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11화 – 정복 전쟁

정복 전쟁

다음 날 새벽 토지에르는 공작 전하를 모시고 스바스 근위 기사단의 핵심 멤버들과 함께 이제 전쟁이 벌어지게 될 스바시에 왕국과의 국경 부근으로 워프했다. 스바시에 왕국은 크라레스 제국과 말토리오 산맥을 경계선으로 하고 있었기에 지형상의 이점이 크게 작용하여, 전쟁에 대한 걱정을 별로 안 하고 살던 곳이다. 하 지만 크라레스 왕국이 대부분의 비옥한 영토를 코린트에게 빼앗기면서, 주 영토를 말토리오 산맥 안으로 잡고 있는 지금, 그 지형적 이점은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 다. 설상가상으로 크라레스 왕국은 감히 코린트로 밀고 들어가지는 못하니까 스바시에 왕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게 그들에게는 문제였다.

하지만 한 가지 스바시에 왕국의 궁정을 안심시키고 있던 점은 크라레스는 거의 몰락하여 이제 겨우 타이탄 28대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영토 거의 대부분이 산 맥 속에 위치해 있어 토지가 척박하여 몇 가지 광물 자원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타이탄을 생산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복수를 염려한 코린트가 과거 30여 년 동안 크라레스가 더 이상 타이탄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무거운 조공(租貢)을 부과하여 크라레스 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없애 왔다.

그렇기에 스바시에 왕국은 마법사가 부족해 어쩌다가 한 대씩 알카사스에서 수입해 오는 타이탄만으로도 충분히 크라레스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법사 는 거의 없었지만 127명의 그래듀에이트와 57대의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바다를 이용한 무역과 풍요롭고 넓은 대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라레스와의 격차를 벌려 줄 테니 나중에는 역으로 코린트와 연합하든지, 아니면 단독으로라도 그 산적소굴 같은 곳을 박살 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스바시에 왕국과의 국경선은 말토리오 산맥 안으로 조금 들어온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상대가 위에서 아래로 밀고 내려오게 된다. 그래서 지형상의 불리함을 없애기 위해 스바시에의 정예군은 주요 도로와 산 위에 대대(1백 명) 또는 연대(1천 명) 규모의 주둔이 가능한 작은 요새들을 구축해 두었고, 대 체적으로 주력 부대는 조금 뒤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저기가 스바시에 왕국이군.”

새벽의 여명이 밝아올 때, 공작이 산꼭대기에서 지평선 저쪽까지 펼쳐져 있는 넓은 대지를 바라보며 말하자, 옆에서 토지에르가 거들었다.

“예, 전하. 전하께서는 이쪽으로는 와 보시지 않아서 잘 모르시겠지만 제법 쓸 만한 나라지요. 저 정도 국력에 마법사가 별로 없다는 것은 신의 도움이옵니다.” “좋아. 크로이델 장군.”

그러자 그들의 뒤에 서 있던 50세가 넘어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인물이 답했다.

“옛!”

“이번 작전을 그대가 짰으니 모든 군의 지휘권은 그대에게 주겠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지도를 가져와라.”

뒤쪽에 서 있던 장교들 중의 한 명이 재빨리 큰 종이 뭉치를 꺼내 활짝 편 다음 그들 앞에 대령했다. 공작은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그대의 작전대로 주 전투는 라딘 대로에서 벌어질 것이니, 라딘 요새를 재빨리 점령해야 한다. 라딘 요새 외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별로 없는 만큼 그 외의 요새들 점령은 보병들로 해결하라. 라딘 요새는 여단급(5천 명)이 주둔하는 대 요새이니만큼 타이탄으로 공격한다. 적은 우리가 공격을 시작하면 아마 타이탄을 곧 바로 투입할 것이다. 그때 카프록시아를 총출동시켜 그들과 함께 타이탄 전투를 벌인다. 이때 라딘 요새를 공격하던 타이탄도 가세해야만 할 테니 요새 전투는 조금 벅찬 싸움이 될지도……. 어쨌든 오늘 라딘 요새 공격은 적 타이탄을 유인, 격멸하기 위한 미끼다. 적은 타이탄 부대가 괴멸당한 걸 알면 후방에 있던 기사단들과 합류하기 위해 후퇴할 것이다. 그들의 위치를 빨리 포착, 섬멸해야만 한다. 오늘 전투에서 적의 전방 부대를 완전히 섬멸하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앞뒤로 적을 상 대해야만 한다. 제군들의 분투를 바란다.”

