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25화 – 기억 상실

기억 상실

소녀는 한참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크라레스의 수도를 휘저어 놓고 도망치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물론 도중에 개울물을 마시고, 토끼 따위를 잡아서 먹기도 했기에 그녀는 매우 생생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내가 지금 왜 도망치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약간씩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은 묵향이었고, 위대한 마교의 전사였다. 묵향이란 이름도 처음에는 2044호로 불리다가 동료 들이 언제나 묵의(墨衣)를 즐겨 입는 그에게 애칭으로 붙인 것이었는데, 그게 어느덧 자신의 이름이 되어 있었다.

“맞아, 내 이름은 묵향이었지. 그리고 나는 살수(殺手)였어. 그렇다면 나는 지금 목표물을 죽이고 탈출하던 중이었나??

한참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며칠 전에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괴물들이 셋이나 튀어나와 싸우다가, 공력이 점차 고갈되는 것을 느끼고 탈출하지 않 았던가? 무려 한 시진(2시간) 동안 맹공격을 퍼부었었는데, 그 괴물들은 끄떡도 없었다. 도대체 그런 괴물들을 쓰는 무림의 방파(派)가 있었던가?

‘참! 그때 죽인 놈들의 모습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아주 수상했어. 푸른 눈, 갈색 눈, 노랑머리, 빨강머리, 갈색! 에이, 골치 아파! 그놈들은 저 멀리 서쪽에서 산다 는 색목인(色目人)들일까? 그도 아니면…. 흑! 맞아, 그러고 보니 아무 생각 없이 그 괴물들과 싸우는 데 본교의 무공을 사용하고 말았어. 큰일이구나. 흔적이 남 았겠는데……. 돌아가서 아예 끝장을 내 버려? 하지만 그렇게 해 봐야 흔적만 더욱 남길 뿐이지. 잘못하면 아무리 내가 1급 살수라도 놈들에게 잡힐지도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교주가 그 괴물들을 죽이라고 했었나? 그런 기억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놈들하고는 왜 싸웠지? 그냥 갑자기 화가 나고 그래서, 일순간 내 정신이 아니 었어. 살수의 생명은 냉정, 침착, 정확인데 말이야. 어?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디쯤이야! 대산으로 돌아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아무 곳이나 찾아 들어가서 여기가 어딘지나 알아보고 행동해야겠군.”

그녀는 한참 횡설수설하다가 휙 몸을 날렸다. 이제부터 그녀의 움직임은 전문적인 살수의 수업을 받은 자의 행동이었다. 거의 흔적조차 없는..

공작 일행은 난감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갑자기 그녀의 흔적이 없어진 것이다. 흔적이 끊어진 곳을 기준으로 주위 100미터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 도 흔적은 없었다.

“난감하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공작 전하.”

“일단 아베인과 합류하자. 마법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마시고 제가 그를 데려오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전하께서는 여기서 쉬시는 것이…….”

“상대가 약하다면 그게 가능하겠지만, 잘못하면 역으로 놈의 공격에 각개격파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모두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가시지요.”

그들은 아베인이 기다리는 장소로 갔고, 벌써부터 와이번을 타고 도착해 있던 그를 데리고 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지독하게 험한 숲 속을 달려가야 했기에 가장 무공이 높은 공작이 아베인을 안고 뛰었다. 그 덕분에 아베인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풀이 짙게 우거진 아래쪽으로 달려갈 수 없었기 에 공작 일행은 나뭇가지를 밟고 도약하며 전진했다. 안겨 있는 아베인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눈을 꽉 감고 제발 빨리 그 장소에 도착하기 만 빌었다.

“이게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다. 여기서 잠시 서 있었어. 두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힌 걸 보면…. 어쩌면 여기서 숨이라도 좀 고른 후에 다시 출발했는지도 모르 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흔적이 끊겼다는 데 있다. 상대를 추격할 방법이 있나?”

“일단 대지의 기억에 물어보겠사옵니다.”

아베인이 주문을 중얼거리고 나자 날씬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생긴 것과는 도저히 안 어울리는 롱 소드를 허리에 찼는데, 검집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서서는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 입을 우물거리기도 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나?”

“예. 대지의 기억에는 어떤 영상만이 기억될 뿐, 소리는 기억되지 않사옵니다. 대신 독순술(讀脣術)을 이용해 상대의 말을 짐작할 수 있는데……. 소신도 독순술 을 좀 배웠사오나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만,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옵니다.”

“참, 토지에르에게 듣기로 그녀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 했으니 그쪽 말을 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난감하군. 이럴 줄 알았으면 견인족이라도 키우는 건데……. 이때 아베인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효과적인 다른 간단한 마법을 외우고 있었다.

