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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8권 9화 – 살라만더 기사단

살라만더 기사단

희뿌연 빛이 사라지는 순간, 거대한 영구 마법진 앞에 나열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마법진 위에 크라레스에서 오기로 되어 있는 동맹군 선발대 3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법사나 되는 듯 두터운 로브(Robe)를 걸치고 있었는 데, 워낙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나타나자 기다리던 사람들은 일순 흠칫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는지 그들 중의 한 명이 달려 들어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서 오십시오, 동맹군 여러분들.”

그 사람은 우글우글 서 있는 사람들 모두가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어서 대충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광범 위하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가 인사를 건네 오자 그들 중의 한 명이 약간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4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믿음직스러운 장년의 사내였는데 바로 그가 크루마 파견대 부대장(副隊長) 발칸 폰 크로아 백작이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을 배출한 크로아 가문은 크라레스에서 대단한 명문이었다. 그렇기에 그 명문의 일족답게 크로아 백작의 답례는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 다.

동맹군을 파견하기 전에 크라레스 지휘부는 파견군 사령관을 선정함에 있어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부분이 이거였다. 다크는 실력에 있어서는 나무 랄 곳이 없었지만 귀족층이 익혀야 할 필수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궁중 예절은 완전히 빵점이었고, 말투 또한 거칠며, 또한 너무 어려 보이는 치명적 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 ‘가짜’였다. 가짜는 될 수 있는 한 말투나 예절 등 모든 것을 확실히 마스터 한 인물을 세우고 그를 뒤에서 다크가 조종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난 후, 크로아 백작은 자신의 일행들이 묵을 숙소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좀 더 상층부의 인사와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크는 크로아 백작만이 들을 수 있도록 음성을 전달하는 고도의 기술인 어기전성(御氣傳聲)을 통해 지시를 내렸고, 크로아 백작은 그대로 따라서 격식에 맞게 상대를 향해 전달했다.

거의 10여 명 이상이 모여 앉은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넓은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를 이리저리 가리키며 작전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현재 저희들이 구상하고 있는 작전입니다. 공작 전하.”

물론 이들은 대 크루마 제국의 높은 직위에 있는 무사들이었기에 로니에르 공작을 향해 극존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크루마에 비했을 때 크라레스 는 형편없는 소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크라레스가 파견해 주기로 약속한 전력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실지 그들의 타이탄을 직접 보고 검사해 본 것 은 아니었고, 또 그것이 그들이 장담한 대로 강력한 타이탄이라고 하더라도 크루마보다는 훨씬 약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상황이 바뀌기 전까지 전하의 기사단은 미란 국가 연합에 배치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 가지고 오신 전력이 어느 정도인 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기 쉽게 설명 드리면, 제가 가지고 있는 본국의 최신형 1.5짜리 한 대, 1.3짜리 40대 그리고 1.0짜리 23대라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겁니 다. 오늘은 절반만 왔고, 내일 나머지가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3차분 1.3짜리 8대는 15일 후에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오, 1.3이면 대단하군요. 그게 크라레스의 차세대 주력 타이탄입니까?”

“예.”

“대단하군요. 크라레스가 코린트에게 짓밟혔을 때 저희는 이제 크라레스가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다고 판단했었는데, 그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계 시다니 놀랐습니다. 오래지 않아 역사의 전면으로 다시 등장하실 날이 오겠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크라레스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대국이 아니었습니까? 이번 코린트 대전만 잘 마무리 지어진다면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 으시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코린트를 반드시 이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최신형 타이탄을 이렇게 대량으로 보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 다는 말을 우선 드리고 싶습니다. 자, 그럼 일단 여기를 좀 봐 주십시오.”

지도의 한 지점씩을 짚으며 그는 말했다.

“지금 현재 첩자들이 보내오는 적 기사단 및 군대의 위치입니다. 아무래도 상대는 본국을 점령한 후, 미란 국가 연합이 그 중간을 막고 있어 여러모 로 곤란한 점이 많이 생기기에 미란 국가 연합까지 점령해 버릴 것 같습니다. 우선은 본국이 매우 강성하기에 미란과 본국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 다는 미란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겠지만, 결국에는 미란도 코린트에 점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미란 쪽에서도 은밀 히 본국과 행동을 함께 하겠다며 동맹군 파병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은 미란 국가 연합에 대군을 파병하여 그곳에서 코린트를 막을 계 획입니다.”

