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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8권 17화 – 일방적인 전투

일방적인 전투

“으그그그…, 미치겠군. 피에 굶주려 헐떡거리는 네 녀석이 싫어서라도 전투를 하지 않겠다.”

〈그럴 수가…………. 너도 지금 흥분하고 있잖아. 나는 느낄 수 있어. 너와 나는 함께 연결되어 있으니까. 인간들의 속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싫 은척하는 거지? 너도 살인귀잖아.〉

다크는 정말 미치고 싶었다. 만약 이게 사람이 옆에서 떠들어 대는 거라면 청각을 막아 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놈의 미치광이 타이탄은 자신의 ‘마 음’에 직접 대화를 걸어 오기에 그걸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다크가 지금 가장 곤란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 놈이 워낙 ‘너도 그렇잖아’하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고 있었기에, 슬며시 ‘진짜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싹트고 있었다.

다크가 망할 놈의 타이탄 덕분에 예정에도 없던 ‘마음의 시험’을 받고 있는 동안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기사들의 전체적인 실력도 유령 기사단이 뛰어난 데다가 타이탄마저도 상대방에 비해 월등하게 우수했다. 48대나 되는 테세우스를 중심으로 그들은 상대를 압박해 나가며 우세한 전 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호 2백 대가 넘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치열한 격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월등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 없었기에 파괴되어 쓰러지 는 타이탄은 의외로 적었다.

살라만더 기사단의 경우 전체적으로 중앙에 포진하고 있는 기사들의 기량과 타이탄이 월등했기에 전투가 전개되면서 중앙이 적을 향해 점점 압박해 들어가면서 돌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좌우 측면을 받치고 있는 로메로들은 상대방에 비해 그렇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자리를 지키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상대방의 지휘관은 뒤에서 쉬고 있는 타이탄들을 좌우 측면으로 돌려 상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전세가 이렇게 흘러가자 다크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적의 포위망이 완전히 갖춰지게 되면 수적으로 훨씬 불리한 이쪽이 나중에는 괴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런 후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을 때 이제부터 쾌락이 시작된다고 느꼈는지 안드로메다는 듣기 껄끄러운 낮은 음성으로 음침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걸 들으니 다크의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에구구, 내가 전생에 죄를 너무 많이 지었던 모양이지. 이런 미친놈이 걸린 걸 보면. 에라 모르겠다. 그래, 가자구.”

그와 동시에 기본 전투 중량 160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타이탄이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거대한 타이탄의 모습만을 주시하고 있던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후작은 전장의 뒤쪽으로 시선을 재빨리 돌렸다. 진짜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타이탄이……… 여태까지 6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타이 탄은 전 세계를 다 뒤져 본다고 해도 단 한 대가 제작되었을 뿐이다. 코린트의 황제용 타이탄 백기사(Knight of Chrome)는 6.5미터나 되는 거대한 타이탄이었지만 드래곤 본과 와이번 본만으로 제작되었기에 실질적인 무게는 54톤밖에 나가지 않았다. 백기사는 막대한 코린트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된 의장용(儀仗用) 타이탄의 성격이 짙었기에 몇 번인가 있었던 근위 기사단의 대규모 기동 연습에서만 모습을 나타냈을 뿐, 실전에 나간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상 타이탄이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절, 그 옛날에는 수많은 형태와 크기를 가진 시험용 타이탄들이 제작되었었다. 아직 확실하게 최고의 파워를 낼 수 있는 크기나 형태가 정립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7미터가 넘어가는 초대형 타이탄도 제작되었고, 초소형 타이탄도 만들 어졌다. 그리고 무게를 최소화시켜 기동력에 중점을 둔 타이탄도 만들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렇게 우수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당시 처음 개발되 었던 엑스시온이 지금으로 하면 0.1도 출력하지 못했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육중한 덩치를 지닌 타이탄이 힘을 못 쓰고 비실거렸을 것은 당연했 다.

