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1화 –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의 상대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의 상대
다음 날 새벽, 크루마 동맹군 사령부에서는 몇몇 고급 장교들이 마법진 주위에서 웅성거리며 알렌 방면에서 오랜 시간 쉬고 있던 동맹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 고 마법진 위에서 밝은 빛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때 1백여 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라만더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알렌 왕국에서 전투를 끝 낸 후 척후로 쓰기 위해 수십 명의 기사들과 또 그들을 보조할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추가되었기에 처음 크루마에 파견된 인원보다 훨씬 더 늘어나 있었다.
소수의 의장대(儀仗隊)가 검을 빼어 들고 인사를 보내는 가운데, 두툼한 로브로 전신을 가린 동맹군들은 자신의 숙소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기 전 에 대충 식사는 했지만, 진지 전체를 이동하는 것이었기에 서둘러 자신들의 짐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보통 기사단들처럼 하인이나 하녀 따위를 거느 리고 있다면 그들만 짐을 들고 숙소로 이동하면 되었겠지만, 이들의 경우 아무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기사단장인 공작마저도 하인이 없을 지경이었으니 까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단장께서는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스칼을 따라가서 짐을 푸시기 바랍니다.”
의장대를 이끌고 온 기사는 동맹군 일행을 향해 누구라고 꼭 짚어서 말하지 못하고 대충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 기사단의 단장인지 행색만 보아 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고, 또 미네르바로부터도 살라만더 기사단장 로니에르 공작의 생김새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 네 명이 앞으로 쓱 나섰다. 기사는 순간 당황했지만, 전투를 앞둔 작전 회의에 참모들을 대동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에 그들을 모두 안내하 여 미네르바가 기다리고 있는 작전 회의실로 향했다.
작전 회의실에는 수많은 기사들과 수련 기사, 마법사, 수련 마법사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지도 위에는 양군의 주둔 상황이 면밀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도 처에 깔려 있는 거의 1백 개가 넘는 정찰조들의 위치가 작은 깃발로 세심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미네르바는 작전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네 명의 기사들 중에서 자 신이 밤새 기다려 왔던 인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중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 새벽녘부터 벌써 정찰조들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기에 매우 바빴어. 이제 조만간 타이탄들이 투입되겠지.”
“그건 정해진 수순이고. 뭐 달라진 것은 없어?”
그들을 안내해 온 기사는 로브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네 명의 동맹국 기사들 중에서 가장 키가 작은 인물이 대답을 했다는 것에, 그리고 그 인물의 목소리가 매 우 맑고 곱다는 것에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다. 크라레스에서 파견되어 온 공작도 미네르바와 같은 여성, 그것도 대단히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없어. 어제의 전투에서 녀석들은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해 버렸기 때문에 오늘 전투는 아마도 정면 대결로 이어질 공산이 커. 사실 키에리가 코란 근 위 기사단을 이끌고 앞장선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흐음, 코란 근위 기사단이 가진 타이탄이 아마도 흑기사, 맞아?”
“당연하지. 코란 근위 기사단의 타이탄이 흑기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우리는 흑기사 12대를 파괴했지. 하지만 그 대가로 내 오른 팔인 루엔을 잃었고, 또 에프리온 18대와 안티고네 16대를 잃었어. 이제는 키에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놈들의 근위 기사단을 막는 것조차도 벅찬 상황이야.” “상당히 상황이 안 좋군.”
“말대로야. 하지만 네가 키에리를 막아 낼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어. 네 기사단으로 그 녀석을 상대해 줘.”
미네르바의 말에 다크는 어두운 로브 안에서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협상 과정에서 스웨인 지방을 뺏어낸 것도, 또 오늘 미네르바와 만났을 때의 일도 어젯밤 충 분히 토지에르와 상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네르바의 말이 토지에르가 예측한 것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크로서는 꽤나 재미가 있었다. 다크는 어 젯밤 토지에르가 부탁한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키에리만 막는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미네르바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힘들겠지만…, 어제처럼 치욕스런 패배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 남은 안티고네와 카마리에를 상당수 그쪽으로 돌리면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을 거야.”
“좋아, 주문이 그렇다면 승부가 날 때까지 키에리를 막아 주지. 네가 약속한 것에 비하면 조건이 너무 작은 것 같은데, 그 외의 주문은?”
상대의 자신감 있는 말에 미네르바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니, 더 이상의 주문은 없어. 혹시 힘이 남는다고 생각한다면 놈들의 후방이나 좀 교란시켜 줘. 살라만더 기사단에 로메로가 몇 대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것 들은 키에리와의 전투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될 테니 모두 후방 교란 쪽으로 돌리면 되겠지.”
