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15화 – 썩은 시체를 찾아 모이는 까마귀들

썩은 시체를 찾아 모이는 까마귀들

다크 일행은 드래곤과 타이탄들의 격전이 벌어지자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그 장대한 싸움을 구경했다. 약간의 볼거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 어린 드래곤은 드래곤 이란 이름값도 제대로 못한 채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정말 싱거운 싸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여태껏 열심히 구경하던 다크가 드래곤이 쓰러져 버리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색 유니콘이 저주받은 문장이라니 무슨 말이야?”

파시르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약간의 두려움과 원망, 절망 등 여러 가지 색채를 띠며 변하고 있었다.

“나는 옛날 론드바르 제국의 기사였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기억이 나지. 론드바르 최후의 날. 화염이 충천하던 왕궁, 비명을 지르며 뛰어가던 시민들……. 나에게 힘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도 원망스러웠던 때가 없었다. 시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하던 그 문장. 하얀 유니콘의 문장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어.”

파시르의 중얼거리는 말만으로는 도대체 유니콘을 문장으로 쓰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기에 분위기가 좀 그렇기는 했지만, 지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 다.

“유니콘을 문장으로 쓰는 나라가 어딘데요?”

갑작스런 지미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파시르는 쓴웃음을 잠시 머금은 후 내뱉듯이 말했다.

““레니아 근위 기사단 문장이다. 저 강대한 크루마 제국의…….”

“레니아 근위 기사단이라구요? 그렇다면 방금 보았던 타이탄들은 근위 타이탄이란 말입니까?”

놀라서 묻는 지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파시르는 다시 드래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대는 카마리에야. 들리는 소문으로는 출력이 1.5나 되는 괴물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방금 드래곤의 머리를 날려 버린 그 거대한 타이탄은 잘 모르겠어. 크루 마의 신형 타이탄인가?”

원체 과묵했기에 잘 몰랐지만 슬쩍 드러나는 파시르의 유식함에 라빈은 감탄했다.

“타이탄에 대해 아주 잘 아시는군요.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좀 가르쳐 주세요.” 파시르는 살짝 미소 지었다.

“사실 너는 그걸 알 필요가 없어. 나같이 타이탄을 조종한다면……. 아니군, 그 녀석은 죽어 버렸으니 이제는 나도 알 필요가 없어졌군. 타이탄을 조종하는 사람은 강한 타이탄의 목록과 유명한 기사단의 문장은 외워두는 게 장수하는 데 보탬이 되지. 특히 나 같은 용병들한테는 말이야. 그것 하나 가지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 까 말이야. 하지만 나한테 타이탄이 없다면 얘기는 달라져. 타이탄이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도망치는 게 최고지.”

“안에는 보석은 거의 없고, 마법 도구가 좀 있고 책뿐입니다. 대장.”

““마리나는?”

“마리나 경은 지금 마법책을 보신다고 정신이 없던데요?”

스펜의 보고를 듣고 잠시 생각하던 타론이 명령했다.

“아더, 스펜! 너희들은 타이탄을 불러내어 저 시체에서 비늘을 떼어 내라.”

“예!”

아더와 스펜이 다시 자신의 타이탄들을 불러내 탑승하고 있을 때 숲 속에서 두 사람이…, 아니 한 사람과 한 드워프가 말들을 끌고 나타났다. 파이어해머는 쓰러져 있는 드래곤을 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짓고는 드래곤 쪽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한 사람, 즉 베티 도니안 사제는 타론에게로 다가가서는 드래곤의 큰 덩치를 보며 놀 랍다는 어조로 물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예.”

“엄청나게 큰데 정말 빨리 끝내셨군요. 과연 레디아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분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드래곤이 어린 데다가 경험도 없었던 덕분이죠.”

“부상자는 없습니까?”

타론은 사제의 아름다운 얼굴을 힐끗 바라봤지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드래곤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이 정도 싸움에 부상자가 생길 수는 없죠.”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베티 사제가 좌우를 쭉 둘러보다가 시선을 멀리 떨어진 곳에 반쯤 녹은 채로 쓰러져 있는 두 대의 타이탄에 두었다.

