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8권 20화 – 미네르바와 다크의 신경전

미네르바와 다크의 신경전

제임스 일행은 일단 알렌 왕국의 변방 도시 카지마트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들은 마법진에서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수십 명의 주민들에게 둘러싸 여 환영을 받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이들이 오는 소식을 접한 카지마트시에서는 환영 행사에 동원할 시민들을 급히 끌어 모았다. 시민들은 급히 모 은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역시 급히 장만한 꽃잎을 동맹군(?)에게 뿌리며 환영했다. 다행히 동맹군이 몇 명 되지 않았기에 얼마 모으지 못 한 꽃잎으로도 성대하게 환영식을 끝마쳤다.

동맹군에 대한 카지마트시의 환영이 예전에 1진이 도착했을 때에 비해 훨씬 더 열렬했던 것은 당연했다. 토란, 가므, 알렌 세 왕국에서 전쟁이 벌어 졌지만 적군을 상대로 승리를 얻어 낸 것은 오직 알렌 방면의 동맹군뿐이었다. 토란과 가므의 전투는 기사단들끼리의 대 격전으로 시작하여 서로가 그것만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어지자 각종 전술을 동원하여 우회 기동을 실시, 곳곳에서 산발적인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방과 후방에서 계속 되는 격전으로 인해 민가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후방으로 피난하는 소동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이런 상황인데도 유독 알렌 왕국만이 전화(戰禍)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해 보였던 동맹군이 국경에서 적을 막아 낸 덕분이었 다.

제임스 일행은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민들에게 떠밀려 강당으로 들어가 회식의 주빈이 되어야 했고, 간단하게 벌어진 환영 무도회에서 춤까 지 춰야만 했다. 물론 정복 따위는 착용하지도 않는 약식 무도회였다. 그런 후 시장 일행은 전선을 향해 떠나는 이 혈맹의 동지들에게 안내자에다가 좋은 말까지 장만해 주며 성대하게 전송을 해 줬다.

“나 원 참,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낮은 목소리로 오스카가 제임스에게 말했는데, 그걸 어느 순간에 안내자가 들었는지 순박한 미소를 듬뿍 지으며 답했다.

“이게 다 기사님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입죠. 처음 이곳에 도착하신 분들은 시장님께 차가운 대접을 받았었는데, 그분들이 승전을 거두자 생각이 바뀐 거죠.”

제임스는 경악했지만 억지로 표정을 누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코린트의 군대를 잘 막아 내고 있는 모양이군요.”

“막아 내는 정도가 아닙죠. 기사 분들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오늘 아침 대회전에서 동맹군이 대 승리를 거뒀다지 뭡니까? 상인들에게 듣자 하니 코린트의 군대가 엄청난 숫자였다고 하던데,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지요. 그러고 보니 그때 봤던 붉은 도마뱀을 그려 놓은 로브를 입은 분들하고는 소 속이 다르신 모양입죠?”

제임스는 일부러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정도로 답을 대신했다. 잘못 말을 했다가는 들통 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안내해 드릴깝쇼? 그 로브 차림의 분들은 조금 전방에 주둔하고 계시고, 여러분들처럼 옷을 입고 계신 분들은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계신데요.”

“그 로브를 입고 있는 분들에게 데려다 주게나. 일단 그곳에서 신고를 한 다음 소속지 배정을 받아야 하니까.”

능청스레 답하는 까미유에게 안내인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요. 그럼 나중에 이쪽으로 돌아오시겠구먼요. 저쪽에 보이는 저기, 연기 나는 곳 있잖습니까? 나중에 인사가 끝난 다음 저기로 가시 면 될 겁니다요.”

“고맙네.”

“뭘요. 기사님들이 도와주시는 덕분에 저희들이 평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건뎁쇼.”

