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22화 – 무리한 승부수
무리한 승부수
“크허억!”
무심결에 다크는 땀에 흠뻑 젖어 있는 자신의 목을 만졌다. 멋지게 목이 잘리며 튕겨 나간 머리가 땅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는 그 느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라 죽였지만 잘린 머리통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특별했다. 붕 날면서 천천히 쓰러지는 자신의 육체가 보이고, 뒹굴 뒹굴 구르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땅바닥을 보는 것도, 또 딱딱한 땅바닥이 자신의 얼굴 여기저기에 닿는 느낌도……. 두 번 다시 당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주스나 좀 다오.”
“예, 주인님.”
세린이 가져오는 주스를 바라보며 다크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상태로는 승부는 뻔했다. 매일 몇 컵은 될 것 같은 땀을 흘려 대니 체력이 온전할 리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승리는 불가능했다. 잠을 안 자는 한이 있더라도 며칠 수련을 해서 그놈을 죽이든지, 아니면 포기하고 놈의 노예가 되든지.
“아예 포기해 버릴까……. 너무 힘들군.”
힘없이 말하는 주인을 세린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름답지만 생긴 것에 안 어울리게 매우 사납고 자신감 넘치는 주인이었는데,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변하게 하는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세린.”
“예?”
“일주일 정도 수련할 만한 장소를 토지에르에게 물어봐라. 위가 뚫려 있어 햇빛과 달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곳이어야 해. 그리고 사방이 뻥 뚫려 있지만 위험은 없 어야 하고. 일주일간 나는 완전히 잠을 자게 될 거야. 그동안 내가 충분히 안전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 물어봐라. 지금 가 보거라.”
“예, 주인님.”
세린이 달려가고 난 후 그녀는 작고 예쁜 반지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공짜는 받는 게 아니었는데…….”
“여긴가?”
다크는 토지에르가 안내해 준 왕궁의 꼭대기에 있는 방어탑 위에 서 있었다. 이곳은 적의 동정을 살피고 또 공격하도록 되어 있기에 전망은 그만이었다.
“그래, 여기 말고는 네가 말한 모든 조건에 충족되는 곳은 없어. 여기는 성에서 제일 높은 곳이야. 좀 좁아서 그렇지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또 사방 에 병사들이 있으니 안전하고, 원한다면 바로 밑에 그래듀에이트 열 명을 배치해 두지.”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실바르만 밑에 배치해 둬. 사람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이상하니까 말이야. 일주일이야. 일주일 동안만 보호를 부탁해.”
“그 정도야 어려운 게 아니지.”
“몸은 괜찮아? 갈비뼈가 두어 대 부러졌을 텐데…….
편의를 잘 봐주자 어제의 행동에 약간 미안해진 다크가 쑥스러운 듯 물었지만 토지에르는 그녀의 사과를 간단히 받아넘겼다.
“흐흐…, 그 정도도 치료 못 한다면 궁정 마도사는 때려 치워야지. 수련 잘하게나.”
토지에르가 내려가고 난 다음 다크는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태양이 조금 떠올라 제법 더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곧 가을이지만 아직도 한낮에는 매우 더웠다. “내 선택이 옳았기를…….”
다크는 중얼거리면서 탑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가 시도하려는 것은 마교의 정통 심법. 그것도 최고 속성으로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마교에 몸담은 초심자들에게 가르치는 천마구령심법(穿魔究逞心法)이었다. 속성이지만 주화입마의 위험성이 최고로 높았고, 잘못하면 마성이 머리 속에 침투해 마인이 될 가능 성 또한 지극히 높았다. 하지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다크에게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개자식, 두고 보자.”
서서히 내공을 역으로 돌리자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심법을 계속하면 통증은 곧 사라진다. 통증이 매우 강하다면 누가 이 심법을 쓰면서 주화입마에 걸릴 것인가? 통증은 오히려 잡념을 없애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데……. 문제는 조금 더 있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신이 노곤해지면서 잡념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다. 거기서 아차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크는 여기에다가 북명신공까지 함께 혼합할 생각이었다. 태양의 막강한 양기(陽氣)와 달의 강력한 음기(陰氣), 또 저녁 무렵에 태양은 지고 달이 떠오르기 전 가 장 강한 대우주의 기운, 그리고 사방에 퍼져 있는 대자연의 기운까지 몽땅 흡수해서 몸이 박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맹렬한 속도로 내공이 역전하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크라레스 왕국은 스바시에 왕국을 평정한 후 비약적으로 국토 면적이 증가했다. 이로 인해 편의상 과거 크라레스 왕국의 땅은 크라레스 지구(地區)로, 스바시에 왕국 쪽은 스바시에 지구(地區)로 불렀다. 현재 스바시에 지구의 총독으로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 콜렌 기사단의 절반과 유령 기사단의 절반을 거느리고 파견 되어 있었다.
또 이번에 들어온 고철 타이탄들을 이용하여 차세대 신형 타이탄인 테세우스급을 생산 중이었다. 테세우스급은 카프록시아의 엑스시온을 이용하였기에 출력은 카프록시아와 동급이었지만, 크기를 조금 더 작게 만들었기에 그 기동성은 카프록시아보다 뛰어났다.