“미란 국가 연합의 전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10개 보병사단, 4개 기병 여단, 4개 용병 사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이탄 123대. 모두 다 정규급 이상의 출력입니다. 하지만 코린트를 상대함에 있어 그렇게 대단한 전력이라고 하기는 어렵죠. 코린트에서 크루마로 들어오려면 수십 개의 길이 있지만 많은 군대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세 개 정도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맡아서 방어해 주십사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그는 세 개의 길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상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최신형 타이탄 미노바를 다량 보유한 코린트의 주력 금십자 기사단이 이동, 집결 중인 이곳 중앙은 본국의 제네리아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 가 막을 것입니다. 그리고 측면에 집결 중인 은십자 기사단의 정면에는 본국의 정예 지발틴 기사단이 위치하게 됩니다. 공작 전하의 기사단이 막아야 할 곳은 이곳이죠. 코린트는 아직까지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을 움직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린트는 낙승을 예상하는 만큼 근위 기사단의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엘프란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는 투입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예, 코린트의 남쪽에 서서히 집결 중인 코린트의 동맹군들입니다. 현재까지 집결된 군세는 7개 보병사단, 3개 기병 여단급입니다. 아직까지 동맹 국이 지원해 준 타이탄의 수는 확실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적으면 50대, 많으면 1백 대 정도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정보국의 분 석으로는 1백 대를 상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답니다. 물론 최악의 경우 1백 대가 넘는 적 타이탄과 교전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에 대비해서 수십 대의 타이탄을 증원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것들도 본국의 기사단은 아니고 동맹군들입니다. 강력한 코린트의 중앙군들은 저희가 막아 낼 테 니, 코린트의 동맹군들은 다섯 개 동맹군 중에서 최대의 전력을 이끌고 오신 전하께서 동맹군 전체를 인솔해 막아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작 미란의 기사단은 어디에 투입되는 겁니까?”

“예, 미란 국가 연합의 기사단들은 원래 자국의 영토니까 지리에 밝을 것은 당연하겠죠. 저희들이 막는 길 이외의 길로 이동을 시작하면 그들이 막 을 겁니다. 그리고 본국에서는 기사단 외에 8개 보병사단과 4개 기병 여단을 파병할 예정입니다. 저희들의 계획은 상대가 아직 철십자와 동십자 기 사단을 투입하기 전에 금십자와 은십자 기사단을 괴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코린트의 전력을 각개 격파(各個擊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전쟁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 이리 오실 때 여분의 병력을 가지고 오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혹시 필요한 것이 있 으십니까?”

“정찰대로 쓸 그래듀에이트 20명 정도, 그리고 마법사 10명 정도를 지원해 주십시오.”

“그 정도로 충분하겠습니까?”

“토지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대의 군대를 막는 것뿐인데 더 이상의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면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신지?”

“내일 후발대가 도착하는 대로 출발하죠. 혹시 이동용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 하루가 급한데 그 정도는 해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내일 말씀하신 20명의 기사와 10명의 마법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다크가 거느리고 있는 유령 기사단 크루마 파견대의 나머지가 도착했고, 크루마 기사단에서 약속한 증원대도 도착했다. 크로아 백작은 합류 한 크루마 기사들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마법진을 통해 곧장 미란 국가 연합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국가인 알렌 왕국으로 향했다.

알렌 왕국은 미란 국가 연합의 모든 국가가 그러하듯 매우 부유한 상업 국가였다. 알렌 왕국은 동쪽으로는 스므에와 산악 국가 스완 왕국, 북쪽으로 는 쟈렌, 서쪽으로는 코린트 제국, 남쪽으로는 아르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엄청난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였다. 물론 뛰어난 외교 전이 없었다면 일찍이 어느 한쪽에 병합되고 말았겠지만 알렌 왕국의 국왕은 미란 국가 연합이 탄생하기 전에 매우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불행한 사태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약소국의 경우 뛰어난 외교적 센스가 있다면 이렇듯 강대국들의 사이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상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만 실수를 하게 된다면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동 마법을 통해 먼저 알렌 왕국의 국경 부근의 도시에 도착한 마법사가 남은 일행들이 도착하기 쉽도록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장거 리 이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장거리 이동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 이동 거리보다 이동 인원이 문제였다. 거의 1백 명에 가까운 사람을 움직여야 했기에 그만큼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려면 아주 넓은 공터가 필요했다.