제임스 일행은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그 붉은색 도마뱀의 문장이 그려진 로브를 입고 있다는 기사단에 가까워진 것을 알고 안내인을 돌려보냈다. 물 론 안내인이 자신들을 의심하지 않게끔 자신들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뺏는 것이 미안하다는 둥의 말로 넘겼고, 아이들 선물이나 사 주라며 기필코 돈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안내인에게 약간의 돈까지 쥐어 줬다. 안내인이 매우 친절하고, 용맹스러운 우방의 기사들이라고 생각하며 희희낙락 하여 돌아가는 것을 눈여겨본 후 그들은 곧 안전할 듯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 본국과의 연락부터 시도했다. 아무래도 본국의 패전 소식이 마음에 걸렸 던 것이다.

“예, 여기는…, 아니, 리카 님 아니십니까?”

상대방 마법사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오자 리카는 대충 그에 답한 후 재빨리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응, 지금 전황을 알려 줘.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소식을 알고 싶어 하신다.”

수정구에 나타난 마법사는 리카 뒤에 서 있는 발렌시아드 후작을 알아보고는 곧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후작 각하.”

“인사는 됐고, 빨리 소식이나 전해 주게.”

“예, 각하, 알겠습니다. 현재 토란과 가므 왕국으로 침공해 들어간 군대는 강력한 적의 저지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루 동안에 토란과 가므 양쪽

에서 140여 대의 타이탄이 파괴되었고, 3백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현재 제1, 2근위대가 가므 전선에 파견되어 적을 막고 있는데, 전 황은 상당히 좋지 못한 편입니다.”

“세상에, 흑기사들이 전부 다 투입되었다는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현재 가므 방면군의 총지휘는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하고 계십니다. 크루마도 그곳 전선에 레디아 근위 기사단을 투입하여 응전 하는 중입니다.”

“그곳은 대충 알겠고, 알렌 방면으로 침공해 들어간 군대는?”

“예, 유감스럽게도 그곳 전선에서 대패했습니다. 현재 철십자 기사단과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소집되어 알렌 방면으로 투입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 다. 현재 바실리시에 집결했던 보병과 기병 사단은 일부는 가므 방면으로 돌려졌고, 나머지는 쟈크렌 요새로 후퇴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견군 사령관 지오르네 후작은?”

“전사하셨습니다.”

“정말 최악이군.”

“그렇습니다, 각하. 하지만 곧이어 호전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철십자 기사단과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거느리고 가실 분은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시 니까요.”

“세상에, 아버님이 직접 가실 정도로 사태가 위중한가?”

“예상외로 상대의 군사력이 강력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나서신 이상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알겠네.”

제임스는 리카에게 통신을 끊으라고 지시한 후 다음 행동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버님은 코타스 전하의 시신이라도 찾아오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 없잖아. 우선, 그녀를 찾아야지. 일단은 저 붉은 도마뱀 기사단을 감시해 보자. 그런데 하필이면 기사단이야. 전시에는 감시 하기 제일 어려운 게 기사단인데.”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 조심해야 해. 전시니까 아마도 저 일대에는 정찰조들이 쫙 깔려 있는 데다가, 마법 트랩(Trap)들도 엄청나게 깔려 있을 거 야.”

“모두들 조심하면 별일 없을 거야.”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바로 그날 밤, 거의 정찰이나 경계를 맡은 인물들과 당직을 서는 마법사들 외에는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한낮 에 있었던 전투는 모두의 진을 빼 놓기에 족할 정도로 대 격전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당직을 서고 있던 여자 마법사는 수정 구슬이 환하게 빛이 나는 것을 느끼며 가벼운 졸음에서 깨어났다.

“여기는 살라만더 기사단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정 구슬에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갈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수정으로 깎아 만든 조각 상처럼 차가웠다.

“귀국의 공작 전하를 바꿔 주세요.”

정말 대단한 미인이라고 생각하며 여자 마법사는 약간 주눅이 드는 심정으로 말했다.

“귀하의 소속과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취침 중이시니 내일 아침 일어나시면 곧장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의 정중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투덜거리며 억지를 부렸다.

“지금 좀 전해 줬으면 좋겠군요. 내 이름은 미네르바 켄타로아. 지금이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때인데, 취침을 하고 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요.”

