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17화 – 교섭
교섭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은 숲 속에 뭔가 찾을 게 있다고 들어간 파이어해머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예정대로 출발했다. 겨우 드워프 하나 때문에 지체할 수 없을 정도 로 이번 임무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작은 비늘이나 뼈는 당나귀에 싣는 데 문제가 없었고, 큰 뼈나 비늘은 타이탄을 사용해서 토막을 쳐 놨기에 당나귀에 싣는 것 역 시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도우러 일행이 도착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했다. 거의 4일에 걸친 강행군 끝에 그들은 그랜디아 산맥을 넘어 아르곤 내륙의 거대한 항구 도시 아르네이아 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르네이아는 거대한 수송선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운하(運河)가 있었기에, 이곳에서 배편을 이용해 랜트 국가 연합으로 이동할 생 각이었던 것이다. 또 산맥을 넘자마자 가장 가까운 도시로 들어온 이유 중에는 도시 안에서 타이탄 전쟁을 벌일 미친놈들은 없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타론은 일단 아르네이아시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띌 정도로 긴장감을 풀었다. 이번 작전은 거의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우러 씨가 임대해 놓은 창고에서 푸대 자루에 넣어 운반해 온 드래곤의 뼈를 타인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큰 나무 상자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재빨리 도우러 씨가 이미 수배해 놓은 화물선에 실렸다.
부두 근처의 창고에 있던 나무 상자들을 화물선으로 운반하고 있는 광경을 이제 조금은 느긋해진 표정으로 바라보던 타론은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 다.
““대장!”
타론이 뒤를 돌아보자 스펜이 눈짓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타론의 시선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곧 타론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10여 명에 달하는 성기사들이 그들 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론은 상대의 허리에 달려 있는 짧은 막대기 같은 물체, 즉 오라 소드(Aura Sword)를 보고 그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타론은 슬쩍 자신의 검이 있는 곳으 로 손을 가져가 평소에 검이 뽑히지 않게 묶어 둔 끈을 풀어 버렸다. 타론의 움직임을 보고 모두들 검을 약간씩 뽑아 놓거나 아니면 타론처럼 끈을 풀었다.
가까이 접근해 온 성기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고, 타론 일행도 일단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형제들. 그 이름도 드높은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기 지휘자가 누구신가요?”
타론이 굳은 표정으로 살짝 앞으로 나섰다.
“접니다.”
“예, 저희들은 형제들이 본국의 영토 안에서 드래곤을 잡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떠나시면 국제 관례상 말이 안 되지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엄연히 본국에서 취득하신 것이니까, 드래곤본(뼈)의 80퍼센트에 대한 권리는 국제 관례상 본국에 있습니다. 물론 슬쩍 도망가셨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들이 알 게 된 마당에 그걸 부인하지는 못하시겠죠? 물론 형제들이 드래곤을 잡으시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신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20퍼센트만 가지고도 형제들은 평생 을 쓰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부(富)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또 그와 함께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영광스런 칭호도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만 해도 형제들의 고생에 대한 충분한 대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타론은 칼만들지 않았다 뿐이지 완전히 날강도 같은 성기사를 노려봤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타론은 눈빛을 누그러뜨리면서 공 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80퍼센트는 너무 많습니다. 조금 양보해 주십시오. 국제 관례상 던전 발굴 등을 했을 때 80퍼센트의 세금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 은 드래곤을 잡기 위해 두 대의 타이탄이 파괴되었고, 여섯 명의 동료를 잃었습니다. 또 드래곤 본을 운반하기 위해 수십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죠. 그들에게도 뭔가 돌아갈 몫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점을 좀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세금을 감면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관님 이상의 고위급 사제나 교황 성하께서만 결정하실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오가는 동안에 2백여 개에 이르는 나무 상자들은 모두 화물선에 실렸다. 저쪽에서 도우러 씨가 살짝 손짓으로 모든 화물이 적재되었음을 알려 주자 타론은 눈짓으로 응답했다. 타론이 검을 뽑은 것과 도우러 씨가 화물선에 출발 신호를 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타론은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고 여태껏 입씨름 을 하고 있던 그 얄미운 성기사 녀석을 엄청난 스피드로 두 토막 내 버렸다. 그리고 타론의 움직임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든 세 명의 부하들도 성기사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격투가 원체 엄청난 속도로 전개되었기에 여덟 명의 목숨이 날아간 후에야 성기사들은 허리에서 무기를 뽑을 수 있었다. 성기사들이 손에 쥐고 있는 그 막대기에 서는 투명한 청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검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냈다.
