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26화 – 드래곤 레어 (6권 끝)
드래곤 레어
“으으응, 여기는?”
“오, 이제 정신이 드시는 모양이군요.”
“아으윽!”
소녀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골이 빠개지는 것 같이 아팠기 때문이다. “저런, 저런…….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치료를 했지만, 아직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해요.” 그제야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웬 아름답게 생긴 사람ᅳ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니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그래! 맞아, 나는 왕궁에 있었는데? 세린은 어디 있죠?”
“세린? 잘 모르겠군요. 세린이 누구죠?”
“세린? 세린…,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누군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뭔가 생각해 내려 하자 머리가 더욱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소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방금 왕궁이라고 했는데 왕족이신가요?”
“아니요. 왕족은 아니고 그냥 거기서 살아요. 아니, 살았던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소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어 이게 방금 자면서 꿈을 꾼 건지, 아니면 이전에 자신이 그런 일을 겪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관성 없이 완 전히 헝클어져서 생각만 해도 혼란스러웠고, 머리도 지독하게 아프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겁니다. 조금 더 주무세요.”
이불을 다시 소녀의 목 위까지 덮어 다독거려 준 다음, 그는 잠의 요정 더스트맨(Dustman)을 불러내 그녀를 잠들게 만들었다. 그녀가 잠든 후 그는 더스트맨 시시 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돌려보냈다. 정령과는 달리 요정은 주종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요정은 매우 자유롭게 행동하고 얽매이기를 싫어하기에 이렇게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종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정이 친구가 되었다고 해도 안심하고 사귀기 힘들었다. 요정은 매우 장난기가 많아 그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사랑의 요정 님 프(Nymph)의 경우를 보면 원수끼리 사랑하게도 만들고, 삼각관계, 사각관계를 만들어 놓고 키득거리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잠의 요정 더스트맨도 마찬 가지다. 꼭 지금 자고 싶을 때는 잠이 안 오다가, 정작 깨 있어야 할 때는 잠이 쏟아지는 것도 이놈들의 악취미 때문인 것이다.
어쨌든 그녀가 잠들자 드래곤은 아쿠아 룰러를 불러냈다. 원래 아쿠아 룰러를 만든 자가 드래곤이었기에 그가 부르자 반지의 정령은 곧장 튀어 나왔다. 뿌옇게 형 상을 이루다가 곧이어 귀여운 어린 소녀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정령은 드래곤에게 절을 하고는 방긋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지의 정령은 자신을 불러낸 이 남자와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해 모습은 바 뀌었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은근한 기운은 골드 드래곤의 것이었다. 그것도 웜(3천에서 5천 살 사이)급의 막강한..
“안녕하셨습니까? 아르티어스 님.”
정령의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 아르티어스도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예, 거의 6백 년 만이네요.”
“그렇구나. 그때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지크리트와 함께였지. 인간이었지만 정말 멋진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예, 그분은 제가 섬겨 본 인간들 중에서 손꼽히는 강자셨으니까요. 그리고 마음씨가 참 좋으셨죠. 그 때문에 빨리 돌아가셨지만…..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가 비열한 수법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걸 알고 내가 복수를 했었으니까 말이야.”
“아르티어스 님께서는 옛날에는 인간 세상에 자주 나가신 걸로 아는데 여기는, 레어(용의 둥지)네요?”
정령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인간 세상에는 나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카렐을 섬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카렐이 죽었나?”
“아닙니다. 카렐 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이시죠. 카렐 님은 키아드리아스 님과 함께 계십니다. 카렐 님은 지금도 매우 건강하세요. 카렐 님이 다크 님께 저를 선물하 셨죠. 카렐 님께서는 플레임 스파우터를 더 좋아하시기에 저는 별로 도움이 안 됐거든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설마, 카렐이 인정한 인간이 저렇게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말인가? 강하기는 하지만, 강하다는 것이 다가 아닌데…. 특히나 나이아드는 주인의 심성을 꼼꼼히 체크하기로 유명한 녀석인데, 나이아드는 설마 저 아이와 맹약을 따를 생각인가?”
반지의 정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르실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저렇게 만든 분이 나이아드님이시거든요.”
“뭐?”
“오랜만에 괜찮은 인간을 만났다고 신이 나서는 밤마다 들들 볶더니 저렇게 되어 버렸거든요.”
