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8권 3화 – 뚱뚱이와 뻔뻔이

뚱뚱이와 뻔뻔이

넓은 호반이 펼쳐진 아름다운 대지. 그곳에 1백 년쯤 전에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어떤 귀족이 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자그마한 성을 지어 놓았다. 그 귀족은 몰락해 버렸지만 그 아름다운 고성(古城)은 아직도 남아서 사람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이 위치한 장소는 전략 적인 요충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만을 연출해 내기 위해 지어 놓은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 고성은 오랜만에 손님들로 들끓고 있었다. 수십 명의 기사들, 그것도 그냥 기사들이 아닌 그래듀에이트들로서 자신의 타이탄을 하 사받은,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고성의 곳곳에 숨어서 외곽을 경비하고 있었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고성의 한구석에서 회담을 나누고 있었다.

“허허허..,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 과한 조건이외다.”

흔히 외교 사절들이 그렇듯 닳고 닳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뻔뻔한, 그러면서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고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사람도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본국(本國)에서 총력을 다해 귀국(貴國)을 지원해 주는데, 겨우 지로테 강(江) 이남(以南)만을 약속한다는 것은 무리 가 있습니다. 우리는 크로나사 평원 전체를 원합니다. 오랜 옛날부터 크로나사 평원은 우리 크라레스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그것을 코린트가 빼앗아 갔으니, 만약 코린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크로나사 평원에 대한 우선권을 본국에서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하지만 크로나사 평원은 비옥하면서도 대단히 넓은 대지외다. 그 반 정도만 가져도 귀국은 엄청난 국력의 증가를 가져올 것인데, 귀국에서 본국에 대해 지원해 줄 수 있는 병력과 비교할 때 크로나사 전체를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욕심이오. 귀국이 보유하고 있는 정규급 타이탄은 겨우 29대, 그걸 모두 본국에 지원해 줄 수는 없을 거고…, 최대한 많이 지원해 준다고 해도 20대의 타이탄이 고작일 거요. 그런데 겨우 20대를 지원해 주 면서 크로나사 전체를 원한다는 것은…….”

뻔뻔이의 말은 여기서 막혔다. 왜냐하면 크라레스에서 파견된 사절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말을 중단하자 크라레스에서 파 견되어 온 뚱뚱한 체구의 인물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귀하는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본국은 치레아와 스바시에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80대의 타이탄을 노획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고철 인 상태에서 노획된 것이지만 그것을 재료로 지금 현재 20대 정도의 타이탄을 생산해 냈습니다. 또 조만간에 그 수는 더욱 불어날 것입니다. 본국의 전력을 겨우 28대의 타이탄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곡을 찔린 뻔뻔이는 약간 헛기침을 하면서 분위기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험험…, 미안하오. 그 점을 잠시 잊어 먹었군. 하지만 본국과 코린트와의 전쟁이 시작되면 뛰어난 타이탄이 아니면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오. 귀국에 서 노획했다는 타이탄들은 잘 되어 봐야 가까스로 정규급에 들어가는 타이탄들…………. 그런 타이탄들은 흑기사를 가지고 있는 코린트와의 정규전에서 쓸 수는 없다는 말이외다. 물론 귀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카프록시아는 대단히 뛰어난 타이탄이오. 그러나 카프록시아는 겨우 10대밖에 되지 않잖소? 그렇다고 근위 타이탄들을 몽땅 다 본국에 지원해 줄 리는 없을 테고…………?”

뻔뻔이의 말에 뚱뚱이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물론 카프록시아는 본국의 얼굴이니 내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카프록시아와 같은 설계로 생산된 테세우스가 있습니다. 지금 테세우스는 28대가 생산되었고, 조만간에 12대가 추가 생산될 예정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모든 테세우스들을 귀국에 파견할 계획이십니다.”

