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9화 – 유쾌한 하루
유쾌한 하루
“히야, 날씨 참 좋군.”
다크가 총독관저에서 아예 떠나 버린 것은 자신에게는 하등의 보탬도 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데 질린 탓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뷰 마나 포스’ 따위의 주문 정도야 자신이 익힌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의 주문으로 숨기고 있을 수 있었지만, 신의 힘을 빌린다는 신성 마법까지 속일 수 있으리 라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사신단의 우두머리가 대신관이라는 매우 고위급 사제였기에 그의 신성력은 대단할 것이고, 자칫하면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을 타고 그냥 아무 방향으로나 달려가고 있었다. 몸에 잘 맞는 남자 옷 위에 약간 헐렁한 양털로 짠 스웨터를 입어 자신의 상체에 생기는 굴곡 을 감추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눈치 챌 수 있는 미소녀임이 분명했다.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 여자가 한두 명도 아니었고……. 그 녀는 다시 그 위에 좀 두꺼워 보이는 양털로 짠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사실 별 필요는 없었지만 세린이 막무가내로 입혀 준 담요 대용품이었다.
따라오겠다고 떠들어 대는 몇 명의 친위 기사들을 물리치고 아직 수련 기사인 지미와 라빈만을 데리고 출발했다. 수하들을 이끌고 한가로이 말을 달리며, 그녀는 오랜만에 자유를 한껏 맛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토지에르 자식. 내가 자기를 도와주면 금방이라도 중원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말짱 거짓말인 것 같아. 그놈을 계속 믿고 있어야 하 나? 아니면 나대로 길을 찾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계속 크라레스에 죽치고 있는 이유는 한 사람이 방법을 찾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그것도 황제의 칙명 하에 많 은 사람들이 덤벼들어 찾는 것이 빠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크도 한 가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지금 위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은거하 지 않고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황제로서는 그런 엄청난 실력자를 자신의 주위에 계속 두고 싶지,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다크라는 고수를 제어하기 위한 미끼까지도 확실히 알고 있는데, 순순히 떠나보내겠는가?
어쨌든 다크는 처음에 총독 관저를 떠날 때부터 기왕에 나온 거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수행원으로 아직 배울 게 많은 지미와 라빈을 선택한 것이었다. 또 크라레스에서 보내 온 관리들이 알아서 모든 일을 처리했기에, 괜히 총독 관저에 붙어 앉아 있어 봐야 별 필요도 없었다. 크라레스 황제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다크의 매력은 그 무서운 전투력에 있는 것이지 관리 능력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다크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전쟁이 터졌을 때만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이번에 ‘가짜’도 도착한 김에 아예 장시간 여행이나 할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세린에게 모종의 뒤처리 방법까지 지시해 놓고 나왔으니, 오랜만에 되찾은 자유로 다크는 기분이 꽤 좋았다.
부하들을 이끌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달리다가 다크는 이번에 아르곤과 크라레스 제국 간에 생긴 문제의 시발점이 되는 말토리오 산맥을 관통해서 아르곤을 한번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크가 이끄는 군대가 아르곤 안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라, 오크 토벌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렇게 깊게 들어가지도 못했고, 또 구경이나 할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었다.
다크는 현경의 경지에 올라 있어 자연스럽게 내공을 몸속에 갈무리하여 드러나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이 방법은 무사들에게나 통하는 방법이었다. 마법사 는 몸속에 들어 있는 마나의 양을 측정하는 마법을 사용하기에 이 방법은 효과가 없었다.
아무리 고도의 기술로 몸속의 내공을 갈무리하여 한 곳에 숨긴다고 해도 몸 안에 들어 있는 그 마나의 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자 신의 힘을 되찾아 크라레스에 돌아왔을 때부터 하이드 마나 포스라는 주문으로 자신의 강대한 마나를 마법으로 포착할 수 없도록 감췄다.
