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14화 – 드래곤 사냥

드래곤 사냥

“저, 진짜 이걸로 놈을 해치울 수 있을까요?”

지미는 아침에 파이어해머로부터 받은 석궁을 들어 보이며 다크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건 다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드래곤이란 생물과 싸워 봤 어야 대답을 해 주지.

“몰라. 효과가 있기만을 빌어. 이번 일은 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게 사실이거든.”

다크 일행은 숲이 끝나는 지점인 동굴에서 거의 1백 미터 전방까지 접근해 들어갔다. 여차하면 숲 속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가급적 숲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지미와 라빈이 두터운 나무 뒤에 숨어서 석궁을 장전하는 동안 다크는 오래전에 가스톤에게 배운 대로 파이어 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은 3사이클급으 로 마나를 원반식으로 끌어 모은 후 외쳤다.

“파이어 볼!”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발사된 큼직한 불덩어리가 휙 날아가서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1백 미터나 떨어진 원거리에서 발사해서 그런지 동굴에 이를 때쯤에 는 파이어 볼의 위력이 상당히 약해졌다. 그 때문인지 동굴 속에 불덩어리가 들어갔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드래곤의 무반응에 약간 신경질이 난 다크는 또다 시 마나를 끌어 모으면서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한 걸 준비했다.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드래곤이 현신하기 전에 통구이가 되어 버린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기에, 다크는 오기로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 모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보 이지 않았지만 다섯 개 마나의 흐름이 만들어졌고, 그 흐름은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파이어 볼!”

그녀의 손에서는 처음 날아갔던 불덩어리는 아예 반딧불 정도로 느껴질 만한 엄청난 불덩어리가 생겼다. 다크는 동굴 속을 힐끗 쳐다본 후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그 불덩어리를 동굴 속으로 던졌다.

“죽어 버렷!”

파이어 볼이 동굴 쪽으로 날아가자 갑자기 동굴 속에서 오우거 한 마리가 밖으로 튀어 나왔다. 오우거는 재빨리 마법을 외워 마법의 장벽을 만들었고, 그 장벽에 파이어볼이 격중되었다.

쾅!

엄청난 화염이 흩어졌을 때는 약간은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는 4미터 정도의 키에 우람한 근육질, 지독하게 못생긴 얼굴을 가진 오우거만 남아 있었다. 한쪽 손에 는 1.5미터는 되어 보이는 바스터 소드를 들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바스터 소드였지만, 그걸 오우거가 들고 있다 보니 롱 소드처럼 보였다.

그 오우거는 놀랍게도 사람의 음성과 비슷하지만 좀 굵직하면서도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엄청난 파이어 볼이군. 너희들은 뭔데 나의 보금자리에 파이어 볼을 던지는 거냐? 목숨이 아깝다면 돌아가라.”

하지만 오우거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다크는 라빈에게 지시했다. 검은 지미가 조금 실력이 나았지만 활은 라빈 쪽이 약간 나았기 때문이다. “저 녀석 다리에 한 방 날려.”

퓽!

확실히 엄청나게 강한 석궁이라 그런지 1백 미터의 거리를 거의 순간에 가로질러 오우거의 다리 깊숙이 박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통해 버렸다. 그 엄청난 석 궁의 위력에 오우거도 약간은 놀란 것 같았다. 오우거는 자신의 살을 관통한 후 10미터쯤 뒤쪽의 절벽에 3분의 1쯤 박혀 들어가 있는 화살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 겼다. 석궁의 위력이 의외로 강하다는 데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오우거는 아직까지도 인간들을 깔보고 있었다.

마법의 원조하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자신이 조금 마법 수련에 게을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겨우 저 정도 마법사 하나 해치우지 못할 이유는 없었 고, 활이나 창 따위를 가진 전사 몇 명이 부록으로 딸려 있다 해도 그건 상황 변화에 아무런 보탬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아내어 본 후에 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오우거는 화살촉이 자신과 같은 그린 드래곤의 뼈로 제작된 것을 알고는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들의 목적이 뭔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은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드, 드래곤 킬러! 네놈들은 드래곤 슬레이어였나? 쓰레기 같은 것들! 죽어랏! 지굉파(地轟波)!”

