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6화 – 제2친위 기사단 조직
제2친위 기사단 조직
때는 봄,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그들의 여행로는 이제 크라레스 제국에 병합된 영토들이었기에 도중에 산적패를 한 번 만났을 뿐, 어떤 조직적인 습격도 받 지 않았다. 그것도 다 타이탄 수송이라는 것이 밖에 드러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드미트리 실바르가 거느린 일행은 8일에 걸친 강행군으 로 크라레스 제국, 치레아 지구의 도톤시에 위치한 총독 관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독관저는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기에 매우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리고 관저 안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는 다 치워 버렸지만 아름다운 왕비 들의 초상화는 남겨 뒀기에 아주 보기 좋았다.
팔시온 일행은 관저 안으로 들어서면서 왕궁 건물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과, 자그마한 예술품까지도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꽤나 감명을 받았다. 통 제가 안 되는 군대라면 산적 떼와 같아서 왕궁 안은 철저히 약탈, 파괴되었을 것이기에, 이 왕궁을 점령한 크라레스 군대의 군기가 얼마나 엄격한지를 대변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실바르는 총독관저에 도착한 후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오는 묘인족 소녀를 향해 마주 인사하고는 대화를 나눴다. 팔시온 일행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묘 인족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약간 눈에 익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묘인족들은 대부분 원체 미모가 뛰어나 오히려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 봤 는지 유추해 내기는 더 힘들었다.
“총독 전하를 뵐 수 있을까?”
“예, 실바르 경. 그리고 일행들도 함께 들어가시죠.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묘인족 소녀의 ‘공작 전하’란 말에 주눅이 들어 버린 팔시온 일행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실바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작이면 왕자하고 동급에 놓이는 엄청난 직위다. 아무리 돈 없고 힘없는 공작이라도 그 작위가 가지는 힘은 엄청나다는 말이다. 그런데 새로운 점령지에 우선적으로 배치된 공작이라면 아마도 제국에서 손 가락에 꼽히는 실세일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공작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타이탄에, 타이탄이 포함된 친위 기사단까지 준다면 그에 대한 황제의 믿음이 보통 크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로니에르 공작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간 팔시온 일행은 모두 멍청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놀랍게도 로니에르 공작은 그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 헤어졌 을 때보다는 더욱 성숙한 분위기에 키도 좀 더 커진 듯한 소녀가 창밖을 보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고개를 돌려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무릎이 살짝 가려지는 짧은 스커트에 허리에는 푸른 광택이 나는 검을 차고는 그들을 향해 활짝 미소 짓는 소녀를 보고 그들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이때 실바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리자, 그들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딱딱한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지.”
“정말 오랜만이…옵니다, 전하.”
습관적으로 평어로 말하려다가, 어색하게 뒷말을 잇는 팔시온을 보고 소녀는 미소 지었다.
“혓바닥이 잘 굴러가지도 않으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말해. 그런 식으로 하면 잘 못 알아듣겠어. 익숙하지 않은 말투라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실 바르.”
“예, 전하.”
“그 녀석은 가져왔나?”
“예, 전하.”
“좋아, 그럼 지하실로 가지. 너희들은 여행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먼저 목욕이나 하고 쉬어. 일 끝나면 곧 찾아갈게.”
소녀가 스커트 자락을 나풀거리며 실바르와 함께 나가 버리자 팔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카엘을 향해 말했다.
“다크가 언제 공작 나으리가 되어 버렸지?”
미카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만약, 힘을 되찾았다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헤어진 지 일 년도 채 안 되었는데 그게 가능할까?”
총독관저는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기에, 치레아 왕실의 근위 타이탄을 보관하던 넓은 지하 공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다크는 거기에 자 신의 청기사를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지하실에 도착한 다크 로니에르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 안드로메다를 불러냈다. 곧이어 공간을 열고 위압적인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청색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 냈다. 청색 타이탄에는 크라레스 황실 근위 기사단의 문장 외에도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이 추가로 그려져 있었다. 그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은 다크가 황제로부터 로 니에르라는 성(姓)과 작위를 하사받을 때 선택한 로니에르 가(家)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가?>
“잠시 너와 맹약을 해지하고 싶어.”
<거절한다.>
설마 저 덩치가 거절할 줄은 생각도 못 해 봤기에 다크는 다시 한 번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타이탄에 해당되는 골렘의 맹약은 일대일이었다. 이 녀석이 맹약 해지 를 찬성하지 않는다면 다른 타이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뭐?”
