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8권 22화 – 다가오는 최강의 대결 (8권 끝)
다가오는 최강의 대결
“피해는?”
미네르바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부하에게 말했다.
“예, 전하. 라이오네 근위 기사단 전멸, 엠페른 기사단 42대 상실, 레디아 제2근위대 전멸. 루엔 공작 전하께서도 전사하셨음이 확인되었사옵니다. 레디아 제1근위대 안티고네 7대 상실. 지발틴 기사단……………”
미네르바는 노장군의 보고를 들으며 오늘 악몽과 같았던 전투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던 많은 타이탄들. 그리고 그들을 무자 비하게 베어 가던 그 무시무시한……………
“그만! 아~ 끝장이군. 겨우 키에리 단 한 명이 가세했을 뿐인데 이 모양이라니.”
그날 하루. 오전 내내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크루마 연합군은 놀랍게도 상대방의 키에리드 발렌시아드 대공이 타이탄을 타고 직접 전장에 나타나 는 바람에 최악의 상태로 곤두박질쳤다. 키에리는 그 놀라운 검술로 눈에 띄는 대로 크루마 연합군의 근위 타이탄들을 파괴해 나갔다. 미네르바는 그 악마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아니 그 이상으로까지 발휘해 봤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조종하는 헬 프로네의 왼손이 떨어 져 나가고 생명까지 위태로워지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 부근의 실력 있는 기사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가 더 많은 피해만 자초했다.
“이 상태라면 본국의 엘프란 기사단을 끌어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사옵니다. 키에리 같은 검객을 상대할 자는 최소한 근위 기사급은 되어야 하옵니다. 하지만 그를 없애기 위해 수많은 기사들이 협공했지만, 결과는…….”
“결과는 알고 있다. 나도 그를 당해 내지 못했으니까. 오늘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 나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유능한 기사들만 잃 었구나.”
“너무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오늘의 전투로 키에리를 상대할 사람이 없는 한,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졌사옵니다. 차라리 본국으로 후퇴하여 마법을 이용하는 것이 확률이 더 높을 것이옵니다. 만약을 대비하여 마리아 방어선에 대타이탄용 공격진을 설치 중이옵니다. 그 곳으로 후퇴하시는 것이 어떠하올지…………….”
노장군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만약 지금 시점에서 후퇴한다면 후퇴가 아니라 패주로 전락, 적의 추격을 받아 최악의 경우 전멸의 가능성마저도 있었다.
“후퇴하면 더 비참해질 뿐이야. 우리가 본국으로 후퇴한다면 몇 남지 않았지만 우선 미란의 기사단이 등을 돌리게 될 거야. 그리고 몇 대 살아남지 도 못했지만 그 외의 동맹국들도 등을 돌리겠지. 그 녀석들이야 모두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
미네르바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자신이 그 망할 계집에게 주눅이 들어 별로 말대꾸도 못하고 쫓겨 온 그날의 일을 부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 만 그녀가 뭔가 말을 하다가 중단하자 부하는 예의상이라도 질문을 던져 왔다.
“무엇이옵니까?”
미네르바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놈들은 이 한밤중에 야간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빛을 뿜는 마 법을 사방에 펼쳐 대낮같이 해 놓고 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바에야 낮에 그렇게 설쳐 댔으면 밤에는 쉬어 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러면서 놈들은 내일 있을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내일 새벽까지 키에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다면 크루마는 미란 국가 연합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네르바는 어젯밤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검집이나 손잡이는 수수했지만 내용물은 정말 고급인 특이한 검을 착용 하고 있던 소녀. 키도 작았고, 아직까지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걸 보면 절대로 어떤 마법이나 그런 걸 이용해서 노화를 억제하고 있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이 미네르바보다 더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자꾸 막고 있었다. 미네르바도 예전에 경험했지만 중년에 이르러 마스 터의 경지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몸이 젊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건 한참 젊을 때로 돌아간다는 의미였지, 아예 성장기 때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게 문제야. 그녀가 과연 놈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못 막더라도 상관없지. 지금 타이탄 60대가 얼만데.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듯 미네르바는 노장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살라만더 기사단으로 갈 테니까 준비해 줘.”
그녀의 말에 노장군은 즉각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노장군 또한 그녀가 어젯밤에 살라만더 기사단의 로니에르 공작을 찾아가서 둘 사이에 뭔가 협 정을 맺었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그것에 대해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작전관인 그에게 여분의 기사단이 놀고 있는 것에 대한 해명을 해 줄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옛, 전하.”