“옛!”

“크로이델 장군.”

“옛.”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기사단의 적절한 지원을 받으면서, 앞에서 타이탄이 쓸고 지나가면 효과적으로 뒤처리를 해 주게.”

“옛!”

“타 요새들에는 타이탄을 배치하지 못하지만 남은 그래듀에이트나 마법사는 빌려 줄 수 있다. 만약 상대 요새를 점령하기 힘들면 지체 없이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 하라. 겨우 스바시에를 점령하면서 정예 병사들을 잃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최악의 난전이 예상되는 곳에는 용병대를 투입하도록.”

“옛!”

“나는 카프록시아를 타고 싸워야 하니까, 병력 지휘는 크로이델 장군이, 마법사들을 이용한 후방 지원은 토지에르 자네가 맡아 주게. 자, 시작하자!”

“옛!”

“자자……. 야, 미카엘, 이 자식. 닥치고 작전 명령이나 들어!”

더 이상 소란스러운 인물이 없어지자 날카로운 표정의 연대장이 대대장들을 향해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연대가 공격할 곳은 라딘 요새다. 우리가 돌격해 들어가서 통로를 개척하면 뒤에서 정규군 1개 사단이 따라올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진입 통로를 개척해야 만해.”

그러자 대대장들의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우… 연대장은 라딘 요새가 어떤 곳인지나 알고 그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 안에 여단급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구요. 거기에다가 대단히 강한 외벽, 또 쇠뇌들 도 많이 갖춰져 있는데 그리 돌진해 들어가는 건 죽으려고……..”

“이봐, 닥치고 내 설명이나 들엇! 우리가 돌격해 들어가기 전에 콜렌 기사단의 타이탄 아홉 대가 먼저 돌격해서 요새를 반쯤 박살 낼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하 지만 중요한 건 상대 타이탄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쪽으로 이동해야 하니까, 그 뒤부터는 순전히 우리 능력으로 돌파해 들어가야 한다. 알겠나?”

“적 기사단의 출동이 늦어지면 우리는 거의 싸울 필요도 없겠군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타이탄들이 외벽을 부수기도 전에 놈들이 올 수도 있다. 그때는 재빨리 후퇴하여 타이탄들끼리의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 린다.”

“예? 그대로 돌격이 아니고요?”

“상부의 지시는 그렇다. 이번 전투는 최전방의 적 타이탄의 격멸이지 요새 따위 점령이 아니다. 그걸 잊지 말도록. 또 타이탄들끼리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이런 요새쯤이야 타이탄으로 금방 박살 낼 수 있다.”

그 말에 팔시온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상부에서는 이번 타이탄 전투에 승리할 확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다.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병력은 크라레스 전력의 90퍼센트에 이른다. 수도를 방어해야 할 근위 기사단까지 총출동했다는 말이지. 그러니 타이탄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대들은 야음(夜陰)을 틈타 부하들을 이끌고 요새에서 1킬로미터 전방까지 돌진해 들어가 거기에서 대기하다가 타이탄들이 통로를 개척하면 그때 돌격을 시작한다. 질문은?”

“부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연대에서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환자가 많으면 뒤로 돌려야지. 후방의 보병사단 쪽으로 돌려라. 사제들과 의사들로 이루어진 구호반이 정규 사단과 함 께 있을 것이다. 또?”

확실히 대규모 정규전은 모두들 처음이라 준비가 확실하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연대장은 마지막 말을 뱉었다.