“설마……. 겨우 그 정도 스트레스 받았다고 미쳐 버린다면, 네 주인이 될 자격 자체가 없잖느냐?”
“아뇨. 제가 만들어진 후 수많은 주인들을 만났지만 인간들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생각해요.”
“설마……. 지크리트보다도 강하다는 말이냐? 그렇게 안 보이는데?”
“예, 지금은 아니죠. 하지만 곧이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이아드 님께 들볶이자 그래듀에이트도 안 되던 상황에서 겨우 7일 만에 마스터의 경지까 지 올랐을 정도니까요.”
아르티어스는 경악했다.
“뭐? 겨우 7일 만에?”
“예, 저도 그런 인간은 처음 봤어요. 그때 너무 빨리 마나를 키운다고 무리를 하더니 저렇게 되었어요. 아마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그렇게 단시간에 마나를 몸에 쌓을 수는 없다. 또 방법도 없고……. 드래곤도 그렇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간 따위가…….”
“하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아르티어스 님. 카렐 님의 말씀으로는 과거에 엄청난 경지까지, 아마도 카렐 님과 대등한 경지까지 올라간 무사였던 모양입니다. 디스 라이크라는 저주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원래 저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그것도 70세 정도의…….”
“놀라운 일이군. 그래, 어쩌면 검사니까 그게 가능했는지도 모르지. 마법사라면 죽었다 깨도 불가능한 일이야. 도대체가 검사란 것들은 우리 드래곤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라니까.”
“예, 이번 주인은 좀 이해하기 힘든 게 많기는 해요. 어쨌든 부작용을 점차 없애 나가면서 잊혀졌던 기억들이 조금씩 단편적으로 되살아났는데, 그 때문에 이번 사 건이 벌어졌죠. 갑자기 자신이 여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완전히 돌아 버렸거든요. 그래서 그녀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까지 제가 기억을 막았어 요. 과거를 생각하면 두통을 일으킨다든지 하면서 말이죠.”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매우 흥미롭게 반응했다.
“호오, 그럼 과거는 완전히 백지 상태라는 건가?”
“예, 하지만 그것도 한 달 정도만요. 한 달만 지나면 부작용을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녀를 아르티어스 님께서 돌봐 주실 수 없을까요?”
“헤헤헤, 뭐 좋지. 오랜만에 보는 인간인데..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저 아이를 어떻게 할까?”
정령은 헤벌쭉 미소 짓는 아르티어스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가 변덕을 부리면 겨우 반지의 정령인 자신의 힘으로 그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 이다.
살며시 눈을 뜬 소녀가 약간 두려운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일어서는 것을 아르티어스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이곳은 레어 안이었 다. 아르티어스의 레어는 드워프들에게 부탁해서 건설했기에 매우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레어의 입구나 통로는 폭 2미터, 높이 4미터로 만들어져 있었고, 통로 를 따라 20미터쯤 들어오면 거대한 지하 공동(地下空洞)이 나타난다.
이 지하 공동은 드래곤인 상태에서 낮잠을 자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지만, 사실 드래곤들도 자신들의 덩치가 너무 크고, 그 때문에 매우 불편한 것을 잘 안다. 그 렇기에 보통은 자그마한 생물로 트랜스포메이션해서 생활한다. 그편이 공간을 훨씬 잘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래곤 같은 매우 고등한 정신력을 가진 생물은 다른 생물로 트랜스포메이션했다고 해도 그 적응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실 인간이나 엘프 등 일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은 모두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신의 육체가 엄청난 변화를 겪었을 때 그걸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적응에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시전자의 정신적 능력에 따라 그 차이는 매우 크긴 하지만…..
하지만 드래곤의 경우 최강의 정신력을 가진 생명체이기에 새로운 몸으로 바꿨을 때 그 적응에는 며칠 정도면 충분하다. 또 그게 이미 전에 한 번 통제를 해봤던 생물이라면 그 적응 시간은 거의 필요 없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드래곤의 정신력은 거의 신에 육박할 정도였고, 기억력은 수년 전에 벌어진 일을 몇 분 전에 있 었던 일처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어쨌든 아르티어스의 레어는 드래곤인 채로 머물 수 있는 거대한 공동에 곁가지로 또 다른 통로가 있고, 그 통로에는 작은 방들이 열 개 정도 연결되어 있다. 그 방 들에는 아르티어스의 마법 서적이나 그가 모아 놓은 보물 등 기타 잡동사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지금 소녀와 아르티어스가 있는 방도 그중의 하나였다. 매우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고풍스럽게 만들어 놓은 방이었고, 방 한쪽 구석에는 마법에 의해 불이 피어오 르는 벽난로가 있어 방 안은 매우 따뜻했다. 그리고 천장에는 매우 밝은 빛을 뿜어내는 원반이 붙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방 전체는 아주 작은 글자라도 읽을 수 있 을 정도로 밝았다.