거대한 마법진을 통해 파견대가 도착했을 때 수백 명의 인파들이 그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한쪽에서는 50여 명은 족히 되는 악사들이 모여 음악 을 연주하고 있었고, 광장에 그려진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낸 맹방의 전우들을 위해 수십 명의 소녀들이 바구니에서 꽃잎을 꺼내 뿌려 댔다.

시민들이야 로브 자락으로 몸을 숨긴 약간 복장이 수상해 보이는 인물들을 향해 열열이 환호했지만, 군대라는 조직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 은 모습을 드러낸 맹방의 전우들을 보며 미간에 주름살을 긋고 있었다. 마법사나 여행자들도 아닌 주제에 저토록 두터운 로브로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도 로브의 모자를 벗지 않는 예의에 어긋나는 무례한 행동을 했다. 거기에다가 명문의 기사들이라면 의례히 로브에 가문을 표 시하는 문장이라든지,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문장 등등 각종 문장들을 붙여 놓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붙여 놓으면 멋이 있기도 했지만, 사실 이 시대에는 그 문장들을 보고 상대의 출신 성분과 그 지위를 알게 해 주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실수하지 않게 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만약 적지 어느 곳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동맹군을 환영하는 환영식장이었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공식적인 복장 을 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것을 잘 아는 인물들이 문장을 살펴보기 위해 이들을 자세히 바라보면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자그마한 문장이 마지못해 하나 붙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도마뱀 문장. 그것은 바로 불의 상급 정령 살라만더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문장을 가진 기 사단이 크루마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동맹군을 파견한다고 있는 생색은 다 내고는 급히 서둘러 편성한 엉터리 기사단을 보내 왔다는 것과 같았다.

“모두들 서둘러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지휘관이 누구신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대의 정중한 말에 크로아 백작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접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함께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시간은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도 먼저 저희들이 주둔하게 될 곳을 안내해 주십시오. 주변 지형 정찰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아, 예. 매우 듬직한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기사단 주둔지는 반나절 정도만 말을 타고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30킬로미터만 더 나 가면 중앙 기사단 제8전대가 주둔 중이죠. 그리고 거기서 50킬로미터 앞이 국경이고 말입니다. 참, 그 전에 저하고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 따라오세 요. 이봐, 자네는 기사님들 이동하실 수 있도록 빨리 준비를 해 주게.”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의 지시가 그러하니 서둘러서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원래는 오늘 이곳에서 성대한 환영 무 도회를 열고 다음 날 주둔지로 출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상대는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저는 이곳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시장 로베르 카지마트라고 합니다. 혹시 술을 하십니까?”

“아니요.”

카지마트 시장은 술병과 술잔을 꺼내서는 한 잔 따른 후 서둘러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식으로 끓어오르는 노기(怒氣)를 약간 가라앉힌 후에 그는 입 을 열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명문 귀족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처지에서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당신에게 따지고자 하 는 것은 이겁니다.”

“말씀하시죠.”

“예, 그럼 말씀드리죠. 저도 예전에 군대에서 근무를 해 봤던 사람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크루마 제국의 기사단 문장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십시오. 귀하가 달고 있는 문장은 제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문장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당신들의 전쟁이 아니라고 그렇 게 급조한 기사단을 보낼 수 있습니까? 그것도 겨우 1백 명도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건 동맹국인 알렌 왕국을 모욕하는 처사가 분명합 니다.”