뚱뚱이의 말에 뻔뻔이는 살짝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응? 본국의 첩보부에서 들은 말과는 다르군요. 귀국에서는 그것들로 미가엘이나 루시퍼를 생산한다고…………

“그것은 차세대 타이탄 생산 계획을 숨기기 위해 본국에서 퍼뜨린 거짓 정보입니다. 카프록시아급 타이탄을 40대나 생산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본국 을 경계할 것이 분명하지요. 본국은 기사의 수가 적기에 그것들을 미가엘이나 루시퍼로 재생산한다면 그것을 탈 기사가 없습니다. 본국의 실정에 가 장 적합한 방법은 소수의 고성능 타이탄을 생산해서 몇 명 되지 않는 뛰어난 기사들에게 배분하는 것뿐이지요.”

뚱뚱이의 말에 뻔뻔이는 마치 큰 은혜나 받는다는 듯 과장되게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엄청난 지원이라면 그 대가 또 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상대에게 최소한의 양보만으로도 그것들을 얻어 낼 궁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오오, 이번 전쟁에 그렇게 대폭적인 지원을 해 준다니, 폐하께서 그걸 아신다면 기뻐하실 거외다. 하지만… 파견군 사령관은 누구로 할 예정이오? 폐하께서는 귀국에서 뛰어난 기사들을 보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상대의 능청스런 요구에도 뚱뚱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것은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근위 기사단이나 친위 기사단 소속을 제외한 본국의 모든 뛰어난 기사들을 투입할 것입니다. 사령관은 제2친위 기 사단장,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가 되실 겁니다.”

상대의 말에 뻔뻔이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로니에르 공작이라면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치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혜성과 같이 권력 의 전면에 등장한 신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크라레스의 황제에게는 꽤 신뢰를 얻고 있는 모양이지만, 대외에 아무런 실적도 드러난 게 없었다. 하지 만 뻔뻔이는 그런 이름 없는 인물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뻔뻔이를 이곳에 보낸 미네르바 공작도………….

“호, 얘기는 들었습니다. 상당한 수완을 지니신 분이라구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귀국에서 파견군 사령관으로 스바시에 전투에서 뛰어난 무위를 보 인 근위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경을 보내 주실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 뛰어난 기사들이 모여야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상대의 코 란 근위기사단은 강하기 때문이지요. 안 그렇소?”

뻔뻔이의 말에 뚱뚱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스바시에 전투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은 지금 스바시에 총독인 루빈스키 공작이다. 하지만 루빈스키 공작이 프로이엔의 타이탄을 타고 싸웠기 때문에 지금 외국에는 프로이엔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터 져 나온 웃음을 슬쩍 얼버무리며 상대에게 말했다.

“하하하.., 그것은 잘못 알고 계신 거지요. 그 타이탄에 타고 계셨던 분이 로니에르 공작 전하시니까요. 폐하의 만류로 아직 시험을 치르지는 않으 셨지만 언제라도 마스터의 칭호를 획득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실력은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뚱뚱이는 일부러 루빈스키 공작을 숨기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인물이 로니에르 공작이라고 말했다. 상대는 그 타이탄에 탄 인물이 론가르트 백작으 로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속여도 들통 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마스터…라고 했소? 하지만 귀국에 마스터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예, 폐하께서 본국의 전력 노출을 염려하셔서 취한 조치였죠.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는 본국 최고의 검객이십니다. 귀국과 마찬가지로 본국에서 도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폐하께서는 가장 아끼시던 그분을 전장에 보내실 결심을 하신 것이지요. 물론 본국에서 파견하는 모 든 타이탄들은 귀국의 국가 문장을 달게 될 겁니다. 최대한 본국에서 귀국을 돕는다는 것을 숨겨야 하니까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본국은 코린트에게 간단하게 멸망당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하오.”

“이해를 하셨다면 크로나사 평원 전체를?”

뚱뚱이의 말에 뻔뻔이는 슬쩍 능청을 떨었다. 전권 대사로 파견된 자신이 말하면 그것은 크루마의 황제가 말한 것과 같았기 때문에 최대한 말조심을 해야 했던 것이다.

“흐음…, 그건 폐하와 상의를 해 봐야………….”

