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24화 – 폭주

폭주

“대단히 화려한 축제군.”

스바시에 지구(地區) 총독,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부관이 공손하게 답했다.

“예, 총독 전하. 프로트시의 가을맞이 축제는 매우 화려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이 가을맞이 축제는 스바시에 왕국 남단에 위치한 프로트 항구에서 매년 벌어지는 매우 성대한 행사였다. 올해는 전쟁으로 인해 중단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지만 전쟁은 매우 빨리 끝났고, 크라레스 제국이 경이적인 속도로 점령지를 안정시켰기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축제는 개최될 수 있었다.

공작은 화려한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를 바라보며 역시 스바시에 지구(地區)가 크라레스 지구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 화려한 행 렬, 넘치는 사람, 수많은 상품들을 쌓아 둔 상점들이 있었고, 거리의 시민들에게는 그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었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며 전쟁 준비만을 위해 악 착같이 살아온 크라레스와는 천지 차이가 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공작의 눈에 꽤 이채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 매우 아름답군.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한 화려한 수레에 아름다운 처녀라. 꽤 권세 있는 가문의 자식인가? 으응? 하지만 웬만한 가문들의 여인들은 몽땅 싹쓸 이해서 노예 시장으로 보낸 걸로 아는데……?”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부관이 상세하게 설명했다.

“권세 있던 가문의 여식이 맞사옵니다. 저 소녀는 며칠 전에 경매에 나갔던 아이죠. 그걸 이번에 새로 당선된 시장(市長)이 구입했사옵니다.”

“흐음, 새로 당선된 놈이 하는 짓거리가 여색에 대한 탐닉이라니……. 이 축제 끝나고 그 녀석을 처형해랏!”

부관이 황급히 공작을 만류했다.

“총독 전하, 그게 아니옵니다. 저 소녀는 제물(祭物)이지요. 이 축제가 끝난 후 아마 살아남기 힘들 것이옵니다.”

“제물?”

“예, 전하. 예로부터 프로트항은 치레아나 아르곤과 무역이 성행해 온 항구 도시이옵니다. 하지만 가을부터 바다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해서, 겨울에는 파고가 매우 높아 항해에 문제가 많지요. 그래서 프로트에서는 가을맞이 축제를 열어 제물을 장만하여 해룡에게 바치고, 대신 안전한 항해를 비는 것이옵니다.” “참내, 도마뱀에게 제물를 바친다고 태풍이 불던 바다가 잠잠해진다던가?”

“예, 놀랍게도 제물을 바친 해는 꽤 날씨가 좋다고 하옵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크라세섬에 살고 있는 실버 드래곤 쥬브로에타가 힘을 써 주는 모양이옵 니다.”

“실버 드래곤 쥬브로에타?”

“예, 여기서 동남쪽으로 120킬로미터 정도 가면 있는 무인도인데, 평상시에는 출입 금지 구역이지요. 1년에 단 한 번 제물을 실은 배가 그 섬에 가서 예쁘게 단장 한 처녀를 거기에 놓고 옵니다. 가을맞이 축제의 정점이 바로 그 제물을 실은 배를 배웅하는 것이지요.”

“쥬브로에타는 몇 년 정도 된 드래곤인가?”

“예, 자세히는 모르지만 거의 3천 년 정도 살아온 드래곤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실버 드래곤이 3천 년이나 묵었으면 날씨 정도 제어하는 것은 힘든 일도 아니겠지. 세계에서 제일 거대하고 강력한 드래곤은 역시 레드보다는 바다의 제왕, 실버 드래곤이니까 말이야. 실버 드래곤의 힘을 겨우 노예 하나로 1년 동안 얻을 수 있다면 매우 싼 가격이군.”

“그렇습죠.”

두 사람의 말투에 약간은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가 가미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버 드래곤의 파워를 노예 한 명, 즉 비싸 봐야 150골드 남짓한 가격을 주고 1년간 얻어 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실속 있는 것이었다. 날씨를 조절하는 마법은 매 우상위급의 마법이었고, 또 날씨를 적절하게 조절하여 상선의 항해에 유리하게 만들려면 최소 6사이클 이상의 마법사가 붙어 앉아 1년 동안 꼬박 날씨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또 바다처럼 매우 넓은 지역에 그 마력을 미치게 하려면 이건 6사이클급 가지고는 턱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아무리 노예라고 하지만 인간을 뇌물로 바쳐야 한다는 게 크라레스 태생인 그들에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계 최강의 생명체라고 해도 실체는 도마뱀 같은 게 아닌가? 그런 도마뱀에게 여인을 향락의 미끼로 제공해야만 하다니…….

