아직 참가할 일행이 정해진 상태가 아니기에 일부러 ‘어떤 물건’이라는 표현을 썼다. 혹시 빠진 사람이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만났던 그 패거리라면, 그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가 끼여 있던 놈들 말이야? 팔시온, 제정신이야? 그때는 다만 운이 좋았던 거라구.”

“맞아. 그 녀석들이 우리를 얕보지 않았다면 몇 명 죽거나 부상당했을 게 뻔해. 특히 그 마법사의 실력은 대단한 것 같던데………….”

“아, 그건 염려할 필요가 없어. 그래듀에이트급의 뛰어난 기사 한 분이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어. 여기 온 분이 우리들과 계약을 청하기 위해 온 분이 시지. 보수는 상당히 괜찮아. 경비는 저쪽에서 부담할 것이고, 또 그 물건을 안전하게 회수해 오면 그에 따른 충분한 보수도 준다고 했어.

자, 각자 생각해 보고 빠질 사람 있으면 지금 빠지라구. 갈 사람이 정해지면 출발에 대해 의논을 해야 하니까…………….”

그러자 미디아가 이의를 제기했다. 한 사람 안 왔기 때문이다.

“아직 미네리아 사제님이 안 왔잖아? 어쨌든 뛰어난 사제가 한 명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상대가 만만하지 않으니까 부상자도 많이 생길 텐데…

“미네리아 사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사실 사제야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고, 또 안 되면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지. 그리고 미네리아 사 제 같은 경우 치료 마법밖에 못 하잖아. 자, 각자 참가할 건지 빨리 말해 줘.”

“나는 참가하겠어. 얼마나 괜찮은 동료가 있을지 알지도 못하는 전쟁터에 가는 것보다는 이미 실력을 확인한 동료가 좋겠지. 그리고 보수도 괜찮은 것 같고. 안 그러면 팔시온이 권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하겠어.”

“나도.”

“우리들도 하겠어요.”

“자네는?”

지미와 라빈이 답하자 마지막으로 팔시온은 다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저 여자 애만 빠진다면 이의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쪼그만 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으니까…………”

그러자 팔시온이 시드미안 경을 바라봤다. 시드미안 경은 라나를 쳐다보더니 싱긋 미소 지었다.

“저 아이는 처음부터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됐습니까?”

“지금 돌려보내시죠.”

“이봐, 스미온, 데려가게.”

“예.”

그러자 라나는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안 돼요. 나 같이 갈래요. 가게 해 줘요. 엉엉, 놔요. 데려가 줘요. 나 없이 잘되나 두고 보자.”

시드미안 경의 뒤쪽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라나를 끌고 나갔다. 라나는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네 배 이상 의 무게를 지닌 인물이 잡아끄는데 끌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버둥을 치고, 떼를 쓰면서 라나가 끌려 나가자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이런 모험 여행, 특히나 기사급 인물들이 지원해 주는 만큼 꽤나 안전하면서 도, 또 역으로 그런 인물들이 참가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이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멋진 모험이 될 것이다. 그런 여행에 꿈 많은 소녀가 참가하려 고 발버둥을 치는 거야 당연했다. 하지만 인정에 이끌리면 안 되지. 짐이 될 게 뻔한데.

모두는 그들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하기로 합의했다. 시드미안 경은 팔시온 일행에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성문 밖에서 만나 기로 약속한 후 나가다가 뒤돌아섰다.

“치료를 위한 신관은 내가 해결해 드리겠소. 이따 봅시다, 그럼.”

일행은 준비를 마친 후 새로운 모험을 향해 활기차게 말을 몰아 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성문 밖의 나무 아래 어두컴컴한 곳에 모여서 시드미 안경 일행을 기다렸다. 밤인 데다가 달빛까지 나무에 가려서 그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자 급히 말을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 명의 인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행복 안에 가죽 갑옷을 입은 새로운 인물들이 두 명 더 끼어 있었다.

시드미안 경은 일단 이동을 시작하라고 지시한 다음 이동하면서 팔시온 일행을 새로운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팔시온 일행의 소개가 끝나자 이번에 는 팔시온 일행에게 새로 합류한 인물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안토니 크로와입니다. 5사이클 마법까지 익힌 마법사죠.”

