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12화 – 훨씬 인간적인 무림(武林)

훨씬 인간적인 무림(武林)

“저기서 쉬다가 가자. 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구나.”

저 멀리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자 그곳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아르티어스가 말했다. 그 말에 다크는 즉시 찬성의 의사를 전달했다.

“예, 그러죠.”

“먼저 정찰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전하.”

기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묻자 다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상관없어. 저런 마을 볼 게 뭐가 있다고 정찰을 해? 그냥 가자.”

“옛, 전하.”

그들은 유령 도시를 떠나 온 후 계속 일직선으로 남하(南下)하고 있었다. 만약 길을 따라서 계속 내려왔다면 마을들을 많이 거쳤겠지만 관광 여행을 하는 것이 아 니었기에 길이건 아니건 가리지 않고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력 부대와 합류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노숙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 으므로 아르티어스의 불평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에 들어섰다. 숨어서 타지인을 향해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마을 사람들. 하지만 모두들 두터운 갑옷 같은 것은 입지 않고 가벼운 옷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 눈길에 두려움까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마을 중심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 목 이 매달린 시체 몇 구가 걸려 있었다. 고문을 당했는지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는 그 시체들은 여덟 구는 되어 보였다.

중앙 광장 부근에 보이는 주점에 말을 매어 놓은 후 그들은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낯선 사람들이 들어서자 잠시 대화를 멈추고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다크 일행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주문을 받 기 위해 재빨리 다가왔다. 여행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복장이 좋았기에 소년은 주저하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 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아버지, 뭐 드실래요?”

“가만있자……. 우선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리고 닭찜, 비프 커틀렛하고 스튜. 뭐 우선은 이 정도만 하지.”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끝내자 다크는 재빨리 뒤를 이어 주문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리고 아무거나 좀 맛있는 걸로 가져와.”

화려한 미모를 지닌 소녀가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끝내자, 퉁명스레 말하는 소녀와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식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태양이 작렬하는 무더운 날씨에 먼지 나는 길에서 오랫동안 시달린 탓인지 모두들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고, 소년은 재빨리 맥주가 가득 들어 있는 잔들을 쟁반에 담 아 나르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풀며 기다리고 있을 때 먹음직스럽게 요리된 음식들이 배달되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기에 묵묵히 음식을 입속 에 쑤셔 넣고 있었다.

팔시온과 파이어해머는 타고난 대식가들이라는 것을 자랑하듯 맥주를 한 잔씩 더 주문했다. 소년은 재빨리 맥주 두 잔을 가져왔다. 팔시온은 자신의 잔을 받아 들 며 소년에게 물었다.

“저기 걸려 있는 시체들은 뭐냐?”

“예? 손님들은 전쟁이 벌어진 것도 모르세요?”

“그건 알고 있지. 그런데 저기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한눈에도 무술을 익힌 사람들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야.”

팔시온의 물음에 소년은 두려움에 질린 듯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예, 협력하지 않는다며 죽인 거예요.”

“누가?”

“누구는요? 여기 영주님이죠. 아마 머지않아 크라레스의 군대가 들이닥칠 거라며 영주님은 병사들을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식량도요. 하지만 아직 추수할 때가 멀었기에 대부분 식량이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반항했다가 저렇게…

소년의 눈에 슬쩍 눈물이 고이는 것으로 보아 소년이 잘 알던 사람들인 것이 분명했다.

“요즘 전쟁이 벌어진 다음부터 영주님은 좀 더 포악해지셨어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매달아 놓고 채찍으로 때리는 정도였는데…….”

“정말, 나쁜 녀석이군. 그렇다면 여기는 그 녀석의 영지라는 말이야?”

이런 마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영지였고, 다른 하나는 영지가 아닌 평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영지인 마을은 농노들이 모여 사 는 곳이다. 농노는 평민들이 아닌 그 영지에 부속된 노예들이었고, 영주는 황제에게 그 경작권과 함께 농노들의 생사여탈권을 부여받아 마음 내키는 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 농노들의 미래는 순전히 어떤 영주를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팔시온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쳇, 아무리 자신에게 소속된 노예들이라고 해도, 저렇게 죽이고 착취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야.”

하지만 소년은 다소 의심스런 시선으로 팔시온을 바라봤을 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와서 슬쩍 떠보는 영주의 앞잡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음식 을 우물거리며 그런 소년의 표정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팔시온. 이런 영주가 있으면 저런 영주도 있는 거야. 노예를 어떻게 부리든, 또 어떻게 대하든 그 녀석들의 자유라고.”

“그, 그거야 그렇지만….”

당황한 어조로 팔시온이 말하는 것을 보고, 소년은 그들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빨리 드시고 가세요. 언제 영주님의 사병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거든요. 영주님의 사병들이 낯선 사람들이라고 시비를 걸어 올 수 있어요. 얼마 전에 영주님 밑 으로 들어간 한스하고 그 패거리들은 아주 거친 사람들이에요. 술만 마시면 마을 사람들한테 시비를 걸거든요. 알아서 조심하는 게 좋죠. 그럼 많이 드세요.”

인사를 건네고 뒤로 돌아서는 소년을 향해 여태껏 말없이 음식을 삼키고 있던 다크가 말을 건넸다.

“이봐, 꼬마.”

