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9화 – 탈출

탈출

제국 최고의 기사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 돌아오면서 크라레스 제국의 지도부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니 서서히 정복 사업을 벌여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크라레스 제국의 최고 지도부는 크로아 공작의 도착과 더불어 작전 회의를 열었다.

정장을 입은 장교 한 명이 찰흙으로 정교하게 만든 지형들 위에 꽂힌 깃발들을 지휘봉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지금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 은 크로아 공작을 비롯하여 크라레스 제국 최고위급 장성들은 모두 모여 있었기에 장교는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본국의 영토는 지금 말토리오 산맥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상 풍요로운 크로나사 평야를 상실한 후 본국의 대부분의 영토가 말토리오 산 맥 속에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기에 과거에는 말토리오 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스바시에 왕국이 지금에는 바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형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먼 저 풍요로운 상업 국가 스바시에 왕국을 병합하고, 그다음 옆에 있는 치레아 왕국을 병합하여 국력을 키우는 게 최선의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흐음, 스바시에 왕국의 군사력은?”

“예, 총 57대의 타이탄과 127명의 그래듀에이트가 주축인 3개 기사단, 그리고 7개 보병사단, 2개 기병 여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병력의 50퍼센트를 국경선 에 투입 중이며, 그로발 근위 기사단과 네시 기사단은 수도 근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4개 보병 사단과 티노 기사단을 최전선에 배치하여 국경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봤을 때 전방에서 전쟁이 벌어진 후 3일 내로 1개 기병 여단이, 나머지 1개 기병 여단도 6일 내로 가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나 머지 보병사단들 중 1개는 치레아 왕국과의 국경선에, 2개는 수도 부근에 포진 중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제2차전은 2개 보병사단과 근위 기사단, 네시 기사단과 의 전투가 될 것입니다.”

“좋아, 상대방이 어느 정도 시간 안에 후방의 타이탄들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예, 스바시에 왕국은 전통적으로 마법보다는 기사가 더 강한 나라이기에 마법사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일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입니다. 그렇기에 전쟁이 터짐과 동시에 이쪽으로 워프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전체 전력을 보내기는 힘들 겁니다. 초반에 이쪽에서 기선을 제압해 버린다면 가망 없는 전투에 타이탄을 소모하기보다는 두 번째 전투를 위해 타이탄을 아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장교의 설명을 쭉 듣고 있던 크로아 공작은 시선을 옆에 있던 노장군에게로 돌렸다. 바로 이 노장군이 바로 작전 담당관, 줄여서 작전관이었다. 이 시대의 모든 전 투는 타이탄으로 결말을 짓게 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기에 총사령관인 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오너(the OWNER of the Titan : 타이탄의 주인)였기에, 자신의 타이탄을 타고 전장에 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령관이 없는 상황에서 남은 부대들을 지휘할 인물이 따로 한 명 더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사령관을 대신하여 모 든 휘하 부대들을 이끌 권한이 주어지기에, 가장 노련한 지휘관이 작전관으로 임명된다.

“작전관, 이번 작전에 본국에서 투입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은 얼마나 되나?”

크로아 공작의 질문에 작전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현재 타국에 알려지기로는 본국의 보유 타이탄은 28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될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병력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 유령 기사단과 청기 사들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코린트의 침공에 대비해 남겨 둬야만 합니다.”

“음, 타이탄의 성능으로만 생각하면 이쪽이 위야. 10대의 카프록시아를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질이 좀 떨어지는 타이탄이라도 57대나 가지 고 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는군. 또 그들과의 전쟁에 최고 실력의 기사들을 투입할 수도 없을 테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번 정복에서 우리의 전력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서 코린트가 보기에 이번 정복이 꽤나 타당성 있게 보여야만 하옵니다. 그렇 지 않다면 코린트는 우리를 의심할 테고, 최악의 경우……..”

“좋아. 그렇다면 마법사들 외에는 답이 안 나오는데, 몇 명이나 동원 가능한가?”

“예, 마법사 클래스만 스물다섯 명이옵니다.”

“스물다섯 명이라……. 빠듯한 숫자로군.”

공작의 푸념에 토지에르가 참견을 했다.

“전하, 남은 스물일곱 명의 기사들을 이용해서 다른 작전을 쓸 수도 있사옵니다.”