미네르바의 말에 다크는 살짝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로메로는 한 대도 없어.”
“뭐? 나는 있다고 들었는데? 정보가 잘못 되었나?”
“아니야, 물론 있긴 있었지. 하지만 모두 본국으로 보냈어. 그쪽에서 필요하다고 해서 말이야. 지금 내가 가진 타이탄은 45대가 전부야. 대신 로메로 11대 분량만 큼의 후방교란은 약속하기로 하지.”
“좋을 대로 해. 하지만 이건 꼭 명심해 둬. 키에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 말이야.”
“명심하지. 나는 그가 소문대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기를 빌고 있으니까 말이야.”
다크는 뒤로 돌아서서 작전 회의실을 나가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타이탄을 투입하면 알려 줘.”
상관이 밖으로 나가자 남은 세 명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작전 회의실을 나서는 네 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네르바가 중 얼거렸다.
“과연, 그를 막아 줄 수 있을까? 하기야 타이탄을 45대나 거느리고 있으니 내가 까뮤를 해치울 때까지 시간을 끌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두 시간 정도만 그 악마 를 잡아 주면 된다구. 그러면 총력을 다해 놈들을 밀어붙일 테니까.”
이때 통신을 담당하던 마법사들의 우두머리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전방을 중심으로 정찰조들 간의 전투가 격화되고 있습니다. 적의 증원군 포착, 이쪽도 증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거대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노장군 한 명이 외쳤다. 바로 이 노장군이 작전 담당관, 줄여서 작전관이었다. 이 시대의 모든 전투는 타이탄으로 결말을 짓게 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기에 사령관인 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오너(The Owner of the Titan : 타이탄의 주인)였고, 자신의 타이탄을 타고 전투에 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령관이 없는 상황에서 남은 부대들을 지휘할 인물이 따로 한 명 더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작전 담당관은 타이탄들을 지원하는 모든 부 대들의 전술 기동에 대한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후방에서 작전 지휘를 담당하게 되므로 기사가 임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각 기사단에 통보하라. 모든 기사 및 수련 기사 투입. 대기 중인 각 사단들은 대타이탄 전투 2급 대비 상태 유지.”
명령에 따라 수많은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이용해 하부 부대로 지시를 전달했고, 모두들 좌우에서 외치는 대로 그 상황을 거대한 지도에 표시한다고 정신이 없었 다. 지금 전방에는 타이탄이 아닌 보다 원시적인 무기들로 무장한 기사들에 의해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원래 타이탄들끼리의 전투가 벌어지기 직 전, 타이탄을 지급받지 못한 그래듀에이트들이 주도하는 정찰조들끼리의 격투는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 정찰조를 쓸어버리고 전장을 장악하면 상대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통신을 담당하던 마법사가 외쳤다.
“제342정찰조에서 적 타이탄 포착!”
그 말이 떨어지자 작전 담당관이 외쳤다.
“각 기사단의 모든 오너, 전투 대기 상태 돌입! 후방의 각 사단에 통보. 대타이탄 전투 1급 대비 상태 유지. 적들의 퇴로 차단에 주의하라.”
미네르바는 작전 담당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간 후 자신의 타이탄을 꺼냈다. 어젯밤 떨어져 나간 헬프로네의 왼팔을 수거해 붙여 놨기에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헬 프로네는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의 전투로 인해 군데군데 페인트들이 벗겨져 나갔기에 몇몇 문장들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 들 정도로 지워져 있었다.
“후훗, 너도 주인을 잘못 만나서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생을 하는구나.”
자조 어린 그녀의 말에 타이탄 크라이넨이 묵직한 음성으로 답했다.
<상대는 크로테아의 주인이다. 태어난 후 서로 처음 만났는데 그 정도 피해조차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아쉬운 것은 크로테아의 주인이 너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 뿐. 오늘도 크로테아와 싸워야 하나? 네 실력으로는 무리일 텐데?>
묵직한 음성에 미네르바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약간 깔보는 듯한 어조로 크라이넨은 말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주인을 향한 걱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치 없는 그녀는 아니었다. 크라이넨은 무뚝뚝하고, 또 예의 타이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탁한 음성으로 투덜거리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니 그녀는 녀석의 본심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건방진 말투에 속상한 적도 많았지만 세월이 흘러 녀석의 본심을 이해한 후, 그녀는 크라이넨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허세로 메 우려고 드는 사람처럼 생각되어 내심 귀엽게까지 느끼고 있었다.
“아니, 오늘은 그 녀석과 대신 싸울 사람이 있어. 자, 머리를 열어.”