확실히 대지의 기운을 지닌다는 그린 드래곤답게 그 오우거의 첫 번째 공격은 대지의 정령 마법이었다. 꼭 파도가 몰려오는 듯 땅이 파동을 일으키며 급속도로 다 크 일행에게 접근해 왔다. 그러나 서로 간의 거리가 1백 미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지미와 라빈은 대지가 꿈틀꿈틀 파동을 일으키며 자신들에게 접근해 오자 놀라서 양 옆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다크도 왼쪽으로 피했다. 다크는 방금 자신들이 있 던 그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부터 산산조각이 나서 쓰러지는 것을 보며 마법의 위력이란 것이 꽤나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따위 것에 감탄하고 있을 여 유는 없었다. 다크는 마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재빨리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집중시킨 후 외쳤다.

“파이어 볼!”

또다시 5사이클급의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오우거를 향해 날아갔다. 오우거는 그걸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이번에도 오우거 가까이까지 날아간 거대한 화염 덩어리는 마법의 벽에 막혀 흩어져 버렸다. 5사이클급 파이어 볼치고는 엄청난 위력인 것을 보고, 오우거는 약간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제법이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를 꿈꿔서는 안 되지. 뇌()!”

그와 동시에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스무 차례에 걸친 날벼락이 떨어져 내렸지만 숲의 나무들만 작살냈을 뿐 별 효과는 없었다. 사람보 다 더 큰 나무라는 존재들이 벼락에 먼저 맞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에 맞고 양 옆으로 튀어 대지를 흐르는 번개와 불타서 쓰러지는 나무들은 다크에게는 별 로였는지 몰라도 지미와 라빈의 생명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지미와 라빈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꼴을 보면서 드래곤은 이런 보잘것없는 존재들 때문에 현신할 필요도 없다는 듯 여러 가지 마법으로 ‘간 큰 벌레’들을 공격 했다.

다크 또한 틈틈이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을 오우거에게 쏴 봤지만 상대의 바리어를 깨지 못하자 약간 초조해졌다. 검을 쓴다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여기서는 원 체 지켜보는 눈들이 많기에 마법만을 써야 했다.

화염과 뇌격을 몇 방 날렸지만 그녀가 지닌 마법은 원체 날림으로 배운 것들이라 위력은 형편없었다. 5사이클급 파이어 볼은 구사할 줄 알면서도 5사이클 마법 중 에서 최강의 위력을 낸다는 익스플로우전(Explosion) 같은 마법은 모르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의 마법은 보기에는 거창했지만 위력은 별로였던 것이다. “제기랄!”

상대의 마법을 민첩한 몸놀림으로 또다시 피한 다크는 아쿠아 룰러를 사용하기로 작정했다. 아쿠아 룰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수계의 정령 마법. 가능성은 있을 것 같았다.

“아쿠아 에로우!”

거의 20여 개에 이르는 엄청난 물 화살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자 오우거는 혼비백산했다. 석궁에서 발사하는 화살보다도 더 강력한 위력의 물 화살. 이건 수계 마법들 중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정령 마법은 마법보다 물리력에 의한 피해가 더욱 큰 마법. 서로 간의 거리가 거의 1백 미터에 이르는데도 그 물줄기의 위력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순식간에 오 우거 쪽으로 날아들었다. 다크가 아직 물 화살들의 방향 조종이 미숙했기에 오우거에게 격중된 것은 불과 다섯 개 정도였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바리어는 간신 히 깨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지만, 자신의 뒤 절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걸 보고 오우거는 중얼거렸다.