그렇듯 수많은 시험작들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엑스시온의 성능도 끊임없이 향상되었고, 또 그것으로 기동 연습이나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타이탄 의 크기와 무게는 점차 고정화되기 시작했다. 일단 국가 간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집단 전투를 벌이게 되었기에, 그 집단 전투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형태로 고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확립된 것이 출력 1.0의 엑스시온이 탑재된 경우 80톤 정도의 무게가 가장 효율 성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각국에서는 출력 대 무게의 비율이 0.0125에 비교적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게의 비율을 무시한 저렇게 거대한 타이탄이, 그것도 이런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가히 쇼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타이탄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후작의 입은 쩍 벌어졌다. 후작의 예상과 달리 그놈의 속도는 엄청났던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도약한 후 포위하기 위해 뒤로 돌아온 이쪽 타이탄을 그 거대한 방패로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그 타이탄은 엄청난 충격에 중심이고 뭐고 다 잃어버리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순간 상대의 거대한 검은 흉갑(甲)을 꿰뚫고 있었다. 탑승한 기사가 앉아 있을 것이 확실한 바로 그 위치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당황한 후작을 향해 마법사는 전장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계속 유지한 채 답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의 꿈이 바로 타이탄 제작자가 되어 이름 을 날리는 것이었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가 신이 만드신 드래곤이라면, 인간들이 만든 최강의 병기는 타이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타이탄 앞에 서는 거의 모든 마법이 무력(無力)했다. 그렇기에 그 마법사 또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타이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 타이탄은 놀랍게도 강철로 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단 한 번 방패를 휘두른 것만으로 이쪽의 방패가 튕겨 나갔습니다. 만약 드래곤 본과 같은

가벼운 금속으로 만들었다면 저렇게 엄청난 파워를 낼 수 없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래, 바로 저 녀석이야. 놈들이 숨겨 두고 있는 비밀 무기가 바로 저 녀석이야. 그렇다면 크루마의 근위 기사단이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빨리 본 국에 알아봐.”

마법사는 아르곤 지역에서 포착된 적이 있었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이 그 녀석인지 본국에 문의했다. 하지만 본국에서 답신하고 있던 마법사는 자 료를 뒤진 후 즉시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고. 그 마법사는 자료를 뒤져 대략적인 형태를 전송해 줬는데,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무게가 대략 110톤 정도 나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양 옆으로 두 개의 뿔이 길게 솟아오른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육중한 타이탄이었다. 그리고 크루마의 타이탄들이 흔 히 그렇듯 사각형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아닙니다, 각하. 아르곤에서 접촉했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지? 이봐, 로안스엘 공작은 아직도 멀었나? 빨리 이곳으로 오라고 지시해라, 빨리.”

이성을 잃어 가고 있는 후작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후작이 허둥대고 있는 그사이에도 뒤쪽으로 돌아왔던 운 없는 타이탄이 여섯 대째 그 거대한 타이탄의 밥이 되고 있었다. 검과 방패를 가진 대결을 할 때는 상대의 방어의 주축이 되는 방패를 무력화시켜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검을 사용한 웬만한 공격은 방패로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그렇기에 보통 방패로 상대의 방배를 후려치며 중심을 무너뜨린 후 검으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저 거대한 타이탄은 그 육중한 무게 덕분인 지 그런 전술을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해내고 있었다.

간단하게 동료들이 피의 제물이 되어 버리자 뒤로 돌아 적을 포위하려던 연합군의 타이탄들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그쪽으로 가면 죽을 것 을 뻔히 알기에 망설이는 사이 옆쪽으로 돌아온 동료 타이탄의 수는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모이자 그들은 다시 금 힘을 얻었다.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쪽은 수가 월등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그들은 적군의 후방을 지키고 있는 그 거대한 타이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으하하하, 바로 이거야, 이거. 이 느낌이야. 흐흐흐………….〉

“으아아…, 소름끼치니까 제발 그만해. 닥치라구.”

그러는 와중에도 이 최고의 궁합을 가진 최악의 콤비들은 상대의 검을 흘리거나 막아 내며,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다. 원칙상으로 상대와 싸움을 했 다면 다크가 지닌 고도의 검술로 적을 간단히 제압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강대한 힘과 피 맛을 알아 버린 안드로메다는 다크의 지배 를 거부하고 있었다. 다크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파이크로 찍고, 검으로 베고, 찌르면 거기에 감질나게 살짝살짝 묻어 나오는 적의 피. 그 끈적함이 안드로메다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크하하하, 죽어라! 죽어.>

“아주 신이 났구먼. 이제는 아주 자기 혼자서 멋대로 움직이고 있어. 야, 이 빌어먹을 타이탄아. 내 말을 들으란 말이얏!”