왜 잘 만들어졌다고 소문이 나 있는 카프록시아를 포기하고 새로이 테세우스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카프록시아는 너무 잘 알려졌기에 드러내 놓고 쓸 수 없지만, 새로운 타이탄을 만들면껍데기만ᅳ배후가 들통 날 우려가 현저히 감소하기 때문이다.
사용 목적이 그런 만큼 테세우스는 생산되는 족족 유령 기사단으로 보내질 예정이었고, 그에 준하는 양의 저급 타이탄을 유령 기사단에서 콜렌 기사단으로 보내도 록 되어 있었다. 그 많은 타이탄을 노획했는데도 타이탄 수가 늘지 않았다면 말이 안 되니 말이다.
그 때문에 타이탄 생산의 관리 감독과 또 카프록시아의 엑스시온 설계도를 가지고 만드느라 정신없는 토지에르를 황제가 급히 부른 건 다크가 운공조식에 들어간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폐하?”
황제의 주변에는 열두 명의 기사들이 쭉 서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유령 기사단 소속의 노장들이었다. 황제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토지에르가 들어오 자 불안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이 기운을 느끼겠소? 아니, 당연히 느끼고 있겠지?”
“어떤 기운 말씀이옵니까?”
“황궁의 위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강대하고 사악한 미지의 기운을 못 느낀다는 말이오? 이미 사람을 보내 봤는데, 실바르 경이 그대의 명이라고 아무도 못 올라 가게 막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대를 불렀소.”
“아… 예, 폐하. 다크 크라이드 남작이 수련하는 것이옵니다. 한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니까 4일 남았사옵니다.”
“도대체 무슨 수련을 하는데 저렇게 무지막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말이오? 또 이런 식이라면 타국의 첩자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모를 수가 있나? 처음 에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더니, 지금에 이르러서 이 지독한 기운은 마치, 마치…, 마신(魔神)이라도 불러낸 것 같은데 말이오.”
“……”
“경은 마법을 쓰든지 뭘 하든지 해서 저놈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으시오. 코린트에서 이걸 가지고 시비를 걸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예, 폐하.”
토지에르가 부랴부랴 탑 꼭대기로 올라갔을 때 다크는 아직도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공중으로 거의 30센티미터는 떠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공포스러운, 무지막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서둘러 마법진을 그려 그놈의 기운이 밖으로 새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마법진을 다 완성시킨 그는 나가려다가 말고,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는 그녀 를 다시 한 번 힐끗 쳐다봤다.
자신이 알고, 또 배운 것은 마법뿐이었다. 사람의 몸을 매개체로 하여 주위의 마나를 다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마법이다. 하지만 마법과 마나의 운용에 있어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게 있다면, 육체 단련을 통해 마나를 몸속에 쌓아 인간 이상의 속도와 힘을 뿜어내는 무술(武術)이었다. 무술을 계속 수련하여 엄 청난 양의 마나를 몸에 쌓으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토지에르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공작을 보며 느꼈던 그 힘을 이제는 눈앞의 이 소녀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몸을 우주에 비유하는 자들도 간 혹 있지만, 이 소녀를 볼 때마다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무한한 힘을 깨닫게 되었다. 마법사로서는 가질 수 없는 강인한 육체와 호전성(好戰性), 또 자신의 육체를 다 스리고 보완해 나가는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기법.
마법은 백마법, 흑마법, 정령 마법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백마법이라면 그 수련 방법은 거의 정해지게 된다. 주문 자체가 변할 수 없기에 수련이란 것도 자신 의 집중력이나 기억력 따위를 향상시키는 여러 수련들로 이루어진다. 또 나중에는 마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나름대로 마나 통제의 기법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 틀에 짜 맞춘, 그러니까 약간 간소화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무술은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렇게 가느다란 팔다리로 저런 엄청난 기운을 뿜어낸단 말인가? 또 저렇게 앉아서 수련하는 사람은 토지에르가 봤을 때 그 녀가 최초였다. 모름지기 무사란 각자 선호하는 무기를 들고 뼈 빠지게 수련하는 길이 최고가 아니었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다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욱 거세지면서 그 기운에 밀려 안 그래도 조금씩 찢어지고 있던 옷이 산산조각으로 찢겨 나갔 다. 그러자 그 안에서 도저히 3일 동안 햇볕 아래 노출되었다고 생각하기 힘든 하얀 육체가 드러났다. 보통 소녀들을 잡아다가 햇볕 아래 저런 자세로 놔둔다면 피 부가 반쯤 익어 버릴 게 뻔한데……. 거기다가 지금은 늦여름이 아니던가? 조금만 있으면 가을이긴 했지만 아직도 한낮에는 매우 더웠다. 그런데도 노출되어 있던 손, 얼굴의 피부색과 지금 드러난 하얀 속살과 색깔이 같다면 여태껏 받은 햇볕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설마, 그걸 흡수했을까?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햇볕을 흡수하는 마법진만도 꽤나 고난도의 마법진인데, 한낱 인간의 몸으로…….”
더 이상 생각하기도 머리 아프기에 토지에르는 아래로 내려갔다. 안 그래도 할 일이 태산처럼 많은데, 여기서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내려가는 길에 실바르에게 다 크의 옷을 한 벌 준비해 두라고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