“어떻게?”

“청기사에 탑승시킬 기사들을 모두 카프록시아로 돌리는 것이옵니다. 사실 청기사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론가르트 단장 이외의 인물에게는 지급하지 않았사 옵니다. 그러니……””

믿고 있는 비밀 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자 크로아 공작은 긴장 어린 표정으로 곧장 질문했다.

“무슨 문제인가?”

“예,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 못된 버릇이 있사옵니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한은 비교 평가되어 또다시 그 주인으로 인정받기 힘들지요. 그러니까 론가르트 단장 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근위 기사들을 모두 이번 전쟁에 투입할 수 있사옵니다. 또 론가르트 단장이 타던 카프록시아는 전하께서 사용하셔도 되구요. 혹시나 코린트 가 이번 전쟁에 개입한다면 모두들 계약을 해제하여 타이탄을 다른 기사에게 넘기고 본국으로 돌아와 청기사와 계약을 맺으면 되옵니다. 하지만 코린트가 우리를 얕보고 보낼 1차 원정대는 막을 수 있겠지만 아무리 청기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은 막기 힘들 것이옵니다. 그러니 이번 작전에서 우리의 힘을 최대한 숨겨

야만 하옵니다. 코린트는 우리가 약간이라도 위험해 보인다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개입해 올 것이옵니다.”

“좋아, 근위 기사들을 이번 전쟁에 투입할 수 있다면 28대가 아니라 20대 정도만 투입해도 충분해. 안티노스, 자네는 우선 코린트의 고관들에게 뇌물을 전달하고 이번 전쟁을 묵인해 줄 것을 요청하게. 또 코린트 황제에게도 적절한 뇌물이 필요하겠지.”

“예, 전하.”

“우리는 이번 전쟁에 국력을 완전히 다 쥐어짜서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여야만 한다. 이번 전쟁만 승리하면 우리에게 50여 대의 타이탄이 새로 생긴다 하더라도 코린트에는 거의 영향이 없지. 코린트가 우리를 얕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작전을 진행시켜라. 코린트와의 국경 수비대를 제외하고 전 병력을 동원한 다. 그 병력 배치는 그대들에게 맡긴다. 대신 이번 전쟁을 최대한 타이탄끼리의 전쟁으로 끌고 가야 해. 25명의 마법사와 콜렌 기사단을 적절히 배치해 최대한 보병 들을 보호하라.”

“예, 전하!”

그들은 한동안 작전 회의를 한답시고 떠들어 대다가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갔고, 회의실에는 공작과 토지에르만이 남았다.

“그 말이 정말이었군요, 전하.”

“뭐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몸이 재구성되며, 젊어진다고 그러던데…….”

그 말에 공작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디서 들었나? 나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그 말에 토지에르는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좀 특이한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에게서 들었사옵니다.”

“그래? 어쨌든 별로 좋은 건 아니야. 내가 이렇게 젊어졌다는 말은 곧 키에리 발렌시아드란 그 악마도 젊어졌다는 말이 되니까.”

말을 하면서 공작은 천천히 창문 쪽으로 걸어가 왕궁의 정원을 바라봤다. 이때 공작의 시야에 낯익은 인물들이 들어왔다. 귀여운 소녀 두 명과 기사 한 명. 그중 한 명이 묘인족인 걸로 봤을 때 또 다른 소녀는 노예까지 거느릴 정도로 지체 높은 인물의 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아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 모양이군. 그렇게 공녀들을 많이 헌납했는데도 아직도 저렇게 예쁜 애가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런데 저 아이는 누 구의 딸인가?”

“예?”

토지에르는 공작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서 창문으로 다가갔고 곧이어 진상을 파악하게 됐다.

“저 아이는 포로이옵니다, 전하.”

“포로라고? 그런데 무슨 포로가 노예에다가 호위병까지……. 전에 만나 보니까 호위 기사가 그래듀에이트로 보이던데, 본국에 그래듀에이트가 그렇게 남아돌았 “나?”

“아니옵니다. 매우 중요한 포로이옵니다, 공작 전하. 그녀는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옵니다.”

그 말에 공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쿠아 룰러? 그 나이아드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예.”

