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14화 – 한가한 한때
한가한 한때
어제는 다크가 원체 히스테리를 부리는 바람에 전달해 주지 못했던 실바르는, 세린에게서 다크의 심리가 꽤 안정되어 있다는 보고를 들은 후에야 행동을 개시했 다. 탈출 사건 때문에 피차간에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으니, 그때 나타났다면 아마도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그도 예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의 판단 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이었다.
똑똑.
그러자 재빨리 세린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으리?”
“네 주인에게 전할 게 있다.”
“예, 나으리.”
세린은 쪼르르 주인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주인님, 실바르 경이 뵙자고 하십니다. 전해 드릴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들어오라고 해.”
“예, 주인님.”
세린의 안내로 실바르가 들어왔고,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 방 주인을 보면서, 뭐라고 대화를 시작할까 한참 망설였다.
“폐하께서 그대에게 전해 주라고 한 물품들을 가지고 왔소. 가지고 와라.”
밖에서 노예들이 차곡차곡 정돈해 놓은 물품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각종 옷가지나 여행 물품들 그리고 작은 검이었다. 그것들 중에는 황제가 다크에게 주는 선물 도 있었고, 다크가 압수당한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세린도 그대의 것이오. 폐하의 하사품이니까 그대가 알아서…….?
실바르가 말을 끊은 것은 상대가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 물품들 중에서 검과 장갑 한 벌을 꺼내서는 검을 허리에 차고 나서 천천히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상대가 장갑을 끼고 “파워 업”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을 때, 실바르의 손도 무의식중에 슬며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검 손잡이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웬만한 여자라면 이따위 짓을 해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소녀의 행동 하 나하나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에, 그러니까 세린은 폐하께서…….”
슉!
갑자기 상대의 검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동작으로 검집을 빠져나와 허공을 날았다. 자기 쪽으로는 날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실바 르의 손이 순간적으로 검을 반쯤 뽑았다가 황급히 다시 집어넣었다.
만약 실바르가 검을 완전히 뽑았다면, 완전히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실바르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뭔가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세 린의 목걸이였다. 자신의 목으로 거의 스치듯이 지나간 칼 때문에 세린의 표정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실바르는 상대의 날카로운 일검을 보고 폐하가 이 소녀를 아끼는 이유가 단순히 뜨거운 잠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자신의 몸이 소녀의 행동에 왜 그렇게 뜨겁게 반응했는지도……. 그녀는 겉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숙련도를 지닌 검객이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군.”
다크는 과거와 달리 자신의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힘을 느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의 내공이 상승한 만큼 마법 장갑은 현재 풀 파워를 내면서도 그녀에게 무 리를 주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충분히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크는 천천히 샤벨을 검집에 넣으면서 “파워 다운”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후 실바 르를 쳐다봤다.
“뭐 할 말이 더 있어요, 실바르 경?”
여러 가지 생각이 뒤얽혀서 멍한 표정으로 있던 실바르는 그제야 깜짝 놀라서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실바르가 밖으로 나갈 때 뒤에서 나지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제 자유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일을 못한다고 두들겨 맞을 이유도 없고, 또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다. 야성이란 것은 야성으로서 존재할 때 아름다운 것. 길들여진 야성은 보는 이에게 슬픔을 자아낼 뿐이지.”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딸깍 하고 실바르가 문 닫는 소리가 들렸고, 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세린이 주인 앞에 꿇어앉아서는 울먹였다.
“주인님, 저 버리지 말아 주세요. 더 열심히 일할게요. 예? 주인님……. 엉엉, 다시는 게으름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할 테니 제발 버리지 마세요.”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세린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인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는 너무 길들여져 버렸구나. 나는 너에게 자유를 선물하려 했는데……. 그게 너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웠느냐? 너를 버리지 않을 테니 그만 울거라.”
그 후로 며칠간은 평온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밥 먹고 수련, 수련. 다크는 수련이었지만 세린이 봤을 때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으니 몸 버리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안 그래도 의사한테 잘 먹이라는 당부를 받았는데…….
“좀 더 드세요.”
얼마 먹지 않고 포크를 놓는 걸 보면서 세린이 말했지만, 다크는 더 이상 먹을 생각이 없는 듯 심드렁하게 맞받았다.