미네르바 켄타로아라면 군대에 관계된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다 이름 한 번쯤은 들어 본 사람이다. 그만큼 그녀의 실력과 직위는 엄청났기 때문이 다. 그렇기에 여마법사는 자신의 언동을 좀 더 조심하며 말했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셨군요. 사령관 전하께 실례라는 것을 잘 알지만,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취침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 하셨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연락이 왔었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조심스런 말에도 불구하고 미네르바는 벌컥 화부터 냈다.

“도대체, 언제부터 크라레스 공작 따위의 간덩이가 그렇게 커졌지? 겨우 오합지졸의 타이탄 3백 대 정도 파괴한 것 가지고 기고만장하다니. 기다려 라, 내가 그쪽으로 직접 가겠다. 망할 녀석들!”

미네르바는 그것이 결코 위협용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잠시 후 여마법사에게 증명해 줬다. 살라만더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숙소 앞이 번쩍 하며 네 명의 기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나자 숙소 주변 사방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알람(Alarm) 마법에 의한 경

고음이 울려 퍼졌고, 숙소 안에서 대충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잠자다가 당황하여 허둥지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외곽 경비를 서기 위해 파견된 기사들 은 벌써 자신의 타이탄을 꺼내 들고 침입자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는 기사들은 본체만체하고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허둥지둥 당직실에서 쫓아 나온 여마법사의 멱살을 그 러쥐며 미네르바는 으르렁거렸다.

“방금 통신을 받았던 계집이 바로 너지? 빨리 그 망할 공작 녀석에게 안내해.”

미네르바는 너무나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 일행을 제지하기 위해 달려 나온 기사들의 포진한 상황을 재빨리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전체적 으로 그녀를 포위한 상황이었지만, 기사들의 수는 그녀가 마법사에게 안내받아 가고 있는 방향의 반대쪽에 더 많이 있었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 쪽에 위치한 한 건물 주위에 기사들이 집중 배치되고 있었다.

쾅!

미네르바는 문손잡이를 돌리는 수고를 생략하고, 발로 곧장 문을 차 버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을 줄 알았던 공작으 로 추정되는 인물이 책상 위에 앉아서 열심히 서류들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미네르바는 그 모습에 노기가 한풀 꺾여 처음보다는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인가?”

“그렇습니다. 모습을 보아하니 켄타로아 공작 전하이신 모양이군요. 그쪽에 앉으시지요. 보시다시피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아서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미네르바는 자신을 향해 얼핏 시선을 돌렸을 뿐, 또다시 서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공작을 향해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감히 크라레스 같은 약소국의 공작 따위가 이렇게 무례하게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못 기다리겠다. 도대체 기사단을 진격시키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뭔지나 들어 보기로 하지. 빨리 말해.”

“공작 전하가 보기에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열심히 귀국을 돕는 입장이니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 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뭣이?”

미네르바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며, 무의식중에 손이 검 있는 곳으로 순간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검을 뽑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 가닥 남아 있는 이성이 그것을 뽑는 것을 제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루마 최악의 적인 코린트를 앞에 두고 자중지란은 절대 금물이었다.

“이게 그대들을 도와주는 국가에 대한 예의인가요? 지금 본인은 이대로 군대를 철수할까 말까 매우 궁리 중에 있소. 첫 전투의 피해도 대단했고, 소 기에 목적하던 막대한 양의 전리품도 얻었소. 여기 쌓여 있는 것이 피해 보고서요. 그리고 저기 쌓여 있는 것이 전리품 목록이지. 또 저쪽에 쌓여 있 는 것은 포상자들의 명단 및 보고서요. 또 저것은 금일 소모된 무기 목록이고, 저건 추가 지급 요청서들이오. 오늘 단 한 번의 전투로 최소한 이틀 밤 은 새워야 할 정도로 많은 서류가 쌓였단 말이오.”