“다른 동료 분들은……?”

“아마 모두들 죽었을 겁니다.”

기사였기에 약간의 죄책감을 머금은 그의 어조를 듣고, 베티 사제는 살짝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그녀의 눈에는 살짝 눈물

이 어려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몇 주 정도였지만 함께 여행한 동료들의 죽음이 슬펐던 것이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시여, 오늘 흉악한 몬스터와 싸우다가 죽은 아름다운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바른 길로 안내해 주시기를 비옵니다.”

죽은 자에 대해 생각해 주는 인물은 베티 사제 한 사람뿐이었다. 마법사는 드래곤의 마법 서적에, 그리고 나머지는 드래곤의 사체에 관심을 쏟을 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보통의 파티들처럼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존자가 있는지 숲 속을 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숲 속을 뒤지는 귀찮은 작 업을 생략했고, 또 살아 있다면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튀어나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숲 속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당연히 ‘미끼’로 쓴 동료들이 모두 죽었다고 간단하게 결론짓고 재빨리 다음 작업으로 넘어갔다.

파이어해머의 지시 하에 드래곤은 천천히 분해되었다. 파이어해머가 끌고 온 말에는 금속으로 된 용기들이 여러 개 실려 있었는데, 그 통마다 드래곤의 살과 피가 가득 담겨졌다. 드래곤의 피와 살은 마법을 통해 만들어지는 합성 생물인 키메라의 귀중한 재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피와 살은 잘 썩지 않기에 재빨리 본국으로 보낼 필요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달 정도밖에 버티지 못하기에 이것은 조만간에 마리나가 동굴에서 나오면 바로 공간 이동시켜 본국으로 수송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뼈가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이 많은 드래곤의 뼈와 비늘은 도저히 공간 이동 마법으로 수 송할 만큼 만만한 양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수송로를 철저히 연구해 놓은 후 사냥을 시작했었다.

그들의 시체 분해 작업은 식사 때문에 멈췄다. 아무리 일을 하려고 해도 배가 고프면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그렇기에 베티 사제가 요리를 시작 하자 아더와 스펜이 드래곤과 싸웠을 때 쓰러지거나 반쯤 타 버린 나무들을 적당히 잘라서 가져왔다. 샤트란은 말에서 요리 도구와 식료품을 가져다주었다. 큼직한 휴대용 냄비에서 스프가 끓기 시작하고, 소금에 절여 놓은 돼지고기가 익기 시작하자 그 냄새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졌다.

꼬르르르륵.

막상 배가 고픈 줄도 모르다가도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면 참기 힘들다. 지미의 배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다크는 지미에게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지미는 주책 맞은 배 덕분에 얼굴색이 약간 빨개졌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다크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지미, 라빈.”

“예?”

“너희는 석궁을 가지고 가서 아무거나 잡아다가 요리해라. 그리고 파시르는 저 녀석들 좀 도와주고.”

“같이 안 가실 겁니까? 잘못하면 서로 길이 어긋난다구요.”

“괜찮아. 한 시간쯤 후에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감시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은연중에 상당히 높은 계급 차를 드러내고 있는 이들을 파시르는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 더 이상 눈치 볼 곳이 없었기에 공손하게 말하는 지미, 그리고 대놓고 하 대를 하는 다크. 누가 봐도 동료라기보다는 주종이었다. 파시르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랜 용병 생활의 습성상 상대가 말해 주지 않는데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 았다. 알아서 좋은 게 있고 몰라서 득 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한시간쯤 타론 패거리를 감시하던 다크는 더 이상 별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크는 자신들을 드래곤 이 뿜어내는 녹색 가스의 희생물로 써먹은 저 녀석들에게 꽤나 감정이 있었지만 아직은 복수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타이탄과 함께 생명을 끝마친 네르만이 여기까지 오면서 뭔가 흔적을 남기는 모습을 본 것만 스무 번은 족히 되었다. 처음 네르만이 무엇인가 숨기는 것을 우연히 보고 그를 꾸준히 감시했지만, 그녀가 못 본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다크는 네르만이 흔적을 남기면서 기다렸던 그들이 누군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고, 다크는 오늘 저녁때쯤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그들의 발자국을 좇기 시작했다.