카지마트 시장의 분노는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가 정상적인 기사단이라면 열 대의 타이탄을 보유했을 때 최소한 열다섯 명 정도의 그래듀에이트를 가진다. 그리고 아직 그래듀에이트가 되지 못한 수련 기사나 기사들 열다섯 명 정도가 포함된다. 이런 수준의 두터운 기사층을 가지 고 있어야지만 그 열대의 타이탄은 최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야만 타이탄을 몰고 있는 기사가 은퇴를 하거나 사망했을 때 재빨리 그 자리 를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정찰 등을 통해 타이탄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통상적인 개념으로 봤을 때 90명 남짓한 이 기사단이 보유해야 할 타이탄의 수는 많아봐야 30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알렌 왕국의 접경 지역에 상대방의 10만에 가까운 대군과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이 집결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습니다. 수많은 여행객이 나 상인들이 소문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겨우 30여 대의 타이탄, 엠페른 기사단 8전대하고 합류해 봐야 45대를 채울 수 없는 상황에 서 상대방을 막아 낼 수 있다고 여기에 온 겁니까? 이런 식이라면 아예 코린트에 두 손을 드는 편이 시민들을 위해 훨씬 더 좋을 겁니다. 이번 전쟁은 귀국 때문에 벌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상대의 말에 크로아 백작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가 이번 전쟁은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의 갈등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그런 상 황에서 재수 없게 중간에 낀 것이 미란 국가 연합인데, 미란이 크루마의 손을 들어 준 이상 크루마는 전력을 다해서 미란을 도와줘야만 했다. 만약 미 란이 뚫린다면 그다음은 곧장 크루마니까 미란의 군세가 아직 튼튼할 때 협동 작전을 벌이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시장님은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오해? 무슨 오해를 한단 말이오?”

“제가 가지고 온 기사단은 본국에서도 최정예급입니다. 그리고 64대의 타이탄들의 성능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요.”

“64대라고 하셨습니까?”

“예, 정찰대로 30명을 데려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수십 명의 기사들이 또 도착할 겁니다. 저희들은 선발대일 뿐이지요. 아마도 크루마에 서 지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들과 동행이 아니니까 따로 숙소를 할당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겁니다. 참, 나중에 우리들과 같은 문장을 달고 있는 녀석들이 도착한다면 주둔지에 빨리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천천히 말을 타고 주둔지로 향하면서 크로아 백작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후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일이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는데도, 그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백작과 같은 복장에 로브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인물이 그걸 들었 는지 느긋한 어조로 답해 왔다.

“왜? 아까 그 영감한테 불려 가더니,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러나?”

“예, 여기 있는 일반 시민들이 모두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코린트 쪽에서 병력을 끌어 모으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식의 무력시위가 계속된다면 시 민들이 동요하게 되죠. 아마도 코린트는 급히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건 시간이 말해 줄 테지.”

칸테로마 드 지오르네 후작(侯爵). 은십자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뛰어난 무장이자, 공포스러운 마왕과 결탁하여 악의 힘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사악한 왕국 트루비아의 정복자. 트루비아 전쟁에서 은십자 기사단 파견대와 동맹국 군사력을 아무런 잡음 없이 잘 이끌어 악의 왕국과의 전쟁을 대 승리로 이끌어 낸 덕(德)이 많은 장군.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아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진했고, 또 그때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번 코린트 동맹군 사령관

으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카돈 왕국의 크란켄 데 지그무스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오, 어서오시지요, 후작 각하.”

“송구합니다, 지오르네 후작 각하. 자, 앉으시지요.”

“트루비아 전쟁 후 처음 뵙는군요.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하, 뭐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코린트 제국의 적은 우리 카돈 왕국의 적이기도 하니까요. 정예 기사 13명과 8대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왔습니 다. 미약한 힘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약한 힘이라니요. 트루비아 전쟁 때보다 거의 두 배의 규모를 가지고 오셨는데. 자, 자, 앉으세요.”

“밖에 누구 있느냐?”

“옛!”

“카돈 왕국에서 도착하신 기사 분들을 정중하게 숙소로 안내해 드리고, 불편하지 않도록 특별히 잘 보살펴 드려라.”

“옛! 각하.”

“혹시 포도주를 좋아하십니까?”

“아, 예.”

지오르네 후작은 우아한 동작으로 두 개의 잔에 포도주를 따른 후 한 잔은 지그무스 후작에게 건네고, 하나는 자신이 들었다. 천천히 향을 즐기며 한 모금 마신 후 지오르네 후작은 말했다.

“바지오 지방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우리 코린트의 보배라고 할 수 있지요. 어렵게 구한 로베르 7세 폐하 시절에 생산된 것입니다. 로베르 7세 폐 하께서 통치하시던 때는 신께서도 코린트를 축복했는지 매년 풍년이 들었었죠. 그때 생산된 포도주의 맛과 향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할 수 있죠.”