“이제 됐어. 배가 너무 부르면 수련에 방해가 돼. 이 정도가 딱 맞아. 포도주나 한잔 다오.”
세린은 붉은 포도주를 반 잔 정도 따라서 주인에게 건네줬다.
“산책이라도 좀 하세요. 안 그러면 건강에 안 좋아요. 운동을 안 하시니까 식욕이 없죠.”
“괜찮아. 한시가 급한데…….”
“산책 좀 하세요.”
“괜찮아.”
“그래도 산책 좀 하세요. 날씨 참 좋아요.” 끈덕지게 세린이 졸라 대자 다크는 울컥했다.
“너 계속 귀찮게 하면 팔아 버린다……. 어?”
사실 한시가 급한 이때,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운데 계속 옆에서 종알거리니 열 받지 않을 수 있나? 갑자기 세린의 표정이 겁에 질려서는 우울한 듯한 표정으로 바뀌 자 찔끔한 다크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그래, 산책 가자구. 가면 될 거 아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무 신발이나 신고 있는 주인을 보며 세린은 이 새로운 주인의 습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 한 게 정석이었지만, 이렇게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인물이 있을까? 토지에르 같은 무서운 사람에게는 막 나가면서 자신 같은 노예의 마음은 신경 써 주다 니……. 특이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세린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세린이 서둘러 주인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실바르도 어슬렁거리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호위해야 하는 이 특이한 소녀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며 말이 다.
그들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을 때 성(城)내는 이상하게도 시끌벅적했다. 모두들 모여서 소란스럽게 떠든다는 말이 아니라,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상시보 다 더 많은 병사들이 보였고, 성 한쪽 구석에 설치된 거대한 마법진들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마법진의 중간에 큼직한 수정 구슬을 올려놓고 뭐라고 떠들어 대는 인물도 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도대체 무슨 일이지? 몹시 소란스럽군.”
“글쎄요, 주인님. 저는 도저히…….”
“하기야 네가 알 리 없겠지. 오랜만에 나왔으니 꽃구경이나 하러 갈까? 여기 혹시 ‘국화’. 으음, 그러니까 이렇게 생긴 꽃이 피는 곳을 알고 있냐?” 그러면서 다크는 국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꽃잎은 여러 개인데, 이렇게 뭉쳐 있어. 그리고 이파리는 이렇게 생겼지. 가을에 꽃이 피는데…….”
다크가 꽃을 그리며 특징을 대강 설명하자 세린이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아, 국화(chrysanthemum)로군요. 후원에 심어져 있습니다. 국화는 성실, 청순, 고귀함을 뜻하기에 정원에서 매우 인기 있는 화초지요. 후원 뜰에서 키운 다음 가을에 꽃이 피면 모두 파내서 왕궁 앞의 주 정원(主庭園)에 아름다운 모양을 이루도록 옮겨 심습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후원에 가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주인님.”
“그럼, 그리로 가자.”
“예.”
다크는 후원으로 걸어가며 세린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후원에 넓은 꽃밭을 만들어 여러 종류의 화초를 가꾸면서 그 꽃들이 필 때가 되면 왕궁으로 들어 가는 통로에 마련된 주 정원에 모양 좋게 옮겨 심는 행위…,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게 다크의 생각이었다.
“쓸데없이 파서 이리저리 옮길 필요가 있을까? 괜히 그래 봐야 힘만 드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주인님. 여기는 왕궁인걸요. 사신들이 이곳 주 정원을 통과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지요. 만약 주 정원에 꽃이 피어 있지 않다면 타국(他國)의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물론 겨울에는 상관없지만.
“쓸데없는 노동력의 낭비야. 그냥 그대로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즐기면 그만이지……. 저렇게 말이다.”
다크가 가리킨 곳을 보던 세린이 생긋 미소 지었다.
“저건 나무라서 옮기기 힘드니까 그렇죠.”
“저건 무슨 꽃이지? 아주 화려한 꽃이군.”
화려한 꽃들이 달린 나무들을 보면서 세린이 설명했다.