과거 살수 생활을 했던 경험에 의해 다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일행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으니 사냥을 해서 가죽을 벗기고, 불을 피워 고기 를 익혀 놓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물론 사냥감을 30분 이내에 사냥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료들을 추격해 가던 다크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발자국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느 사이인지 일행의 발자국, 그러니까 지미, 라빈, 파시르가 남긴 발자국 에 누군지 모르는 또 다른 네 번째 인물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다크가 그것을 조금 뒤늦게 눈치 챈 것은 모두의 신발 바닥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여행에 사용되는 신발은 두터운 가죽을 4, 5겹으로 깔아서 만든 것들이었 다. 아주 귀족들이 신는 신발들의 경우 거기에 모양을 낸 후 뒤 굽을 붙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는 신발은 그렇지 못했다. 또 대단히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하 는 경우 신발 바닥에 얇은 철판이나 구리판을 덧대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말굽에 붙이는 편자까지 박기도 하지만 일행들의 경우는 모두 말을 타고 왔기에 철판을 댄 신발은 아니었다.

새로 끼어든 발자국의 크기로 봤을 때는 남자, 그것도 6척 반(약 190센티미터)은 됨직한 거구의 사내였다. 그리고 발가락 부위에 무게가 걸린 것으로 봤을 때 무예 를 수련한 인물이었다. 언제든지 자신의 몸을 날릴 수 있도록 준비된 무사……. 보폭이 매우 일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발에 밟힌 풀이 꺾여 있는 각도나 발자국에 남아 있는 수분 등으로 추측하건대 지나간 시간은 3각(45분) 정도? 또 일행이 지나갔음직한 시간도 그때쯤인 것을 보면 뒤에서 몰래 따라가고 있는 모양

이었다. 그런데도 일행의 발자국에 그 어떤 반응도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은 추격당한다는 사실 자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지미와 라빈만이라면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시르는 얘기가 다르다. 용병 중에서도 그래듀에이트급이 아닌가? 그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크는 재빨리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일행을 찾기 시작했다.

다크는 그로부터 10분도 되지 않아 일행을 찾아냈다. 일행들은 자신들의 위험도 눈치 채지 못하고 느긋하게 뭔가를 불에 굽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쪽에서 다크가 땅을 밟지도 않고 풀 위를 밟는 초상비(草上飛)의 경신술을 이용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자 놀란 눈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다크는 자신을 귀신 보듯 얼이 빠져 바라 보고 있는 세 명을 무시한 채 어둠침침한 숲 속을 향해 외쳤다.

“거기 숨어 있는 녀석! 빨리 튀어 나왓!”

그 말에 일행들은 더욱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미쳤나?’하고 생각했겠지만, 다크가 바라보던 숲 속 방향에서 진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숲 속에서 나온 사람은 도대체가 이런 숲 속에서 만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검을 차고는 있었지만, 갑옷 따위는 아예 입지도 않았고, 간편한 여 행복 차림을 하고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약간 붉은색이 도는 머리카락을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그 머리카락을 슬쩍 뒤로 넘기면서 걸어왔다. 다시 말해서 그 녀석은 한 몇 시간 산책 나온 것과 같은 모습으로 이 깊은 산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살짝 살기를 내뿜고 있는 소녀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풀 위를 달려오는 소녀의 그 놀라운 기술과 자신의 위치를 단번 에 포착해 냈음에도 별로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요?”

하지만 소녀는 그를 향해 싸늘한 눈길만을 던질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때쯤 정신을 수습한 다크의 동료들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지만 그 남자의 말에 동 작을 멈췄다.

