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16화 – 소녀, 정체불명

소녀, 정체불명

모든 사람들이 꿈에서도 그리는 영광스러운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획득한 인물들. 그들은 열심히 작업하여 드래곤의 피와 살의 일부, 그리고 드래곤의 레 어에서 발견한 모든 물품들을 그날 저녁 마법을 이용해 본국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철야 작업을 감행하여 드래곤의 뼈와 비늘을 거의 다 해체하고는 드래곤 사체 옆에 쌓아 두었다. 이제 드래곤에게 남은 것은 저 시뻘건 고깃덩어리뿐..

타론은 밤샘 작업으로 인해 핏발이 선 눈으로 스펜을 바라보았다.

“도우러 씨는 언제 온다고 하던가?”

“약속대로라면 오늘 점심때쯤 도착할 겁니다, 대장.”

““마리나는?”

“본국에 보내지 않은 마법책을 잡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한 권을 슬쩍 해서는 감춰 둔 걸 보면 말입니다. 불러다 드릴까요?”

“불러 올 필요까지는 없고, 마리나에게 지금 당장 여기 좌표를 본국에 확실하게 알리라고 해. 만약의 경우 지원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도우러가 늦게 온 다면 어차피 오늘 밤도 여기서 지내야 한다. 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도도 증가하지. 또 산맥을 넘어서, 랜트 국가 연합까지 가려면 1백 킬로미터를 가야 해. 도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타이탄 네 대면 꽤 쓸 만한 전력이긴 하지만 이곳 아르곤에서는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어. 본국에서 지원 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나 끄는 정도지. 이번 일을 성공하려면 본국과의 연계가 매우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마리나 경께 전하겠습니다.”

스펜은 동굴 안에서 마법책을 읽고 있는 마리나에게 달려갔다. 부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타론이 중얼거렸다.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훗! 안티고네까지 가지고 왔으면서 이런 나약한 생각을 하다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내야지!”

이제 드래곤의 해체 작업은 완전히 끝났고, 모두들 곧 도착할 도우러 일행을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아르곤의 성기사단은 싸움을 걸지 않았다. 별로 재미없다고 생각하며 소녀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싸우지 않는 거지?”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목소리가 컸기에 일행들에게 다 들렸다. 먼저 대답을 한 것은 제임스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가?”

제임스는 그녀의 오빠라도 되는 양 제법 자상하게 설명했다. 제임스는 소녀를 줄곧 관찰해 본 결과 어느 정도 그녀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아르곤 제국 내에 있는 최대의 산악 지대죠. 여기 살고 있는 드래곤만 해도 네 마리 이상입니다. 그 넷은 매우 포악하기에 잘 알려져 있는 녀석들이고, 알 려지지 않은 드래곤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드래곤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곳에서 타이탄을 가지고 대규모 전투를 벌여 보십시오. 어떻게 될지……. 드래곤의 사체를 포획하기는커녕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드래곤은 동료가 죽었다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지만, 주위가 소란스러운 것은 못 참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일단 이 산맥을 벗어난 후에 전투를 벌이든지, 아니면 교섭을 할 테죠.”

“그런데 왜 너희들은 드래곤이 죽은 다음 날 아침에 공격할 생각을 했지? 드래곤이 참견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당연한 겁니다. 아르곤인들은 산맥을 벗어난 후에도 아르곤 땅이 이어지기에 기다릴 수 있지만, 저희들은 다릅니다. 저희는 사람이 없는 여기에서 후딱 한 판하고 끝내야 하거든요. 사람들이 여기서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채면 곤란하니까요. 하지만 그 계획도 물 건너 간 것 같군요. 지금은 레디아 기사단과 아르곤의 성기사단(聖騎士團)을 함께 상대해야 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죠. 격투가 오래 지속되면 드래곤이 참견할 가능성이 아주 커집니다. 그러면 일이 더 꼬이게 되니 지금은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없어요.”