샤이하드의 권능을 상징하는 오라 소드. 웬만한 공격 마법은 막아 낼 수 있고, 싸구려 검 따위는 단번에 두 토막을 낸다. 그런 신성한 무기를 상대가 뽑아 들자 어느 정도 서로 간의 균형이 맞았지만, 상대는 크루마 제국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인 근위 기사단이었다.
아무리 아르곤에서 샤이하드의 권능을 자랑하며 성기사의 무서움을 자랑하고, 타국의 기사를 멸시했다 하더라도 정말 뛰어난 타국 기사와는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었기에, 성기사들은 톱클래스의 기사들이 가지는 그 강인한 힘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싫어도 맞붙게 되었으니 결과는 당연했다.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에 거대한 화물선의 돛은 팽팽하게 부풀었고, 배 옆에 지네발처럼 나와 있는 수십 개의 노를 일사분란하게 저어 부두를 떠나고 있을 때, 성기 사들과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의 격전은 최고조를 달렸다. 성기사들은 한 명씩 한 명씩 기사들의 검날 아래서 목숨이 끊어져 갔다. 아무리 신성력에 의존해서 근력
증가를 시켰다 하더라도, 또 오라 소드라는 엄청난 신성 마법 병기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검술이 떨어지는 그들은 근위 기사단의 상대가 되기는 힘 들었다.
타론은 피 묻은 검을 쓱 닦아서 검집에 집어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본국에 증원을 요청해라.”
타론의 명령에 마리나는 장거리 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리나가 통신을 하는 것을 힐끗 보면서 타론은 스펜에게 명령했다.
“너희 셋은 지금부터 도우러 씨를 보호하고, 또 그가 하는 일을 도와라. 그리고 마리나와 베티 사제님을 부탁한다.”
“하지만 대장, 드래곤 본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멍청한 녀석들! 너희들이 가져온 타이탄은 카마리에다. 그걸 꺼내서 크루마 제국의 근위군이 아르곤에 들어와서 무력을 행사했다는 걸 광고하고 싶냐? 내가 가 진 녀석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드래곤과 싸우면서 외장 페인트까지 다 날아가서 문장 등의 표식이 하나도 없다. 지원하러 올 타이탄들도 모두 표식이 없는 녀석들이다. 너희들이 끼어들면 오히려 일만 더 복잡해져. 목숨을 걸고 도우러 씨를 도와라. 알겠나?”
“옛, 대장”
“도우러 씨, 뒷일을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마음 놓으십시오.”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한쪽 공간에서 뿌연 빛을 뿜으며 여섯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가벼운 갑옷을 입거나 아니면 아예 갑옷 따위를 생 략한 인물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대단히 좋은 고급 검을 차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타론은 재빨리 다가가서는 그중 옅은 금발 머리를 가진 청년에게 공손히 인사 했다.
“루엔 공작 전하, 안녕하셨사옵니까?”
그 말에 청년, 즉 루엔 공작은 살짝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본국에 지원을 청할 정도로 사태가 안 좋은가?”
“예, 전하. 완전히 들통 난 상태이옵니다. 그래서 2단계 작전을 실행 중이옵니다. 일단 놈들의 이목을 딴 곳으로 집중시켜야 하기에…….”
루엔 공작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냉랭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쓸모없는 녀석! 그것 하나 기밀 유지를 못 하다니……. 가자!”
루엔 공작 일행은 강 위를 달리고 있는 화물선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르곤의 영토 내에서 이 화물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려야 할지는 그 누 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성기사단이 화물선을 추격 중입니다. 그리고 화물선 주위로 엄청난 실력의 기사들이 호위 중입니다. 증원을 요청한 모양입니다.”
껄끄러운 노마법사의 목소리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제임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증원이라고? 그럼 호위 무사의 수는?”
“일곱 명입니다.”
“일곱? 하! 겨우 그걸로 호위를 하겠다고?”
“겨우 일곱이 아닙니다. 마스터급이 한 명 끼어 있습니다.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마스터급이라고?”
“예, 뷰 마나 포스를 통해 얻은 정보입니다.”
노마법사의 말에 제임스는 히죽 미소 지었다.
“마스터라…, 재미있겠군. 일단 눈치 채지 못하게 계속 추격하도록!”
“예.”
제임스와 마법사가 한쪽 구석에서 서로 쑤군거리는 것을 슬쩍 곁눈질로 보면서 지미가 말했다.