“강철도 뚫어 버리는 물 화살. 최상급 물의 정령 마법? 정말이지 나를 놀라게 하는군. 너는 나에게 도전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우거의 몸이 녹색 광택에 휩싸이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지미와 라빈은 재빨리 나무를 헤치며 뒤도 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우거인 상태에서도 이놈의 석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본체로 현신한 후에는 안 봐도 뻔하기 때문이다. 조금 뒤늦게 다크도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명의 마법사와 두 명의 수련 기사가 오우거, 아니 드래곤을 향해 용을 쓰는 것을 네 개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인 마리나와 기사 인 샤트란이었다. 마리나는 재빨리 움직이며 파이어 볼을 날리고 있는 다크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 아이 마검사(魔劍士)였어. 저 놀라운 움직임을 봐. 바리어나 실드를 치는 게 아니고 회피 동작으로 마법을 피하다니. 보통 마법사들은 체력이 모자라서 절대 저렇게 못 하지. 남자 애들이 저 여자 아이에게 꽤 조심스럽게 대하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저 아이들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인 것 같아.”

샤트란도 검사에 못지않은 움직임으로 재빨리 드래곤의 마법 공격을 피하면서 공격 마법을 날리고 있는 다크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마법이 너무 단조롭네요. 썬더(Thunder), 파이어 볼, 윈드 에로우(Wind Arrow). 위력은 꽤 괜찮은 것 같지만 모두 초보적인 마법들뿐이잖아요?”

마리나는 시선을 싸움판에 고정시켜 둔 채 답했다.

“맞아. 확실히 수준은 5사이클급이지만, 저런 초보 주문으로는 제대로 된 위력을 내기 힘들지. 설마 상급 주문을 안 배운 것은 아니겠지?”

“글쎄요.”

이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태껏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던 소녀가 뭔가 주문을 외우면서 손을 뻗치자 순간적으로 햇빛을 받아 빛나는 수십 가닥 의 무언가가 드래곤 쪽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속도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겠지만,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뛰어난 무사인 샤트란은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죠?”

“글쎄, 수계(水系) 공격 마법 같기도 하고. 이 거리에서는 잘 모르겠는걸?”

하지만 그녀들의 한가한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드래곤이 갑자기 녹색 광채를 뿜어내며 본체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래에서 싸우던 사 람들은 숲 속으로 도망쳐 버렸고,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에 가려서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도망치는 지미, 라빈, 다크의 좌우로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수풀을 헤치며 달려 나오는 거대한 물체들이 있었다. 숲 속 저 뒤쪽에 숨어 있던 거대한 타이탄 두 대는 1조가 목표를 달성하자 엄청난 속도로 창세 자루를 쥐고, 허리에는 검을 찬 채 돌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이 정도 새끼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 고 가까이 접근해서 빨리 끝장내버릴 작정이었다.

드래곤은 타이탄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본 순간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콧방귀를 뀌며 빈정댔다.

“가소로운 것들, 계획이 겨우 이거였단 말이냐? 겨우 저 고철덩어리 두 개로 뭘 할 수 있다고…….”

드래곤은 인간들의 얕은 잔꾀를 비웃으며 변신하면서도 깊이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타이탄 두 대가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진 그 순간 드래곤은 본체로 돌아 가 있었고, 순식간에 몸속에 쌓인 대지의 기운을 토해 냈다. 드래곤의 몸속 깊이 쌓여 있던 대지의 기운은 드래곤의 폐 속에 들어 있던 공기와 섞여 짙은 녹색을 띠 는 가스 같은 것으로 변해 거대하게 벌어진 드래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창은 녹색의 가스를 통과하던 도중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강한 부식력을 지닌 가스였다. 그런데 그 가스는 창을 녹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흘러가 곧장 타이탄들에게로 날아갔고, 두 대의 타이탄은 그 녹색의 가스를 피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이탄들은 드래곤을 잡을 목적으로 너무 가까이 접근해 들어갔었기에 그 브레스를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었다. 타이탄의 외피가 가스에 녹아 들어갔지만 타이탄들은 머리 뒤쪽에 방패를 대고 탑승자를 보호한 채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타이탄의 외부 부식도가 엄청나서 그걸 수복하기 위해 타이탄은 기사의 마 나를 대량으로 흡수해 댔다.