“뷰 마나 포스!”

뷰 마나 포스를 유지한 상태에서 그는 더욱 시야를 넓히기 위해 비행 마법까지 외웠다. 하나의 마법을 유지한 상태에서 또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고난도 의 수법이다. 하지만 그는 5사이클까지 익혀 마법사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기에 그렇게 힘든 일만은 아니었다. 그의 몸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고, 곧이어 거의 지 상 20미터 상공까지 올라갔을 때 그가 외쳤다.

“저기에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마나입니다.”

아베인이 내려오자마자 공작은 그의 몸을 끌어 잡고 몸을 날렸다.

아무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날씬한 소녀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여태껏 기척을 숨기면서 이동해 왔지만 생리적인 욕구를 슬쩍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투 덜거리면서 나무 앞에 서서는 치마를 내렸고, 소변을 보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거시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걸 잡아야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아 니 거의 본능적인 일처리 순서였다. 그런데 그게 황당하게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변이 있나?”

여태껏 눈길도 주지 않았기에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선을 밑으로 내리니 자신의 몸과 옷차림이 매우 이상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거시기 대 신…….

“꺄아아아아아악!”

공작 일행이 도착했을 때 다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검을 뽑아 들고 사방을 닥치는 대로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사실 다크가 그때 완전히 미쳐 버렸기에 자신의 힘 을 감추지 않았고, 그 덕분에 아베인의 마법에 포착된 것이었다. 어쨌든 공작 일행이 보기에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충혈된 눈은 완전히 광기(狂氣)로 번들거 리고 있었다.

한참 목적 없이 아무거나 때려 부수던 다크의 광기 어린 눈과 슬쩍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공작 일행의 눈이 어느 순간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다크 가 공작 일행에게 뛰어 들었고,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 챈 공작 또한 검을 뽑아 들고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둘이 무시무시한 대결을 벌이고 있 을 때 남은 두 기사는 자신의 타이탄들을 불러냈다.

어쨌든 목표물은 찾았고, 이제 해치우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날 죽여 주슈’하고 그냥 목을 바치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그 작업은 매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쿠엑!”

무시무시한 붉은 강기의 회오리에 밀려 나무에 처박힌 공작이 피를 토해 냈다. 다크는 피를 토하는 공작에게 좀 더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검을 들고 달려들 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행(?)은 채 이루어지지 못하고 타이탄들에게 막혔다. 타이탄 둘이 소녀 하나를 쥐 잡듯 검으로 찍어 대기 시작했고, 날렵한 소녀의 몸놀림 덕 분에 땅바닥에 구멍만 뚫렸다.

소녀는 간혹 피하다가 한 번씩 엄청난 붉은색이 나는 뭔가를 뿜어냈는데, 그 덕분에 방패가 푹푹 파이는 걸 보면 보통 위력은 아니었다. 그들은 더욱 방어에 치중 하며 소녀를 때려잡으려 들었고, 곧이어 몸을 추스른 공작 또한 검을 휘둘러 대며 그 격투에 가세했다.

지독하게 강한 상대였기에 고작 5사이클급 마법사인 아베인은 끼어들 엄두도 못 내고 멀찌감치 뒤로 물러서 버렸다. 3대 1의 대결이었지만 네 시간 정도 지나자 그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녀는 힘이 빠져서 헥헥 댔고, 남은 셋은 아직까지는 끄떡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이탄을 동원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남자 셋이 먼저 골로 갔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들은 두 대나 되는 타이탄을 동원한 매우 치사한 방법으로 소녀를 압박해 들어갔고, 타이탄들은 역시 비싼 값을 했다.

캉!

거대한 타이탄의 장검에 부딪쳐 소녀의 검은 박살 나 버렸다. 그리고 소녀는 한참 날아가 굵직한 나무에 처박히면서 정신을 잃었다.

“휴우, 정말 지독하게 강하군. 우웨엑!”

피를 토하는 공작에게 아베인은 재빨리 다가가서 치료 마법을 구사했다. 공작은 잠시 응급 치료를 받은 후 아베인에게 포션을 받아서 몇 모금 마셨다. 내상을 치료 하는 데는 포션을 아예 마셔 버리는 편이 빠르기 때문이었다.

입가에 피를 흘리며 쭉 뻗어 있는 피투성이 소녀에게 기사 한 명이 다가가 검을 높이 들어 목을 베려는 찰나, 공작이 그를 제지했다.

“그만 둬!”

“예? 지금 죽여 버리심이?”

“이 팔찌를 채워라. 이건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으니,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는 못하겠지.”