“질문이 없으면 이동을 시작해!”

이번 전쟁에 투입한 크라레스의 타이탄은 19대. 카프록시아 10대와 푸치니 9대였다. 푸치니는 출력이 0.7밖에 안 되는 만큼 요새 공격이나 보병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고, 대타이탄 전쟁은 근위 기사단의 카프록시아가 전담하기로 했다.

그 외에 콜렌 기사단이 보유한 미가엘 네 대와 루시퍼 다섯 대는 일부러 코린트 근방에 배치하여 그들을 경계하는 척했다. 모든 타이탄을 이곳 전쟁터로 돌린다면 여유 부대가 있지 않을까 코린트가 의심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막대한 뇌물을 코린트의 상층부에 헌납하고 이번 침략 전쟁을 묵인해 줄 것을 허가받았기에 이들은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또 이번 전쟁이 끝난 후에는 노 획물들 중의 상당량을 또다시 뇌물로 헌납해야 코린트가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놈들을 응징하겠답시고 참전하는 걸 막을 수 있겠지만, 그건 전쟁이 끝난 후의 일 이고 우선은 묵인해 주겠다는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팔시온 일행은 그들의 옆으로 아홉 대의 타이탄들이 한 손으로는 방패로 몸을 가리고, 또 한 손으로는 철퇴나 도끼를 휘두르며 돌진해 들어가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그날 새벽에 도착한 공작 일행은 간단한 작전 회의를 끝냈다. 근위 기사단에 소속된 그래듀에이트 전원이 자신들의 카프록시아를 불러내서 탑승할 때, 이미 콜렌 기사단의 푸치니들은 오른손에는 거대한 철퇴를 들고 왼손에는 널찍한 방패로 상대의 화살이나 대타이탄용 쇠뇌를 막으면서 적의 요새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화살이야 막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지만, 거대한 기계 장치로 4미터 길이의 거대한 창을 날리는 대타이탄용 쇠뇌의 위력은 엄청나기 때문에, 잘못 막으면 타이탄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요새에 도착한 푸치니들은 각자가 가진 거대한 철퇴나 도끼로 요새의 벽을 허물고 문을 박살 냈다. 그리고 달려드는 인간들을 철퇴나 도끼로 찍어 가루로 만들었 다. 이때쯤 되어 크로이델 장군이 지휘하는 국경에 집중된 크라레스의 3개 사단 병력의 보병들이 밀고 들어갔고, 그들과 함께 카프록시아 열 대가 함께 이동했다.

결전병기(決戰兵器)는 타이탄이었지만 전 영토를 타이탄으로 막을 수는 없었기에 보병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카프록시아들은 보병들을 호위하며 주 공격 로인 라딘 요새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시온은 거대한 덩치의 타이탄들이 거대한 철퇴나 도끼를 휘두르며 굳건한 라딘 요새의 외벽을 허무는 걸 보면서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도 부하들을 따라 달려가다가 저쪽에서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엄청난 먼지를 피우는 것들의 정체는 상대의 거대한 기병 사단 같은 게 아니라 타이탄들이었다. 요 근래 시드미안과 여행하면서 겨우 타이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었던 팔시온은 30여 대의 타이탄들이 이쪽으로 돌진해 들어오자 숨을 죽 일 수밖에 없었다.

“이야, 엄청 많은데? 이거 후퇴해야 하는 거 아냐?”

옆에 있던 미디아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정도로 시속 1백 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로 돌진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은 그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이때 그들의 뒤쪽에서 푸른색과 붉은색을 얼룩덜룩 칠해 놓은, 어깨까지의 높이가 5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타이탄 열 대가 돌진해 오는 상대 타이탄들을 향해

달려갔고, 요새를 허물던 아홉 대의 타이탄들도 그 뒤를 따랐다. 곧이어 이 시대가 낳은 최강의 마법 병기인 타이탄들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팔시온은 눈길을 격전장에 둔 채 옆에서 멍하니 격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미카엘에게 말했다.