파시르는 자신의 몸을 망토로 가린 채 타이탄에서 탈출했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지켜보던 다크가 재빨리 그의 몸에 아쿠아 바리어를 쳐 줬고, 파시르는 물에 잘 녹는 그 가스의 위협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파시르의 타이탄은 도망치는 그의 뒤에서 반쯤 녹아 버린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파시르는 자신의 생명을 우선시했고, 타이탄을 한낱 마음에 드는 도구 정도로 생각했기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네르만은 완전히 그와 반대의 경우였다. 그는 타 이탄 한 대가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걸 포기할 수 없었다. 타이탄은 정말 엄청난 재산적 가치가 있기에 그걸 저따위 브레스에 녹아 없어지게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 축적되어 있던 마나는 모두 고갈되었고, 그가 기절하자마자 타이탄도 그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주인과 함께 생명을 끝마쳤다.

“살려 줘서 고맙다. 예상 밖으로 대단한 마법사였군.”

파시르는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소녀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티라는 사제는 브레스에 죽어 버렸는지 아니면 도망쳤는지, 부 상자 치료를 위해 그녀가 대기해야 할 장소에 없었다. 그리고 저 절벽 위쪽에 있는 마법사보다는 이 소녀가 자신을 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만에. 죽기에는 아까운 인물인 것 같아서 도와줬을 뿐이야.”

다크는 넓은 면적에 걸쳐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방어 장벽인 아쿠아 바리어를 쳐서 드래곤이 뿜어내는 가스를 막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마법 장벽 안 에 들어와 있는 파시르, 지미, 라빈은 멀쩡했지만 나머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다크는 한 번씩 장벽 윗부분에 구멍을 뚫어 아직도 가스가 날아다니는지 살펴보 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파시르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직도 브레스를 토하고 있나?”

“글쎄, 거의 멈춘 것 같은데?”

“일단 브레스가 멈췄으면 일행에 합류하자. 절벽 밑은 전멸했다고 해도 절벽 위로 올라간 녀석들은 괜찮을 거야.”

모두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크의 생각은 달랐다. 다크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니, 일단 숨어서 지켜보기로 하지. 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니까.”

다크가 반지로 흘러들던 기를 차단하자 거대하게 회전하고 있던 물의 장벽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 지독한 부식성 가스가 숲을 덮쳤지만 놀랍게도 숲은 깨 끗했다. 물론 밑에 쌓여 있던 낙엽이나 나뭇가지, 돌 등은 완전히 녹아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녹아서 부드러운 흙 속으로 흘러든 지금 숲의 나무들은 더욱 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확실히 대지의 기운을 갖는 그린 드래곤은 대지에서 태어나는 숲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그 놀라운 가스를 전력으로 토해 낸 후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반쯤 녹은 채 쓰러져 있는 타이탄의 잔해를 보며 승리의 환성을 질렀다.

<캬오오오오오오오!>

드래곤 로어(Dragon Roar). 드래곤의 포효는 모든 생명체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다. 드래곤의 포효 한 번에 아예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삐질거리는 게 거의 모든 생명체의 공통 사항이었고, 이 소리를 듣고도 움직이는 놈이 비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놈들 세 명이 드래곤의 자화자찬이 아니꼽다는 듯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그 타이탄들은 파시르가 가지고 있던 로메로보다 월등하게 덩치가 컸다. 과거 시드미안이 몰던 안토로스보다도 더 덩치가 큰 것 같았다. 세 대의 타이탄들 중 한 대는 특히 더 컸는데, 어깨까지의 높이가 5.5미터, 머리 위의 뿔까지 합한다면 6미터가 넘는 거대한 타이탄이었다.