“믿을 수 없군. 겨우 저런 힘없는 소녀가 지닐 물건이 아닌데. 또 아쿠아 룰러가 겨우 저런 소녀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할 리도 없고 말이야.”

토지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도 마스터였사옵니다.”

공작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스터가 그렇게 흔한 게 아닌데, 어찌 저런 소녀가 마스터가 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정말인가?”

“예, 공작 전하.”

그러면서 토지에르는 공작에게 다크와 있었던 그전의 일들을 설명했다. 만약 이런 말을 토지에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했다면, 공작은 거짓말하지 말라 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만큼 토지에르가 한 말은 믿기 힘들었다.

“아쿠아 룰러의 주인에게 저주를 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예, 아쿠아 룰러를 가지기 전의 일이었지요. 아쿠아 룰러는 저 그레이시온 산맥의 주인 키아드리아스에게 선물 받은 것이옵니다.”

공작은 새삼 다시 한 번 그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놀라운 인물이군.”

“예, 시간을 두고 설득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하옵니다. 그때까지는 호위를 붙여 놔야 하지요. 현재의 육체가 어떻든 과거에 엄청난 경지까지 올라갔던 인물 이옵니다. 그래서 감시자로 그래듀에이트를 붙일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좀 더 열심히 회유해 보게나.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 우리 편이 된다면 매우 든든할 테니까.”

“예, 전하.”

세린은 요즘 들어 인간 여자의 무서움에 대해 새로이 깨닫고 있었다. 많이 자 봐야 하루 한두 시간의 수면, 뒤로는 욕을 하면서도 직접 만났을 때는 미소 띤 귀여운 얼굴로 드미트리 실바르를 대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이 궁리 저 궁리 하며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 걸 보면, 과연 인간의 여자는 묘인족과 달리 매우 무서운 존재들인 모양이었다.

한 2주일 돌아다니고 나자 요즘은 그 높은 구두를 신고도 제법 맵시 있는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있는 주인을 보면서 세린은 존경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 예뻐라. . 저거 정말 예쁘지 않니, 세린?”

그날은 다크가 외곽 정찰을 나온 날이었다. 이왕 내친김에 시내까지 들어가서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마침 여성복 가게 앞에 걸려 있는 무릎 정도 오는 짧은 치마에 예쁜 블라우스를 보고는 일부러 과장되게 예쁘다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네요, 주인님.”

“저거 정말 예쁘다. 입어 보면 좋을 텐데…

이런 식으로 그 앞에서 30분 정도 주절거리고 있으니, 아무리 눈치 없는 실바르라도 상대가 의도하는 걸 외면할 수 없었다. 사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까.

“저, 저런 옷은 평민들이나 입지 다크 양처럼 고귀한 분이 입기에는…….?”

다크는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앙증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호호호,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고귀한 사람도 아니구요. 정말 예쁘네요.”

돈은 몽땅 빼앗겼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도망치기 전에 치마 아랫부분을 잘라 낼까하는 궁리까지 하 는 판에 저렇게 도망치기 좋은 간편한 복장이 있는데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 멍청한 녀석은 이 정도까지 눈치를 주고 있는데, 아직 사 줄 생각을 안 하고 있으 니 다크는 될 수 있으면 옷에 욕심이 생긴 평범한 여자 애처럼 행동하는 중이었다.

“정말 저 옷을 입고 싶으십니까?”

“예.”

그 말에 실바르는 아무 생각 없이 두 여자를 이끌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 옷뿐만 아니라 뒤 굽이 낮은 구두까지 사 주고 말았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나중에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말이다.

어쨌든 실바르는 옷과 구두를 다크에게 선물했고, 다크는 일주일 정도 뒤에 그것을 입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실바르는 기껏 사 줬는데도 그 옷이나 구두를 입 지 않는 걸 보고 조금 섭섭했겠지만, 그걸 입고 돌아다니다가 실바르보다 좀 더 머리 회전이 빠른 놈이 본다면 뺏길 게 뻔하기에 다크는 애지중지 그 옷과 구두를 구 석에 숨겨뒀던 것이다.

“오늘은 좀 이상하네.

“예, 왜 그러세요, 주인님?”

“평상시보다 무사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예? 저렇게 많은데요?”

세린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상시보다 더 많은 수비병들이 쫙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수비병들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뛰어난 실력 의 기사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평상시보다 수비병들의 질은 떨어지고 양은 늘어났다고 봐야 할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궁금하시면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그래라.”

