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8권 15화 – 예측할 수 없는 전쟁
예측할 수 없는 전쟁
“긴급 전문이 도착했사옵니다.”
매우 당황한 듯 허둥대는 젊은 마법사를 향해 미네르바는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며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뭔데 그러느냐?”
“본국이, 본국이 기습을 당했사옵니다.”
그 말에 경악한 것은 미네르바도 마찬가지였다.
“뭣이? 언제?”
젊은 마법사는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미네르바의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격투 중이라고 하옵니다. 적은 흑기사 열다섯 대와 붉은색 타이탄 두 대이옵니다. 루엔 공작 전하께서 근위기사단을 이끌고 격전 중이라는 보고이옵니다.”
아직 전투 중이라면 희망은 있었다. 그리고 적의 타이탄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만약 코란 근위 기사단 전체를 동원해 서 기습을 가해 왔다면 어쩌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겠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마법진을 부탁한다.”
“옛, 전하. 그런데 몇 분이 가실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다섯 명이다. 빨리 준비하라.”
“옛, 전하.”
미네르바는 자신이 거느리고 온 제2근위대 소속의 무사들 중에서 네 명을 긴급히 불러들인 후 마법진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제1근위대는 이번에 실전 배치된 안티고네 15대로 이루어져 있으니 밀리지는 않겠지만, 과연 잘 막아 낼지…….”
이윽고 한참 마법진을 만들고 있던 마법사가 외쳤다.
“마법진이 완성되었사옵니다. 전하. 빨리 마법진에 오르십시오.”
미네르바와 그 일행들이 마법진에 올라서자마자 마법사는 시동어를 외쳤고, 그들은 곧장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도 착했을 때 이미 전투는 끝나 있었다. 마법진을 만든다고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흑기사들을 이끌고 온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은 상대방 타이탄이 자신들이 이끌고 온 흑기사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에 강렬한 충격을 받았 다.
원래 이런 기습 공격은 상대방의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상대를 휘저은 다음 재빨리 탈출하는 것에 묘미가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 도착하는 즉시 상대 기사단을 박살 내고 황궁을 대충 박살 낸 후 미리 마법사가 그려 놓은 마법진으로 달려가서 재빨리 후퇴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막강한 타이탄을 앞세워 저항해 왔고, 수도 부근에 주둔 중이었던 엘프란 기사단의 일부까지 달려왔다. 물론 엘프란 기사단은 저급 타이탄이 주력인 매우 약한 기사단이었지만, 강력한 근위 기사단을 보조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돌진하여 맞붙은 상황에서 거의 백중지세를 이루는 대결을 하는 가운데, 자신보다 약간 낮은 실력을 가진 루엔 공작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타 이탄을 가진 덕에 자신과 용호상박의 대결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적기사 두 대가 더 있었기에 약간의 우세를 유지 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점점 더 흘러가자 리사는 이번 기습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재빨리 탈출할 생각부터 했고, 그 것을 실행에 옮겼기에 엘프란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해는?”
미네르바는 도착과 동시에 루엔 공작을 호출했다. 미네르바가 레디아 기사단의 총단장이자 총사령관이라면, 루엔 공작은 레디아 기사단의 부총단장 이자 수도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엔 공작은 상관의 질문에 산뜻한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즉시 대답했다.
“예, 안티고네 몇 대에 가벼운 검상(劍傷)을 입은 정도입니다. 그리고 황궁 벽이 대여섯 군데 무너졌고, 구멍이 난 곳도…………”
이리저리 자세하게 답을 해 오자, 미네르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루엔 공작의 말을 가로질렀다.
“이번에 온 붉은색 타이탄은 예전에 보고받았던 그것들이던가?”
“예. ‘초록 도마뱀’ 작전 때 봤던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이었습니다.”
“두 대만 왔던가?”
“예, 하지만 전과는 달리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놈들을 엘프란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붙잡아 둘 수 있었습니다.”
미네르바는 타이탄 발자국이 군데군데 찍혀서 황폐해진 황궁 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원의 중앙에 있던 분수대는 전투의 와중에 완
전히 박살 났고, 정원에 피어 있던 아름다운 꽃들은 엄청난 무게를 지닌 타이탄의 발아래 완전히 가루가 되어 있었다.
“흐음, 그렇다면 전에 그 빨간 타이탄을 몰았던 녀석들은 딴 놈들이라는 말이 되는군. 놈들은 최신형 타이탄을 개발하기는 했지만 몇 대 만들지 못 한 거야. 아마도 네 대 정도에서 많아 봐야 여섯 대 정도가 고작일 거야. 안 그런가?”