<과거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실망스러웠지만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너를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너를 통해서 수많은 사 람들을 봤고, 지금의 너에 필적하는 인물은 한 명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내가 왜 너를 포기하겠는가?>
“대책이 없는 놈이군. 하지만 너는 너무 눈에 띄어서 사용할 수가 없어. 그렇기에 황제가 보내 준 딴 녀석을 쓰려고 해. 대신 나중에 전쟁이 벌어지면 너를 꼭 쓸 거 야. 그리고 나도 그 전에 타이탄을 어떻게 부리는지 배워야 할 거 아냐?”
<그런 이유라면 허락하겠다. 하지만 맹약을 완전히 취소하지는 않겠다. 나는 너의 종이다. 그 사실은 네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다시 부를 때까 지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겠다. 맹약이 완전히 취소되지는 않았기에 너와 나는 아주 가는 맹약의 실에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너의 생과 사를 확인할 것 이며, 네가 죽는다면 그때부터 새로운 주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동의하는가?>
“동의해.”
<좋다. 내가 안식을 취하는 동안 너는 타이탄을 다루는 기법을 배워라. 앞으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주인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청기사는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크도 이런 식이 될 줄 알았다면 구태여 청기사를 보관해 둘 넓은 장소를 찾는다고 고생할 필요조차 없 었기에 약간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청기사가 사라지고 나자 다크는 실바르를 돌아봤다.
“그 녀석을 불러.”
“예, 전하.”
그와 동시에 방금 청기사가 사라진 옆 공간을 열고는 청색과 붉은색을 칠한 거대한 타이탄이 나타났다. 이 타이탄에는 제2친위 기사단을 나타내는 검은 드래곤의 문장과 그 문장의 중간에 쓰인 흰색의 ‘I’라는 숫자. 또 로니에르 가문을 나타내는 황금 드래곤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카프로니아는 크라레스가 보유한 최고의 검객들을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처음부터 단가를 줄이기 위해 아예 미스릴을 입히지 않았다. 미스릴을 입히지 않아도 그 들은 이 정도 타이탄에게 주종 관계를 거절당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카프로니아는 페인트 밑으로 대마법 주문(對魔法呪文)의 형 상이 울퉁불퉁하게 드러나 있었다.
카프로니아가 거대하다고 하지만, 방금 봤던 청기사가 원체 크고 뚱뚱했기 때문에 둘은 자연스럽게 비교되었다. 어떻게 보면 연약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카프로 니아급 타이탄은 다크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기에 현재 다크가 차고 있는 검처럼 유연한 곡선을 가진 검 한 자루가 검집에 들어간 채로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 리고 방패 대신에 소드 스톱퍼(Sword Stopper : 손목 위에 장착하는 강철 구조물. 검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아주 소형화된 방패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만이 양 손목에 달려 있었다.
그 녀석이 나타나자 실바르는 재빨리 수송을 위해 맺었던 가계약을 취소했다. 맹약으로 맺어진 인물만이 그 타이탄과 대화를 할 수 있기에, 옆에서 봤을 때는 실바 르 혼자서 떠들어 대는 것처럼 보였다. 실바르가 맹약 취소를 선언한 후 다크는 카프로니아를 향해 말했다.
“이봐.”
<나를 불렀는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대에게는 안드로메다가 있지 않은가? 너는 그의 주인이고 또 그는 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쓸 수 없지. 쓸 수 없는 타이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 때문에 그 녀석과 맹약을 거의 반 이상 해지해 놓은 거고. 그러니 나와 맹약을 맺지 않겠는가? 나는 타이탄의 조종술도 익혀야 하고, 나중에 안드로메다를 쓸 수 있을 때까지 다른 타이탄이 필요하다.”
<정말인가? 하지만 겨우 나 따위와..
“정말이야. 너는 황제가 나에게 직접 선물한 녀석이거든.”
<나에게 있어서 황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는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그대는 숨기고 있지만 그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나는 느낄 수 있 다. 나라도 괜찮다면 맹약을 수락하겠다. 후회하지는 않겠지?>
“후회는 안 한다.”
<좋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도로니아. 그대의 이름은?>
“다크, 다크 로니에르. 지금은 필요 없으니 일단 공간 저편에 들어가 있어.”