크라레스는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30년 전의 전쟁 이후 농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노예들을 없애 왔고, 또 농노들까지도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왔다. 노 예가 없어진다는 말은 세금을 내야 하는 시민들이 증가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또 농노들이 해방된다는 말은 곧 국유지가 감소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국유지가 넓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황제의 힘이 거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속은 달랐다. 그 중간에 끼여 있는 기생충 같은 귀족들의 힘만 비대해질 뿐이기 때 문이다. 황제와 농노들의 사이에서, 농노들을 쥐어짜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기생충들 말이다.

그렇기에 크라레스는 귀족에게 하사했던 영지들을 단계적으로 회수하고, 농노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주어 해방시킴으로써 세입을 늘릴 수 있었다. 크라레스의 세금은 평균 60퍼센트 정도였지만ᅳ물론 흉작일 때는 세금을 낮춰 줘야 하니까그 세금의 일정량을 귀족들이 삼키는 일 없이 몽땅 다 국가의 수입으로 들어왔기

에 그나마 크라레스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노예들이 거의 없는대신 수인족은 계속 노예로 썼다―나라에서 살다 보니, 부관이든 공작이든 인간이라면 ‘고용인’의 개념은 있었지만, 인간인 ‘노 예’를 완전히 ‘가축처럼 보는 것은 힘들었다. 특히나 공작의 경우 오랫동안 외국을 떠돌며 여행을 해 왔기에 노예라는 개념이 익숙지 않은지도 몰랐다.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변방에 가면 오랜만에 만난 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이 반가울 뿐이지, 그 상대의 출신 성분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쪽에서 기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재빨리 공작에게 예를 올렸다.

“급히 황궁으로 귀환하시라는 폐하의 칙명이옵니다, 전하.”

“무슨 일인가?”

“잘 모르겠사옵니다. 매우 급한 일이라고만 들었사옵니다.”

“알겠다.”

공작은 안내하는 기사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성질 같아서는 최고 속도로 달리고 싶지만, 이런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인다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를 타국의 첩자들에게 발견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성질을 죽이고 기사의 뒤를 따라 이동용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폐하?”

공작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이리로 오기 전 보았던 광경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도의 일부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아직도 곳곳에서 부상 자들을 실어 내는 장면, 또 사방에 거대한 타이탄의 발자국들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면 타이탄까지 동원해서 시가전(市街戰)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적의 기습이라도?”

“아닐세.”

“예? 그렇다면?”

황제는 한숨을 내쉬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 다크 크라이드 남작이 미쳐 버렸어.”

“에? 미치다니 무슨 말씀?”

“간신히 그 아비규환에서 탈출한 실바르의 말에 따르면 시내를 구경하던 중에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그걸 보더니 갑자기 미쳐 버렸다고 하더군. 검을 빼들고 있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고, 나중에 그녀를 말리기 위해 출동한 병사들까지……. 그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급히 타이탄 세 대를 출동시켰는데 타이탄들 과 싸우면서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쳤어.”

타이탄들과 싸우다가 도망쳤다는 말에 공작의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가…….”

“그 때문에 자네를 불렀네. 부하들을 많이 줄 수는 없어. 두어 명 데리고 가서 그녀를 사로잡도록! 만약 생포가 불가능하면 죽여도 상관없네. 대신 청기사는 꼭 회 수해 오도록!”

“세상에, 그녀가 청기사까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가지고는 있지만 쓰지는 않았어. 사실 그녀는 타이탄을 다룰 줄 모르니까 청기사를 불러낼 이유도 없겠지. 어쩌면 타이탄을 소유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거 야. 하지만 보통 실력이 아닌 만큼 유령 기사단에서 로메로를 가져가게. 그리고 자네는 만일을 대비해서 청기사를 가져가는 게 좋을 거야. 그녀의 실력은 엄청나다 네. 어쩌면 마스터급일지도…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마스터급이라고요? 하기야 타이탄과 맨몸으로 싸웠다면 그것 외에는 답이 없지만……. 그때 그녀와 싸웠던 인물들의 증언을 들어 보고 떠나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 대신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처치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공작은 유령 기사단 소속의 그래듀에이트 두 명과 5사이클급 마법사 한 명을 데리고 추격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가 도망친 방향은 동남쪽, 그러니까 그 길로 쭉 갈 수만 있다면 아마도 치레아가 있을 것이고, 그다음은 아르곤 제국에 도착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북쪽의 코린트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리로 도망쳤다면 추격 작업이 매우 곤란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말을 타고 갈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할 수 없군. 이보게, 아베인!”