“귀국에서 크로나사를 줄 수 없다면 본국도 귀국을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하를 믿고 드리는 말이지만, 본국에는 과거 트루비아의 모든 타이탄들이 망명해 와 있습니다. 물론 파로인급 네 대야 쓸모가 없겠지만, 안토로스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기사단장은 그라드 시드 미안이라는 인물이죠. 대단히 뛰어난 기사가 아닙니까?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 트루비아가 독립할 수 있도록 귀국에서 도와주셔야 하겠지만 말입니 다. 어떻습니까?”

그 말에 뻔뻔이는 맹렬하게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고성능 타이탄 44대. 웬만한 나라 열 개를 합한다고 해도 구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외상이라면 황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거기에다가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상대가 원하는 크로나사 평원은 크루마의 땅도 아닌, 코린트의 땅인데 말이다.

“헛헛헛, 좋소이다. 귀국에서 그 정도로 성심껏 본국을 도와주신다고 하는데, 그 정도 대가는 있어야 하겠지요.”

“하하하.”

뚱뚱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것을 눈치 챈 기사는 재빨리 뚱뚱이에게 서류를 건네줬다. 뚱뚱이는 미리 작성된 2부의 서류 중에서 하나를 뻔뻔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귀국의 언질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일단 국가 간의 중대사이니만큼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죠?”

자신의 앞에 놓여진 서류가 ‘전승했을 때 크로나사 평원을 양도한다’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눈치 챈 뻔뻔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구겨졌다. 잠시 망 설였지만 뻔뻔이에게는 이 서류에 서명하지 않고 벗어날 명분이 없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서류가 나오지 않았다면, 뻔뻔이는 이러쿵저러쿵 변명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다가 헤어질 작정이었던 것이다. 뻔뻔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서류에 서명한 후 뚱뚱이에게 자신이 서명한 서류를 넘겨줬고, 곧 이어 뚱뚱이가 서명한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뻔뻔이는 뚱뚱이가 건네준 서류에도 서명한 후 씁쓰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 서류 를 건네줬다.

기사가 서류를 조심스레 접어서 품속에 넣는 광경을 보지도 않고 뻔뻔이는 약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뚱뚱이를 향해 슬쩍 비꼬았다.

“준비성이 좋으시군.”

그 말에 뚱뚱이는 두터운 살집 위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각하께서 제 의견에 찬성하지 않으셨다면 휴지 조각이 될 종이였을 뿐이죠.”

“그렇다면 군대의 파견은 언제?”

“전쟁이 시작된 후 저희들은 기다리다가 코린트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 필요하다면 본국이 들통 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 사단을 파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저희들이 기사단을 파견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우선 본국(本國)이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하니까요. 그 정도 는 이해해 주시겠지요?”

뚱뚱이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세세히 이해득실을 따져 본 후 승산이 있다면 참전하겠다는 그 속셈 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뻔뻔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뻔뻔이는 상대의 말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코린트의 정보 망은 대단히 치밀했고, 또 흑기사들의 위력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알겠소. 귀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폐하께 자세히 아뢰겠소.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부탁드리겠소.”

“물론이지요, 가레신 후작 각하.”

능청스레 미소를 짓고 있는 뚱뚱이를 보며 가레신 후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자신이 당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국(大國)의 체면상 말 을 뒤집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물 건너간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 가레신 후작은 맹렬히 두뇌를 회전시킨 후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뭔가 돌파구가 될 만한 것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귀국이 본국에 성심성의껏 협조를 아끼지 않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외다. 그런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으음…………..”

가레신 후작은 짐짓 궁리하는 척하다가 이윽고 생각났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귀국의 기사단은 아무래도 본국의 기사단보다 약하지 않소?”

가레신 후작이 밑도 끝도 없이 말을 시작하자 뚱뚱이는 ‘저 노회한 너구리가 또 무슨 수작을?’하는 생각을 하며 긴장했지만, 상대의 말을 반박할 수 는 없었기에 일단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요.”