뷰 마나 포스는 3사이클급의 주문이었지만, 그 마법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게 해 주는 하이드 마나 포스는 1사이클급이다. 하지만 뷰 마나 포스는 단시간 사용 하면서 주위를 관찰하고 끝낼 수 있는 반면, 하이드 마나 포스는 필요할 때까지 몇 시간이라도 그 주문을 지속시켜야 했다. 그래서 하이드 마나 포스를 몇 시간이나 계속 사용하려면 그 마나를 지속적으로 끌어 모으다가 완전히 탈진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다크는 마법 주문 따위를 외우지 않아도 마나를 자유자재로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서 소량의 마나를 끌어 모은다는 것은 꽤 성가 신 작업이었는데, 그걸 아주 간편하게 해 주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노망난(?) 아르티어스 옹에게 배운 용언 마법(龍言魔法)이었다. 드래곤은 원래가 자신의 몸속 에 쌓여 있는 방대한 마나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특이한 방식의 마법에 익숙한 생명체다. 용언 마법으로 이런 지속적인 효과를 내는 주문을 사용하면 시술자인 드 래곤은 마법의 유지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마나를 이용하는 것이니 일단 발동만 시켜 놓으면 드래곤의 몸속에서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알아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겨우 1사이클짜리 마법을 돌린다고 드래곤의 그 엄청난 마나가 고갈될리는 없었고, 그건 다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다크는 아르티어스와 헤어진 후부터 줄곧 이 마법을 몸에 걸어놓고 있었다.
다크 일행이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면서 천천히 말을 몰아 말토리오 산맥 말단에 있는 세 개의 통로 중 하나인 크로세인 통로 부근에 위치한 크란스 마을에 도착한 것은 총독 관저에서 떠난 지 4일 만이었다. 4일이 지난 후에도 총독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쪽에서는 난리가 났겠지만, 내일쯤 되면 그 소란도 멈출 것이다. 세린에게 자신이 떠난 후 5일째가 되면 ‘오랫동안 여행을 할 생각이니 그리 알도록!’하고 쓴 편지를 이번에 새로이 배속되어 온 ‘가짜’ 공작이자 제2친위 기사단장 이며 부총독(副總督)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카알 폰카슬레이 백작은 유령 기사단에서 잔뼈가 굵은 매우 뛰어난 검객으로 유령 기사단의 창립 멤버들이 모두 그러하듯 이미 오래전에 전사(戰死) 처리된 인물 이었다. 그 당시 그는 20대 초반이었지만 매우 뛰어난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무사였다. 하지만 크로나사 평야를 뺏기고 국가가 3분의 1로 축 소되는 그 망할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전력 노출을 숨긴다는 명목 하에 그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버렸고, 그때부터 역사의 전면(前面)에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가짜 총독을 보내는 작업에서 무인치고는 매우 잘 돌아가는 머리와 뛰어난 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그에게 지급된 유령 기사단의 미가엘급 타이탄
한 대와 함께 다크의 보좌역으로 파견되었다. 그 때문에 제2친위 기사단은 미가엘 여덟 대로 전력이 더욱 증강되었다.
예상외로 다크가 총독 일을 잘해 주고 있긴 했지만 그는 원래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기에, 기왕에 보내는 가짜라면 일처리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는 인물이 낫 겠다 싶어 선정한 인물이 카슬레이 백작이었다. 그는 유령 기사단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검술 실력과 그에 걸맞은 뛰어난 머리를 갖춘 인물이었다.
하지만 원체 뛰어난 인물인 데다가 그에게 주어진 부총독이라는 직위를 생각해 보면, 혹시나 다크 총독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는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의견 이 제시되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황제가 자신을 감시하고 또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스 본국에서는 그런 오해가 터져 나온다면 부총독이란 직책은 없애 버리기로 그들끼리 합의를 본 후 카슬레이 백작을 보냈는데, 예상외로 다크는 그 결정에 대환영이었다. 오히려 몇 가지 우려되는 사항에 대해 주의까지 듣고 온 카슬레이 백작이 당황할 정도로 다크는 그를 반겨 맞이했고, 대폭적인 권력 이양을 해 줬다. 몇 가지 중요한 서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카슬레이 백작 독단으로 처리해도 된다는 전폭적인 신뢰의 뜻이 담긴 명령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카슬레이 백작은 그 명령의 저의가 골치 아픈 모든 일을 다 떠넘기고 도망치겠다는 뜻이었는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뭐, 로니에 사제까지 불러다 줬으니 잘해 내겠지. 공식적인 포교 활동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르곤의 사제가 크라레스에서 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면, 그 사신 녀석들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들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어느 여관에서 자고 갈까??