“예, 그 추측이 정확할 것입니다. 빨간색 타이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지만 전쟁용이 아니었습니다. 90톤 에서 1백 톤 정도로 꽤나 중장갑이긴 했지만 방패 없이 검만 한 개나 두 개를 가진 것으로 봤을 때, 이번 기습 작전 같이 어떤 특수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 아마도 그게 맞을 거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자네하고 대결했다는 인물이 그 빨간색 타이탄을 몰았을 테니까 말이야. 그랬다면 전세가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럴 필요도 없이 초록 도마뱀 작전 때 만났던 그 두 녀석이 빨간색 타이탄에 타고 있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겁니다. 그 둘 다 저와 거의 동급의 실력으로 보였으니까요.”
루엔의 말에 미네르바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루엔은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실력이긴 했지만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인가? 정말이지 코린트의 기사층은 너무나도 두텁구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뭘 말이냐?”
“아마 다음에 온다면 이번 실패를 밑거름 삼아 흑기사단 전체가 다 몰려올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1근위대만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좀 더 증원 을 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렇다고 전선에서 제2근위대를 뺄 수는 없어. 중앙 부분을 두텁게 해 뒀다가 개전과 동시에 금십자 기사단을 돌파하여 괴멸시킨 후 은십 자 기사단을 협공해서 박살 내야 한다.”
루엔은 미네르바의 말투에서 풍기는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미네르바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좌익이 약하지. 하지만 좌익에 모여 있는 적의 부대는 모두 다 코린트의 기사단이 아니라 코린트 동맹국의 기사단들이다. 그들이 본국의 좌익 부대를 괴멸시켰을 때쯤이면 이미 금십자 기사단이 박살 난 후일 테고, 또 은십자 기사단도 위험한 상황일 테지. 은십자와 금십자 기사 단이 무너지고 나면 그 동맹국 기사단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미네르바는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듯 빙글빙글 미소 지으며 루엔에게 질문을 했다. 루엔은 검술 실력이 뛰어난 훌륭한 기사였지만, 아직도 국가 간 의 중상모략 따위는 거의 모르는 순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코린트의 편을 들어 악착같이 우리들을 공격할까? 아니면 자국으로 돌아갈까?”
루엔은 미네르바가 말하는 것이 뭔지 대충 깨닫고는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씹듯이 말했다.
“대단한 작전입니다. 단장님.”
미네르바는 부하의 비난을 간단하게 묵살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 이 작전에도 몇 가지 문제는 있어.”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금십자 기사단을 얼마나 빨리 괴멸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하고, 우리의 동맹국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코린트 동맹국으로 편성된 우익 부대 의 공격을 막아 내느냐 하는 거야.”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미네르바의 말투에 약간 신경이 거슬린 루엔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약간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있죠.”
“뭔데?”
“자국의 기사단이 전멸한 후, 동맹국들은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자신들의 파견군을 배치시켜서 소모품으로 썼다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전쟁이 끝난 후에 얼마나 심한 비난을 받게 될지 예측하기 힘듭니다.”
루엔 공작의 반격을 들은 미네르바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자네는 딴 것은 다 좋은데 생각을 조금 더 넓게 가져야 해.”
“예?”
“동맹국에서 본국에 책임을 물을 때쯤에는 전세가 우리 쪽으로 완전히 기운 다음일 거야. 그렇게 된다면 동맹국 녀석들이 우리들을 비난하려 들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파견한 타이탄들까지 상실해서 국력이 더욱 약해진 상태지. 그런 때 우리까지 무너지고 나면 자신들에게 남는 것은 멸망뿐이 야.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돕는 것밖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어. 그 녀석들은 아마 마지막 남은 국력까지도 다 짜내서 우리를 도울 거야. 또 돕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우리들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동맹국들이 생길 테니까 말이야.”
“그건 좀 너무…..”
“아닐세. 기사도에 입각한 고정적인 사고는 국가 간에는 통하지 않아. 기사들끼리의 결전에서 비겁한 수는 용서되지 않지만, 국가 간에는 용서된다 네. 물론 승리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지만 말이야.”
“알겠습니다. 단장님.”
“자네의 경험이 나보다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마음에 둘 필요는 없네. 자네도 이번 전쟁을 통해 보다 성숙해졌으면 좋겠군.”
“예, 단장님.”
미네르바가 수도의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 전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보고가 있었다.
“정확한 보고냐?”
“예, 공작 전하. 두 번, 세 번 확인한 것이옵니다.”