상대가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들자 가레신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본국의 기사단이 귀국보다 강한 것은 뛰어난 선생들을 많이 보유한 아카데미 덕분이죠. 본래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검술을 익혀 가지고 태 어나는 것이 아니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코린트의 그 강대한 기사단들도 따지고 보면 우수한 아카데미들이 코린트 내에 여럿 있기 때문이죠. 엘프리 안에 있는 엘프리안 아카데미는 마법으로도 유명하지만 뛰어난 그래듀에이트들을 많이 양성한 기사학부를 가지고 있소이다. 어떻소? 귀국의 태자( 子)는 무술에 꽤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본국에서 수련시킬 생각은 없소? 폐하께서는 귀국이 그토록 본국의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을 아시고 본인이 떠날 때 태자를 엘프리안 아카데미 기사학부에서 뛰어난 기사로 키워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하고 말씀하셨소이다.”

물론 가레신 후작이 마지막에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엘프리안 아카데미는 타국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하게 폐쇄적인 학교로 유명했다. 그만 큼 엘프리안 아카데미의 기사학부에는 뛰어난 기사인 스승들이 많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대로 크루마를 이끌 어 가는 기둥으로 성장했다. 그런 전통과 실력이 있는 학교에 타국인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뻔했다. 인질…………. 하지만 뚱뚱이는 이미 그것을 거절할 찬스를 놓쳐 버린 상태였다. 상대가 ‘폐하’를 등에 업고서 말을 했을 때 뚱뚱이는 더 이상 할 말이 궁색해지고 말았다. 사실 대국(大國)의 황제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쓴다는 말인가? 황제 폐하 운운하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임이 확실했지만 그 말을 황제가 했다고 하는 데야 “그 말은 거짓말이야”하고 반박할 수는 없었다.

뚱뚱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마지못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주절거렸다.

“너무나도 크신 은혜라 감히 그것을 따르기에는………..”

가레신 후작은 그 일격에 상대가 쩔쩔매는 것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가증스럽게도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상대 방에게 마치 큰 은혜나 베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오. 귀국에서 본국에 해 주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성의일 뿐이죠. 엘프리안 아카데미에서 신입생을 받는 것은 겨울이외다. 그때 3개월 에 걸쳐 실력 테스트가 행해지고, 각자에 맞는 교육이 시작됩니다. 저희들로서도 든든한 우방이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안 그렇소이까?”

“그, 그렇죠.”

뚱뚱이와 뻔뻔이의 대결이 끝난 후, 뚱뚱이가 축 처진 몰골로 퇴장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가 마지막에 맞은 카운터펀치는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 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뚱뚱이는 황제 폐하의 진노 덕분에 목이 날아갈 가능성이 다분히 있음에도 서둘러 크라레스로 돌아갔다. 그런 후 황제 폐하께 자신의 실수를 아뢰었고, 곧이어 대책 회의가 열렸다.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옵니다, 폐하. 황태자 전하는 다음 세대의 크라레스를 이끌어 가실 분이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하를 파견하는 것은 아 니 되옵니다. 그 때문에 코린트에도 가짜를 파견한 것이 아니옵니까?”

6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황실 시종장(長)의 말이 끝나자, 토지에르 경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시종장의 말이 맞사옵니다. 아무리 아카데미에서 무술을 배우게 된다고 하더라도 인질이 될 가능성이 다분한 이상 황태자 전하를 보낼 수는 없사 옵니다.”

이때 두툼한 뱃가죽을 자랑하는 안티노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코린트는 언젠가는 전쟁을 해야만 하는 상대지만, 크루마는 지금부터 착실하게 신뢰 관계를 쌓아 가야 만 하옵니다. 코린트에는 무도회 정도만을 개최하는 공식적인 자리기에 가짜를 보내도 들킬 염려가 없사오나, 크루마는 아카데미 입학이기에 장시간 교육을 받고 또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리 쪽에서 가짜를 파견했다는 것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안티노스의 지적에 모두 그가 지적하는 바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는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국장이었기 때문이다. 휘하에 수많은 첩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있다면 그것을 핵으로 이것저것 갖다 붙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낼 수 있 는 인물. 그렇기에 그가 가짜임이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었다.

“흠, 시종장.”

“예, 폐하.”