미네르바는 이번에는 수행원 한 명만을 거느리고 또다시 살라만더 기사단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미리 연락을 하고 왔기에 마법사가 좌표를 알려 주 고, 또 그 부근의 알람 마법을 해지해 놓은 상태였기에 어제처럼 그렇게 요란한 등장은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전하.”
“로니에르 공작은 어디에 있나?”
“예, 따라오십시오.”
마중 나온 기사의 안내에 따라 미네르바 일행이 사라지자, 그곳에서 기사와 함께 공작 일행을 마중 나왔던 당직 마법사는 재빨리 그곳에 알람 마법 을 다시 시전했다. 이런 식의 마법 트랩을 부근에 쫙 깔아 놔야만 첩자나 적의 기습으로부터 안전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 일행이 안내된 곳 은 어제 마법사와 함께 갔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똑똑.
“무슨 일이냐?”
“예, 공작 전하. 미네르바 공작 전하께서 오셨사옵니다.”
“들어오라고 해.”
“옛, 전하. 안으로 드시죠. 그리고 마법사 분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시죠.”
기사의 말은 공작 한 사람만의 초청을 의미하고 있었다. 마리나는 미네르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네르바는 거의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임으 로써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마리나는 상대의 친절에 감사한다는 둥의 상투적인 말을 내뱉으며 마지못해 기사를 따라갔고, 미네르바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미네르바가 봤을 때 공작의 방은 매우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깨끗해서 여자로서 필요한 물품들이 거의 없다는 데 있었다. 방 한쪽에는 술병들이 몇 개의 컵과 함께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의 검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널찍한 탁자의 한쪽 구석에는 귀찮은 물건을 쌓아 놓듯 아무렇게나 놔둔 보석류 몇 가지가 있었다.
미네르바 또한 여자였기에 그쪽으로 자연히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소녀에게 잘 어울리는 색상의 보석들로 만들어진 예쁜 귀걸이며, 반지, 목걸이, 팔찌, 빗 등이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미네르바가 척 보기에도 웬만한 사람은 구입하기도 힘들 정도의 정교한 진품들이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세공품들은 드워프가 공들여 만든 것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었고, 인간 세상에 나와 장삿속에 물든 드워프는 도저히 만들기 어려운 대단한 작 품들이었다. 이것들은 요즘 들어 아르티어스가 잡아먹겠다는 협박과 함께 군침을 흘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파이어해머가 꽁지 빠지게 만들어 바친 것 이라는 것을 물론 그녀가 알 리 없었지만, 미네르바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소녀의 격조 높으면서도 고아한 취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 히 헛다리 짚은 거였지만.
“정말 아름답군. 드워프가 만든 물건인 모양이지?”
“마음에 들면 하나 가져.”
상대방으로부터 의외의 말이 튀어 나오자 미네르바는 약간 당황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기에 모여 있는 세공품들은 예술품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 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뭐? 준다면 고맙게 받기로 하지. 하지만 하나 골라 주지 않겠어? 주인이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모두 다 마음에 안 드니까 아무거나 골라.”
“……?”
대화가 이상하게도 헛도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미네르바는 화제를 딴 걸로 바꿨다. 일단 처음 만나자마자 도와 달라고 하기에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보니까 저 검(劍)은 상당히 특이하더군. 혹시, 드래곤 본으로 만든 건가?”
일단 검 얘기가 나오자 다크는 자신의 검을 가져와서는 살짝 뽑아 보이며 슬쩍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닌 애검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여기 와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지? 그걸 알아본 사람은 여태껏 없었는데…………. 정말 대단한 작품이지?”
그때는 대충 봤을 뿐이었기에 미네르바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야말로 웬만한 국가의 왕도 가지기 힘든 보검이었다. 일부러 눈에 잘 안 띄게 하려고 전체적으로 단순한 형태와 우중충한 색상에 미세한 무늬를 넣은 것 같은 검집과 손잡이. 하지만 손잡이도 그녀가 쥐기에 좋 고, 또 잘 미끄러지지 않게 매우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 살짝 모습을 드러낸 주문이 빽빽이 새겨진 황금빛 나는 검신.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 다.
“정말 대단하군.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것을 누가 만들었지?”