그러자 너무 학자풍으로 생겨 가죽 갑옷이 안 어울리는, 적어도 마흔은 넘어 보이는 인물이 인사를 해 왔다.

“안토니 크로와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저쪽은 로니에 칸타로와 사제십니다. 샤이하드를 모시는 신관이시죠.”

엄청나게 잘생긴 30대 중반 정도의 금발 미남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그는 미네리아와는 달리 허리에 묵직해 보이는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다.

어쨌든 전번 여행의 동료였던 미네리아 로안스에르 사제나 말괄량이 라나 슈바이텐베르크 등 만나는 사제들은 모두 멋진 미남, 미녀인 것이 특이했 다.

하지만 거기에는 작은 비밀이 있다. 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신께서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믿음으로 각종 미(美)에 관계된 신성 마법을 개발했 고, 그런 마법에 의해 그들의 얼굴과 몸매가 개조(?)되어 눈에 확 띄는 미남, 미녀가 된 것이지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여자 신관들의 경 우 못된 녀석들에게 희롱당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여자 신관들은 믿음직한 모험가 파티가 결성될 때만 여행을 했다.

시드미안 경의 소개에 팔시온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에도 샤이하드를 모시는 신전이 있는 모양이죠, 시드미안 경? 저는 아르곤 제국에만 신전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자 칸타로와 사제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나라에 포교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크로노스교(敎)를 금하고 있기에 포교는 참 힘들지요. 그 때문에 보통 봉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타국에 나갈 때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신관복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렇군요.”

그러자 옆에서 말을 달리던 지미가 팔시온에게 물었다.

“샤이하드라는 신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설명 좀 해 줘요.”

“크로노스교의 경전 ‘니트라’에는 샤이하드 외의 신을 섬기지 못하게 하지. 대단히 폐쇄적인 종교로 이방신을 섬기는 자와는 한자리에서 식사조차 못하게 규정짓고 있어. 그러니 다른 신을 섬기는 신전, 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악마나 암흑신들과 관계를 맺는 흑마법사나 마나의 힘을 이용하는 백마법사, 정령을 부리는 정령술사까지 전부 다 이교도라고 죽이거나 추방하지. 그래서 아르곤 제국은 마법사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국가가 된 거야. 샤이하드를 섬기는 크로노스교가 아르곤 제국에서 국교(國敎)로 선포되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어. 그렇기에 다른 나라들에서는 마 법사들이 주축이 되어 크로노스교가 자국에 들어오는 것을 엄중히 막고 있지.”

아르곤 제국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에 크로노스교도 여기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들 팔시온과 지미의 대화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백마술은 악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그리고 정령술도…….”

“누가 아닌 걸 모르냐? 하지만 고위 사제들이 그걸 확대 해석하는 바람에 거기에 들어간 거지. 오직 샤이하드만이 제어해야 할 대자연의 원동력인 마나를 한낱 인간이 부리는 것은 샤이하드에 대한 모독이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마나를 부릴 권세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말도 안 되는 소 리지만 아르곤 제국에서는 그게 정설이야. 그래서 아르곤 제국에서는 백마법이나 흑마법이나 정령 마법을 익힌 자들은 모두 다 악한 마신을 섬기는 자로 몰아서 모두 한꺼번에 처리한 거지. 대신 기사는 좀 달라. 검을 오랜 시간 수련하다 보면 자연스레 몸속의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니까, 그들까 지 없앨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들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들은 샤이하드의 은총을 받았다고 여기지.”

“그렇다면 전쟁이 벌어지면 타국의 마법사들 때문에 고생하게 될 텐데요? 아무리 기사단이 강하다고 해도…………….”

“흠…,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지. 그 나라의 전 국민은 샤이하드를 받들고 있어. 그 말은 그들의 군대도 샤이하드를 받든다는 말이 되 지. 하여튼 전 국민이 샤이하드를 열광적으로 받드니까 말이야. 전쟁이 터지면 광신도(信徒)들처럼 무서운 미친놈들이 또 어디 있는데…, 험험.” 그러다가 팔시온은 자신의 말이 조금 빗나갔다는 걸 느끼고 헛기침을 하면서 칸타로와 사제를 힐끗 보았다.