기사 둘은 곧 공작에게서 팔찌를 받아 그녀에게 채우고, 배낭에서 끈을 꺼내 그녀를 꽁꽁 묶었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꽉 묶고 있을 때 숲 한구석에서 웬 젊은이 가 걸어 나왔다.

매우 아름답게 생긴 데다가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기에, 몸매의 굴곡이 조금만 있었다면 여자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는 야유회라도 나가는 듯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런 산골짜기에서 저런 인물이 튀어 나왔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공작은 상대를 힐끗 쳐다보고 표정이 약간 굳어졌지만, 그래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아, 약간의 불상사가 벌어져서 말이죠. 소란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마스터의 경지에까지 들어간 공작이 저자세로 나가며 상대를 대하자 두 명의 기사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공작의 눈치를 보며 그냥 하던 일을 계속했다.

“보통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이렇게 주위가 황폐하게 된 걸 보면..

그러면서 그 젊은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거의 반경 250미터 이상이 묵사발이 나 있었다.

“마법이라도 썼습니까? 아니군, 거대한 발자국들이 흩어져 있는 걸 보니 타이탄을 동원했군요.”

“죄송합니다. 휴식에 방해가 되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저 소녀를 여기서 간신히 따라잡았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소녀 하나를 잡기 위해 이 난리를 피웠다는 말입니까?”

“예.”

“흐음…….”

그 남자는 기절해 있는 소녀를 매우 유심히 바라보았고, 몇 마디 중얼거리는 걸 보면 마법도 쓰는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아니군요.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엄청난 마나를……”

그러면서 그는 공작을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도 엄청나군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엄청나다니, 우연인가요?”

그 말에 공작은 속으로 찔끔해서 재빨리 대답했다.

“우연입니다. 위대한 분께서 여기 계시는지 알지 못했기에 여기서 일을 벌인 겁니다. 만약 알았다면 딴 곳에서…….”

“좋아요. 그렇게 이해하도록 하죠. 그건 그렇고, 저런 몸으로 데려가다가는 아마 돌아가는 도중에 죽을 게 뻔하니 제가 조금 치료를 해 드리죠.”

“그렇게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남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의 3백 년 만에 보는 사람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죠. 약간의 치료 정도는 뭐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 남자는 곧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더니 첫 번째 목표물로 공작을 잡았다. 공작은 자신의 몸으로 날아오는 은은한 광선을 보면서 검의 손잡이를 쥐고 싶어 용을 쓰는 오른팔을 억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여기서 검을 뽑아 봐야 그야말로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에, 공작의 이성이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었 다.

곧 공작은 소녀와의 싸움에서 얻은 내상과 작은 상처들이 깨끗이 치료되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놀라운 수준의 마법이었다. 그 남자는 공작과 그 부하들을 간단 히 치료한 후 마지막으로 소녀를 향해 치료의 광선을 날렸다. 하지만 그 광선은 소녀의 몸을 덮는 순간 소멸되어 버렸다. 젊은이는 약간 놀라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에게 다가가서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소녀의 팔에 채워진 팔찌는 착용자가 마나를 응집하는 것만을 방해하는 것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마나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막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 남 자의 눈길은 소녀의 손목에서 떠나 소녀의 목, 귀로 이동했지만 거기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놀라울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말이지 장식을 안 하는 소녀였다. 마지막으로 그 남자의 눈이 머문 곳은 소녀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 그 반지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흐음……. 저 반지는 이 소녀의 것이 확실한가요?”

“예.”

“그렇다면 이 소녀를 당신들이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아쿠아 룰러는 드래곤과 정령왕과의 약속의 증표. 그것이 사악한 인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은 모든 드래곤의 사명이죠. 심심풀이 삼아 만들었다고는 해도 인간이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힘이니까요.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내가 알았으니 그냥 둘 수는 없군요. 이 소녀를 내가 데려가도 될까요?”

말은 공손했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죽이고서라도 데려갈 것이 뻔하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공작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공작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위대한 분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그 남자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소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을 때 공작은 다급히 말했다.

“그 팔찌는 저희들 것이니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가져가십시오.”

공작의 부하 한 명이 재빨리 다가가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팔찌를 회수했다. 모든 일이 끝나자 그 남자는 소녀를 안고,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수 풀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 공작 전하. 저 소녀가 미쳤다고 말해 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는지…….”

부하의 말에 공작은 빙긋이 웃었다.

“꼴에 드래곤이니 어떻게 하겠지. 아마 그걸 눈치 챈 후에는 고생 좀 해야 할걸? 하하하, 제기랄!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