“정말 박진감 넘치는군. 하지만 갑옷 입은 보병들이 싸우는 거랑 별로 다를 건 없는데?”

“그러게 말이야. 저런, 나쁜 새끼! 옆에 있는 타이탄과 싸우는 적의 등을 찌르다니……. 비겁한 놈.”

“원래 싸움이란게 다 그렇지. 이야, 그건 그렇고 저 타이탄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타이탄을 타고도 저렇게 화려한 검술을 구사할 수 있다니……. 봐, 수준 차이 나잖아. 근위 기사단이라는 저 뻘겋고 푸른 타이탄 정말 엄청나군. 대 단한 실력의 그래듀에이트들이 타고 있는 모양이야.”

그들의 시야를 잡고 있는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은 상대의 검을 방패로 밀어 내면서 무게에서 밀리는 상대가 약간 비틀거리는 사이 재빨리 왼쪽으로 도약하며 한 칼에 상대 타이탄의 몸을 두 토막 냈다.

“이야, 멋지군. 저놈의 허리는 몇 도까지 돌아가는 거야? 방금 봤어? 거의 180도 넘게 돌아갔잖아. 그러면서 옆에서 동료하고 싸우던 타이탄까지 한 방에 둘 을…….?

“아무리 그래도 비겁한 짓이야……. 등을 친 거잖아.”

“정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실력은 엄청나군. 벌써 여덟 대째잖아. 정말 실력 차이 나는군. 아예 상대가 안 되는데?”

이들의 태도를 보고 있던 미디아가 혀를 찼다.

“쯧쯧……. 야! 용병으로 고용되었으면 돈값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래도 모두들 실력을 계산해서 대대장으로 고용되었으면, 부하들을 이끌고 죽자고 싸워야지.” 팔시온이 시선을 미디아에게로 돌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누구하고 죽자고 싸워?”

“저기…….”

미디아는 말을 채 맺지 못했다. 믿었던 기사단의 타이탄들이 허무하게 묵사발이 나자, 요새에 남은 패잔병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항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길, 이번 전쟁은 너무 싱겁잖아. 나는 아직 칼 한 번 못 휘둘러 봤는데…….”

“싱거운 게 아냐. 전쟁도 이 정도면 할 만한 거지.”

마지막 남은 상대의 타이탄이 그 멋진 실력을 보이던 근위 타이탄의 검 놀림에 쓰러지는 걸 보면서 팔시온이 말했다.

“자, 이제 눈요기할 것도 없으니까 일을 시작해 볼까? 야! 이 녀석들아, 포로들은 저쪽에 모아. 그리고 혹시 숨어 있는 놈이나 죽은 척하고 있는 놈 있는지 찾아내. 미카엘, 너는 부하들 데리고 저쪽으로 가서 나머지 잔당들을 소탕해. 그리고 미디아와 가스톤은 요새 안을 맡아. 우리 용병대가 정규군 놈들에게 뒤지지 않다는 걸 보여 주자구. 빨리 움직엿!”

지미와 라빈도 소대장으로서 자신에게 배당된 용병들을 데리고 신이 나서 전쟁터를 누볐다. 처음 겪는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고 좋아하는 그들을 보면서 미디아가 팔시온을 툭툭 쳤다.

“저 녀석들 신났군.”

“그럼, 승자 쪽에서 하는 전쟁은 언제나 신나지. 패자 쪽은 암울하겠지만….

“그건 그렇고, 다크는 어떻게 지낼까?”

“뭐, 잘 지내겠지. 이번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좀 만나게 해 달라고 토지에르 영감에게 부탁해 볼까?”

이때 그들의 뒤쪽에서 으르렁거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네 녀석들! 부하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대대장이란 놈들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얏! 빨리 안 움직이면 껍질을 벗겨 줄 테닷!”

“히익!”

어느새 다가와서 으름장을 놓는 험악한 인상의 연대장을 보고 팔시온과 미디아는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