“만약 황태자를 파견한다면 최대한 붙일 수 있는 호위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예, 국제관례상 본국의 국력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전하께서 타국을 방문하실 경우 공식적으로 1명의 마법사와 5명의 기사, 20명의 호위병을 대동

하실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4명의 시녀, 8명의 하인, 30명의 짐꾼을 거느리실 수 있습니다.”

시종장은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국제관례상 통용되고 있는 호위의 수를 상세히 설명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이런 국 제관례를 따질 필요가 없었지만, 황태자가 갈 곳은 크루마 제국이었고, 크루마는 4대 강국(四大强國)에 들어갈 정도로 강대국이었기에 국제관례를 철 저히 따질 필요가 있었다.

“흠, 그 모두를 기사로 채운다고 해도 턱도 없는 전력이군.”

약간은 허탈한 듯한 황제의 말에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거기다가 전하께옵서는 친선 사절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가시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실 필요가 있사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크루마에 가고 오실 때에는 호위를 붙일 수 있지만, 아카데미에 계신 동안은 그 정도의 호위조차 상주시킬 수 없사옵니 다. 아카데미에서 전하께 배정해 주는 방의 수와 규모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아마도 호위 기사 2명 내외, 시녀 2명, 하인 4명 정도가 최대치일 것이옵 니다.”

“그대의 말이 옳겠지. 하지만 그 모두를 그래듀에이트로 채워 넣는다고 해도 크루마의 군사력을 생각해 볼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그렇다면 경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폐하, 그러니까……”

젊은 황제의 질문에 입을 연 인물은 목소리는 들렸지만 그곳의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회의가 벌어지고 있는 밀실의 중앙에는 넓은 원 형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탁자에는 일곱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들에는 다섯 명만이 앉아 있었고 두 개는 공석이었다. 공석인 탁자 위에는 지름이 50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수정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수정 구슬 안에 비춰지고 있는 스바시에 총독인 루빈 스키 공작이 입을 연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 두 명의 시종만을 붙여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호위를 붙이지 않는 편이 황태자 전하께 유리할 것이옵니다.”

“경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폐하. 호위가 유능할수록 감시는 오히려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리고 만약 상대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즉시 손을 써 오 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호위 무사가 없으니 언제라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비밀리에 파견한 기사나 마법사를 통해 전하를 구출할 수 있겠지요. 아마도 그편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더 높을 것이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노라. 황태자는 길일(吉日)을 택하여 크루마에 보내도록. 하지만 크루마가 본국을 얕잡아보지 않도록 황태자의 일행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최고의 정예들로 배치하라.”

“예, 폐하.”

“오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진다. 모두들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국외로 수련 여행을 떠난 기사들을 하루빨리 소환하도록!”

코린트의 황궁 ‘피의 궁전(Blood Palace)’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 홀에는 대규모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우아한 옷들을 입은 처녀들과 최대한 늠름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청년들. 수백 명에 이르는 남녀들로 연회장은 붐비고 있었지만, 황궁의 중앙 홀이 원체 넓다 보니 거의 반도 채우 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 홀의 한쪽에는 거의 1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악단이 자리를 잡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금은과 각종 보석으로 아 름답게 치장된 천장과 벽은 금은 세공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드워프들의 작품답게 호화찬란했다. 바닥은 아름다운 문양을 가진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어찌나 잘 다듬었는지 거의 거울 같아서 얼굴이 비칠 지경이었다. 거기에다가 대리석의 곳곳에 각종 보석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놓았다. 수백, 수천의 보석 알갱이들을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정확한 위치에 집어넣은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코린트가 가진 엄청난 부(富)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바닥 모자이크에 사용된 보석은 비싸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노, 홍옥, 청옥, 갖가지 색의 수정 따위였고, 중앙 홀의 엄 청난 넓이를 생각한다면 거기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홀이 너무 넓은 데다가 모자이크의 규 모가 매우 크기에 바닥 위에서 대충 봤을 때는 뭐가 그려져 있는지 알기 힘들었지만, 2층이나 3층 현관에서 내려다보면 전쟁의 신이자 코린트가 그들 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들고 있는 아레스(Ares)의 비호 아래 코린트의 군대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그려져 있는 전쟁의 주 무대는 그 땅을 획득함으로써 코린트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크로나사 평원이었다.