“두 개를 만든 제작자가 달라. 손잡이와 검집은 드워프가 만들었고, 검신은 아버지가 직접 만들었지.”
“정말 대단한 장인(匠人)이신 모양이군.”
“별로 그렇지도 않아. 잔소리꾼일 뿐이지. 그건 그렇고 내 검이나 보자고 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이지? 그대들의 실력을 아직까지는 입증하지 못 한 것 같던데? 술 한잔하겠어?”
“좋아.”
“이거 루빈스키가 보내 준 건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나는 아주 좋아하는 술인데.”
미네르바가 슬쩍 보니까 호박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병에는 ‘레드 드래곤’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라면 애주가 사이에서는 꽤 알
려져 있는 스바시에 특산의 브랜디였다. 미네르바도 이게 엄청나게 독한 술이라는 것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맛이나 보려는 심 산으로 조금만 마셨다. 순식간에 독한 술기운이 목 안을 화끈거리게 만들더니, 곧이어 뱃속 저 깊은 곳까지 뻗어 나갔다. 소문대로 정말 독한 술이었 다.
“그쪽의 시험에 내가 별로 성실한 답안을 제출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알리러 왔어. 오늘 전장에서 코린트 최고의 검객 키에리 발렌시아드가 갑자기 나 타났지. 그 덕분에 지금 크루마 연합군은 완전히 붕괴 직전이야.”
귀에 익은 이름이 나오자 다크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생각하려고 애썼다.
“키에리 발렌시아드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꽤 여러 번 들어서 그런지 아주 귀에 익은 이름이야.”
“키에리를 모른다면 검객이 아니지. 세대의 헬 프로네 중 한 대의 주인이자, 코린트 최고, 아니 어쩌면 세계 최고의 검객일 거야. 오늘 싸워 보니까 정말 그 칭호가 아깝지 않은 사람이더군.”
미네르바의 말에 다크는 코웃음을 쳤다.
“세계 최고라고? 쯧쯧. 그런 명칭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녀석도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던데, 그런 표현은 쓰지 않았어.”
“그 사람이 누구지?”
“카렐.”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기에 미네르바는 상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잘 모르겠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야.”
“아마 그럴 거야. 아주 오랫동안 은거한 모양이니까.”
그런 고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직접 칼을 겨누지 않는 이상, 상대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그의 존재를 무시 하고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 뛰어난 실력의 무사들은 참 많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자를 상대할 만한 기사가 없는 한 이번 전쟁은 절망적이지. 오늘 입은 피해가 워낙 컸기에 도와 달라고 찾아왔어. 솔직하게 말한다면, 만약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크루마 본국으 로 후퇴할 수밖에 없어. 아마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크루마는 지도 상에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코린트에서 크로나사 평원 을 되찾을 가능성은 아예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코린트는 점점 더 강해질 테니까.”
“흠, 꿈도 꾸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황제가 별로 기뻐할 소식은 아니군.”
“자, 어떻게 할 거야?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짐짓 생각하는 척하던 다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좋아, 도와주지. 대신 스웨인 지방까지 우리에게 줘야 할 거야. 패퇴하는 쪽을 돕는다는 것도 우리에는 매우 큰 모험이니까 말이지. 위험률이 큰 만 큼 그에 따른 대가는 그에 비례하는 법이지.”
그 말에 미네르바는 발끈했다.
“크로나사에 이어 스웨인까지 가진다면 지금 코린트 면적의 거의 반을 가지겠다는 건가? 그건 욕심이 지나친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그쪽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데? 멸망에서 승전으로 뒤바뀌고, 거기에다가 코린트 영토의 반을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더 가지겠다는 것인가?”
한참 생각하던 미네르바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괜히 고집 부려야 소용 없었다. 지금은 상대가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말이다.
“좋아, 승낙하겠어.”
미네르바의 허락이 힘겹게 떨어지자, 다크는 곧바로 서랍을 열고 서류 두 장을 꺼내 들고 미네르바 앞에 내밀며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았어. 그렇다면 여기에 서명하라구. 아마도 다시 한 번 더 찾아오게 될 것 같아서 발칸보고 만들어 두라고 했지.”
“철두철미하군.”
“물론이지.”