수십 대의 적이 포위 공격을 해도, 이 거대한 타이탄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얼마나 재빠른지 공격을 한 순간, 이미 상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타이탄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닥치는 대로 자르고, 베고, 두들기고 있었다.

쿵!

무작스런 힘과 무게로 그 거대한 방패를 휘두르자, 그 방패에 두들겨 맞은 상대 타이탄이 아예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80톤에 이르는 육중한 타이탄 이, 단 한 번의 충격으로 튕겨 나갈 정도라면 그 방패를 막아 낸 팔이 무사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철로 된 외피와 달리 내부에 있는 타이탄 의 몸은 주철이다. 그렇기에 강렬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 나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이 겨우 한 대의 적을 상대로 고철이 되어 나뒹굴고 있을 때쯤, 후작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로안스엘 공작이 거느린 별동대가 마 법진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안스엘 공작도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작전을 무시하고 자신을 호출한 후작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후작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수십 대의 타이탄이 엉켜 붙어 싸우는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뒤쪽에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극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타이탄들보다 거 의 1미터는 확실히 더 커 보이는 시커먼 타이탄이 지축을 울리며 날뛰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박살 나고 있는 상대가 자기 편이라는 것이었지만.

“저 괴물을 죽여라, 빨리.”

핏발 선 후작의 눈을 바라보며 로안스엘 공작은 중얼거렸다.

“저런 괴물은 정말 자신 없는데요.”

“그렇다면 어쩔 건가? 저놈 한 대가 무서워서 후퇴하자는 것인가? 상대는 단 한 대다. 자네가 거느리고 있는 것은 50대고. 빨리 해라. 아직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 녀석을 없애야 해.”

“알겠습니다. 해 보죠. 자, 모두들 돌격 준비. 창을 준비해라.”

로안스엘 공작은 부하들을 이끌고 전장의 뒤편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달려가는 그 순간에도 다섯 대의 타이탄이 그 괴물에게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 모두들 거리를 두고 접근해라. 그리고 켈빈, 자네에게 열 대의 타이탄을 줄 테니 놈들의 후미가 저놈을 도와주기 위해 달려오지 못하게 막아 라.”

“예, 공작 전하.”

“자, 모두들 멀리 떨어진 채 창으로 공격하라. 놈의 덩치로 봤을 때 근접전은 매우 불리하다.”

로안스엘 공작의 지휘에 따라 고전(戰) 중인, 아니 학살을 당하는 중이던 포위 공격대는 뒤로 물러서며 한숨 돌릴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공작의 지시에 따라 놈은 저 멀리 뒤편으로 분리, 포위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서 로안스엘 공작의 의도를 파악하고 큰 타이탄을 돕기 위해 뒤로 빠진 적 타이 탄도 있었지만 켈빈이 지휘하는 저지대(沮止隊)에 막혀 버렸다.

일단 상대를 분리시키는 작업만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다섯 대의 타이탄이 더 고철이 되어 뒹굴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로안스엘 공작은 상 대를 후미에 멀찍이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독립된 명령 체계에 의한 일사불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괴물 같 은 상대의 힘 앞에서는 그 공격도 오래가지 못했다. 무작정 한쪽 방향으로 돌진해 들어오며 방패와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는 뒤로 빠 지고, 적 타이탄의 뒤쪽에 있던 아군이 상대의 등을 공격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놈의 속도가 원체 빠르다 보니 뒤로 빠지던 아군이 미처 뒤로 빠지 지도 못한 채 고철이 되어 뒹굴어야 했고, 뒤에서 덮친 아군은 헛되이 허공만을 찔러야 했다.