세린은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한 시간쯤 후에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구요. 콜렌 기사단하고 근위기사단 건물이 텅 비었다고 하던데요? 여기저기 하녀들하고 하인들한테 물어봤으니까 아마 정확할 거예요. 어디 훈련 나갔는지도 모르죠.”

“그래?”

별 표정 없이 대답했지만 다크는 이제 기회가 왔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세린은 야행성 동물 특유의 몸짓으로 조용히 주인의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자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침대 위에 이상한 자세로 앉아 있을 테지만. 만약 자고 있다면 이불을 정돈해 줘야 하고, 또 토지에르에게 지시받은 대로 주인에 대한 감시도 해야 했다. 자질구레한 걸 보고할 필요는 없었지만, 만약 도망친다면 그걸 막든지 아니면 그 사실을 빨리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을 테니까…….

그녀가 살짝 들어갔을 때 주인은 침대 위에 없었다. 순간 세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내일 당해야 할 몽둥이찜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녀는 주인이 혹시나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어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려고 했을 때, 몸이 뜨끔 하더니 곧장 정신을 잃어버렸다.

세린의 혈도를 찍어서 잠들게 만든 후 다크는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세린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혈도가 인간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 차이를 파악할 만한 시간은 충 분했다. 그사이에 다크는 일부러 세린을 안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그녀의 몸속으로 내공을 흘려 넣어 이미 혈도를 파악해 놓은 상태였기에 일은 손쉽게 진 행된 것이다.

“여기 온 지도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나에게 힘이 없는 줄 착각하다니, 호호호.”

자신의 방은 4층이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곧장 경신술을 사용하여 왼쪽 아래층에 있는 발코니로, 그다음은 오른쪽 2층에 있는 발코니로, 그다음은 잔 디 위로 매끄럽게 떨어져 내렸다. 그다음부터는 될 수 있으면 보초들의 눈을 피해서 이동해야 했기에 다크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지고 또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저쪽이군.”

다크는 여태껏 꼼꼼히 그려 놨던 지도를 펼쳐서 별들을 보고 방향을 잡아 도망쳤다. 우선은 시내로 들어가기보다 산속으로 도망치는 게 최고. 하지만 시내 쪽으로 도망친 것 같은 흔적을 만들어 둬야 했기에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샥!

앞으로 나가려다가 저쪽에서 보초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다크는 재빨리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보초를 해치울 수는 없었다. 보초는 거의 두 시간 단위로 교대를 했고, 이 보초를 해치우면 두 시간 이내에 자신의 탈출 사실이 발각되기 때문이었다. 뒤쪽에서도 보초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다크는 재빨리 옆에 있는 나무로 몸을 날렸고, 그 나뭇가지를 밟고 위로 올라가 옆 건물의 발코니 같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밑에서 네 명의 보초들이 만나 잠시 쑤군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다크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바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 다시 뒤로 돌아서 나가려고 할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응? 들켰나?”

어둠 속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크는 바짝 긴장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상대를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쪽에서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느낌상 거리는 3미터 저쪽. 제길,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네. 달려 들어가면서 그대로 목뼈를 부숴 버려야 해.’

<그대는 누구인가?>

깡!

“아얏!”

재빨리 도약해서 상대를 가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손은 강철을 때린 것처럼 얼얼했고 발밑은 허전했다.

“끼약!”

퍽!

그래도 비명 소리를 크게 안 질러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충격에 한동안 정신이 없던 다크는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 라는 걸 다시금 상기했다. 얼떨결에 떨어져서 발목을 삐었는지 욱신욱신 전해져 오는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걸 참으며 다크가 살며시 물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나? 나는 쿠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나의 옛 주인과 함께 있던 자로군.>

“쿠마라고? 그 타이탄?”

<그렇다.>

“시드미안은 어디 있지?”

<나와 계약을 해제하고 떠났다. 아무래도 그는 정신이 제압당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럼 시드미안도 여기 있다는 말이군.”