공작의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미네르바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만약 공작이 미네르바의 부하였다면, 아니 최소한 동맹 국의 지휘관이 아닌 동맹국 기사쯤만 되었다고 해도 두 토막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서류나 정리하겠다고 여기서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지금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때인지도 모르는데? 멍청한 네놈 때문에 벌써 코린트의 철십자 기사단은 집합을 완료한 상태야. 또다시 이곳에서 헛되이 대규모 전투를 되풀이하고 싶나?”

열 받아서 외치는 미네르바에게 공작은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오.”

“그럼 누가 알지? 네 녀석의 기사단이 쟈크렌 요새를 점령하는 것은 둘째 치고, 적 중앙 집단의 측면 공격만 해 줬어도 오늘 대승을 거둘 수도 있었 어. 네 녀석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토란과 가므 왕국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기사들이 죽었다.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거야?”

“그것 또한 내가 알 바 아니오. 내 책임이 아니니까.”

이 순간 미네르바의 몸속에 있던 뭔가가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정말 뱃속까지 썩은 놈이군.”

그 순간 그녀의 허리에 달려 있던 고색창연한 보검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뽑혔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래로 내려쳐 저 얄미운 공작의 몸통을 분 리시키지 못했다. 아직 그녀의 이성이 남아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목에 검날의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 어느새?”

미네르바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자신의 뒤에는 누구도 있지 않다고 자신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실지로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검을 집어넣어.”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미네르바의 뒤에서 차갑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거역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 담겨 있었다. 스르릉 소리가 나도록 천천히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는 미네르바의 이성은 어느샌가 맑아져 있었고, 그때쯤에야 누군가가 뒤에 서 있다는 가벼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상대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놀라울 정도의 고수였다. 미네르바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 서 있는 도저히 검을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 가녀린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미네르바는 우선 상대가 취하고 있는 자세가 상당히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검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

같지도 않았다. 허점이 많은 것도 같았고 완벽한 수비 자세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감히 모험을 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흥분하 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바로 등 뒤까지 접근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이어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이한 빛을 뿜고 있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이하게도 황금빛이 나는 얄팍한 검. 웬만큼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라면 묵직한 검을 선호한다. 이미 마나를 이용해 검을 다루기 시작하면, 검의 무게는 그렇게 큰 장애 요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처럼 얄팍한 검보다는 훨씬 파괴력이 좋은 묵직하고 긴 검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 미네르바는 상대의 검신에 새겨진 수많은 기하학적 주문을 볼 수 있었다. 검에 모양 좋으라고 저렇듯 엄청나게 많은 미세한 주문을 새기는 인 물은 절대로 없었다. 저것은 아마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새겨 놓은 주문이리라. 하지만 저렇듯 좁은 면적에 엄청나게 작은 글자로 저렇게 많은 주 문을 빽빽이 새겨 놓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검을 만드는 사람이 그걸 모두 다 새겨 넣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 황금색의 검. 검의 재료가 될 수 있는 황금색이 나는 금속은 의외로 숫자가 적다. 황금같이 무른 금속으로는 당연히 검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일 부 황금색이 나지만 잘 부서지는 금속도 사용 불가. 황금색이 나면서도 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질긴 금속은 오직 미스릴과 골드 드래곤 의 뼈뿐이었다. 물론 둘 다 엄청나게 가격이 비쌌고, 또 가공하기도 힘들었다.

저렇듯 희귀한 금속에다가 마법검이라면 그 검의 가격이 매우 비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보검의 소유자라면 결코 평범한 인물일 가능성은 없 었다.

“너는…, 누구지?”

“아마도 네가 이 밤중에 찾으러 온 사람이겠지.”

싸늘한 소녀의 말에 미네르바에게는 언뜻 집히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소녀는 들고 있던 황금빛 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봐, 발칸. 포도주나 주게. 혹시 브랜디가 있다면 더 좋겠고. 밤늦게 찾아온 손님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그녀의 말에 발칸 폰 크로아 백작은 즉시 책상에서 일어섰다.

“옛, 공작 전하.”

“거기에 앉아. 그래 뭘 따지려고 온 거지?”

미네르바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상대가 권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진짜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이야?”

“내가 한 말에 대답부터 해. 물은 것은 나야. 그리고 대답하는 것은 너고.”