“아르곤에서는 신앙심을 꽤 중요시하니까, 신성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의 수가 많아. 어쨌든 기사들 중에서도 사제가 많으니까 말이야. 아르곤의 기사들 중에서 신성 마법을 쓸 줄 아는 기사들을 성기사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기사들이 신성 마법을 쓴다는데 놀라 지미가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와, 기사가 신성 마법까지 쓴다면? 정말 대단하겠군요.”

“물론 신성 마법의 특성상 흑마법이나 백마법처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지 못하지만, 그 방어력이나 치유력에 있어서는 흑마법이나 백마법보다 월 등하게 뛰어나지. 아무리 흑마법이나 백마법의 파괴력이 뛰어나다 해도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면 모두 소용없는 거야. 그래서 모두들 성기사 를 두려워하는 거야. 게다가 성기사는 자신의 몸 곳곳에 신성 마법을 걸어 놓지. 근력 증가의 마법이나 반사 신경이 빨라지는 마법 등……………. 그게 신앙 심이 유지되는 한은 평생토록 유지되니까 얼마나 근사해?”

“우와, 정말 대단하군요.”

그러자 그 옆에서 듣고 있던 라빈이 경탄 어린 눈빛으로 칸타로와 사제를 바라보았다.

“칸타로와 사제께서도 신성 마법을 쓸 줄 아세요?”

칸타로와 사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떤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라도 사제급이 되려면 신성 마법을 쓸 줄 알아야 했다. “우와, 그러면 저한테도 근력 증가 마법 같은 거 걸어 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칸타로와 사제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걸어 주는 신성 마법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해요. 오래가 봐야 2, 30분 정도지요. 그렇기에 신성 마법을 걸려면 자신의 몸에 걸어 그 신 앙심을 흡수하도록 만들죠. 그러면 신앙심이 유지되는 한 그 신성 마법은 영원히 지속되니까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타인에게 거는 경우는 전투를 벌 이기 직전인 경우나, 전투 중인 경우죠.”

라빈이 약간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사라질 힘이라면 얻어 봤자 쓸모도 없는 게 아닌가.

“그러면 칸타로와 사제님도 그 마법을 몸에 걸어 놓으셨어요?”

칸타로와 사제는 약간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 저도 근력 증가의 마법이나 뭐 그런 걸 걸어 놨죠. 사실 저는 전문적인 검투(劍鬪) 훈련 같은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제 몸을 지키려면 마법을 이용해서 몸을 상향 조정하는 방법밖에 없죠. 그 덕분에 바스타드 소드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것이구요. 저같이 전문적인 교육 을 받지 못한 사람도 신성 마법에 의해 검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데, 성기사처럼 검투 교육을 받은 사람은 과연 어떻겠어요? 또 성기사들에게는 검 술에 관련된 신성 마법도 전해져 내려온다고 합니다. 어쨌든 제가 알기로는 성기사의 능력은 전쟁의 신전에서 말하는 그래듀에이트급 이상이라고 하 “더군요.”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이 없잖아요.”

“전에 발트란 공국에서 온 사신 일행 중에 그래듀에이트급 기사 한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와 성기사가 비무를 한 적이 있었죠. 그때 비무는 성기 사의 압승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저의 조국인 아르곤 제국을 근방의 모든 국가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샤이하드의 힘은 대단히 위대하답 니다.”

그러자 라빈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성기사의 수는 얼마나 되요?”

“제가 알기로는 3천 명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성기사가 3천 명이나 된다구요?”

“예.”

“그럼 성기사 중에서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요?”

“잘은 모르겠지만 샤이하드의 축복으로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성기사는 3, 4백 명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지미는 약간 김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진짜 실력자는 3, 4백 명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웬만큼 큰 국가들도 그래듀에이트급 기사 3백 명 정 도는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에이,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그래듀에이트급 기사와 비무했던 성기사는 직위가 낮은 사람이었어요. 마나를 다스릴 권능을 부여받은 성기사가 그런 하찮 은 타국 기사와 비무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다크를 제외하고 모두들 놀라움을 느꼈다. 마나도 다스릴 줄 모르는 성기사가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를 이기다니……………… 물론 신성 마법의 덕분이겠지만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놀라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