사실 뿔이야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기에 타이탄의 높이는 어깨 높이를 말하는 것이 표준이었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타이탄들은 모두 사각형의 방패 를 가지고 있었는데, 방패에는 우아한 유니콘(머리에 한 개의 긴 뿔이 달려 있고 날개가 달린, 말처럼 생긴 전설상의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여러 색상으로 채색된 타이탄의 본체에도 갖가지 문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세 대의 타이탄이 나타나자 승리의 기쁨에 넘쳐 있던 드래곤은 상당히 놀랐다. 타이탄이 두 대뿐인 줄 알고 자신의 몸속에 쌓여 있던 모든 대지의 기운을 토해 냈 기에, 드래곤에게는 마법 외에 딱히 그것들을 상대할 무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드래곤은 나누어 쓴다면 세 번에서 다섯 번까지도 브레스를 뿜을 수 있지만, 이 드래곤은 나이가 많지 않았기에 그의 몸속에 쌓인 대지의 기운은 전력 을 기울인다면 한 번의 브레스를 뿜을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만약 적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껴서 두세 번까지 뿜을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신나게 뿌려 댄 게 화근이었다.

세 대의 타이탄이 드래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숲 속에 숨어 있던 일행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다크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 다.

“내가 말했잖아. 뭔가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말이야. 역시 그놈들이 가진 타이탄은 한 대가 아니었어.”

다크의 말에 자신들이 성난 드래곤의 브레스까지 처리해 주는 소모품 역할이었다는 것을 눈치 챈 지미와 라빈은 놀란 표정에서 곧 성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파시르는 다크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 놀란 표정이었다. 파시르는 지금 자신의 타이탄이 소모품으로 쓰였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릴 정도로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파시르는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지는 육중한 타이탄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순백(純白)의 유니콘……. 저 저주받은 문장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매우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드래곤은 지체 없이 타이탄들을 향해 용언 마법을 날렸다. 그러자 세 대의 타이탄들 중 좌우의 것들은 양 옆으로 피하면서 드래곤을 압박하는 형태로 움직였고, 중간에 남은 덩치 큰 타이탄은 이 정도 마법쯤이야 볼 것도 없다는 듯 피하지도 않고 방 패로 막았다.

7사이클급에 해당하는 강력한 용언 마법이 불러일으킨 화염이었지만, 고작 방패의 표면에 입힌 페인트만을 태웠을 뿐이었다. 곧 화염이 걷히면서 방패는 겉으로 드러난 미스릴이 뿜어내는 옅은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이것만 봐도 어중이떠중이 타이탄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타이탄의 대마법 주문은 타이탄의 등급에 따라 수준이 다르다. 엑스시온의 등급이 높을수록 마법에 대한 내성도 증가하고, 또 타고 있는 기사의 등급에 따라서도 그게 증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을 눈치 채자마자 마나의 힘으로 그 육중한 몸체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기 시작했다. 역시 위 험 부담이 큰 상대인 만큼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에 날아올라, 공중에서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드래곤은 하늘을 날 수 있지만 타이탄은 날지 못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날기 위해 그 거대한 날개를 폈을 때, 절벽 위에서 날아온 6사이클급에 해당하는 마법 공격과 거대한 투창 공격이 시작되었다. 물론 마법 정도야 드래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었지만 그 거대한 창이 드래곤의 날개를 꿰뚫었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창촉을 드래곤 뼈로 만든 묵직하고도 거대한 강철 창은 순식 간에 드래곤의 바리어를 찢고 들어와 드래곤의 거대한 날개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잠깐 사이에 드래곤의 왼쪽 날개에는 절벽 위에서 날아온 두 개의 창이 박히면서 그 거대한 금속성의 날개가 본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두 토막이 나 버렸다. 드래곤은 곧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며 땅바닥에 추락했고, 그 옆으로 짙은 녹색의 거 대한 금속성 날개가 떨어졌다.