이제 좀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소녀를 보며, 제임스는 이 소녀를 계속 데리고 다닐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제임스가 소녀를 관찰해 본 결과 내린 결론은 ‘마법사’였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였다. 마법사나 정령술사, 신관은 자신의 몸속에 마나를 축 적하지 않고, 체외의 마나를 이용하기에 검객인 자신이 알아보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렇기에 제임스는 숨어 있는 자신의 부하들과 연락병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마법사에게 소녀의 정체에 대해 슬쩍 물어봤다. 노마법사는 상관의 명령에 흔히들 쓰는 수법인 뷰 마나 포스의 주문과 뷰 매직 포스의 주문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대단히 뛰어난 무사가 된다면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 있다. 즉, 체외로 은근슬쩍 새 나가는 마나의 기운을 아예 차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뷰 마나 포스의 주문을 사용하면, 이 주문은 몸속에 쌓인 마나의 절대량을 보여 주는 주문이기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가 있다고 해도 알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밖으로 새 나가는 마나를 단지 차단하는 것뿐이지 몸속에 쌓여 있는 마나를 체외 어딘가에 이동시켜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은 평범했다. 뷰 마나 포스라는 마법이 소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풀 위를 걸어 다닐 수는 없으니 마나를 숨긴다는 말이 되고, 그 말 은 곧 소녀가 하이드 마나 포스라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다면 하이드 마나 포스가 뿜어내는 마법의 기운이라도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뷰 매

직 포스를 사용해도 마법의 기운은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법의 기운도 함께 숨겼다는 대답이 된다. 즉, 소녀는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도 정신력이 남아 도는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이었다.

교활하게도 비행 주문을 사용해서 ‘풀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척하는 연극을 하는 바람에 제임스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만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해서 소녀가 마 법사라는 게 드러났다.

마법사라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소녀가 설혹 마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모습을 젊게 변화시킨 할망구쯤 되는 엄청 나이 많은 대마법사라고 해도 제임스의 적은 될 수 없었다. 수련 기사쯤 되어 보이는 두 청년들이 그녀에게 깍듯이 대하는 걸로 봤을 때, 또 그녀가 인간이라고 부르기에 벅찰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점으로 보아, 저 모습은 마법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모습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마법을 꽤나 사용할 줄 알면서도 기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신분이 꽤나 높은 철부지 소녀든지….

제임스는 국왕께 충성하고, 정의를 숭상하고, 또 레이디를 존중해야 하는 기사였기에 대충 그녀에 대해 파악했다고 해서 막 대할 수는 없었다. 또 그녀가 마법사라 면 아르곤이란 광신도 집단과는 아예 상관없다는 게 증명되는 것이었기에 소녀를 제법 존중해 주는 척했다. 하지만 이제 제임스는 소녀에게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 어가야 할 사항이 생겼다. 그것은 이 소녀 일행이 자신에게 적이냐 아군이냐를 분명히 알아내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소녀에게서 두 걸음 정도의 거리로 슬쩍 다가섰다.

“레… 에…, 당신도 드래곤 사체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있다면?”

“경쟁자는 적을수록 좋으니까 여기서 끝장을 보는 게 좋겠죠.”

제임스가 약간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자 소녀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겨우 그 실력으로?”

“……”

제임스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소녀는 또다시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죽어 버린 드래곤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제임스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약간 철부지인 이 소녀가 제법 마음에 들었던 제임스로서는 그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조금 망설여지던 참이었다. 소녀의 목 적이 드래곤의 사체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시켜 줄 수 있었다. 이제 제임스는 어느 정도 쾌활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면 살아 있는 드래곤에게는 관심이 있으십니까? 여기 꽤 이름난 포악한 드래곤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소원을 풀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저기 연기 가 피어오르는 화산(火山)이 보이시죠? 저기에 성질 더러운 레드 드래곤이 한 마리 살고 있죠.”

그 말에 소녀는 흥미를 나타냈다.

“레드?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 말이야?”