“도대체 언제 돌아가실 겁니까?”
지미는 매우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크에게 물었다. 지미와 라빈은 여행을 떠날 때 다크에게 주의받은 대로 ‘공작 전하’라는 호칭과 궁중 언어를 여행이 끝날 때까지 사용하지 못했지만, 다크’라고 이름을 부르기도 껄끄러워서 언제나 호칭은 생략했다.
“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됩니다. 아직 점령지가 안정되지 않아서 할 일도 많은데.
“상관없다. 여태까지 여행하면서 너는 뭘 봤냐? 이 정도면 안정된 거지. 또 안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거기 남아서 일하는 놈들은 그걸 가만히 놔둘 만큼 멍청한 놈 들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 마을에서 자고 가자.”
“예.”
둘은 다크의 단정적인 말에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했고, 그녀는 그들의 태도에 만족스레 미소를 지으며 눈에 띄는 세 군데의 여관 중에서 제 일 가까운 곳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방이 없다는 종업원의 말에 두 번째 여관으로 갔고, 곧이어 세 번째 여관에서도 허탕을 치고는 큰길가에서 벗어나 구석진 곳 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40일쯤 전에 있었던 대규모 오크 토벌전이 성공을 거두면서 말토리오 산맥의 통행이 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산맥을 넘기 위해 모여 든 상인들과 짐꾼들로 마을의 여관들은 만원이었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마을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덕분에 더욱 번창하고 그러면서 여관이나 술집도 많이 생기겠지만, 아직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 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제 겨우 40일 전에 통행로가 뚫렸는데, 어떻게 40일 만에 건물들을 짓겠는가?
하지만 치레아 북부에서 아르곤 남북부로 이동하는 데는 치레아 남쪽으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아르곤 남부의 항구로 이동했다가 또다시 북쪽으로 가는, 거의 U자 형태의 여행보다 산맥을 관통하는 게 시간이 훨씬 절약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인들이나 짐꾼들은 아직 숙박업소가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 다 하더라도 이쪽 길을 택했다. 그 결과 방 값이 폭등했고, 여관 주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됐다. 아마 지금 몇 군데 뼈대가 올라가고 있는 큼지막한 건물들이 모두 완성되고 나면 그들의 호경기도 끝장이 나겠지만 당분간은 매우 즐거우리라.
“이봐, 여기 방 있냐?”
여관 주인들이 배가 부른 탓인지 호객꾼마저 없었기에, 거의 한 시간을 뒤져 찾아간 구석진 여관에는 다행히도 빈방이 있었다.
“그런데 방이 하나밖에 없는데요?”
“상관없다. 가자.”
다크가 그 허름한 여관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지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지독하게 낡은 여관이라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무너진다 해도 하나도 이상 할 게 없는 이 으스스한 곳으로 들어가겠다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녀의 지위는 이 나라에서 가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 않는가?
“전……. 여기 들어가실 겁니까?”
“왜? 밖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빨리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가자구.”
“에휴, 어쩌면 밖에서 자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모르죠.”
둘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보통 여관은 식당까지 함께 하지만 이런 허름한 여관에 제대로 된 식사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들 은 방에다 짐을 풀어 놓고 찬물에 대강 먼지를 씻어 낸 후 길가에 있는 큰 여관에 딸린 식당으로 갔다.
“어서 오십쇼.”
점원인 사내가 그들을 반겨 맞이했다. 식당 겸 술집인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술 마시며 도박판을 벌인 사내들부터 시작해서 비싼 술 마시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패거리, 또 간혹 그들에게 곱지 못한 시선을 던지며 얌전히 밥 먹는 패거리…….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로 식당은 들끓고 있었다. 아마 이 정 도로 장사가 잘된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식당 주인은 또 다른 식당 하나를 더 세울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아무거나 사람이 먹을 만한 거 3인분 가져와. 그리고 시원한 맥주 두 잔하고 포도주도 한 병.”