은근히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는 지오르네 후작의 성의를 봐서 지그무스 후작은 포도주를 간단하게 한 모금 마셨지만, 지금은 포도주 맛과 향 따위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궁금한 의문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예, 기탄없이 말씀하시지요.”

“예, 오다가 봤는데 대로의 좌우에 늘어서 있는 그 많은 타이탄들. 족히 80대는 넘어 보이는……, 정말 위압적인 장관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이쪽의 전력이 너무 노출될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상대의 말에 지오르네 후작은 자신감 있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난 또 뭐라고요. 그래 그것들을 보시고 느낌이 어땠습니까?”

“예, 솔직히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타이탄을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타이탄 전시회라도 하는 듯 각양각색의 타이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예,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지요. 각하가 거느리고 오신 타이탄도 숙소 앞쪽에 도열해 놓으십시오. 오래전부터 코린트와 크루마는 잘 지내 왔었지 만, 요즘 들어 그들은 흑마법을 장려하고,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마법 생물 키메라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등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악의 제국이 너무 강하기에 그 누구도 선뜻 그들에게 정의가 뭔지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용단(勇斷)을 내리셔서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크루마에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한다고 칙 명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악의 제국 크루마는 사악한 꾀로 미란 국가 연합을 꾀어 자신들의 동지로 삼은 모양인데, 서둘러서 전쟁을 벌인다면 미란과 도 싸워야 한다 이겁니다. 우리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미란에게 충분히 인식시켜 준다면 그들은 사악한 제국을 버리고 다시 정의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제 계획이?”

“후작 각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여러 전쟁터를 전전했던 본관도 이리로 오는 길에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깔려 있는 것을 보 고 다리에 힘이 빠졌을 정도니, 아직까지 전쟁다운 전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그들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정의의 길을 외면한다면 어 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악의 길로 들어서면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는지 먼저 가르쳐 준 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려고 하시는 후작 각하와 아 그립파 4세 폐하의 덕(德)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본관은 폐하의 미천한 종일 뿐, 저에게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

“하하, 겸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저희는 이렇게 덕이 많으신 사령관을 모시게 되어 절로 힘이 솟는 듯하군요. 언제라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카 돈 왕국의 모든 기사들은 정의를 위해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오. 카돈 왕국과 지그무스 후작 각하의 도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지오르네 후작의 계획은 상당 부분 적중하고 있었다. 10만이 넘는 병력이 알렌 왕국과의 국경선에 포진하고, 또 1백여 대의 타이탄들이 도열해 있 는 모습을 보고 전쟁이 곧 시작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인들은 없었다. 더군다나 코린트의 군세가 알렌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므 왕국과 토란 왕국 앞에 대규모로 집결 중이었기에 곧이어 전쟁을 예감한 약삭빠른 상인들은 미련 없이 미란 국가 연합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 시작했 다.

또 우직하게 미란 국가 연합을 떠나지 않은 상인들은 곧 할 일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란은 코린트와 크루마의 중개 무역을

주로 해 왔는데, 코린트 및 코린트 연합군에 의해 얼마 지나지 않아 국경선이 완전히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를 왕래하 던 상인들이 미란을 통과하는 대신 훨씬 더 안전한 아르곤 제국과 산악국인 오실롯 왕국을 경유하는 루트를 통해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 자 풍요롭던 미란의 경제 체계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시민들의 불만도 차츰 쌓여 가고 있었다. 다행히 시민들의 불만이 완전히 폭발하지는 않은 것은 아직까지 일부 상인들이 코린트-아르곤-알렌-크루마라는 무역 루트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적인 코린트와의 전쟁이 임박한 상태였고, 무역로가 막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어디 보자…….”

품속에서 꺼낸 얄팍한 마법책을 보며 배운 대로 이리 긋고, 저리 긋고 열심히 마법진을 그렸다. 본국의 마법사들이 원체 바쁜 관계로 마법사를 단 한 명도 데려오지 못한 덕분에 그녀는 직접 마법진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거느리고 있는 파견대 내에는 10여 명의 마법사들이 있기에 그들에게 부탁하면 되지만, 기밀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직접 그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그야말로 마법에 통달한 인물도 한 마리 있었지만 그 양반은 잔소리가 많아서 그런 걸 부탁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여러 번에 걸쳐 통신용 마법진을 만드는 것을 세밀하게 배웠다. 그렇기에 그걸 완성하는 데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았다.