일부 타이탄들은 창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괴물 같은 타이탄의 두터운 외장 장갑만을 가까스로 뚫을 수 있었을 뿐. 치 명타를 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대는 동료들을 계속 죽이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힘으로………….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

발렌시아드 공작은 중년의 장군 두 명과 널찍한 지도를 앞에 두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예상외로 가므 쪽에서 밀리고 있었기에 대책이 시 급한 실정이었다. 서둘러 지원한 1백 대와 제1근위대를 보내 줬는데도 미네르바가 지휘하는 적의 주력은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숫자에서는 코린트가 조금 우세했지만 타이탄의 질에서는 저쪽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전투가 벌어진 후에 까뮤의 요청에 의해 제2근위대까지 파견된 후였다. 그 후, 전세는 코린트 쪽으로 돌아서는 듯 보였지만, 놈들도 엘프리안에 주둔 중이던 레디아 근위 기사단의 남은 병력을 모두 전장에 투입했 기에 점차 뒤로 밀리는 실정이었다.

코린트 최강의 코란 근위 기사단이 보유한 흑기사 30대와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투입하고도 전세가 밀리고 있었기에 키에리는 긴급히 장군들을 소 환했고, 이렇듯 대책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위급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을 찾으니 약간 짜증이 났다.

“무슨 일이냐?”

“이변이 일어났사옵니다.”

다급한 어조와 표정과는 달리, 마법사의 입에서 답답한 소리만 흘러나오자 짜증이 난 공작이 으르렁거렸다.

“무슨 이변? 빨리 말해라.”

“예, 알렌 방면으로 침공해 들어간 지오르네 후작이 고전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마법사의 말에 키에리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뭐라고? 설마…, 놈들의 주력은 지금 가므에 있는데? 그건 무슨 말이냐?”

“이게 적 타이탄의 모습이옵니다. 디스플레이 이미지(Display Image)!”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곧이어 방금 전에 그 마법사가 전송받았던 기억이 영상으로 드러났다. 검은색 타이탄들과 가지각색의 코린트 동맹군들의 타이탄들이 엉켜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방적인 학살극. 원체 거대한 타이탄이 주도하고 있었기에 마법사가 더 이상 설명 하지 않아도 키에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쪽으로 가 있었다. 그 거대한 타이탄의 움직임은 매우 간단했다. 빠른 돌격, 방패로 후려치기, 그런 후 찌르 거나 베기. 물론 중간 중간에 검으로 찌르기 귀찮았는지 무릎에 붙은 거대한 스파이크를 이용해 찍어 올리거나, 또는 팔목 관절에 붙은 스파이크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그 엄청난 거구가 움직이는 모습이 거의 춤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이쪽 타 이탄은 걸레가 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나는 저렇게까지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히고, 또 써먹는 놈은 처음 봤어.”

솔직한 키에리의 감상이었다.

“저, 대공 전하.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자네는 어떻게 봤나?”

키에리의 말에 여태껏 그와 함께 작전을 짜고 있던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장군이 즉각 대답했다.

“대단한 실력인 것 같사옵니다. 동작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위력적인 것으로 보이옵니다.”

“그래. 그렇지? 허구헌 날 검술을 익히며, 더 뛰어난 검술만 찾는 멍충이들에게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이야. 저게 바로 기본기라는 거야. 막고, 두들기고, 베고, 차고……………. 누구나 다 아는 동작이지. 또 가장 간단한 동작이고. 자네도 저런 동작을 수도 없이 해 봤을걸?”

“예, 전하.”

“요즘도 저런 동작을 훈련하나?”

공작의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 상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저것은 오래전에 끝냈고, 지금은 로체스터 가의 고급 검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상대의 답변에 키에리는 짓궂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왜 고급 검법을 배우고 있나? 그렇다면 요즘 저런 것은 하지도 않고 있다는 말이겠군.”

“그렇사옵니다, 전하. 고급 검법으로 넘어가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네는 저 녀석을 상대로 싸운다면 어떻게 하겠나?”

“예? 글쎄요. 워낙 힘에서 밀리니까, 거리를 좀 두고 공격을…………….”

“그래 맞아. 저 녀석의 움직임이 대단하기는 해. 하지만 고급 검술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봐야 한다. 저런 놈을 상대하는 데는 저 녀석 들 정도로는 무리가 있겠군. 제2근위대는 가므에 지원 나가 버렸고, 어떻게 한다? 참, 제3근위대에 남은 놈들이 있나?”

“예,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대기 중이옵니다.”