그럼 오크나 오우거가 먹는 것도 여기서 판단 말인가? 주문이 좀 특이했지만 점원은 군소리 안 하고 물러섰다. 별의별 손님들이 다 있다 보니 이런 특이한 인물들 도 있었고, 그걸 다 상대하려고 들었다간 시비 붙기 십상이었다.
“예.”
조금 지나서 가져온 음식은 시골구석에 있는 여관치고는 꽤 괜찮았다. 모두들 시장하던 참이라 열심히 먹고 있는데, 그들의 옆에서 술 마시던 패거리 중의 한 명이 언성을 높이는 게 들렸다.
“뭐야?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몇 달 안 본 사이에 간이 많이 커졌군. 제길! 잘 들어. 이 멍충아. 이 브리지만 어르신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방금 한 말은 사실이라구. 말토리오 산맥에 골드 드래곤이 산다니까.”
“흥, 그걸 어떻게 알았냐? 아무도 모르는데, 너희 일행만 봤다면 말이 안 되잖아.”
“그야 우리 일행은 깊은 산속에서 일했으니까 볼 수 있었지.”
“일?”
“흐흐, 왜? 일이라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글쎄…….”
“우리는 금도 캘 겸해서 산맥을 뒤지고 있었지. 하지만 금이란 게 잘 보이는 물건이냐? 금찾기는 부업이고 산적질이 주업이지. 흐흐, 그러다가 화전민(火田 民)의 오두막을 봤는데, 그 딸내미가 참 예쁘더란 말이지. 크크……”
“그래서?”
“그래서는, 열심히 그년과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들 머리 위로 골드 드래곤이 날아가더라 이 말씀이야.”
“그년과? 혼자서?”
“큭큭큭, 혼자일 리가 없잖아.”
“히히히, 거기 어디야? 이 몸도 한번..
“이봐, 좀 닥치고 술이나 퍼 마셔. 시끄러워서 밥을 먹을 수가 있어야지.”
다부진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고, 그 패거리는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뭐야?”
뾰족한 목소리로 폭언을 퍼부은 상대는 매우 예쁘게 생긴 계집애였다. 아직 성숙하지는 않은 몸매였지만, 이 무뢰한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 니었다. 그놈들은 일단 군침부터 삼키면서 상대의 날씬한 몸매를 음흉한 눈초리로 훑어봤다. 그것 참 맛있게 생겼군’하면서 말이다.
“닥치라는 말 안 들려?”
소녀의 일행인 덩치 좋은 두 남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소녀는 천천히 일어나 여태껏 헛소리를 하던 거의 하마만 한 덩치를 가진 남자에게 겁도 없이 다가왔다.
“헤헤헤, 고것 맛있게 생겼는데……. 어때? 우리 같이 한번…, 억!”
짝!
소녀는 그대로 그 덩치의 뺨이 휙 돌아갈 정도로 매서운 일격을 가했다. 지미와 라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고인이 되어 버릴 저 사내에게 명복을 빌 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드릴 사람을 건드렸어야지. 하지만 꽤 큰 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덩치는 고개만 돌아갔을 뿐 별 타격은 없었는지, 다시 소녀를 음흉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헤, 손맛이 제법인걸. 그럼 아랫도리 맛은 어떤지 한번 구경해 볼까? 흐흐흐.”
그자가 일어서서 소녀에게 다가가자 나머지 패거리는 키득거리며 그놈을 부추겼다. 이 돌연한 사태에 지미와 라빈은 멍청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겨우 저 정도 잡배를 어떻게 못 하다니. 이럴 수가?
소녀는 아직도 멍하니 앉아 있는 두 일행을 힐끗 바라본 후 힘없는 여자로서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시작했다.
“끼약! 저 사람이 날 때리려고 해요. 살려 줘~.”