크라이넨은 머리를 위로 꺾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의 첫 번째 주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난 후 아버지는 주인을 찾아 떠나라고 했고, 오랜 시간 찾아 헤매다가 내가 처음 택한 인물이었지. 나는 그 의 실력보다는 곧고 바른 마음씨에 끌려서 주인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가 빨리 죽자 될 수 있다면 강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 나는 주인이 빨리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 내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있겠지?>
미네르바는 의자에 차분히 앉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전 주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처음 듣는군. 첫 번째 주인은 누구였지?”
<크로멜, 크로멜 반 엘렉시아.>
크로멜 반 엘렉시아라면 미네르바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크라이넨은 그가 실력이 별로 없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는 헬 프로네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만큼 뛰 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로서 이름이 나 있었다. 오죽하면 1백여 년 전의 인물을, 그것도 타국 사람을 미네르바가 기억하고 있겠는가.
지금이야 헬 프로네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 위해 모든 국가가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찾지만, 과거에는 달랐었다. 일반적으로 타이탄의 명성은 그 제작 국가와 제작 자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어느 국가에서 누가 근위용으로 타이탄을 새로 설계하여 제작했다’하는 정보가 새 나오면 모두들 그 타이탄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된 다. 근위용으로 제작되는 타이탄의 경우 그것을 사용하게 될 주인들도 그 국가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지만, 타이탄 자체도 ‘근위용(近衛用)’으로 제작되는 경 우 국력을 총동원하여 제작한 최고급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근위 타이탄의 경우 그 제작 국가의 국력도 한몫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원래 강대한 국가 에서만 강력한 타이탄을 만들 수 있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프로네는 근위 타이탄도 아니었고, 처음 제작되었을 때 그 존재에 대해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크루마 제1궁정 마법사였던 안 피로스가 자신의 흥미 위주로 제작한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헬 프로네는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지닌 주인들의 실 력이 너무나도 뛰어났기에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원체 타이탄의 성능이 대단했었기에 그 제작자의 이름도 모두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추적 한 후에나 밝혀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근위 타이탄의 명성이 이렇듯 갑작스레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헬 프로네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세월을 거듭하며 이 룩된 것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헬 프로네의 주인이 누군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요 근래 50년도 채 안 된다. 바로 이 50년쯤 전에 서야 헬 프로네의 성능과 그 소유주들의 실력이 완전히 공인(公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헬 프로네의 주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니까 말이다.
미네르바는 크로멜이 한창때의 나이에 권력 암투에 휘말려 자신의 측근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크라이넨을 위로했다. “슬펐겠구나.”
크라이넨은 미네르바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자신은 절대로 인간 따위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는 듯 더욱 무뚝뚝하게 말했다.
<누가 인간 따위가 죽었다고 슬퍼했겠나? 나는 그런 추상적인 감정을 알지 못해.>
하지만 미네르바는 아마 이 녀석이 인간이었다면, 얼굴이 약간 빨개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혼자 키득거렸다. “보면 볼수록 귀여운 녀석이란 말이야’하고 생각하 며 미네르바는 전방을 주시했다. 미네르바는 잘 몰랐지만, 이 크라이넨의 성격이 좋은 것은 첫 번째 주인의 영향이 아주 컸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타이탄이 처음 태어났을 때는 슬픔이나 기쁨 따위의 추상적인 감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인을 선택해서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런 감정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듯, 타이탄도 그 첫 주인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라면 그렇게, 정의감이 투철하다 면 또 그렇게, 아주 지독한 악당이라면 또 악한으로.. 그렇지만 갓 생산된 타이탄이 아니라면 주인을 여러 명씩 맞이하게 되면서 각자에게 약간씩 간섭을 받아 차츰 원만한 성격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걸 생각한다면 크로멜은 겉으로는 당당한 척해도 속마음은 아주 여린 인물이었던 것 같다.
바로 이때 크라이넨이 미네르바에게 경고를 보내왔다. 통상의 타이탄에 비해 헬프로네들의 경우 미스릴을 입히지 않아 시각의 폭이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엄청난 녀석이 다가오고 있다.>
미네르바는 타이탄의 허리를 돌려 뒤에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곳에는 생전 보지도 못한 엄청나게 큰 검은색 타이탄이 지축을 울리는 굉음을 내며 천천히 다가 오고 있었다.
“세상에, 저게 크라레스의 신형 근위 타이탄인가? 엄청나게 크구나.”
<덩치만 큰 게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엑스시온이 탑재되어 있다.>
“어느 정도? 전에 루엔이 봤다는 2.3 정도인가?”
<아니 3.01 정도다.>
상대방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숙련된 고수가 더욱 잘 알아보듯 타이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데다가 헬 프로네의 경우 미스릴까지 입히지 않았기에 자체적인 시각이 매우 넓어 미스릴을 입힌 타이탄보다 훨씬 정밀한 측정이 가능했다. 이것만 봐도 탑승할 기사들을 위해 입혀 놓은 미스릴이란 것이 얼마나 타이탄에게는 족 쇄가 되는지 알 수 있다.