“그 녀석들을 보내라. 그러면 되겠지. 저 녀석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녀석은 상대를 잘못 골랐어. 저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자네들도 잘 기억해 두 게. 그 예전에 익혔던 기본기만으로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낼 수 있는지 말이야. 저 녀석의 노력과 근성에 찬사를 보내고 싶군. 그건 그렇고, 하던 얘 기나 마저 하지.”

키에리는 영상을 보는 것 하나만으로 적의 약점을 간단하게 알아챘다. 상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의 장점들을 극대화시켜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검술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상대의 그 끈기와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익힌 검술은 전장에서는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고수와의 일대일의 대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고수들에게는 어 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그것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기술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전장에 마법진을 이용해 도착했을 때, 전세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단 한 대에게 수십 대의 타이탄이 파괴되어 나뒹굴고 있었고, 로안스엘 공작이 이끄는 공격조는 공작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두려 움이 서서히 전체 기사단에 파급되기 시작하여 상대를 저지하고 있던 포위망 자체가 붕괴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도착과 동시에 자신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후작은 본체만체하고 자신들의 타이탄을 꺼냈다. 후작은 새로운 증원에 갑자기 힘이 나기 시작하는지 웅장한 목소리로 기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코란 근위 기사단에서 지원하러 오셨다. 모두들 힘을 내라고 전해라. 저 괴물 같은 놈만 처치하고 나면 승리할 수 있다. 모두들 전의를 잃지 마라!” 크리스틴과 페트릭은 그런 후작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후 자신들의 붉은 타이탄에 탑승했다. 웬만한 나라에서는 검술 실력이 뛰어나면 곧 작위도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 아버지 대에서 검술이 뛰어나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들이 뛰어난 검술을 유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 았다. 코린트 같이 거대한 제국의 경우 그런 식으로 귀족의 칭호를 남발했다가는 귀족의 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기에 국가에 공을 세운 경우에만 작위 가 상승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검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높은 작위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작위를 가진 귀족들의 경우 세금을 내지 않기에, 세수(稅收)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유리했다. 물론 검술 만 제대로 하면 받게 되는 작위의 최하 계급은 기사(Knight)다. 그렇지만 기사는 그 아들들에게 세습되지 않는다. 세습되는 최하 계급의 작위는 남작 (Baron)부터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코린트의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검술이 뛰어나서 높은 직위를 가진 인물이 있지만 작위가 낮은 경우가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크리스틴과 페트릭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둘 다 발렌시아드 가문이나 로체스터 가문에서 검술을 사사받았기에 발렌시아드 대공이 인 정했을 정도로 엄청난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우 평민의 자식들이었다. 그렇기에 둘 다 기사 칭호를 검술 시험을 통해 자신들의 힘 으로 확보해야만 했다. 아마도 이번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면 남작으로 승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실력을 통해 올라오는 기사라는 작위. 그 작 위는 무한하게 높은 자리일 수도 있었다.

페트릭과 크리스틴은 상대 쪽으로 다가서며 외쳤다.

“모두들 물러서라.”

강압적인 명령이었지만 모두들 ‘이런 시건방진’하고 따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주춤주춤 뒤로 내빼고 있었다. 누가 자기들 대신 죽어 주겠다는 데야 절대로 반대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덩치가 대단한데? 거의 백기사하고 맞먹겠어.”

크리스틴의 말에 자신의 타이탄 로마니아가 묵직한 음성으로 답해왔다.

<저기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엑스시온의 파워는 나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

그 말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는 너 이상 강력한 타이탄은 아직까지도 태어난 적이 없다고 하셨어. 자, 이제 한번 놈의 실력을 테스트해 볼까? 그동안 너는 상대의 파워를 측정하라구.”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걱정 마. 가자.”

상대편 타이탄도 이쪽에서 공격 준비를 갖추기를 기다려 주는 것인지 조용히 서 있었다. 적기사는 양손에 검을 단단히 쥐고는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적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도약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 거대한 방패로 후려쳐 왔다.

“똑같은 패턴인데?”

크리스틴은 상대의 틀에 박힌 공격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놈의 공격 패턴이 똑같다면 그다음은 보나마나였다. 그다음 순간 붉은 타이탄과 검은 타이탄의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들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거대한 검은 타이탄의 방패는 헛되이 공간을 갈랐을 뿐이었고 적기사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면서도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이었다. 순간적으로 상대가 어디 있는지 놓쳐 버린 안드로메다. 그 순간 적기사는 재빨리 상 대방 타이탄 뒤쪽으로 도약하며 있는 힘껏 검을 아래로 내리찍듯 휘둘렀다.