“휴…, 다 끝났군. 이제 수정구를 놔야지. 그런데 그걸 어디다가 뒀더라.”

이리저리 뒤적인 끝에 발견해 낸 지름 30센티미터는 족히 될 듯한 수정구를 마법진의 중간에 올려놓자 나머지는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다. 마법책을 보며 알아보기도 힘든 룬어라는 망할 놈의 언어를 대충 흥얼거리며 마나를 법칙에 따라 유도하기만 하면 끝.

“안녕하셨습니까?”

“별로 안녕하지 못하다. 까만 토끼(토지에르)는 어디 있나?”

“예. 까만 토끼는 두 번째 귀염둥이(카프록시아 II)를 돌봐 주기에 바쁘죠. 우선 좋은 소식부터 전해 드리겠습니다. 까만 토끼는 5일 이내로 소포를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호오, 제법이군. 15일은 걸릴 거라고 그러더니 대단히 열심히 일한 모양이야.”

“예,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혹시 잘 모르실 수도 있기에 보고 드립니다. 알렌 왕국을 점령하기 위한 코린트의 우익 공격대는 바실리 시에 집결 중입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예, 그런데 규모가 문제지요. 현재까지 파악된 것은 15개 보병 사단, 8개 기병 사단, 126대의 타이탄입니다.”

“126대?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만약 따로 놔뒀다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바실리 시가지에 보라는 듯이 쭉 세워 놨기에 덧셈만 할 줄 안다면 누구나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망할 녀석들. 절대로 1백 대는 넘어가지 않을 거라더니.”

“예? 저희는 절대 그런 보고를 드린 기억이 없는데요?”

“너희들 말고. 타이탄 성능에 대해서는 파악된 것이 있나?”

“예, 유명한 타이탄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기에 파악하는 데 별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좀 위안이 되는 것은 코린트 동맹국의 근위 타이탄은 몇 대 없다는 것이죠. 대부분이 각국의 중앙 기사단 소속 타이탄들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정규 출력입니다. 1.2를 상회하는 타이탄은 정확히 9대입니 다.”

“대단한 정예 부대군.”

“예, 하지만 동맹 연합군이기에 통일된 작전 수행 능력은 떨어질 것이 당연하니까 잘해 보시라는 까만 토끼의 전언이십니다.”

“놀고 있군. 그렇게 쉬워 보이면 자기가 직접 와서 해 보라고 해.”

“예,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쁜 소식 하나 더. 현재 집결 중인 코린트의 군사력이 워낙 엄청나기에 모든 국가들은 코린트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병력 파병을 망설이고 있던 많은 국가들이 이 기회에 아그립파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병력 파병을 서두르 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은 병력이 바실리시에 집결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쁜 소식은 그게 다냐?”

“예, 박쥐(첩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조만간에 더욱 정확한 보고가 들어올 것입니다.”

“알겠다. 그런데 3일에 한 번씩 연락을 하는 것은 정보가 너무 늦어. 하루에 한 번으로 하지.”

“예, 좋을 대로 하십시오.”

“좋아, 그럼 수고하도록!”

“옛!”

소녀는 상대방의 모습이 수정 구슬에서 사라지자 슬쩍 발끝으로 마법진을 지워 버린 후 수정 구슬도 한쪽에 숨기며 중얼거렸다.

“흐음, 크루마 녀석들,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 주지도 않다니. 그러고도 동맹국이라고 떠들어? 이것들을 당장 달려가서 그냥…….”

투덜거리는 소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슬그머니 몸을 숨기는 인물.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그의 일행들이 자신 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예,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 소녀는 마법사더군요. 크라레스와 통신을 했는데,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이 조금 엉성한 걸 보면 고위급의 마법사는 아 닌 듯했습니다.”

“통신의 내용은?”

“예, 5일 후에 뭔가가 도착한답니다. 대화의 맥락으로 봤을 때 ‘까만 토끼’라는 인물이 보내 주는 ‘두 번째 귀염둥이’라고 했습니다.”

“까만 토끼? 그리고 두 번째 귀염둥이라. 그게 뭔지는 5일 후에는 알 수 있겠지. 그 외의 내용은?”