“예, 장미(rose)라고 합니다. 짙은 붉은색의 장미는 정절과 열렬한 사랑을 뜻하기에 기사들이 선호하는 꽃이지요. 또 요즘은 품종도 많이 개량되어 겨울 빼고는 늘 장미꽃을 볼 수 있거든요. 색깔이 참 많죠? 붉은색, 노랑색, 분홍색, 흰색이 있는데 여기서는 흰색은 심지 않아요. 코린트 제국의 국화(國花)가 백장미거든요. 우리 나라가 코린트 제국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러더군요.”
“흐음…….”
“봄이 되면 주 정원은 참 아름다워요. 아마 겨울에 삭막했기에 더욱 아름다운지도 모르지만요. 그때가 되면 크라레스 왕국의 국화(國花)인 히아신스로 주 정원이 아름답게 단장되지요. 또 꽃말도 근사하잖아요. 기쁨과 승리…….”
아름다운 봄의 정원을 회상하는지,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눈빛의 세린을 보면서 다크는 피식 웃었다.
“꽃말이란 건 또 뭐냐?”
세린은 별 이상한 사람도 다 보겠다는 듯 황당한 표정이 됐다.
“꽃말도 모르세요? 각 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요. 기쁨, 용기, 승리, 슬픔 같은 거요.”
그 말에 다크는 별 할 짓 없는 놈들 다 보겠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꽃은 그냥 꽃으로서 아름다울 뿐, 뭐 하려고 쓸데없이 따로 뜻을 지어서 붙이는지…….”
“아주 낭만적이잖아요. 탄생화도 정해져 있는걸요? 주인님은 생일이 언제예요? 무슨 탄생화인지 제가 알려 드릴게요.”
“몰라.”
“예?”
“나는 고아라서 몰라.”
다크의 무심한 말에 세린이 오히려 당황해서 사죄했다.
“죄송해요, 주인님. 그만…….”
“상관없다. 부모 얼굴 따위 상상해 본 기억도 없고,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 나는 여태껏 그런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으니까…….”
이윽고 국화밭에 도착한 다크가 그윽한 눈빛으로 국화를 바라보자 세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 꽃도 피지 않았는데, …. 혹시 무슨 추억이라도 있으세요?”
다크는 싱긋 미소 지었다.
“사실 국화 따위에 무슨 추억이 있겠냐? 내 삶을 돌이켜 보면 검(劍)과 피(血밖에 없는데. 저 국화도 과거 나를 구해 줬던 멍청한 부하 녀석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 을 뿐이야.”
“그 부하 분이 국화를 좋아하셨나요?”
“아니, 그 녀석 이름이 국화였어. 진짜 이름은 나도 모르겠고, 그냥 부르기 편해서 국화라고 불렀지.”
“크리샌더멈(국화)이라……. 괴상한 이름이네요.”
“글쎄…….”
“저쪽으로 가시지요, 주인님. 여기는 가을에 꽃이 피는 화초들만 심어져 있거든요. 아직 꽃이 피지 않아서 볼 게 없어요. 여름에 꽃이 피는 것들은 지금 주 정원에 옮겨 심었지만, 후원 저쪽에 보면 그래도 많이 남아 있어요. 또 의자도 있구요. 햇볕이 따가우니까 그리로 가시지요.”
세린이 안내한 후원의 한구석에는 원추리, 참나리, 작약, 해바라기, 다알리아, 백일초, 접시꽃, 봉선화, 칸나, 아마릴리스, 글라디올러스, 붓꽃, 천일홍 등 수많은 화 초들이 꽃을 피우고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원추리처럼 이미 꽃이 지고 있는 것도 있었고, 칸나처럼 한창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참 아름답죠? 언제나 후원의 세 곳은 꽃을 뽑아서 옮겨 심지 않고 그냥 놔두거든요. 그래서 왕궁 안의 사람들은 그 세 곳을 각각 봄, 여름, 가을의 정원이라고 부 르지요. 이제 두어 달 지나고 나면 여기 있는 꽃들은 모두 질 거고, 그때쯤에는 가을 정원에서 꽃이 피기 시작하지요.”