“가만히 계세요. 지금 저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여태껏 기척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크의 그 놀라운 기술을 보고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일행은 그가 뭔가 단단히 믿는 것이 있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은 실력 행사라는 단순무식한 수단은 최후에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검 쪽으로 가져갔던 손을 원상 복구했다. 지금은 검을 꺼내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지미는 일단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마자 불에 굽고 있던 고기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빈은 한 마리 더 잡아 놓은 토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좀 더 크고 귀는 작은 ‘티칸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일행 중에서 가장 실력이 뒤떨어지는 두 사내가 일단 싸우지 말자는 간접적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계속 하던 일을 하자 약간 놀 랐다. 이 말은 자신의 갑작스런 등장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협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눈앞의 소녀를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었고, 또한 소녀는 그 정 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 이름은 제임스. 코린트의 기사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말했는데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소녀를 흥미롭게 지켜본 후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지금 위에서 드래곤의 사체를 분해하고 있는 녀석들과 동행인가요?”

“방금 전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소녀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향해 하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직위, 또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을 빨리 떠나십시오. 조만간에 이곳은 전쟁터가 될 테니까요.”

“썩은 시체를 찾아 모이는 까마귀들의?”

“독수리들의!”

까마귀에서 독수리로 등급을 올리려고 용을 쓰는 그의 대꾸에 소녀는 피식 웃었다.

“독수리도 덩치만 조금 더 클 뿐, 썩은 시체를 향해 모여 드는 것은 마찬가지지.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 테니까 참견하지 말도록.”

소녀가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이제 티칸까지 굽기 시작하는 불 가에 앉았다. 그 남자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뭔가 구실을 붙여서라도 좀 더 얘기를 나눠 보고 싶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참견하지 않을 테니 고기 좀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저도 배가 고프군요.”

“고기는 충분하니까 거기 앉아.”

일행은 익은 티칸부터 적당히 잘라서 뜯어 먹기 시작했다. 모두 배가 고파 음식에 정신이 팔린 탓도 있었지만, 이 미지의 방문객이 껄끄러워 대화는 거의 오고 가 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라는 인물은 부지런히 먹으면서도 소녀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도대체가 말도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실력. 겨우 열여섯 살이 될까 말까 해 보이는 소녀가 그래듀에이트들 중에서도 높은 수련을 쌓은 인물들 만이 가능한, 풀을 밟고 달리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고, 또 자신의 위치를 손쉽게 포착해 냈다는 것은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임스는 음식도 씹으랴, 소녀도 힐끔거리랴, 생각도 하랴, 너무나도 바빴다. 일단 소녀의 옷차림으로 봤을 때는 마법사 같기도 했다. 또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신관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근력 증가 따위의 신성 마법을 쓴다 해도 풀 위를 뛰어다니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 마법사라고 가정한 다면 풀 위를 뛰어 다니는 성가신 방법보다는 비행 마법을 사용해서 날아왔을 것이다. 또 마법사라면 자신의 몸속에 축적된 마나의 기운을 읽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감히 이렇게 당차게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소녀는 단순한 모양의 검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셔츠에 스웨터 정도의 간편한 옷차림, 짙은 갈색의 바지를 입고, 낮은 뒤 굽이 붙어 있는 매우 고급 여성용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귀족일까? 아니면 왕족? 아니면……? 뭐가 또 남아 있지? 축적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검은 그냥 모양으로 차고 다니는 게 확실한 것도 같은 데…….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제임스가 의문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적당히 고기를 뜯어 먹은 소녀는 손수건을 꺼내 손을 쓱쓱 닦으면서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네르만이 남겨 놓은 표식을 따라 왔나?”

제임스는 그녀의 어조에서 퉁명스러움이 사라지자 꽤 맑고 고운 음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말의 뜻이 머릿속에서 이해되자 일순 당황했지만 그걸 억 누르면서 조용히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너 혼자는 아닌 것 같은데? 몇 명이나 왔지?”

제임스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역시 이 아이도 코린트가 가지는 이름의 위력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군.’