소녀는 재빨리 그 두 남자의 뒤로 숨어 버렸고, 술집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지미와 라빈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들은 그놈의 남자라는 자존심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다른 방법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자신들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덩치와 싸우게 되었다.
“풋! 제법 믿는 구석이 있어서 까불었다 이거지. 먼저 이놈들을 죽여 놓은 후 네년을 손봐 주마. 죽어랏.”
“헛소리.”
상대가 무기를 들지 않았기에 지미와 라빈은 본격적인 주먹다짐을 했고, 그들의 숙련된 몸놀림에 덩치가 밀리자 이제 덩치의 패거리까지 가세하여 패싸움이 벌어 졌다.
“죽엇!”
쿵! 퍽! 와당탕! 퍽! 퍽!
식당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지다 보니 이리저리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속출했고, 그중에서 덩치 좋은 인물들은 자신의 그 작은(?) 피해를 참아 줄 관용 이라는 단어는 모르는지 모두들 패싸움에 동참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식당 안은 50여 명이 집단 난투극을 벌이는 장소가 되어 버렸고, 이제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 인지도 모호해졌다. 정신없는 패싸움장에서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놈은 모두 적이었다.
“지미 녀석 동작이 굼뜨기는…, 빨리 피해.”
꿀꺽꿀꺽.
“그래, 라빈 잘한다! 쳐라 쳐! 죽여 버렷!”
이 패싸움의 발단을 제공한 소녀는 한쪽 구석에 앉아서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신나게 응원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가장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하고 이웃집 불구경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아그그그그극! 저 악마!”
지미는 침대 위에서 천사 같은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이빨을 갈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있지?
“참아, 참으라구.”
“내가 지금 참게 생겼냐? 아이구…….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네. 넌 괜찮냐?”
“괜찮을 리가 없잖아.”
라빈은 철퍼덕 방바닥에 주저앉더니 곧장 드러누웠다. 서 있을 힘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패싸움을 벌였으니, 팔팔하다면 그놈이 비정상일 것이다.
원래가 패싸움이란 것은 시비를 걸고 치고받다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혼란스러워지면 재빨리 내빼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런데 이 순진한, 직설적으로 말하면 멍청 한 녀석들은 나중에 사람들이 지쳐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을 포기할 때까지 치고받았으니 그 넘치는 체력은 찬탄받을 만했지만, 그게 결코 잘한 짓은 아니었다.
원래 패싸움이란 게 그렇게 크게까지 번지는 일은 드물지만, 이 마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크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소란스러웠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대 규모 오크 토벌이 완료된 지금 마을의 젊은이들은 넘쳐 나는 에너지를 딱히 해소할 길이 없어 온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오랜만의 스트레스 해 소를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패싸움의 절정기에는 거의 3백여 명이 모여 들어 식당 밖 대로에서까지 치고받았던 것이다.
또 패싸움을 말려야 하는 이 마을 수비대원들까지 무료한 김에 이 싸움에 가담해서 주먹다짐을 해 댔으니, 그 싸움의 규모가 가히 상상하기 힘든 지경까지 간 것은 당연했다.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꺄하하하…….”
어제저녁 잠들기 전까지는 그래도 봐줄 만하던 지미와 라빈의 얼굴은 아침이 되자 그야말로 대단했다. 멍의 색깔은 그야말로 최고의 절정기를 나타내는 검푸른색 을 뽐내고 있었고, 두들겨 맞은 곳은 퉁퉁 부어올라 이게 사람의 얼굴인지 몬스터의 얼굴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웃지 마세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지미는 가급적이면 라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대는 다크에게 항의했다. 그들끼리도 서로의 얼굴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는데, 이번 일을 일으킨 당사자가 이 얼굴을 보고 웃지 않으면 아마 천사의 탈을 뒤집어쓴겉모양은 아름다우니까 ‘악마’일 것이리라.
“전… 다크 님께서도 마법을 익히셨는데, 혹시 치료 마법은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꺄하하하호호호호. 난 그런 거 몰라.”