“왜 엘프리안을 기습한 흑기사가 반쪽밖에 안 되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군. 놈들도 금십자 기사단의 정면에 본국의 주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야.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녀석들이 우리를 고립시키고, 동맹군을 모은다고 시간을 질질 끌어 준 덕분에 본국은 2차 군비 증강까지 완료한 상태니까 말이야. 안 그런가?”
“예, 소신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전하.”
“카마리에와 안티고네가 대량 생산된 만큼, 제네리아 기사단의 골고디아의 수는 늘어나게 되어 있어. 놈들은 전쟁이 터진 후에야 자신들이 본국의 타이탄 수를 파악함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날이 기대되옵니다. 참, 전하. 알카사스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것 말이옵니다.”
“그런데?”
“알카사스에서 어제 정식 통보가 왔사옵니다.”
“뭐라고 하던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 재고량 전부를 코린트에 판매한다고 했사옵니다.”
“뭣이?”
“알카사스는 이번 전쟁에서 코린트가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량을 한쪽 국가에만 판매하다니. 그래 몇 대나 팔았다고 하던가?”
“1백 대이옵니다. 그중 48대는 노리에(1.02)급이고, 나머지는 선더린(0.87)급이라고 들었사옵니다.”
“노리에급? 노리에급을 우리가 산다고 했을 때 재고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런데 소인이 뒤로 알아본 결과에 따르면 얼마 전에야 모두 코린트에 판매되었고, 물품은 내일쯤 인도된다고 했사옵니다.”
“내일? 그렇다면 아마도 모래쯤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문제는 그게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건데………….”
“코린트도 이쪽의 병력 배치에 상당한 수준의 정보를 획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소인의 예상으로는 거의 전량 중앙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 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된다면 여태껏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중앙에서의 병력 우세가 물거품이 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전하, 지금 신형 타이탄으로 전력이 한껏 증강되어 있는 지발틴 기사단을 중앙에 배치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제네리아 기사단에는 골고디아 1백 대만 줘서 토란에 배치하고 말이옵니다.”
“중앙에 전력을 최대한 증강시켜서 위쪽으로 치고 올라가 금십자와 은십자 두 기사단과 함께 쟈므시에 집결 중인 적의 군대까지 한꺼번에 괴멸시키 려면 아무래도 그 방법밖에 없겠지. 지발틴 기사단에 연락을 넣어라. 오늘 밤에 제네리아 기사단과 위치를 바꾸라고 말이야.”
“옛, 전하.”
코린트와 크루마. 이 양국이 전쟁을 벌이기 직전 크루마는 2차 군비 증강까지 가까스로 완료했다. 그렇게 해서 크루마의 최신형 타이탄인 안티고네 는 23대로 늘어났고, 출력 1.5나 되는 카마리에는 50대가 되었다. 그날 밤, 우선적으로 카마리에를 지급받게 되어 카마리에 46대, 골고디아 50대를 갖춘 지발틴 기사단이 제네리아 기사단을 대신하여 가므 왕국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제네리아 기사단도 골고디아 1백 대를 가지고 토란 왕국에 투입 되어 은십자 기사단과 어느 정도 대등한 전력(戰力)을 갖추게 되었다. 또 그날 밤, 미네르바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엠페른 기사단의 토란 왕국 주둔 군이었던 제6전대와 쟈렌 주둔의 제7전대는 가므 왕국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양국은 어느 정도 무대를 갖췄다. 좌익을 희생해서라도 중앙을 보강하여, 적 중앙의 금십자 기사단 및 좌익의 은 십자 기사단을 우선적으로 괴멸시켜 승리의 토대로 삼겠다는 미네르바의 계략.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약점이었던 중앙을, 구입해 온 타이탄 1백 대 로 충분히 보강하여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코린트의 계략, 미네르바의 계략이 어느 정도 모험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코린트 쪽은 세계 최강의 관록 이 붙은 국가인 만큼 충분한 인적, 물적 자원을 대량으로 투입하여 전반적으로 열세인 적을 천천히 밀어붙이는 정석에 가까운 작전을 쓰고 있었다.