세린은 조르르 달려가서 먼저 널찍한 천 조각을 꺼내서는 벤치 위에 펴고 주인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 검 걸리적거리지 않으세요? 옆에다 풀어 놓으세요. 여기는 왕궁이라 그걸 사용할 일이 없다구요. 왜 꼭 그걸 가지고 다니세요? 무거울 텐데…
다크는 피식 웃고는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습관이야. 검을 가지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지. 특히나 지금처럼 힘이 별로 없을 때는 말이야. 너희들도 검을 쓰냐? 아, 내 말은 야생에서 말이야.”
“아닙니다. 저희들은 원래 아주 깊은 산속에 사는 종족입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자랐기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숲에서 살다가 잡혀 온 동족에 게 들어보면 긴 손톱이나 발톱으로 싸운다고…….”
그 말에 다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손톱이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어?”
“저희는 손톱이…….
어머나.”
둘 다 놀란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던 매끈한 세린의 손가락 끝에서 뾰족한 손톱이 1센티미터 정도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전에는 마법의 목걸이를 걸어 밖으로 자 라지 못하게 했지만, 세린의 목걸이는 다크가 잘라 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손톱이 밖으로 튀어 나온 것이다. 당사자인 세린도 그걸 처음 보고 놀라고 말았다. 다크는 신기하다는 듯 손톱을 바라보았다.
“아주 신기하네. 흠.. .! 고양이도 발톱은 발가락 속에 감춰져 있으니까 그런 원리인가? 하지만 겨우 이거 가지고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겠어? 말도 안 되 지. 대신 날카롭고 뾰족하니까 이쑤시개나 포크 대용으로는 쓸 수 있겠군.”
“이쑤시개나 포크라니요?”
세린은 주인의 말에 발끈했지만, 그 항의는 다크에 의해 간단히 묵살되었다.
“쉿! 조용히.”
갑자기 저쪽에서 한 남자 애가 튀어 나왔던 것이다. 열네 살쯤 되어 보였다. 다크하고 키는 거의 비슷했지만 여자로서의 성장기가 거의 끝난 다크에 비해 남자로서 2차 성장기를 막 시작한 소년은 몇 년 지나지 않아 180센티미터가 넘는 장대한 청년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아무튼 제법 단정한 옷차림에 가녀린 선을 지닌 미소년이었지만, 혈색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학자풍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나약해 보인다 고 해야 할까? 세린은 황급히 손톱을 집어넣고 그 소년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소년은 그걸 막고 입을 열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네. 나는 아리아스라고 해. 여기는 내 또래의 애들은 없는 줄 알았는데……. 너는 누구……?”
“나는 다크.”
“응, 다크구나. 좀 앉아도 되겠니?”
“안 돼!”
의외의 거부에 소년은 안색이 벌겋게 바뀌더니 엉거주춤 선 채로 말했다.
“오늘 궁이 시끌시끌하지? 오전 중에는 지하실에 들어가 있으라고 해서 도망쳐 나왔어. 나는 그런 꽉 막힌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너는?”
“저 애한테 끌려 나왔지.”
노예한테 끌려 나왔다는 말에 소년은 농담이라 생각하고 미소 지었다.
“풋, 그런데 그 검은 네 거니?”
“응.”
“여자들은 검을 잘 배우지 않는데, 너는 좀 특이하구나.”
“글쎄?”
“혹시 너 무녀 아니니?”
다크가 고개를 가로젓자 소년은 또 떠들어 댔다.
“나는 네가 무녀인 줄 알았어. 너무 예쁜 데다가 전쟁의 신전에서는 무녀들에게도 검을 가르치거든. 여기는 참 아름다운 곳이지?”
“……”
“책 보다가 질리면 여기에 자주 나와. 가업을 이어갈 형이 있으니까 부모님도 나한테는 검술을 익혀라, 뭘 해라, 하는 주문을 안 하셔서 나로서야 잘된 일이지만 말 이야..”
“얘기할 거 아직도 많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중에 자신의 말을 잘라 버리는 소녀에게 소년은 기가 죽었다.
“어, 아니…….”
“얘기 끝났으면 가 봐. 나는 너하고 놀 시간 없으니까.”
소년은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재빨리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아마 엄청나게 당황스럽고 무안했으리라…….
그 아리아스라는 소년이 멀어지자 다크는 피식 웃었다.