“더 이상은 위험합니다. 지금 각국에서 타이탄들과 기사들을 투입하는 것 같은데…….”
지미가 또다시 설득을 하려고 들자 다크는 그의 말을 도중에 가로막았다.
“……”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오늘도 봐! 돈 주고도 못하는 구경을 했잖아? 성기사라는 것들 제법이던데? 그 오라 소드란 것도 대단히 멋있었어. 성기사라는 녀석들이 오 라 소드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제법 강력해 보이더군. 밤에 구경했으면 정말 멋있었을 텐데……. 안 그래, 파시르?”
파시르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소녀에게 대답했다.
“응.”
보통 여자들은 피 튀기는 싸움, 방금 전과 같이 확실히 상대를 보내기 위해 베는 것이 아니라 두 토막을 치는 잔인한 광경을 보면 먹은 것을 다 토해 내든지 기절을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격전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이런 눈동자를 가진 여자를 보려면 용병
단 외에는 없을 거라고 파시르는 생각했지만, 소녀의 나이로 봤을 때 도대체가 솜씨 있는 용병이 될 시간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 파시르.”
“왜?”
“타이탄도 부서졌는데, 이 일 끝나고 나면 뭐 할 거야?”
“용병 일이나 또 시작해야지, 별수 있어? 남들처럼 대단한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누구한테 얽매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지난번처럼 운 좋으면 타이 탄 하나 전장에서 주울지도 모르지.”
“그러지 말고 내 밑에서 일해 보지 그래. 충분한 자유 시간, 높은 보수, 거기에다가 타이탄도 한 대 줄 테니까 말이야.”
소녀의 천진난만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파시르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타이탄이란 게 그렇게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타이탄 한 대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파시르는 예의상 이 철없는 아가씨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나중에 이 말 한마디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도 모른 채…….
“말만이라도 고맙군.”
“교섭이 결렬되었습니다, 단장님.”
단장은 은빛 찬란한 성기사의 정식 갑옷을 입고 보고를 올리는 부하에게서 시선을 돌려 항구를 떠난 후 더욱 속력을 내고 있는 화물선을 바라봤다.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나?”
“모두 샤이하드 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몇몇 시신의 상태를 봤을 때 아마도 기습을 당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흠, 비열한 녀석들! 어쩔 수 없이 싸워야겠군. 20퍼센트만 가져도 충분할 텐데 과욕을 부리다니……. 저 녀석들이 먼저 도발했으니 끝을 봐야겠지.”
“하지만 단장님, 저희 기사단에 주어진 임무는…….”
“알고 있다. 하지만 먼저 놈들의 실력을 한번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단장은 화물선과 그 화물선을 보호하듯 포진하여 움직이는 기사들을 잠시 노려본 다음 출동 지시를 내렸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단장의 지시에 거대한 타이탄들이 속속 공간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크로티아르 성기사단은 아르곤의 외곽에 주둔 중인 여섯 개의 성기사단들 중 하나였다. 이 여섯 개의 성기사단은 출력 0.62의 구형 타이탄인 헤지곤을 주력으로 가지고 있었다. 물론 0.84의 출력을 지닌 타비곤도 있었지만, 고위급 성기사에게만 주어졌 다. 크로티아르 성기사단은 헤지곤 24대, 타비곤 6대, 총 30대의 타이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기사 2백여 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기사단이었다.
이번 드래곤본 탈취 작전에 동원된 기사단은 총 4개로, 크로티아르, 크로미아, 카쟈르, 타리아 성기사단이었다. 그중 수도에서 지원차 달려오고 있는 타리아 성기 사단은 1.2의 고르곤과 1.12의 라르곤 30대를 장비한 최강급 성기사단이었다. 하지만 타리아 성기사단을 제외하고도 거의 90여 대의 타이탄이 동원된 만큼 타리아 기사단이 투입되기도 전에 드래곤본의 탈취는 끝나지 않을까 하고 모두들 추측하고 있었다.
단장은 타이탄에 올라타며 외쳤다.
“화물선을 격침시켜라. 강물 속으로 가라앉은 화물은 건지면 된다. 적들이 강한 것 같으면 시간을 끌어라. 두 개의 성기사단이 세 시간 내로 도착할 것이다. 형제들 이여! 드래곤본을 교단에 바치자! 샤이하드의 가호(加護)가 함께 하기를!”
그러자 성기사들도 각자 오라 소드를 뽑아 들고 외쳤다.
“샤이하드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돌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