<그대는 과거 만났을 때보다 엄청난 진보를 했군. 하기야 내가 그대를 처음 봤을 때는 그대가 드래곤인 줄 착각했을 정도였으니까……. 현재 그대의 마나는 아직 보잘것없다. 하지만 그대의 발전 속도로 미루어 봤을 때, 조만간에 그대는 엄청난 힘을 다시 얻게 되겠지. 골렘의 맹약을 맺기 위한 첫째 조건은 마나를 다룰 수 있 는 자. 그대의 마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대는 그걸 효율적으로 다룰 줄 알기에 첫째 조건은 충족된다. 그대는 나와 계약을 원하는가?>

“타이탄이 한 대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넌 시드미안의 것이잖아. 사양하겠어.”

<나는 시드미안의 것이 아니다. 시드미안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계약을 해제했으니까……. 현재 나의 주인은 없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 가?>

“내 대답은 똑같아. 그런데 여기를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지?”

<그건 나도 모른다. 나는 주인을 통해 모든 걸 보고 느낀다. 주인이 없는 지금 나는 5미터 정도의 앞을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보탬이 안 되는 놈이군. 좋아, 다음에 보자구.”

<나중에 그대의 종으로 선택될 타이탄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제기랄, 이 건물에는 창문도 없나? 아예 눈앞이 하나도 안 보이네…….” 더듬거리면서 한참을 걸어가자 또다시 다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이번에도 굵직한 저음의 무게 있는 목소리……. 보나마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타이탄일 것이다.

“제길, 여기는 타이탄을 쌓아 둔 창고인 모양이군.”

<그대는 누구인가?>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 그런데 여기 출구가 어디야? 너무 컴컴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지금 나의 능력으로 그 정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대와 같은 마나를 부릴 능력을 갖춘 자를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 사실 그대의 능력은 매우 실망스럽 지만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대는 마나를 부릴 수 있기에 계약의 최소 조건은 갖춰져 있다. 그대는 나와 계약을 맺고 싶은가?>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내 이름은 안드로메다.>

“안드로메다? 아무도 주인이 없었다고?”

<그렇다.>

“호오……. 그럼 그 녀석들의 타이탄인 모양이군. 좋아, 계약을 맺자구. 어떻게 하면 되지?”

<그대가 수락을 했으니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안드로메다. 그대의 이름은?>

“나는 다크.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내 몸에 탑승하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주지.>

“좋아, 그런데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아.”

<그건 걱정하지 마라.>

곧 거대한 손이 다크의 몸을 잡고 위로 살며시 들어 올렸다가 내려놨다.

<거기 있는 의자에 앉으면 된다.>

다크가 더듬더듬 찾아서 의자에 앉자 곧이어 기긱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고, 앞으로 밀려가 있던 금속 조각이 튀어나와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그다음 거대 한 안드로메다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걸음에 다크는 재빨리 소리쳤다.

“이 멍청아, 너무 시끄럽잖아. 내려 줘, 걸어서 도망치는 게 잡힐 확률이 적겠다.”

안드로메다가 곧 멈췄고, 조금 지나자 손으로 다크를 잡아서는 아래쪽에 내려놨다. 땅에 내려서자 또다시 더듬거리면서 걸어가는 다크를 향해 안드로메다가 말했 다.

<나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참, 그러고 보니 쿠마는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다가 부르면 나타나던데. 너도 공간의 저편에 갈 수 있냐?”

<좋아,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지.>

그다음은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또 다른 청기사들도 서 있었지만, 이미 주인이 있는 상대를 부를 필요가 없었기에 잠자코 있는 것이었다.

다크가 가까스로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왔을 때는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제길, 이런 식이면 시가지 쪽으로 도망친 흔적을 만들 수도 없잖아. 할 수 없다. 빨리 도망치자.’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크는 최대한 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녀가 도망쳤습니다.”

“뭣이? 그럼 네 녀석은 뭐 하고 있었나?”

토지에르의 질책에 실바르는 얼굴색이 벌게지며 황망히 답했다.

“그것이 밤에 살짝 도망쳤기 때문에..

“그렇다면 세린은?”

“방 안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해도 깨어나지 않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공작이 말했다.

“데리고 와라.”

“예, 전하!”

조금 지나자 묘인족 소녀가 들려왔다. 그녀는 완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세린의 몸을 이리저리 눌러 보던 공작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흐음, 대단하군.”

“무슨 일이옵니까? 마법으로 잠을 재운 것도 아니고…….”