뒤쪽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경무장을 한 중년 사내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전하.”

“연락해서 와이번 두 마리만 지원해 달라고 해. 그리고 말을 가지고 돌아갈 사람 한 명도 데리고 오라고 해. 알겠나?”

“예, 전하.”

아베인이라 불린 마법사가 통신을 하는 동안 공작은 주위를 쭉 살폈다. 그러다가 나무 아래쪽을 가리키면서 따라온 기사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좀 쉬다가 갔군.”

공작의 옆에 서 있던 바스타드 소드와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 한 명이 곧장 대답했다.

“여태까지의 발자국으로 봤을 때, 대단한 속도임에 틀림없습니다. 발자국 간격이 거의 5미터를 넘어서고 있사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우리가 쫓는 게 평범한 소녀가 아니니까 말이지. 그녀를 발견하면 즉시 자네들은 타이탄을 불러야 할 거야. 자네들의 실력으로는 턱도 없을 정 도로 강한 상대니까…….”

“그 정도나…….?”

부하들의 반응에 공작은 갑자기 타이탄을 타고 다크와 싸웠다는 기사의 증언이 떠올랐다.

“그녀가 가진 검에서 엄청난 불덩어리들이 튀어 나왔사옵니다. 그것도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나……. 하지만 우리들은 방패로 그걸 막아 냈사옵니다. 방패의 파손이 심했지만 우리는 그녀를 포위했지요.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더욱 사악하고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마나를 더욱 집중하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그녀가 힘을 모으지 못하게 재빨리 검으로 공격했지만, 그걸 피하면서 그녀는 계속 우리들을 공격했사옵니다. 저희들은 그때 공격은커녕 방어하 기에도 벅찼사옵니다. 그녀는 한동안 공격을 해 대다가 나중에는 지쳤는지 도망쳐 버렸사옵니다. 저희들은 타이탄의 손상 정도가 꽤 심했고, 또 뒤쫓는다 해도 그녀 를 죽일 자신이 없었기에 추격을 포기했사옵니다. 타이탄의 상처를 보시겠사옵니까?”

그 기사가 불러 낸 루시퍼의 방패는 거의 너덜너덜했고, 방패로 가리기 힘든 하체 부위의 손상도 꽤 심했다.

“이게 순전히 검만 가지고 만든 상처인가?”

“예, 전하. 검에서 나온 불덩어리들의 위력은 대단했사옵니다. 방패가 푹푹 패였으니까 말이지요. 도대체 그게 무엇이옵니까? 엄청난 위력에 매우 사악한 기운을 뿜고 있던데…, 설마, 그게 검강이옵니까?”

기사의 물음에 공작은 직접 검을 뽑아 들고는 강기를 뿜어냈다.

“그 모양이 이렇던가?”

검강의 목표는 타이탄의 발이었다. 두 상처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였다. 검강이 날아가는 것을 본 기사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슷하긴 하옵니다만 매우 사악한 기운을 뿜고 있다는 게 달랐사옵니다. 그리고 한 개가 아니고 수십 개를 한꺼번에 날렸사옵니다.”

공작은 타이탄의 발에 패여 있는 자국을 비교해 보았다.

“강기 종류가 맞는 모양이군.”

그때 공작은 한 번에 수십 개의 강기 다발이라는 기사의 증언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었다. 사실 자신도 그 정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억을 정리하며 공작은 부하들에게 확정적으로 말했다.

“거의 나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 매우 조심해야만 한다. 알겠나?”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베인!”

“예, 전하.”

“우리는 먼저 출발하겠다. 자네는 말을 인계하고 와이번에 탑승한 후 저쪽에 보이는 산꼭대기에서 만나기로 하지.”

“예, 전하.”

공작은 말에서 필요한 짐들을 꺼내 등에 지면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 정도 실력자와 만났을 때 갑옷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모두들 갑옷을 벗어 몸을 가볍게 하게.”

공작 일행은 무거운 갑옷이나 기타 방호구들을 다 벗어 두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각자 필요한 짐만을 가지고 발자국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대는 엄청난 실 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의 흔적을 지우거나 최소화할 생각조차 않고 있었기에 추격 작업은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상대의 도주 속도가 매우 빠른 만큼 그 또한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