캉!

그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거대한 타이탄의 뿔 세 개 중 두 개가 잘려나갔고, 양쪽 어깨의 견갑(甲) 일부가 잘려 나갔다. 물론 견갑은 아래쪽 에서부터 맹렬한 속도로 재생되었고, 또 잘려진 뿔도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헤헤헤, 역시 덩치뿐이야. 놈은 숙련되어 있을 뿐이지, 검술은 별 볼일 없는 것 같아. 이봐, 그 순간 저 녀석의 파워를 측정해 봤어?”

<믿을 수 없게도 엑스시온 출력이 3.0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리고 저 타이탄, 기사와 타이탄이 별로 공조가 되지 않는 것 같아. 그 둘의 합쳐진 힘 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타이탄과 공조도 못 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녀석 아니야?”

〈그렇지 않다. 우리를 만든 코타스는 적기사의 프로토타입을 보고 가장 큰 문제점 하나를 발견했지.>

“응? 우리 대장이 몰고 있는 녀석 말이야?”

〈그렇다. 드라쿤은 우리들보다 훨씬 자아가 강하다. 만약 제임스 같은 뛰어난 기사가 아니었다면 드라쿤은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았겠지.>

“호오, 그럼 두 번째부터는 자아를 좀 약화시켰다는 말이겠군. 그렇다면 놈의 자아도 강하다는 말이 되나?”

<우리들의 자아도 강한데, 우리보다 더 월등한 엑스시온이라면 그 자아를 통제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기사와의 공조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잘된 일이군.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

〈크아아아, 내 뿔이 잘렸다. 내 자존심인 뿔이 두 개나 잘렸어. 그동안 네 녀석은 뭐했냐?>

“뭘 하긴 뭘 해? 여태껏 네놈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 있었잖아. 뿔까지 잘려 나가고 보니까 제정신이 드냐?”

<크아아악! 저 자식 죽여 버릴 거야.>

그 순간 안드로메다는 또다시 자기 마음대로 돌격해 들어갔다. 다크의 몸에서 거의 무한대라고 볼 수 있는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만큼 그 속도는 그 야말로 엄청났다. 또다시 청기사가 달려들어 방패로 후려치는 순간 상대는 훨씬 뒤쪽으로 도약해서 도망친 후였고, 방패가 힘에 밀려 몸 밖으로 약간 벗어난 그 틈을 노리고 상대의 검이 쑤시고 들어왔다. 물론 서로 간의 거리가 있었기에 검이 박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대기를 가르며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 들어왔다.

쾅!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뭔가는 1차 장갑을 꿰뚫고, 2차 장갑을 반쯤 박살 낸 상태에서 멈췄다. 그 정도 피해에서 끝난 것도 다 이 청기사의 장갑 판이 덩치에 어울릴 정도로 무지하게 두꺼웠기에 얻어낸 행운이었다.

〈그게 뭐였지? 분명히 피했는데……………〉

“피한 게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포착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나? 나는 못 믿겠다. 어떻게 그렇게 빠른 공격이 있을 수 있나?>

“멍청한 녀석! 저건 검기(劍氣)라고 하는 기술이야. 검을 통해 응축된 마나를 뿜어내는 기술이지. 네 녀석의 피 냄새로 굳어진 돌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걸?”

쾅!

그 순간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배부部: 등 쪽)에서 둔중한 진동이 느껴졌다. 등 쪽에 서 있던 붉은색 타이탄이 똑같은 기술로 등 쪽을 공 격해 온 것이다. 그로부터 몇 분 동안 안드로메다는 놈들을 박살 내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대의 공격에 치명상을 간신히 면할 정도의 막심한 피해만 입었을 뿐, 놈들의 장갑판에 가벼운 흠집 하나 만들 수 없었다. 붉은 기사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자, 이제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겠지? 지금부터는 내 명령에 따라, 이 멍충아.”