공작이 살펴보는 사이 마법을 써 봤던 토지에르가 궁금한 듯이 묻자 공작이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대단한 기술이야. 몸속에 마나가 흐르는 통로를 막았어. 그러니 이상이 생길 수밖에…….”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몸속에 자연스레 흘러야 하는 마나의 통로를 막는 기술도 있사옵니까?”

“글쎄, 타인의 몸속에 자신의 마나를 끼워 넣어 마나 흐름을 방해하는 기법도 있을 수 있겠지. 어쨌든 대단한 기술이야. 이걸 그 소녀가 했다는 말인가?” “예.”

“정말 자네가 말한 대로 마스터였던 모양이군. 그것도 매우 독특한 기술을 많이 알고 있는……. 추격대는?”

“예, 군견(軍犬)들을 이끌고 수색 중이옵니다. 전하.”

이때 세린이 깨어났고, 토지에르는 재빨리 그녀를 추궁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사방에 서 있는 높은 양반들 때문에 주눅이 든 표정이었지만 세린은 솔직히 말했다.

“주인님 방에 들어가자마자 등 뒤가 따끔하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토지에르 나으리.”

그 말에 토지에르는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하녀를 제압했다 하더라도 옷이나 신발이 도망치기에 적당하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도망쳤지?”

그 말에 공작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긴 치마야 자르면 그만이고, 신발이야 벗고 담요로 돌돌 말면 그만인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추격대에 그래듀에이트 네 명을 추가로 파견해라.” “예.”

이때 세린이 끼어들었다.

“저, 주인님께는 행동하기 좋은 옷하고 구두가 있습니다. 그렇게 안 해도……..

“뭐? 네년은 그걸 감시하지 않고 도대체 뭐 한 거냐?”

“저, 그게 실바르 나으리께서 선물하신 거였기 때문에…….”

그 말에 토지에르는 괜히 돈쓰고 궁지에 몰린 실바르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네 녀석은 그녀를 감시하고, 보호하라고 붙여 놨더니, 편한 옷까지 사주면서 도망치는 걸 도와줘?”

“예? 죄송합니다, 토지에르 경. 굉장히 예쁜 옷이었고, 그걸 사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아무 생각 없이……. 죄송합니다.”

“네 녀석도 빨리 달려 나가 그 소녀를 잡아왓! 못 잡으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말아라.”

“옛!”

이때 당황한 표정의 인물이 들어섰다.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가는 실바르와 충돌할 뻔했지만 용케 실바르가 옆으로 피해 나갔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 인물이 다급하게 외쳤다.

“토지에르 경,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청기사가 한 대 없어졌습니다. 그게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게……..

토지에르는 단정적으로 공작에게 말했다.

“그녑니다.”

“뭐?”

“그녀가 훔쳐간 게 틀림없사옵니다.”

“설마.. 그래도 방금 전 하녀의 몸속에 들어간 마나의 성질이나 분량으로 봤을 때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그야 그렇지요. 실력은 별 볼일 없지만 타이탄과 계약을 맺는 데 마나의 분량은 상관없사옵니다.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실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자라면 대단한 실력의 인물, 몸속에 방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 생겨난 조건이기에…….”

“그렇다면 더 큰일이군. 유령 기사단의 그래듀에이트 열 명을 투입해라. 제길! 이제 막 전쟁이 시작되려는 판에 이게 무슨 꼴이얏!”

“헉, 헉, 헉….

다크는 죽자고 달리다가 이제 더 이상 달릴 기운도 없어서 나무 아래에 퍼질러 앉았다. 그놈의 타이탄을 때린 오른손은 뼈까지 몇 개 부러졌는지 손등 위로 뼛조각 이 불룩 솟아올라 있었고, 통증도 엄청났다. 그리고 자신이 2층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뛰어든 결과, 타이탄을 가격한 후 아래쪽으로 떨어지면서 삐어 버린 오른쪽 발목은 너무 혹사를 시켜서 그런지 퉁퉁 부어올라 욱신거리다 못해 이제 무감각해진 것 같았다. 몇 군데 혈도를 제압해 통증만을 억제해 놓은 상태로 밤새껏 달렸으 니, 몸에 이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밤새 달려오면서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군데군데 찢어져 걸레가 된 상태였고, 또 몇 번이나 넘어져서는 흙투성이가 된 데다 피부도 여기저기 찢겨서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는 곳이 있었다. 밤에 산길을 달렸으니 이 정도 대가야 별로 큰 것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지금쯤 그놈들도 자신의 탈출 사실을 알아내고 추격을 시작 했을 테니 그것이 문제였다.