“현재 코린트 동맹군의 병력 상황입니다. 그런데 정말 타이탄이 126대나 집결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보병과 기병을 합쳐서 23만이나 되는 대군 에, 그 외에도 계속 집결 중이랍니다.”

“정말인가?”

“예,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15개 보병 사단에 8개 기병 사단, 그 외에도 계속 집결 중. 정확합니다.”

“알겠다. 기사단 사령부에 문의해 보지. 만약 그 정도 규모라면 현재 이곳에 집결 중인 군대로는 역부족이겠는데, 어떻게 한다……………. 이봐, 스칼! 본대 에 연락을 취해라.”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옛!”

스칼이라고 불린 마법사가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힐끗 보며 그 우두머리가 말했다.

“정찰대로부터 보고는?”

“아직 변동 없다는 보고입니다. 아무래도 미란 국내에서만 정찰 활동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몇 개 조는 코린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할 “까요?”

“그것도 괜찮겠지. 3개 조만 코린트 안으로 투입해. 나머지 6개 조는 위치를 조금씩 수정해서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지시해.”

“예, 정기 연락 시간에 통신을 시도하겠습니다.”

이때 마법진을 그려서 사령부를 부르던 마법사가 외쳤다.

“남작님, 사령부가 나왔습니다.”

마법진 위의 수정 구슬에는 음침한 표정의 마법사가 나타났고, 그 마법사는 수정 구슬 가까이에 위치한 인물들을 알고 있는 듯 곧장 인사를 건네 왔 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지오 남작님.”

“현재까지 바실리시에 집결한 적의 병력 상황을 알고 싶다.”

“예, 적 타이탄 99대, 15개 보병 사단, 8개 기병 사단입니다. 적의 병력이 많기는 하지만 타이탄의 수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니 선전을 바란다는 사령관 각하의 명령이십니다.”

“뭐? 126대가 아니고 99대라고?”

바지오 남작이라고 불렸던 우두머리의 말에 마법사는 약간 당황한 음성을 내뱉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야? 이 자식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예, 실은 사령관 각하의 함구령이 있었습니다. 지금 바실리시에 집결 중인 병력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입니다. 만약 그 숫자가 정확히 동맹군 측에 전달된다면 최악의 경우 동맹군 측에서 전투 포기를 할 가능성까지 있기에 그들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해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126대가 정확한 거로군. 병력의 추가 지원은 없나?”

“예, 스므에에 주둔 중인 엠페론 기사단 5전대와 가므 주둔의 제4전대를 이틀 내로 그쪽으로 돌릴 예정입니다. 총전력은 로메로-H형 22대입니다.” 통상 가벼운 무게와 재빠른 몸놀림으로 유명한 타이탄 로메로. 하지만 로메로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통상 로메로 하면 로메로-L(Light)형을 말하 는 것이지만, L형은 재빠른 몸무게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파괴력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알카사스에서는 본국에서만 사용할 예정으로 좀 더 중장갑 형태의 H(Heavy)형 50대가 생산되어 배치되었다. 30년 전부터 파괴력이나 출력에서 로메로보다 더 뛰어난 노리에급이 생산 되어 실전 배치되면서 H형도 전량 타국에 판매되었는데, L형이 243대가 생산되었던 것에 미루어 보면 H형은 매우 적은 숫자만이 생산되었던 셈이 다. 그 때문에 그냥 로메로라고 하면 L형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맹군은?”

“더 이상의 증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기랄! 충분히 막아 낼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구멍이 뚫리는군.”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통신을 끊습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통신을 자제해 주십시오. 상대의 전력이 워낙 크다 보니 사령부의 통신이 폭 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분투를 빕니다.”

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우두머리는 지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려운 전투가 될 것 같군. 증원될 것까지 합하면 엠페른의 로메로 36대, 크라레스의 타이탄 64대, 그리고 후방에 포진 중인 동맹 4개국의 타이탄 32대, 총 132대의 타이탄. 하지만 대부분의 동맹국들이 첫선을 보이지도 않은 신형 타이탄을 집어넣던지, 아니면 아예 수많은 국가들이 사용하는 로 메로나 노리에를 보내 주고 있다. 물론 그 녀석들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는 있지. 표시 나게 본국을 지원해 줬다가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코린트의 노 여움을 사게 될 테니까. 크라레스를 포함해서 5개국이 본국의 편을 들어 준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인 것이야. 그것도 인질을 잡은 채 반 어거지로 얻 어 낸 것이 겨우 이 정도라니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말일세.”