〈다, 닥쳐라. 내가 질 것 같으냐?>

“방금 전 공격에 꽤 심하게 당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당하면 네 녀석 목숨도 위태로울 거야. 안 그래? 죽을 거면 빨리 죽어 버려. 그래 야 나도 본국에 가서 도로니아와 다시 사이좋게 계약을 맺을 수 있지. 나는 말 잘 듣는 놈이 좋더라.”

<웃기지 마라.>

또다시 단순무식하게 이어지는 공격. 만약 상대가 도망칠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면, 아마 진작에 적기사들은 저 분노에 불타는 안드로메다의 검에 두 조각이 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 본대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싸우다 보니 상대의 움직임을 저지할 만한 방해물은 하나도 없 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다크는 엄청난 기의 흐름을 느꼈다. 타이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라면 자신이 뿜어내는 검강과 거의 엇비슷한 위력을 낼 정도였는 데, 그렇다면 바로 이것은? 다크는 그 기의 흐름이 날아오는 직선거리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도로니아를 조종했듯이 재빨리 안드로메다 를 움직였다. 여태껏 다크가 안드로메다를 가만히 놔두고 있어서 그렇지, 조종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움직일 수 있었다.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한 원활 한 움직임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저놈들 정말 한가락 하는 놈들이야. 검강을 쓰다니…….”

청기사가 약간 움직이는 그 순간 청기사가 원래 있었던 그곳을 관통하는 엄청난 빛 무리가 있었다. 안드로메다는 자신의 몸이 움직이고 나서야 다크 의 시각을 통해 옆으로 흘러가는 빛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안드로메다는 아직 못 느끼고 있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둘 다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검강? 검강이 뭔데?>

‘바로 저 빛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안드로메다가 물어왔다.

“검강도 모르는 애송이가 나한테 반항하다니. 이게 바로 검강이다.”

그 순간 청기사의 검이 안드로메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러졌고, 그 검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대기를 관통하며 덮쳐 오는 빛 무리에 상대방 타이탄은 기겁을 한 채 회피했다. 그들은 이쪽 타이탄이 그 어떤 고급 검술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방심한 상태였 는데, 자신들이 여태껏 사용했던 검술에 바탕을 둔 검강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 밀려들자 혼비백산했던 것이다.

안드로메다가 자신의 몸 안을 관통한 그 엄청난 마나의 흐름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주인’의 음성이 들려왔 다.

“제발 아무것도 모르면 좀 닥치고 내 말을 들어. 네 녀석은 내가 너를 타게 되었기에 무적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야. 내가 타 는 모든 타이탄은 무적이야. 알겠어? 도로니아보다도 형편없는 타이탄에 타고 있었어도 너 따위는 1분도 안 되어 고철로 만들 수 있다구.”

다크의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다크의 의지대로 청기사는 상대편 적기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청기사의 검은 엄청난 빛을 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상대편 적기사는 재빨리 회피하며 청기사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청기사의 검은 진로를 가로막은 적기사의 검을 두 토막 내며 밑으로 미끄러졌고 곧 1차 장갑판을 가르며 밑으로 훑어 내렸다.

뒤로 재빨리 회피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몸이 두 조각 나는 것은 면했지만, 그래도 흉부의 1차 장갑이 날아가고 2차 장갑의 반 이상 깊이까지 들 어온 매우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뒤로 후퇴하는 적기사가 채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 상대는 아래로 휘둘러졌던 검을 즉각 위로 쳐올리며 순간 엄청난 빛을 뿜어냈다. 그와 함께 붉은색 타이탄은 두 토막이 나 버렸다.

그다음부터 안드로메다는 자신이 ‘닥치고’ 주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강하다고 자부를 하고 있 었지만, 그의 주인은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했다. 냉철했고, 정확했으며 검을 휘두르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두 번째의 붉은 타이탄이 간단하 게 두 조각으로 잘린 후, 청기사는 멈추지 않고 적 타이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처음에 로니에르 공작이 탑승하고 있던 청기사가 상대방의 붉은색 타이탄에게 밀리기 시작했을 때 모두들 당황했지만, 순식간에 공작은 언제 자신 이 그랬냐는 듯 엄청난 기술을 써서 상대들을 죽여 버렸고, 또 밀집해 있는 상대 타이탄들을 베기 시작하자 거기에 새로운 힘을 얻은 그의 부하들도 맹렬히 도망치는 적을 뒤쫓아 확실하게 죽여 나갔다. 코린트와 크루마 간의 전쟁에 참여했던 크라레스 기사단의 첫 번째 승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 었다.