이때 저쪽에서 와이번이 한 마리 날아가는 게 보였다. 와이번이라면 기사단에서 정찰, 이동용으로 쓰는 괴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다크는 좀 더 으슥한 곳 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 다음 오른손의 부러진 뼛조각들을 대강 맞추기 시작했다.

지독한 통증을 참으며 손가락을 앞으로 당겼다가 어느 정도 제 위치를 확인해 가며 다시 밀어 넣는 동작을 반복했다. 부러진 뼛조각 두 개를 맞췄을 때쯤 지독한 통증으로 인해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강 몸을 정리한 후, 다크는 이제 서서히 밝아 오는 하늘 위를 떠도는 와이번을 잠시 바라보다가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30분쯤 후, 운기조식에서 깨어난 다크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해서 그런지 다리나 손에서 통증은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운기조 식을 하면 치유력이 대단히 높아지기에, 고수라면 30분 정도 운기조식으로 다리 삔 거 정도는 치유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실 고수가 다리를 삘 리도 없었고, 또 다크의 내공으로는 고수 축에도 못 들어가는 게 현실이었다.

다시 네 시간 정도 죽어라 달려가자 작은 오솔길이 나왔다. 이 길을 따라서 갈 것인가, 아니면 산길로 들어갈 것인가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사람들이 걸 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합 다섯 명. 그들의 모양새를 잠시 바라보던 다크는 그들이 아무래도 여행객 내지는 모험가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도망 쳐 온 곳은 왕궁이었으니까 추격자들은 군인들일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보세요, 헉, 헉…….”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은 소녀를 보고 그들은 잠시 놀란 것 같았지만, 곧 그녀가 뛰어온 방향을 향해 세 명이 검을 뽑아 들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이런 곳에 소녀 가 이 꼴로 뛰어왔다면 아마도 저쪽에서 몬스터라도 따라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중에서 제법 인자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남자가 물어왔다.

“혹시 물이나 먹을 거라도 가지고 계시면 조금 주실래요? 헉, 헉…….”

“여기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소녀는 기갈이라도 들린 것처럼 작은 휴대용 물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리고 소녀가 말했다.

“토지에르라고 들어 보셨어요? 마법사인데…….”

소녀의 말에 그중 좀 가냘파 보이는 인물이 말했다.

“토지에르라면 여기 크라레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님을 말하는 건가요?”

“예, 그 토지에르…, 그 인면수심의 나쁜 놈이 우리 엄마를 겁탈하고 아빠를 죽이고, 거기다가 나까지, 흑흑…….”

소녀의 말에 그들은 모두들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설마가 아니에요. 저쪽에서 토지에르의 부하들이 쫓아오고 있다구요. 아마 날 잡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흐느끼는 척하면서 다크는 자신의 거짓말 솜씨에 도취되어 가는 중이었다. 여행객 일행은 설마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그래도 저 꼴이 된 채 도망치는 소녀를 보고 마음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때 그중 한 명이 말했다.

“토지에르 경일 리는 없겠지요. 아마도 토지에르 경을 사칭하고 못된 짓을 하는 놈일지도…….”

“저를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상대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구요. 괜히 도와주시려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실 수도……. 어쨌든 물하고 식량이라도 좀 주실래요? 친척집까지 도망치려면…..

“친척집은 더 위험할 겁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세요. 여기 물하고 식량은 좀 나눠 드리죠. 도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 정도만 해도 저에게 큰 도움을 주신 겁니다. 그럼 안녕히…….?

소녀는 물과 식량을 등에 지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잠시 바라보던 검객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정말 빠르군. 그런데 저 말이 진짜일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저 아이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저 아이의 말이 진짜인지 그것도 확실하지 않잖아. 설혹 진짜라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힘으로 저 아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상대는 궁정 마법사야. 그냥 혼자

서 도망치게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일행 중 젊은 쪽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뭔가 한마디 더 하려다가 포기했다. 사실 그들의 힘으로 궁정 마법사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 다.