“코린트라는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계속 집결 중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타이탄을 동원하려는 것이지?”

우두머리의 푸념을 뒤로하고 소녀는 아르티어스의 숙소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동맹국들조차도 못 믿어서 첩보전을 벌이는 쪼잔한 놈들이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어. 바보 같은 놈들.”

“모두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모두들 대충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크로아 백작은 장중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이곳 알렌 왕국에 투입된 타이탄의 수는 엄청난 수입니다. 엠페른 기사단 6전대가 거느린 로메로 14대, 뮬러 후작의 노리에 4 대, 로메로 8대, 무터 백작의 로메로 8대, 칸텔 백작의 로메로 7대, 작센 백작의 노리에 1대, 로메로 4대. 그리고 제가 가지고 온 신형 41대와 로메로 23대. 총 110대 중에서 알카사스에서 생산된 것이 69대나 되는군요. 그렇다면 크루마의 동맹군은 알카사스인가요?”

어느 정도 농이 섞인 어조에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타이탄이 알카사스의 수출용 타이탄인 것은 모두들 자신의 소속 국가가 어디인지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현재 최신 정보로는 전면에 99대의 타이탄이 집결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곳에 집결된 연합군의 타이탄도 모두 정규 출력 이상이므로 군사적으 로 매우 우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통일된 지휘 체계가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겠죠. 이번에 경들을 모신 이유 는 연합군의 지휘자를 선임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의견이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뮬러 후작이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크루마에서 이곳에 오기 전 귀국에서 투입한 전력을 듣고 솔직히 조금 놀랬었습니다. 64대의 타이탄을, 그것도 귀국에 타이탄이 별로 많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듯 많은 타이탄을 투입한 것은 대단한 모험이겠죠. 본관은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 군을 지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귀국에서는 이 번 전쟁에 흥망의 도박을 거신 모양인데, 타이탄 투입 규모로 봤을 때 그 지휘관 또한 그에 걸맞은 인물을 보냈을 거라고 본관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본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쪽에서 지휘를 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겠지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부족한 능력이지만, 제가 그 자리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부관, 지도를 가져와라.”

부관이 큼직한 지도를 펼쳐 놓은 후 밖으로 나가자 크로아 백작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적의 병력은 계속 증원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조만간에 우리들의 전력을 훨씬 상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뮬러 후작께서 는 동맹 4개국의 기사단을 모두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해 주십시오. 혹시나 퇴로가 막힌다든지, 아니면 적이 너무 강대하다면 아르곤이나 오실롯 왕 국으로 후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크라이슨 백작.”

“예.”

“귀하가 거느리고 있는 6전대는 이곳에 주둔해 주십시오. 만약 엠페른 기사단에서 증원이 있더라도 모두 여기에 배치해야 합니다. 혹시 퇴로 차단 등 악조건을 당한다면 쟈렌 왕국으로 넘어가서 그곳에 주둔 중인 7전대와 합류해도 좋고, 아니면 그쪽이 막힌다면 우리들과 합류해도 좋겠죠. 중앙 은 저희 살라만더 기사단이, 왼쪽은 뮬러 후작의 기사단, 오른쪽은 6전단이, 이렇게 세 곳에서 지키며 적의 동태를 파악하여 대처해 가는 것이 가장 유연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공작 전하, 만약 상대가 현재의 전력에 머무른다면 이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적의 전력이 이쪽을 훨씬 상회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각개격 파당하기 딱 좋은 배치입니다. 오히려 한 군데 뭉쳐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후작 각하의 말도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단일 국가의 군대가 아닙니다. 동맹국이죠. 이런 상태에서, 언제 적들이 침공해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 곳에 뭉쳐 있다가는 잘못하면 서로 간의 갈등만 심화되어 자멸할 수도 있습니다. 놈들처럼 사기충천하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적의 군사 력에 대해 심한 압박감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말썽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 점도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서로 간의 간격은 50킬 로미터. 30분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모두들 여분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정찰대로 내보내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게 좋을 듯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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