“대승을 축하드리옵니다, 공작 전하.”

다크가 타이탄에서 내릴 때 크로아 백작과 린넨 백작이 달려와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부하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땅바닥에 마법진 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랜 격전에 둘 다 피곤하겠지만, 테세우스 20대씩을 끌고 가서 아직도 양쪽 날개를 담당하고 있는 기사단을 도와줘라. 벌써 다 죽어 버렸다면 별 문제겠지만, 살아 있다면 도와줘야 하겠지.”

“옛, 전하.”

두 명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끌어 모아 양쪽의 격전지로 달려갔다. 마법사가 없기에 격전지까지 달려가야만 했는데, 그러자면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니 어쩌면 그동안에 동맹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전멸당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뭐, 죽은 놈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다크는 부하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린 후, 곧이어 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다 그린 후 상대방 마법사가 흘리고 간 수정 구슬을 주워 들고 마법진의 중앙에 놓고 일어서며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자신의 타이탄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야, 너 아직도 안 돌아갔냐? 너 이제 볼일 끝났어. 더 이상 피 맛보기 힘들다구. 알았어?”

다크가 저놈의 타이탄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툴툴거리자, 그녀의 머릿속에 타이탄 특유의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이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기다리고 있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어쭈? 언제는 돌아가라는 말을 해야 돌아갔냐?”

그녀의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메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주인이 타고 있지 않을 때 타이탄의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며 안드로메다는 말했다.

<당신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때 안드로메다 뒤쪽의 공간이 열리며 그 거대한 덩치를 삼켜 버렸다.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군. 언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었나?”

다크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한 번씩 보이던 낯익은 마법사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시옵니까? 공작 전하. 첩자들에게 받은 보고로는 오늘 아침부터 격전이 시작되었다고 하던데, 전황은 어떻사옵니까?”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거 보면 모르냐? 여기에 타이탄 2백 대 정도가 나뒹굴고 있으니까 까만 토끼보고 알아서 가져가라고 해.”

상대의 이죽거리는 말에 마법사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약간 토라진 듯한 모습이 보기에 귀여웠지만 그녀의 실력과 지위를 잘 알고 있는 마법사는 감히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단 그녀의 말은 승전 보고였기에 반갑게 말했다.

“벌써 전투가 끝났사옵니까? 승전 소식을 들으신다면 폐하께서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그렇게 좋아할 것은 못 되지. 로메로 열두 대하고 테세우스 네 대가 박살 났으니까 말이야. 일곱 명 전사. 나머지는 모두들 뻗어 있으니까 한 몇 달 몸조리 잘하면 일어나겠지.”

“예, 피해 상황은 까만 토끼에게 전하겠사옵니다.”

“그래, 딴 곳의 전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그쪽만 전투 결과가 나왔고, 딴 곳은 아직도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 중이옵니다. 미네르바 공작이 이끄는 가므 방면 기사단들은 조금씩 진격 중 인 것으로 보고받았사오나 전황이 그렇게 유리한 것 같지는 않았사옵니다. 바로 그곳에서 코란 근위 기사단과 레디아 근위 기사단이 맞붙었다고 보 고를 받았으니까요.”

“어떻게 되었든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빨리 보고를 해 주도록. 그리고 이쪽의 좌표를 일러 줄 테니 마법사 몇 명 좀 보내 줘. 불행한 사고에 의해 크 루마에서 파견되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모두 전사(戰死)해 버렸거든. 그 덕분에 휘하 기사단들 하고 통신도 안 되는 형편이야.”

약간 비꼬는 듯한 그녀의 어투에 어떻게 사건이 진행 중인 것인지 대충 감을 잡은 마법사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 매우 불행한 사고였군요. 즉시 조치해 드리겠사옵니다.”

통신이 끝난 후 그녀는 여기저기 앉아서 쉬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서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전장에 남아 있는 청기사의 흔적을 없애라.”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옛! 전하.”

그들은 각자의 타이탄을 꺼낸 후 청기사가 남겨 놓은 큼직하면서도 깊숙한 발자국들을 찾아 짓이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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