미네르바는 나이도 얼마 먹지 않은 계집애가 꼬박꼬박 자신에게 반말지거리를 하자 슬그머니 화가 났지만 일단 참고 입을 열었다. 나이로 보나, 또 국력으로 보나 자신 쪽이 한 수 위였지만 현재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것은 자신이었다.

“왜 진격하지 않느냐 하는 거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잖아.”

“절호의 기회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가면 본국의 피해가 너무 커져. 나는 내가 맡은 기사단을 최대한 보존한 상태로 본국에 돌아가서, 지금쯤 황궁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을 그 빌어먹을 황제에게 돌려줘야 한다구. 이제 이해가 됐어?”

‘빌어먹을 황제’라는 말이 나오자 미네르바는 슬쩍 자신의 앞에 포도주잔을 놓고 있는 발칸이라고 불린 사내를 훔쳐봤다. 하지만 그 사내는 으레 그 렇거니 하는 생각인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잔을 두 여자 앞에 놨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또다시 서류 더미에 묻혀 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지? 그냥 이 자리에 눌러앉아 있겠다는 것은 설마 아닐 테지?”

“물론 아니지. 그다음 일은 재편성과 휴식이 끝난 후에 생각하기로 하겠어. 그동안 그쪽에서는 피를 좀 흘리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되겠지.”

“이런 망할! 그렇게 되면 본국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게 될지 생각해 봤어? 오늘 하루만 해도 박살 난 타이탄이 80대를 넘어섰어. 내일은 또 얼 마나 많은 타이탄이 박살 나고, 또 기사들이 죽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구.”

“그건 그쪽 사정이지 우리 쪽 사정이 아니야. 처음에 하는 것 보니까 그쪽은 이쪽에서 대충 시간만 끌어 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안 그 래? 나도 돌머리가 아니니까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상대가 미네르바의 약점을 들고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랬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처음 당신의 부탁대로 지금 대충 시간만 끌어 주고 있어. 뭐 잘못되었어?”

“그건…….”

“아, 이쪽에도 머리 잘 굴러가는 인물들이 많으니까 변명은 하지 마. 너는 우익군을 상대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맞췄지. 그리고 중앙군은 최대한 보강했고 말이야. 그러면서 이쪽은 엄청난 열세인데도 증원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은 이쪽이 시간을 끄는 동안 중앙을 돌파하여 적의 좌익군을 협공, 전멸시키겠다는 의도 아니겠어? 그동안 우리는 적의 우익군이 우리를 돌파하고 중앙군을 노리는 것을 막아 주기만 해도 작전 성공이었잖아. 그렇게 되면 코린트군이 주축인 주력이 무너진 이상 코린트의 동맹군은 자연적으로 와해될 거고 말이야. 매우 좋은 작전이지. 나는 그것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어. 나는 겨우 그 정도로 그쪽에서 우리를 배신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속이 좁지도 않아. 실력도 없는 것들을 동맹군이랍시고 우대하는 짓은 나도 못하겠으니까 그쪽도 그건 당연할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우선 이쪽의 실력을 그대들에게 먼저 보여 줬어. 우리 쪽에서는 그따위 얄팍한 적들에

게 농락당할 사람들이 아닌 진짜들을 보내어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협조하고 있다고 말이지. 이제 그대가 나한테 자네들의 힘을 보여 줄 차례야. 병력 은 거의 엇비슷하니까 잘해 낼 것이라고 믿어.”

“그, 그런…….”

“설마 그것도 해내지 못하고 괴멸당할 크루마라면 대 크라레스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봐야겠지. 알겠어? 조만간에 좋은 소식이 오기 를 기다리지.”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여태껏 크라레스가 과거 코린트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힘을 잃은 약소국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크라레스가 자신들을 도와주는 것 또한 능력도 없는 것들이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그 들을 적당히 이용한 후 버리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고 나약하다고 생각했던 크라레스에게 대국인 크루마가 시험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에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한다면 크루마는 멸망당하게 될 것이 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