이제 드래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드래곤은 처절한 육탄 공격을 시작했다. 드래곤의 몸은 강력한 금속성. 그렇기에 드래곤은 뱀처럼 머리를 뒤쪽으로 꼬았다가 포위해서 접근해 오는 왼쪽 타이탄을 향해 재빨리 머리를 날렸다. 드래곤의 긴 목 덕분에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상대 타이탄에게 다가 들었다. 그러나 타이탄은 재빨리 드래곤의 아가리를 방패로 막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타이탄이 가지고 있는 검의 몸체는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이 드래곤을 잡기 위해 거금을 투자해서 만든 세 자루의 드래곤 킬러 중 하나. 그 검은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만큼 가벼웠으므로 길이를 4미터나 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검을 보고 드래곤이 재빨리 머리를 뒤로 뺐지만, 드래곤의 작은 두 개의 뿔 중에서 하나가 검 과 부딪치며 어이없게도 두 토막이 나며 떨어져 나갔다. 정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잘된 강한 놈들이었다. 이때 오른쪽에 있던 타이탄이, 드래곤이 왼쪽의 동료에게 정신 팔려 있는 틈을 이용해서 재빨리 창을 던졌다. 역시나 이 창의 촉도 드래곤의 뼈로 만든 드래곤 킬러. 드래곤은 몸속 깊이 뚫고 들어온 창이 전하는 아픔에 분노했다.

<크아아아아!>

평소에 벌레 보듯 해 온 인간이, 그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감히 자신에게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지독한 고통을 선물한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찬 드래곤은 오른쪽 에 있는 타이탄을 향해 그 거대한 채찍과 같은 꼬리를 내려 쳤다. 드래곤의 꼬리가 날아오자 그 망할 타이탄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오르며 자세가 허물어진 드래곤 을 향해 또 하나의 창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타이탄들도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졌다. 엄청난 고통에 신음하며, 드래곤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점점 이성을 잃어 갔다.

사실 이 어린 드래곤에게 이성이 남아 있다면 이동 마법을 통해 재빨리 도망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드래곤의 덩치로 봤을 때 이동 마법을 시전 하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했고, 그 마나가 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인내심 따위가 드래곤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저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을 뿐이었다.

순간, 드래곤의 그 거대한 덩치가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 놀라운 움직임을 만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앞발에 비해 놀랍도록 큰 뒷다리였다. 드래곤은 재 빨리 뛰어오르며 왼쪽에 있는, 자신의 자존심인 뿔을 잘라 버린 타이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설마 저 덩치로 저렇게 재빠르 게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타이탄은 고작 방패로 앞을 막을 시간 여유밖에 없었다.

아무리 방패로 막았다고 해도 드래곤의 덩치는 어마어마했고, 그 덩치에 밀리면서 왼쪽의 타이탄이 붕 떠오르더니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드래곤은 재빨리 뻗어 있는 타이탄에게 다가가 그 육중한 다리로 타이탄을 짓밟으면서도 동료를 구출하려는 두 대의 타이탄을 견제했다. 덩치 큰 타이탄은 드래곤이 피하기를 바라면서 창을 던졌지만, 드래곤이 한눈을 팔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창은 드래곤의 공격 주문에 막혔고, 창촉을 제외한 대부분이 박살 나며 튕겨 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

드래곤은 한차례 울부짖은 후 대지의 기운을 발에 끌어 모았다. 타이탄을 짓밟고 있던 발이 짙은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재빨리 그 발을 들어 올렸다 내리 찍어 타이탄을 떡으로 만들려는 순간, 절벽 위에서 여태껏 지원 사격을 해 주던 타이탄이 방패를 놔둔 채 양손으로 창을 꽉 쥐고는 뛰어내렸다.

절벽 높이가 50미터가 넘었기에 타이탄은 엄청난 도약을 이용해 그 거대한 창을 드래곤의 등 깊숙이 찔러 넣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다가 86톤이 넘는 거대하고 무 시무시한 강철 덩어리가 드래곤의 등에 부딪쳤으니, 드래곤이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 충격을 받고 앞으로 쓰러지는 순간, 덩치가 조금 작은 타이탄이 이때가 기회라는 듯 재빨리 창을 던졌다. 그리고 덩치가 큰 타이탄은 검을 뽑아 들고 드 래곤에게 과감하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던 드래곤의 목 부위를 순간적으로 검이 훑고 지나갔고, 서서히 그 긴 목이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 했다. 일정 각도 이상 아래로 쳐지자 드래곤의 잘려진 목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거대한 드래곤이 쓰러지자 네 대의 타이탄의 머리가 뒤로 들리면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큰 타이탄에 타고 있던 인물은 타론이었다. 타론은 엄청난 드래곤의 사체를 질렸다는 듯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스펜! 아더하고 함께 레어 안을 조사해라.”