그들은 한 시간도 못 되어 반대편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험악한 인상의 세 남자에게 제지당했다. 그들은 제법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있었고, 허리에는 모두들 롱 소드나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다. 그중 앞에 서 있는 덩치 좋은 인물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혹시 금발머리 소녀 한 명을 못 봤소? 키는 이만하고 아주 예쁘고, 삐쩍 말랐는데…….’

“그런 아이를 보기는 했소. 그런데 무슨 일이시오?”

그중 인상이 좀 더 험악하고 얼굴에 흉터까지 가진 사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 것 없고 어디로 갔소?”

그들의 하는 짓거리에 모두들 ‘이놈들이 토지에르 경의 이름을 사칭하고 못된 짓을 하는 놈들이군’하고 단정을 지었다. 그들이 가리킨 방향은 소녀가 도망친 방향 과는 상당히 다른 곳이었다.

““저쪽 길로 달려갔소.”

“만난 지는 얼마나 되었소?”

“세 시간 정도 되었소. 그 아이를 본 게 드미트리안 고개에서였으니까 말이오.”

“고맙소. 가자!”

그들은 큰 덩치에도 놀라운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젠장! 더럽게 빠르군.”

동료의 말에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마 리더인 듯 보이는 인물이 말했다.

“진짜 그래듀에이트다. 그런데 왜 저들이 소녀를? 소녀가 한 말이 진짜라는 건가?”

“그렇다면 진짜로 그 토지에르 경이?”

“아마 그럴지도…….?”

“원래 마법사란 것들이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잖아. 아, 미안하군. 자네는 빼고…

이들은 다시 크라레스 왕국의 수도 크로돈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토지에르라는 악당을 씹기 시작했다. “나쁜 놈, 못된 놈, 그 엄마도 모자라서 딸까지?”하면서 말 이다.

이때 하늘 위에 떠 있던 와이번 한 마리가 그들을 보고는 아래로 쏜살같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지만, 그 와이번 위에 사람이 타고 있는 걸 보고는 경계를 풀고 상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곧 와이번은 길 위에 착륙했고, 그 위에 타고 있던 인물이 재빨리 그들에게 뛰어왔다.

“자네들은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정식 갑주를 걸친 것으로 보아 기사단 소속의 기사인 모양이었다.

“코린트 제국에서 오는 길입니다.”

“혹시 오는 길에 금발머리의 예쁘장한 소녀 한 명 못 봤나?”

“그런데 왜 찾으십니까? 방금 전에도 그걸 묻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던데…….”

“지금 크라레스 전역에는 그 아이를 잡으려고 야단이지. 현상금 100골드까지 걸려 있단 말일세. 그 못된 년은 얼마 전까지 토지에르 경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는 데, 국왕 전하께서 토지에르 경에게 하사하신 물건을 들고 도망쳤다 이거야. 사실 그렇게 비싼 거는 아니지만, 전하께 하사받은 물건을 도난당했으니 일이 크게 벌 어진 거지.”

크라레스는 과거 제국으로 불렸지만 30년 전 코린트와의 전쟁 이후로 왕국으로 전락했다. 타국에서는 크라레스를 왕국으로 불렀고, 또 사신들도 국왕으로 불렀 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던 크라레스의 신하들은 그들끼리는 제국, 황제 폐하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용기사는 친절하게도 제법 자세하 게 그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 줬다.

여행객 일행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짜 토지에르 경이 사고(?)를 쳤다면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그래듀에이트까지 동원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듀에이트면 기사단의 최고 엘리트들……. 그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바보가 있을까? 하지만 뭔가 들고 도망쳤기에 추격하는 데 그래듀에 이트가 동원되었다면 말이 되지.

“지금부터 한 시간쯤 전에 만났습니다. 알기에는 고개를 넘은 후에요. 우리들에게 토지에르 경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인간인지 한참 떠들어 대면서 자신의 엄마를 강간하고……. 흠흠, 그러더니 우리에게 물과 식량을 조금 얻어서는 오른편 산속으로 도망쳤죠.”

그 기사가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르는 걸 보면서 그들은 또다시 쑤군거렸다.

“그 아이가 못된 년이었군.”

“역시 도와주지 않기를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