호기심이 짙게 배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임스는 호기심 왕성한 자신의 귀여운 조카가 생각났다. 표정이 약간 비슷한 데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드래곤은 실버입니다. 레드는 육상에 돌아다니는 드래곤들 중에서 최고로 강하죠.”

“한번 봤으면 좋겠군.”

“이번 일이 끝나면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면회 신청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슬쩍 숨어서 구경하는 정도는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때 노마법사가 비행 마법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노마법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기절한 남자가 한 명 쥐어져 있었다. 노마법사는 땅바닥에 착지하면서 그 남자를 땅바닥에 던져 버린 후 제임스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꽉 쉬어 버린 것 같은 목소리는 듣기에 매우 껄끄러웠다.

“성기사단 뒤편에 또 다른 패거리가 나타났습니다. 당나귀 1백여 마리, 그리고 말 30마리 정도를 가진 20여 명의 상인들입니다. 아마도 드래곤의 뼈와 비늘을 운 반하기 위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성기사단이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길을 열어 주는 것까지 보고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은 드래곤 슬레이어와 일행 같은데, 숲 속을 헤매고 있길래 정보라도 좀 획득할 수 있을까 해서 잡아왔습니다.”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고? 일단 깨워라.”

노마법사가 주문을 외워 상대에게 걸어 놨던 마법을 풀자, 엎어져 있던 그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작은 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근육들, 애늙은이 같은 주름진 얼굴에 짙은 수염, 드워프였다.

“여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드워프의 시선은 곧이어 뒤쪽에 서 있던 소녀에서 멈췄고, 곧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으로 이동했다.

“살아 있었군.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야?”

제임스는 왼손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드워프의 멱살을 쥐고는 간단히 일으켜 세웠다. 아니, 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정말 상당한 완력이었다. 왼손만으로 드워 프의 다리가 땅에 닿지 않게 잡아 올렸으니까 말이다. 그다음 제임스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숲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는지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상대가 위압적으로 나오자, 드워프는 자신이 왜 숲에 들어가 있었는지 말해 줘도 상관없었지만 약간 오기가 치솟아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고 제임스는 조금 더 짙 게 미소 지으며 오른손으로 드워프의 왼손 손가락을 잡은 후 살짝 힘을 줬다.

뚝!

“크흑!”

드워프는 발광했지만 제임스는 마치 바위덩어리라도 되는 듯 끄떡도 안 했다. 오히려 고통과 두려움에 발광하는 드워프를 잡고 자근자근 다지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은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듯, 그 손에 잡힌 드워프의 신체는 곧장 힘없이 꺾여 버렸다. 바둥거리며 자신을 향해 발길질을 하던 드워프의 두 다리를 꺾어 버린 후 제임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도 말하고 싶지 않나요?”

“마…, 말하겠다. 검을, 검을 찾고 있었다. 검을..

“검이라고요?”

“다크…, 다크가 가진 검은 우리 드, 드워프의 걸작. 다크는 죽었다고 해도 검은, 검은 안 녹고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걸, 그걸 찾고 있었다.” “드워프의 걸작이라고요?”

두려움과 고통의 광기에 가득 차 있는 드워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임스. 그는 소녀가 가진 검 쪽으로 흥미로운 시선을 돌렸다.

꽤 잔인한 고문에 소녀의 주위에 서 있던 세 남자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지만, 소녀는 태연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제임스는 소녀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솟아났다. 순수하게 강함만을 추구하는 광기(狂氣). 자신의 힘을 잘 알고, 또 그 힘을 어떻 게 행사해야 할지를 잘 아는 인물. 하지만 제임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소녀의 눈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았기 때문이 다.

제임스는 다시금 시선을 드워프 쪽으로 돌렸다. 검사가 검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것은 매우 당연했지만, 제임스는 이미 황제 폐하로부터 하사받은 좋은 검이 있었 고, 또 자신은 이제 검의 좋고 나쁨에 구애받는 경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군데군데 뼈가 부러져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반쯤 미친 드워프를 노마 법사에게 던졌다.

“치료해 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