“제길 할 수 없군. 이 얼굴로 어떻게 밖에 나가지? 안 그래, 라빈? 풋후후후……..”
지미는 라빈의 얼굴을 보면서 말하다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기 바빴다. 자신의 처참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떡이 된 라빈의 얼굴만 보이니 웃음이 터져 나 오는 것은 당연했다. 한쪽 눈이 퍼런 데다가 얼굴 반쪽은 퉁퉁 부어오른 라빈의 얼굴에서 과거 그 준수하던 얼굴을 떠올린다는 것은 정말 무리였다.
“웃지 마. 제길, 아야야. 이제는 이쪽 이빨까지 흔들거리네. 너는 이빨 괜찮냐?”
“말도 마라. 앞니 하나가 부러졌어.”
지미가 이가 빠져나가 찬바람이 드나드는 검은 구멍을 보여 주자 라빈도 급기야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푸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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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보여 줬더니 친구를 비웃어? 못된 녀석.”
“헤헤……. 야, 밥 먹으러 가자. 더 이상 죽치고 있어 봐야 답도 안 나온다.”
“가시죠.”
지미와 라빈은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잡화점에 들러 1골드를 주고 포션(聖水) 두 병을 구입했다. 원래가 아르곤 제국의 주력 수출품 중 하나가 이 ‘샤이하드의 숨 결’이라는 포션이었는데, 보통 포션보다는 가격이 반밖에 안 될 정도로 저렴하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었다. 대신 포션에 기록된 ‘주의사항’에 자신이 해당된다면 샤이하드의 은총은 바랄 수 없기에 모두들 그 주의 사항만은 꼭 읽어 보고 구입했다.
사실 주의 사항이란 것도 별것은 아니었다.
※ 주의 사항
1. 샤이하드 외의 타 신을 믿는 자에게는 효과가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상관없음)
2. 마음이 사악한 자에게는 효과가 없습니다.
3. 효과를 보지 못하셨다고 해도 절대 환불해 드리지 않습니다.
4.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그런데 이 샤이하드의 숨결의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문제점이 2번 사항이었다. 누가 사악하고 사악하지 않은지 알 재주가 없었기에, 일부 악덕 상인들이 성수가 아 닌 그냥 물을 넣어 팔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효과 없다고 따지면 ‘당신의 속마음이 사악하기 때문이다’라고 우기면 어쩔 건가? 그 때문에 생겨난 조항이 4번 조항이었다.
일부 돈 없는 여행객들의 경우 이 샤이하드의 숨결을 사서 가지고 다녔지만, 경험 있는 여행객들은 절대로 샤이하드의 숨결을 구입하지 않는다. 그만큼 가짜가 많 이 돌아다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아르곤과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였기에 그들은 가짜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전제 하에 샤이하드의 숨결을 구입했다. 일부는 얼굴에 바르고 일부는 입을 헹궜다. 이 상태로는 입속이 다 터져서 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곳에서 파는 샤이하드의 숨결이 가짜는 아닌 모양인지 둘의 얼굴 모양새가 확실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부러져 나간 이빨이야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흔들리던 이는 단단히 고정되었다. 어제 저녁밥을 먹었던 식당은 완전히 박살나서 내부 수리 중인지 문을 열지 않았기에 일행은 그 옆에 있는 여관의 식당으로 갔 다.
될 수 있으면 자극성 없는 음식을 시켜서 먹는 일행의 주위로 왔다 갔다 하는 남자 손님들 중 태반이 얼굴이 떡이 된 걸 보면 과연 어제의 집단 난투극에 참가자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제 왜 그랬습니까?”
“뭘?”
“몰라서 물어요? 충분히 혼자서 해치우고도…, 아니지, 그놈들뿐 아니라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떼거리로 덤벼도 이길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소 름끼치는 연극을?”
“그야 물론 재미있으니까 그랬지. 너희들은 재미없었니? 나는 아주 재미있었는데…….”
“으으으윽! 악마!”
“내가 악마인 거 이제 알았냐? 식사 다 했으면 나가자. 오늘도 또 유쾌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시간 죽일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