사실 코린트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제국. 드래곤 사체 강탈 작전에 한 명의 기사만을 투입했을 리 없었다. 드래곤 사체가 싸구려도 아니고, 또 그 무게도 엄 청났다. 그걸 가져가려면 엄청난 인력이 필요한 것이다.

“쓸 만한 부하 몇 명을 데려왔습니다.”

“언제 공격할 거지?”

“예정대로라면 내일 아침에요. 아침밥 먹고 나서 식후 운동 겸 한판 할까 생각 중이죠.”

제임스의 대답에 소녀는 피식 웃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치면 만용(蠻勇)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제 부하들과 저의 실력을 믿을 뿐이죠. 제 부하들은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요.”

제임스를 향해 뭐라고 말할 듯하던 다크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봤다. 제임스도 그 시선을 따랐고, 다크와 제임스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 리자 일행들도 무슨 일인가 해서 하늘을 쳐다봤다. 하지만 원체 짙게 우거진 숲이라서 거대한 나무들에 가려 별빛도 거의 보기 힘들었다.

이때 나뭇가지를 뚫고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정통적인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자신과 일행들의 실력 또는 그 뒷배경에 자 신 있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감히 아르곤에서 마법사의 정식 복장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새로이 나타난 마법사는 60세는 되어 보이는 쭈그렁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땅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제임스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런 그를 보고 제 임스는 약간 못마땅해 했다.

“무슨 일이냐? 아직 집결 시간이 안 되었을 텐데?”

마법사 영감은 쉰 듯한 껄끄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의외의 사건이 벌어져서 대장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

“적의 규모는?”

“일단 합류하셔서 작전을 토론하시는 편이…….”

제임스는 다크일행을 힐끗 바라본 후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상관없으니까 말해라.”

제임스는 여기에 조금 더 있으면서 상대에 대해 탐색도 하고 싶었고, 또 상대에게 약간의 정보를 누설해 그에 따른 반응도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르곤의 성기사단입니다. 대략 1백여 명 정도로 추정되며, 타이탄의 수는 알 수 없습니다.”

“1백 명? 그런데 아르곤에서는 어떻게 냄새를 맡았지? 알 수가 없군.”

노마법사의 보고를 듣고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제임스을 향해 소녀는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도 알고 왔는데, 또 다른 첩자가 하나 더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요. 그럼 그 첩자는 누구죠? 당신인가요?”

약간 농담조로 제임스가 말하자 다크는 살짝 미소 지었다.

““나일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왜?”

“만약 당신의 자신감이 겨우 성기사 1백 명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내일 아침에 뜨는 해를 보실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해서 자신의 생명을 단축

시킬 정도로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을 대로 생각해. 그런데 언제 싸울 건지는 나한테 가르쳐 줘야 해.”

“왜 그러시나요?”

“그거야 가장 좋은 볼거리는 남의 집 불구경하고 싸움 구경이라고 하잖아? 당연한 거지.”

소녀의 대답에 제임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레이디. 하지만 지금 모여 드는 독수리 떼의 숫자가 숫자인 만큼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까마귀 떼가 좀 모여 봐야 별수 있어? 그리고 레이디란 소리는 빼! 나는 그 말만 들으면 그 소리를 내뱉은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나니까 말이야.”

“아주 과격하시군요, 레…….”

제임스는 하던 말을 황급히 멈추고 노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부하들을 적당하게 회피시켜라. 그리고 성기사들을 저 위대하신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과 부딪치게 만들어. 그런 후 결과를 두고 보기로 하지.”

제임스는 일부러 타론 일행을 ‘위대하신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라고 부르며 비꼬았다. 제임스는 약간 늦게 도착해서 시작 부분은 못 봤지만 타이탄들이 드래곤 을 때려잡는 모습은 볼 수 있었기에 그 정도 드래곤을 드래곤이라고 부르기 아깝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노마법사는 제임스의 지시를 듣고는 마법의 힘을 이용해 재빨리 몸을 띄워 올렸고, 곧 나뭇가지 위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이동하는 것이 좋겠군요. 잘못하면 성기사들에게 포착되어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제임스의 말에 다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