“옛!”

스펜은 아직도 드래곤의 발아래 깔렸던 그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더를 재촉하여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그들이 타고 있던 타이탄들은 공간 저 편으로 사라졌다. 타론은 타이탄에서 뛰어올라 쓰러져 있는 드래곤 위에 올라서서 드래곤의 거대한 비늘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휴, 이 거대한 녀석을 우리가 잡았단 말이지? 폐하께서 기뻐하시겠군. 그런데 예상외로 재빠른 몸놀림이었어. 이 큰 덩치가 그렇게도 엄청난 속도를 낸다는 것이 놀랍군.”

이때 타론의 옆으로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기른 예쁜 여자가 뛰어내렸다. 드래곤의 등을 창으로 찍었던 샤트란이었다. 그녀는 황금으로 멋을 낸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갑옷은 와이번의 비늘로 만들어진 최고급품이었기에 상당히 두툼해 보였지만 매우 가벼웠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엄청 힘들 줄 알았는데 별로군요, 대장.”

타론은 피식 웃었다.

“잘해 줬다. 몸은 괜찮냐?”

샤트란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떨어진 충격에 몸이 좀 욱신거리고, 군데군데 멍이 좀 들었지만…

“다행이군. 원체 드래곤이란 생명체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으니까 말이야. 놈이 그 정도로 재빠를 줄은 예상도 못 했으니까 일어난 일이었지.”

“그래도 잡긴 잡았잖아요? 그것도 별 피해 없이……”

“마리나의 추측에 의하면 이 녀석의 나이는 8백 살 정도. 기척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니까 마법도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1천 살도 안 된 드래곤이라면 브레스를 잘 뿜어 봐야 한 번, 나눠서 두 번 정도? 그렇다면 답은 나오지. 자살 공격조만 희생시킨다면 이 드래곤은 누구라도 잡을 수 있었어. 이 녀석만을 보고 전체 드래곤의 힘을 추측한다는 것은 드래곤에 대한 실례야. 아더가 당할 뻔한 것만 봐도, 이 어린 드래곤이 이 정도인데, 다 자란 놈들은 어떻겠나? 너무 자만해서는 안 돼. 알겠나?”

“예, 대장. 하지만 사실 이렇게 나약한 드래곤이라면 저희들이 나설 필요는 없었잖아요? 엘프란 기사단 정도만 동원했어도, 약간의 피해는 있었겠지만 그래 도…….”

샤트란의 말에 타론은 마치 철부지 애를 보는 듯한 조롱기 어린 눈으로 지그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눈길에 그녀가 발끈하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어린 드래곤은 있는 곳을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한다면 잡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걸 본국까지 가져가는 것은 어렵지. 그것 때문에 너희가 투입된 것이다. 그 리고 너희들을 보호하라고 나를 보내신 거지. 그렇지 않다면 본국 최고의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안티고네를 왜 끌고 왔겠나? 이번 작전은 안티고네의 실전 테스트 를 겸한 것이기도 하다. 알겠나?”

타론의 말에 샤트란은 약간 풀이 죽었다. 사실 카마리에를 지급받은 자신들과 타론 같은 최신형 타이탄, 안티고네를 지급받은 인물들은 엄청난 등급 차이가 있었 다. 안티고네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거대한 크루마 제국의 수많은 기사들 중 최고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 대장.”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절벽 위에 홀로 남아 있던 마리나가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고 판단하고 에이비에이션(Aviation : 비행 마법)의 주문을 사용하여 곧장 내려왔다. 그녀는 샤트란과 타론을 슬쩍 바라본 후 곧장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법사였기에 드래곤이 소장하고 있는 마법 서적에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가지 고 있었다. 그렇기에 타론과 잠시 잡담할 시간도 아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타론은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빨리 나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구. 마법책은 나중에 궁에 돌아가서 천천히 연구해.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