그 말과 동시에 카프로니아는 사라졌고, 그 거대한 덩치들이 이 지하실을 꽉 채웠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 같이 느껴질 정도로 공간은 다시 텅 비었다.
“좋아, 일이 잘되었군. 이제 친구들을 만나러 가 볼까?”
“이야, 내 생전에 왕궁에서 목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나체로 걸어 나오는 팔시온을 보면서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이게 무슨 왕궁이냐? 왕궁이었지. 그 둘은 천지 차이라구. 왕이 살지 않는 궁은 대저택 이상의 의미는 없어.”
그렇게 이죽거리는 미카엘은 팔시온보다 먼저 목욕을 마쳤고, 편안한 옷을 입은 채 푹신한 의자에 앉아 젖은 긴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남자들, 특히 귀족들인 경우 머리를 길게 길렀으므로 귀족물을 좀 먹었다는 미카엘은 그의 탐스러운 금발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끈으로 묶었고, 씻을 때마다 귀 찮다고 떠들어 대지만 아직까지 자르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그 금발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좀 차이 나면 어때? 왕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정말 으리으리하더군. 세상에, 수도꼭지 봤냐? 은(銀)이었어. 그거 하나만 뜯어다가 팔아도 제법 돈 이…, 으악!”
팔시온이 비명을 지른 이유는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렇고, 또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다. 입고 있 던 옷은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썼기 때문에 목욕하면서 빨았고, 이에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나와 미카엘과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가 튀어 들어왔으니 당 황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저 녀석 왜 저래?”
팔시온은 후다닥 목욕탕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 모습을 보면서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보며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네 모습을 보고 생각 좀 해 봐라. 어떤 남자가 여자 앞에서 알몸 보이고 당황 안 하겠냐?”
그러자 다크의 뻔뻔한 대답.
“상관없어. 나는 원래 남자잖아.”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군.”
“그건 그렇고, 요즘 지내기가 꽤 좋은 모양이네. 예전에 비해 꽤나 취향이 고급스러워졌어.”
전에는 못 보던, 멋지게 세공된 목걸이나 반지. 그리고 옷은 헐렁하고 편한 형태지만 꽤나 고급 천을 사용했고, 거기에 우아한 무늬가 매우 꼼꼼하게 수놓아져 있 었다. 그걸 다크가 한눈에 알아보자 미카엘이 미소 지었다.
“원래 내가 고귀하신 혈통 아니겠냐? 요즘 들어 나의 이 섬세하고도 격조 높은 취향을 조금씩 살려 나가고 있지. 월급이 제법 풍족하게 나오니까 말이야.” “살기가 괜찮다니 다행이군.”
“잠깐만 기다려, 딴 사람들도 불러 올게.”
“그래, 좀 있으면 세린이 차와 먹을 걸 가져올 거야.”
미카엘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목욕탕 안에서 다급한 팔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내 옷이나 좀 가져다주고 나가.”
“직접 가져다 입어.”
“너 죽을래?”
미카엘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팔시온의 짐을 뒤져 비교적 깨끗한 옷 몇 가지를 찾아 건네주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 오랜만에 만났으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팔시온 일행은 세린이 차와 과자,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와 테이블에 차리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모습이 눈 에 익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 모두들 휴가를 내어 다크를 만나러 갔을 때, 다크는 왕궁을 떠났다고 알려 준 하녀가 그녀였던 것이다.
그들은 차를 일찌감치 마셔 없앤 후 과자를 안주 삼아 브랜디(포도주를 증류하여 40퍼센트 정도로 도수를 올린 강도 높은 술)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다크는 자신의 신상 내력이나 추억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대화는 팔시온 일행의 몫이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정규군에 편입되었는지, 또 이 번에 참전한 스바시에 전투의 경험담 등 할 말이 무지하게 많았다.
“그때 말이야. 타이탄이란 것들이 싸우는 걸 볼 수 있었어. 정말 엄청나더군. 특히 푸른색과 붉은색을 칠해 놓은 그 타이탄 이름이, 에…….”
팔시온이 약간 버벅거리자 미디아가 옆에서 살짝 참견했다.
“카프록시아.”
“응, 그 카프록시아. 정말 엄청나더군. 상대방 타이탄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는데, 모두 검술 실력이 정말 대단했어. 어떻게 그 덩치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특히 그중 하나는 정말 대단했지. 한 번에 두세 대의 적을 베던데……. 타이탄에 안 타고 있어도 힘든 동작인데, 정말 대단하더군. 단연 돋 보였어.”