청기사는 워낙 급하게 만들어졌기에 성능이 완벽하게 서로 같지는 않았다. 만약 똑같은 재질의 드래곤 하트를 썼다면 동일한 성능을 냈을 테지만, 처음 제작한 네 대와 뒤에 제작한 여덟 대의 출력은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앞의 것이 정확히 2.9972 정도이고, 뒤에 제작한 것은 3.0124로 조금 뛰어났다. 그것은 토지에르의 작전 에 의해 탈취한 드래곤 하트의 재질이 앞에 것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3.01이라고? 크라레스는 도대체 코린트에 복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한 거지? 믿어지지가 않는군.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얻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 정말이지 무서운 국가야. 저런 괴물을 숨겨 두고 있었으니까 키에리를 해치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겠지.”
<저 녀석이 크로테아와 싸울 것인가?>
“응.”
미네르바가 경악을 하건 말건, 그 거대한 타이탄은 땅을 쿵쿵 울리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헬 프로네 옆에 섰다. 거대한 뿔 세 개가 돋아 있는 전체적인 모습은 안 그 래도 위압적인 거대한 흑색 타이탄을 더욱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뿔 세 개 중의 두 개는 윗부분이 파랗게 칠해져 있고, 방패나 전체적 인 외장 장갑도 군데군데 색이 벗겨져 파란색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네르바는 어느 정도 놀라움이 가라앉자 상대를 향해 말했다.
“왜, 혼자 왔지? 나머지는 아직도 준비 중인가?”
그녀의 물음에 상대는 언제나 그랬듯이 감정이 별로 섞이지 않은 말투로 답해왔다.
“키에리를 상대하는 데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 나머지는 지금 공간 이동 준비를 하고 있지.”
“네 타이탄을 보니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키에리는 타이탄 성능이 좀 좋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야. 이번에 싸워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 그 랜드 마스터만이 완성할 수 있는 검술을 키에리는 갖추고 있었어. 그랜드 마스터의 앞에서 타이탄 성능이 얼마나 좋으냐는 거의 무의미해. 검이 빛나는 그 순간 아 무리 강한 장갑판이라도 잘려져 나가거든. 괜히 배짱부리지 말고 부하들을 다시 불러 모아.”
미네르바의 친절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은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아니, 사양하겠어.”
“제기랄, 좋을 대로 해라. 하지만 이건 명심해! 꼭 그를 막아 내야 한다는 것 말이야.”
“아, 그건 당연히 지켜 주지. 나는 내가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은 꼭 지키는 사람이야. 그리고 너의 부탁대로 후방을 휘저을 로메로 열한 대분의 역할을 할 여덟 대의 타이탄은 남겨 뒀어. 아마 전투가 시작된 후 조금 지나서 코린트군의 후방으로 공간 이동을 할 거야.”
그러면서 다크의 타이탄 안드로메다는 손목에 부착되어 있던 거대한 방패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12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방패가 땅바닥과 부딪치며 엄청난 소 리를 냈다. 그 소리에 미네르바는 또다시 힐끗 다크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방패를 버리는 거지?”
“필요 없으니까. 전에 한 번 써 보기는 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더군. 오히려 수준 있는 상대를 만나면 방해만 되지.”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방패를 한 번밖에 써 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타이탄 조종을 배웠지?”
“아,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도로니아’는 네가 가지고 있는 녀석처럼 소드 스토퍼만 달려 있었지. 나는 방패는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그 녀석이 자기 마음대로 붙 인 거였어.”
“훗, 이상한 녀석이군. 그렇게 육중한 타이탄을 조종하면서, 왜 방패를 쓰지 않는 거지? 집단적으로 얽힐 때는 방패가 있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는데.”
“글쎄…, 이것도 다 사연이 있다구. 이 녀석은 내가 얼떨결에 선택했었는데, 도대체가 나중에 계약 해지를 해 주지 않아서 말씀이야. 안 그랬다면 도로니아를 끌고 왔겠지. 사실 나한테는 도로니아가 더 맞는 것 같아. 말도 잘 듣고…….?”
이때 전방의 전령이 뒤쪽 사령부에서 보내오는 수신호(手信號)를 보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외쳤다.
“적이 타이탄을 투입했습니다!”
전령의 말을 듣지 못한 기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붉은 깃발만을 보고 일제히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 덕분에 미네르바는 다크가 나중에 중얼거렸던 말을 거 의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가므 왕국에서는 세 번째 타이탄 전투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