미네르바가 서류에 서명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두 개의 달 중 하나는 이미 하늘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코린트에서 야간에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지 않은 것은 어두운 밤에는 상호 간에 분별이 힘들다는 것 등의 얄팍한 이유가 아니었다. 코린트군 최고 사령관인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과 오늘 낮까지 크루마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에게 전쟁을 하는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이 생 겼기 때문이다.
“먼 길을 가기 전에 포도주 한잔하고 가는 것이 좋겠지.”
키에리는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포도주를 한 잔 가득 부어 조심스럽게 관 위에 올려놓은 후 다른 두 개의 잔에도 가득 부었 다. 그런 후 이제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친구에게 잔을 건네준 후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절친했던 우리들의 친구를 위해서 건배!”
까뮤는 포도주잔을 완전히 비운 후 그 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으르렁거렸다.
“자네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도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야.”
까뮤의 질책에 키에리는 고개를 숙이며 침울한 어조로 답했다.
“미안하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망설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자네들만으로도 크루마를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내 착각 덕분에 친 구 한 명만 잃었군. 그리고 수많은 부하들도.”
까뮤는 포도주잔을 하나 더 가져다가 자신의 잔에 붓고, 또 키에리의 잔에도 부어 주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뭔가 오래전을 회상하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기억나나? 리사와 처음 만났을 때 말일세.”
그 한마디에 키에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그때를 생각하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훗, 당연하지. 그렇게 성질이 괄괄한 아가씨는 처음 봤었으니까 말이야.”
“그런 건 괄괄하다고 하는 것보다, 대범하다고 하는 거야. 지독한 말괄량이였지.”
“그 성격 덕분에 재미나게 돌아다녔었잖아?”
“그래, 그랬어. 그녀의 검술 실력은 그 당시 자네와 비슷했었지. 우리들이 모험 여행을 떠났을 때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말이야.”
까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길로 키에리는 잠시 그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 당시 리사는 정말 대단한 검객이었다. 그녀의 스승이었던 크로데인 후작이 그녀의 천재성을 격찬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검술 실력이 다른 친구들과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출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검술만을 수련했었다면 크루마와의 전투는 처음부터 크게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아주 든든한 친구였지.”
“그래, 처음 세상에 나가서는 드래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녀를 말린다고 나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는데, 네 녀석은 그 녀를 옆에서 부추겼지?”
“하지만 덕분에 깊은 산속에 은거해서 미련하게 마법 실험이나 하고 있던 친구를 한 명 더 구했잖아.”
“그건 그래.”
까뮤는 관을 세심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알고 있었나?”
“뭘?”
“나는 리사를 정말 사랑했었네.”
까뮤의 말에 키에리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키득거렸다.
“대강은 눈치 채고 있었지. 사실 나도 조금은 마음이 있었거든. 그래서 자네가 아예 고백을 못하도록 막고 있었지. 킬킬킬…….”
키에리가 오랜만에 속마음을 털어놓자 까뮤는 픽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만약 리사가 결혼하던 날 키에리가 고백이랍시고 이 말을 했다면 아마 칼을 빼들고 달려들었겠지만 그새 엄청난 세월이 흐른 후였기에 그들에게는 그때 일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둘이서 견제하고 있는 사이에 딴 놈에게 뺏겼군.”
“나는 너만 견제하고 있었지. 그라세리안은 여자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런 말괄량이가 겨우 사랑 노래 한 방에 이성을 상 실하고 경쟁 상대라고 생각도 안 하고 있던 비리비리한 녀석에게 결혼 승낙을 할 줄이야 꿈에라도 생각을 했었겠나?”
“참,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짜 죽었을까?”
“아마도………….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리사의 자리에 그녀의 아들을 앉힐 작정이야. 아마 저승에 있는 그녀도 기뻐하겠지. 그런데 그라세리안의 자 리는 누구에게 물려주지? 왜 그 녀석은 대를 잇지 않은 거야.”
“아마 불능이었는지도 모르지. 킬킬…….”
“글쎄.”
그들은 전쟁 따위는 잠시 잊고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과의 추억을 얘기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러는 것이 고인(故人)에 대한 예의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만약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도 죽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들은 또 한 번 더 고인이 좋아했던 술을 앞에 두고 밤을 지새울 것이 다.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 정해져 있던 고인을 전송하는 방법이었다. 추억과 술잔을 나누는 가운데 머나먼 변방의 밤은 점점 더 깊어 가고 있었다.
『<묵향 : 외전-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