양국 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중앙의 전투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앙 쪽에 쏟아 부은 병력은 모든 국가들의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우선 양국이 10만 이상씩 쏟아 부은 병력은 두 번째로 하고, 크루마와 미란 국가 연합의 연합군이 보유한 타이탄이
203대였고, 코린트가 중앙에 두툼하게 배치한 타이탄이 215대였다. 물론 여기서 숫자는 코린트가 약간 우세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크루마 쪽이 단연 우수했다. 1.2 이상의 출력을 가진 강력한 타이탄의 보유량도 크루마 쪽이 월등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코린트 쪽에 배치된 1백 대의 타이탄 을 조종하는 기사들이 타이탄에 탑승한 채 받은 훈련 기간이 짧기에 타이탄 조종에 있어 상당히 미숙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크는 미네르바로부터 도착한 전문을 통해 그날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전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대기에 가득 찬 살기(氣)만으로도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날 새벽, 모든 살라만더 기사단원들이 무장을 갖추고 도열한 가운데 크로아 백작과 다크, 아르티어스, 그리고 린넨 백작이 밖으로 나오자 모두들 자세를 꼿꼿이 했다. 크라레스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첫 전쟁이니만큼 모든 기사들의 긴장감이 눈에 보일 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열해 있는 모든 기사들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자, 바지오 남작은 이들의 실전 경험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쟁이라고는 치 러 본 적도 없는 병사들이 적진 앞에 섰을 때와 같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기사들. 그런 긴장감이 서서히 전염되고 있는 듯 바지오 남작이 거느리고 있 는 기사들까지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이때, 밖으로 나온 크로아 백작이 바지오 남작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바지오 남작, 정찰대는 몇 명이나 보냈지요?”
“예? 저, 마법사가 오늘 정찰을 할 필요는 없다고 전달하셨기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타이탄을 서포트해야 하는 정찰대가 먼 저 공격을 당한다면서, 쓸데없는 희생은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바지오의 답에 크로아 백작은 씩 미소 지으면서 뇌까렸다.
“그렇다면 정찰대는 보내지 않은 것이군요.”
상대의 의미 모를 미소와 그 말투의 미묘한 어감 때문에 바지오의 기분은 매우 나빠졌다.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나? 그렇게 생각한 바지오는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예, 지금이라도 보낼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바로 이때, 소녀가 기사들이 도열해 있는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경들, 조국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경들은 이 머나먼 타국 땅에 왔다. 이 전쟁터에서 경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패가 조국에 안겨 줄 파장은 엄청나다. 아름다운 크로나사 평원을 경들은 기억하는가? 물론 본관은 그곳에 가 보지 못했기에 잘 알지 못하 지만, 경들 중에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크로나사 평원이 본국에 귀속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이번 전쟁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영달만이 아닌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을 생각하라. 경들의 어깨 위에 조국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생각하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잊어라. 중압감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있는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경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이 자리에 섰을 것이다. 자, 모두들 눈을 감고 예전에 받았던 지독하게 혹독했던 훈련을 기억하라. 그때 그 훈련장이 경들의 앞에 펼쳐져 있다. 경들 은 이번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끝낼 수 있겠나?”
소녀의 말에, 모든 기사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외쳤다.
“옛, 공작 전하.”
공작 전하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자 바지오 남작 및 그의 부하들은 놀라운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바지오는 지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소녀 가 공작이라면 그렇다면 저기 서 있는 공작은 또 뭐지? 다만 한 가지 바지오 남작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단어는 ‘당했다’라는 것이었다. 바지오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을 때 뒤에 뭔가 걸리는 것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뒤에는 린넨 백작이 서 있었다.
“어디 몸이 안 좋나요? 바지오 남작.”
바지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은 더 이상 감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멍청하게 도 가장 정찰 활동이 왕성해야 하는 이때 공작의 부탁을 듣고 단 한 명도 정찰을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상대가 정찰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인데 좀 쉬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아, 아니요, 나는 괜찮습니다.”
바지오 남작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부인하자 린넨 백작은 음흉하게 미소 지으면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백작의 부하들도 검을 뽑아 들었다. 바지오 남작의 손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검이 있는 곳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기사급인 자신과 타이탄을 조종할 권리를 부여받게 되는 그레듀에이트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실력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바지오 남작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소.”
일단 바지오 남작 건이 해결되자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전한 후 자신의 휘하에 있는 두 개 기사단에 통신 을 보냈다. 그녀는 수정 구슬에 상대편 마법사가 나타나자 늘 하던 대로 말했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공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작 전하께서는 각 기사단이 현 위치에서 수비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적들의 타이탄은 엄청난 숫자입니다. 합류하여 함께 행동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공작 전하께서는 여러분들이 현 위치를 고수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혹시 뒤쪽으로 이동 마법을 통한 기습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으니 그
에 대한 대비를 부탁드립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각 기사단 지휘관의 재량에 맡긴다고 하셨으니, 퇴로 확보에 주의하십시오. 귀 기사단의 무훈을 빕니다.”
“알겠습니다. 니케(승리의 여신)와 함께하는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상대방 마법사가 수정 구슬에서 모습을 감추자 다크는 생글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자, 이제 무대는 갖춰졌으니 한바탕하러 갈까? 한번 해 보니까 타이탄을 가지고 싸우는 거 정말 재미있던데 말이야.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