“별 할 짓 없는 녀석 다 보겠네. 그건 그렇고 포도주 가져 왔냐? 한 잔만 다오.”
“예.”
주인에게 포도주를 한 잔 따라서 건네주며 세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방금 보신 분 인상이 어떠세요?”
“아까 말했잖아. 아마 귀족의 방탕한… 아니군. 멍청한 아들 녀석 정도 되겠지.”
“반쯤은 정확하네요. 그분은 아리아스 폰 그래지에트 왕자 전하시거든요.”
“아까 그놈이 왕자라고?”
“예.”
“이 나라도 망하기 일보 직전이군. 저런 숙맥이 왕자라니…….”
“퍽 마음이 고운 분이시죠. 형이신 엘리안 왕자 전하와 달리 마음이 여리세요. 하지만 형이 원체 뛰어나시기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사실 수 있는 거죠. 안 그랬으면 저분도 벌써부터 국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으셔야 했을 테니까요.”
“국왕의 나이도 별로 안 들어 보이던데, 도대체 아들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두 분이십니다. 엘리안 왕자 전하께서는 지금 아카데미에서 기사 수업을 받고 계시지요.”
“그럼 몇 살에 결혼한 거지?”
“국왕께서는 독자였기 때문에 결혼을 일찍 하셨지요. 열여덟 살에 결혼하셨으니까, 왕자가 두 분 계시다 해도 놀라운 게 아니지요.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크라레 스에서는 보통 열일곱 살부터 스무 살 사이에 결혼합니다.”
“흐음, 보통 사람들은 결혼을 아주 빨리하는군.”
그도 그럴 것이 다크가 살아 왔던 무림(武林)이란 곳은 보통 30세가 넘어서 결혼을 한다. 젊을 때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준의 무예를 익히자니 당연히 여자를 가까 이 할 수 없었고, 그건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의 명가라면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에 결혼하는 일도 흔했다. 자신들의 노화쯤이야 주안술(珠顔術)로 충분히 숨길 수 있었고, 도중에 칼 맞아 죽지 않는다면 5, 60년은 함께 살면서 아들, 딸 낳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 보통 사람이라뇨?”
“아무것도 아니야. 포도주 한 잔 더 줘.”
“과음은 몸에 해롭습니다, 주인님. 그거 말고 우유를 드릴까요?”
“정말, 말 안 듣는 하녀군. 그러면 물이나 줘.”
그 말에 세린이 바구니를 뒤적뒤적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깜빡 잊고 물을 안 가져왔어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곧 가져오겠습니다.”
“물 한 잔 가지러 일부러 갈 필요는 없어. 가만있어 봐라……. 이게 물의 지배자니까 물을 달라고 하면 줄까?”
다크는 반지를 향해 말했고, 세린은 주인의 행동을 보면서 지금 그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었다. 반지 보고 물 달란다고 주나? “이봐, 물 좀 줘.”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크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지. 물컵을 대고 말해야 물을 주지. 멍청하게…….’ 이번에는 반지 밑에 들고 있던 포도주잔을 대고 말했다. “물!”
이번에도 반응이 없자 다크는 또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카렐의 말로는 지금은 쓸 수 없다고 했으니 힘을 되찾으면 쓸 수 있다는 말. 그렇다면 이것도 기를 이용 해서 다루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 당연히 사용 방법은 뻔했다.
다크는 기를 반지 쪽으로 뿜어 넣으며 외쳤다.
“물!”
그와 동시에 반지에서 물이 왕창 뿜어 나오더니 포도주잔을 꽉 채우고 넘쳐서 옷을 다 버리고 말았다. 여태껏 소녀의 행동을 보고 반쯤 돌아 버린 게 아닌가하고 생각하던 세린이 갑자기 반지에서 물이 쏟아지자 경악해서 거의 굳어 버렸다. 멀찌감치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실바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너무 과했나? 꿀꺽, 어쨌든 휴대용 물통이군.”
흘러넘친 물이 옷을 적시든 말든 다크는 잔에 든 물을 전부 마셨고, 그걸 세린이 보면서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어머나, 갑자기 웬 물이……. 치마가 다 젖었네. 감기 드시겠어요. 빨리 돌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