소년은 ‘꼬마’라고 자신을 부르는 자기 또래의 계집아이를 기가 차다는 듯 돌아봤다. 하지만 상대는 ‘손님’이었고 자신은 ‘점원’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신경질이 났지만 자신의 몸에 밴 상술 덕분에 실수는 하지 않고 넘어갔다. 소년의 머리가 따지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아래로 숙여지며 자신도 모르게 주절거리 고 있었던 것이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여기 레드 드래곤 있냐?”

“없습니다, 손님. 여기는 작은 마을이라서 드래곤 같은 게 있을 리가 없거든요. 그러지 마시고 깊은 숲 속이나 산맥을 뒤지시는 편이…….”

그 말에 뒤쪽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가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야, 스테판. 레드 드래곤은 술 이름이야. 큰 도시에 가면 있지.”

그 말에 스테판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소년은 그게 진짜 드래곤을 말하는 것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그 사내는 그런 스테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그런 허무맹랑한 주문을 하는 소녀를 향해 말했다. 그는 소녀의 복장이 검은색 일색이긴 했지만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고, 여기저기 그림도 그려져 있었기에 아마도 귀족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며 말투를 정중하게 했다.

“좀 풍족한 마을이라면 있겠지만, 이 마을에는 레드 드래곤 같은 고급술은 없습니다. 꽤 독한 술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이 마을 특산의 디지드를 한잔하는 것은 어 떻겠습니까?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상대의 추천을 듣고 다크는 스테판에게 주문을 정정해서 말했다.

“이봐 스테판, 그거 한 병 가져와.”

스테판은 속으로 투덜투덜하며 디지드를 한 병 가져다줬다. 대충 밀주(密酒)같은 것이라서 그런지 포장은 아예 되어 있지 않았고, 짙은 갈색의 액체가 포도주병 안에 담겨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겁도 없이 여태껏 물이 있던 잔을 비워 버린 후 그 안에 디지드를 한 잔 가득 붓고는 꿀꺽꿀꺽 삼켰다. 이윽고 한 잔을 다 비운 후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후…, 이거 정말 괜찮은데? 뒷맛만 좀 더 개선한다면 레드 드래곤보다 더 좋을 거 같아.”

“진짜야?”

그녀의 술에 대한 취향을 잘 아는 팔시온은 슬쩍 병을 집어서는 이미 비어 있던 자신의 물컵에 조금 따른 후 꿀꺽.

“후와…, 정말 대단하군. 아예 뱃속까지 찌릿찌릿한데?”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리는 팔시온을 뒤로하고 소녀는 술병을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지.”

다크는 밖으로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며 덩치 큰 사내에게 말했다.

“214.”

“예.”

“저거 한 열 병만 사 둬. 나중에 루빈스키한테도 한 병 선물하고 싶으니까.”

“예.”

소녀가 제법 괜찮아 보이는 검을 차고 있는 덩치 좋은 중년 남자에게 명령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을 보고 술집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지켜봤다. 하지만 그것뿐, 잠시 지나자 술집 안은 다시금 자신들의 얘기로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죽여도 괜찮은 것일까?”

말을 몰아 시체 근처를 통과하면서 다크는 린넨 백작에게 물었다. 심각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린넨 백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해왔다.

“전하, 국가 간의 전쟁에서 이런 일은 매우 흔한 것이옵니다.”

“흔하다고?”

“예, 전쟁이란 것이 상대의 주력 부대만 격멸했다고 종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영주들대로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죠. 전에 치레아나 스바시에 전쟁처럼 재빨리 왕가를 끝장내 버리면 이런 무의미한 전쟁으로 연결되지 않사오나, 코린트는 아직도 황제가 건 재하지 않사옵니까? 황제를 몰아내든지, 아니면 점령지의 영주들을 모두 다 없애 버리지 않는 한 이런 비극은 끝나지 않습니다. 전에 이 땅을 크라레스로부터 빼앗 아 낸 코린트 제국도 휴전 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는 각 지방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지방 영주들 때문에 상당히 고생을 했었죠. 그 덕분에 빨리 휴전이 이루어진 것 이지만 말이옵니다.”

“특이하군. 전쟁에서 벌써 졌는데…, 그리고 이런 식으로 싸워도 아무런 득이 없는데 왜 계속 싸우려고 드는 것이지?”

“각 지방의 영주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이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옵니다. 황제가 항복하지 않는 한, 영주들은 끝까지 황제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울 의무 가 있는 것이옵니다. 일부 영주들은 새로운 점령군에 대해 ‘충성의 서약을 하고 전향하는 경우도 있사오나, 그런 식의 배신자는 이쪽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없지요.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 이러나 저러나 그들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인가?”

다크는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화끈한 액체를 몇 모금 삼킨 후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 중원의 하늘도 이런 색이었다. 하지만 중원…. 그 것도 무림에서 자라 왔던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충성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끝까지 저항하는 녀석도 이해하기 힘들었지 만,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강요하는 그들의 의식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뻗어 나가던 강대한 문파라고 하더라도 그 총단이 무너지고 나면 나머지 지단들의 경우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또 총단의 힘이 약해지든지, 그 지역에서의 힘을 상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림이란 곳은 충성심이 아닌 힘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힘이 모든 것 을 말해 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충성도, 우정도, 사랑도, 정(情)도 무의미했다.

“무림이 훨씬 더 인간적인 것일까? 아니면 여기가 더 인간적인 것일까?”

슬쩍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서 물어봤지만 그 어디서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옆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에게 물어본 것일 뿐.

다크는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려 저 멀리 지평선 가까이 큰 성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당황한 린넨 백작이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어디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전하. 아군은 그쪽이 아니라…….”

“알고 있다. 저기 영주 녀석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