그 말에 다크는 싱긋 미소 지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야. 나도 왕궁에서 들었는데 그때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더군. 직접 만나 봤는데 멋진 눈을 가지고 있었지. 성실한 노력형이라고 할 까?”
“공작 나으리라구? 작위야 어쨌든 간에 정말 화려한 검술 실력이었어. 너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내 생전 그렇게 엄청난 검술은 한 번도…….”
“그거야 당연하지. 그 양반 소드 마스터거든.”
“정말이야?”
“응.”
“어쩐지, 엄청나더라니. 그래듀에이트도 저 먼 산인데, 거기 타고 있던 사람은 아예 하늘이었군. 제길! 꼭 노력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풍겼었는데, 말짱 망상이었다니…….?
“망상은 아니었을걸? 얘기 들으니까 첩자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싸웠으니까 말이야.”
“그래? 그럼 마스터의 실력은 아니었군. 그럼 열심히 노력하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그 말과 동시에 미카엘과 미디아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이죽거렸다.
““꿈 깨!”
“나도 꿈 좀 꾸자. 이상은 넓고 크게. 몰라?”
“이런 말도 있지. 이루지 못할 이상은 이상(理想)이 아니라 망상(妄想)이다. 그런 말 못 들어 봤냐?” “제길, 친구라는 놈들이……. 그건 그렇고 스커트가 잘 어울리네. 이제는 아주 여자다워졌는걸?” 약간은 장난기가 섞인 팔시온의 칭찬에 다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이거? 보통 때는 그냥 편하게 바지를 입는데, 요즘 생리 때문에 치마를 입는 거야.”
그 말에 몇 명은 얼굴이 완전히 굳어 버렸고, 주량이 약한 관계로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지미는 갑자기 “쿡! 으읍, 푸!”하면서 앞자리에 앉아 있던 미디아에게 붉은 액체를 뿜어 버리고는 심하게 기침을 해 댔다. 갑작스런 상대방의 썰렁한 반응에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뭐가 이상해? 기저귀 차고 바지 입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치마를 입는 거라구. 뭐 잘못됐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듯한 다크의 반문에 오히려 기가 더 막혀 버린 미카엘은 숨을 좀 고른 후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진짜 여자는 절대 그런 말 입에 못 담지. 도대체 여자로서의 자각이 없는 녀석이야 너는.”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남자야. 그런데 여자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였냐?”
“그럼, 너는 도대체 예전에 남자였을 때 여자에 대해 호기심도 없었냐?”
“호기심? 무술 익히느라 바빠서 여자라고는 사귀어 본 적도 없었다. 바빠 죽겠는데 당연한 거 아냐? 또, 생리라는 것은 여자가 성장하면 모두 한다면서? 그런데 그 걸 말하는 게 왜 잘못된 거야? 모두들 다 아는 사실인데……. 이상한 녀석들이군.”
이렇게 당당하게 반론을 펼치는 데야 오히려 이쪽이 주눅이 들 수밖에.
“에……. 음, 도저히 나는 설명 못 하겠으니까 나중에 미디아하고 상의를 해 보든지, 아니면 세린한테 물어봐. 사람 당황하게 만들지 말고.”
“뭐, 그러지.”
대화가 일단락되자 팔시온은 서둘러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총독부 건물 앞에 그려져 있는 웃기는 그림은 뭐야?”
“무슨 그림?”
“아주 웃기게 생긴 황금색 드래곤 말이야.”
“아, 그거? 내 가문의 문장(文狀)이지.”
“세상에! 그게 문장이라고? 문장이라면 좀 더 멋지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드래곤은 드래곤이지만 꼭 입을 쫙 벌리고 있는 꼴이 그 뭐냐, 오리가 꽥꽥거리는 모 습하고 비슷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야 당연하지. 원래가 잔소리꾼 골드 드래곤이거든. 깃발에 그려진 모양이 꼭 잔소리하는 것처럼 생겼잖아. 적당히 설명해 줬는데, 그 화가(畵家)가 아주 내 마 음에 쏙 들게 잘 그렸더군.”
“잔소리꾼? 어감이 꼭 실존하는 드래곤처럼 들리는데, 설마?”
“응, 실존하는 드래곤이야. 내 의부지 엄청난 잔소리꾼 영감이야. 나중에 찾아오면 소개해 줄게.”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