전에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딴 것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소녀가 이제 좀 나아졌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 보면서 아르티어스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 깨어났군요. 몸은 좀 괜찮아졌나요?”
“예.”
소녀가 몸을 일으키는 걸 슬며시 바라보면서 아르티어스는 약간은 당황하면서, 한편으로는 흥미 있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가 몸을 일으키자 덮고 있던 이불이 아
래로 살짝 벗겨졌고, 아직 여물지 않은 작은 가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옷은 침대 옆에 있습니다. 깨끗한 침대에 그런 더러운 옷을 입힌 채로 눕힐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르티어스는 소녀를 치료한 후 그녀가 입을 옷을 사기 위해 마을까지 왔다 갔다 했던 자신의 노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원래가 드래곤에게는 성(性)이란 게 없었지만, 옷을 입는다든지 뭐 여러 가지 편의상 여자보다는 남자인 쪽이 편했기에 아르티어스는 남자의 모습으로 트랜스포메이션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가지고 있는 옷들도 모두 남자용이었고, 그렇기에 소녀에게 자신의 옷을 입힐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옷의 사이즈가 소녀에게 맞았다면 옷을 사러 가는 수고를 생략하기 위해 아마도 자신의 옷을 입혔을 테지만.
아르티어스는 소녀가 자신의 말을 듣고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당연한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했지만 소녀는 그러지 않았다. 원래 ‘여자 가 나체를 타인에게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행위다’라는 것도 오랜 교육을 통해 주입되는 것인데, 그 기억 자체가 없는 사람에게 그걸 바라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소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옆에 놓인 옷을 주섬주섬 입었는데, 그 옷들을 다 입고난 후에도 그녀는 뭔가 허전한 감정을 느꼈다. 꼭 뭔가 빠진 절차가 있는 것 같 기도 하고,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소녀가 잠시 멍하니 서 있자 아르티어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아르티어스의 말에 소녀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배가 고픈가?
“예, 배고파요.”
“준비해 둔 게 있는데 같이 먹기로 하죠.”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옆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 안에는 입맛을 돋우는 구수한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아르티어스는 몇 가지 요리를 가져다 가 식탁 중간에 놓았다. 우선은 고기가 좀 들어 있는 채소 스프, 그리고 식탁의 큰 은접시 위에는 알맞은 불로 잘 익힌 오크 통구이가 올려졌다.
“자, 식기 전에 들어요.”
소녀는 막 먹으려고 하다가 어떻게 먹는 것인지 잠시 궁리한 후 아르티어스가 먹는 방법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채소 스프는 옆에 놓인 숟가락으로, 그리고 오크는 그대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한쪽 손을 뜯어내서는 통째로 씹어 먹었다.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그녀의 기억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흉측한 음식까지 제공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녀의 기억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 다는 거였다. 인간 소녀가 도저히 오크 손을 뜯어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군요. 내 이름은 아르티어스라고 합니다.”
“저는 다크예요.”
“다크? 여자 이름으로는 좀 이상하군요. 그건 그렇고 이제 몸도 다 나은 것 같은데 어디 갈 곳이라도 있나요?”
다크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갈 곳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과거를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아, 아뇨. 없는 것 같아요.”
“그럼 갈 곳이 생각날 때까지 나하고 같이 지내는 것은 어때요? 사실 나는 인간은 아니지만 지내기는 뭐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그럼?”
“드래곤이죠. 골드 드래곤.”
“드래곤? 드래곤이 뭐예요?”
하기야 오크가 뭔지도 모르고 먹고 있는 판에 드래곤이 뭔지 모르는 거야 당연하지.’
“설명하기는 좀 힘드니까 그냥 드래곤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드래곤 한 마리와 소녀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묵향7 : 외전-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