참혹한 전쟁터가 그려져 있는 홀에서 무슨 파티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자이크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바닥 바로 위에 서서는 무슨 그림이 그 려져 있는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으니, 그 위에 서서 파티를 즐기는 인물들에게 있어서 이 홀은 단순히 엄 청나게 호화롭고 아름다운 장소로만 보였을 뿐이다. 홀에서 무도회를 즐기고 있는 남녀들의 거의 대부분은 코린트 시민이 아닌 타국에서 참석한 귀 족, 혹은 왕족들이었기에 이곳에 그려진 그림이나 이 모자이크가 그려진 배경 따위를 알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있는 청년들의 상당수는 상당한 미모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는 ‘로닌그레이’ 황녀의 남편감 후보로서 초청된 인물들이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코린트 황실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기에 각국의 왕실에서는 황녀를 획득(?)하기 위해 앞 다투어 그 초청에 응해 왕자들을 파견했다. 또 수많은 왕자들이 참석하는 연회인 만큼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 각국에서 온 공주들도 많이 있었다. 또 코린트의 귀족들도 타국의 왕자나 공주를 사귀기 위해 참석하기도 했다.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연회장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3층 현관에서 재미있다는 듯이 그들을 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짧은 콧 수염을 가진 상당한 멋쟁이였는데 그는 보통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탐스러운 금발을 상당히 길게 기르고 있었다.

“제법 무대가 갖춰져 가는 것 같군 그래. 초청에 불응한 국가는?”

그의 말에 뒤편에 서 있던 화려한 복장의 젊은이가 재빨리 대답했다.

“없사옵니다, 대공 전하. 오히려 로닌그레이 전하께 선택되지 않은 왕자나 귀족들을 사윗감으로 삼기 위해 각 국에서 공주들까지 파견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추가되었기에, 그 인원을 위한 준비가 힘이 들 지경이옵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하긴 그래. 저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누가 크라레스의 왕자이지?”

청년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바로 저쪽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건장한 젊은이이옵니다.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청년이 가리키는 곳에는 젊고 잘생긴 젊은이가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춤을 추고 있었다.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크라레스의 왕자가, 본국이 크라레스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전쟁의 홀(Hall of War)’에서 계집들과 춤을 춘다. 크흐흐흐, 매우 재미있지 않나?”

“옛!”

발렌시아드 대공은 반쯤 농담 삼아 미소를 흘리며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청년 무관은 얼굴에서 긴장을 지우지 않고 즉시 답했다. 그런 부하를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본 다음 발렌시아드는 또다시 시선을 크라레스의 왕자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제법 잘생겼군. 하지만 아직 풋내기야. 그런데 그레지에트 왕과는 별로 닮지 않았는데?”

“예, 전하. 그 때문에 그의 신분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했사옵니다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사옵니다. 부계보다는 모계 쪽에 가까운 얼굴을 지닌 것으로 조사되었사온데, 나이에 비해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아마도 크라레스 왕가 자체가 뛰어난 무사들의 혈통을 지닌 만 큼, 나중에는 제법 괜찮은 기사가 될지도………….”

그 말에 대공은 비웃듯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저 녀석의 호위들은 어디에 있나?”

“예, 3-22호 숙소에 묵고 있습니다. 금십자 기사단 소속의 기사 몇 명이 감시 중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크루마와 전쟁을 벌이려면 후방이 튼튼해야 한다. 크라레스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으려면 철저히 대비를 해야겠지. 알파레인 경에게 명하여 그래듀 에이트를 몇 명 더 파견하여 동태를 감시하라 일러라.”

“옛, 전하.”

공작은 청년 무관에게 명령을 전달한 후 이제 더 이상의 볼일은 없다는 듯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려한 복장의 청년은 자신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관 두 명 중의 한 명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청년의 지시를 받은 무관은 즉각 금십자 기사단장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에게 대 공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