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14화 – 닭대가리 사령관
닭대가리 사령관
크로나사 지방과 코린토비아 지방은 드넓은 황무지와 산들에 의해 나누어진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살기 좋은 넓은 황야임에도 불구하고, 30여 년 전에 크라레스 제국과 코린트 제국의 국경선이 위치했었기에, 양국의 막대한 군사력이 주둔함으로써 몬스터들이 살아가기에는 별로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 후 코린트는 크로나 사 지방을 점령한 후에는 이곳에 몬스터가 정착하지 못하도록 몇 군데에 요새를 건설하고 상당한 군사력을 주둔시켜 두었다. 미투랑성은 그때 건설된 요새들 중의 하나였다. 사단급의 병력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성으로서, 산 위를 깎아 내고 건설된 미투랑성은 대단히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투랑성에는 겨우 1개 연대가 주둔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군인과 기사, 그리고 마법사들과 그들의 하인이나 노예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총사령관이 된 로체스터 공작의 결정에 의해 크로나사 지방에 대한 탈환은 크루마 정복 후로 미루어졌었다. 그런 까닭에 코린트의 주력 부대는 모두 다 크루마 전선 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크루마와 휴전 조약을 체결한 후에 이곳 요새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또 다른 정세의 변화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성주가 직접 행하는 환영 인사에도 불구하고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인물은 오만한 표정으로 대충 답례를 한 후 말했다.
“그래, 현재 크라레스 방면에 투입 가능한 군사력은 얼마나 되지?”
상대가 아무리 검을 차고 있고, 후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비대한 몸매로 봤을 때 절대로 고도의 검술을 익힌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귀족 의 교양필수인 검술을 조금 익히기는 했겠지만 그 정도로 익혀서는 행세를 하기 힘든 것이다. 이 후작이란 양반의 경우 검술이 아닌, 황제와 인척인 그로체스 공작 이 아끼는 부하였기에 이렇듯 거만했던 것이다. 그의 뒤 배경을 잘 알고 있는 성주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결전을 회피하시고 모든 병력을 후퇴시키셨기에 거의 모든 병력이 남아 있다고 보시면 될 것이옵니다. 그 병력 및 주둔지 상황은 따 로 보고서를 마련해 뒀습니다. 그리고 크로나사 방면에서 반격을 펼치기로 했던 동십자 기사단은 모두 이곳에 집결해 있습니다.”
후작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기사단 전 대장들은 나중에 따로 만나 보기로 하지. 아마 며칠 내로 쟈크렌 요새에서 기사들이 올 거다. 그들의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조심하게.”
“예, 후작 각하. 그런데 기사들이라고 하시면 어떤?”
“그로체스 공작 전하께서 폐하께 상소하여 얻어 낸 은십자 기사단의 일부다. 은십자 기사단장 투르넨 후작이 도착하면 나에게 안내하도록 하게.”
“예, 각하.”
“자, 내 방으로 안내해 주게.”
“옛.”
자신의 방으로 안내된 후작은 성주가 올려놓은 각종 서류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무술을 제외한다면 후작의 능력은 대단히 탁월했다. 모든 검술을 익히는 무리들이 작위를 받은 후 군부에서 일하게 되며, 또 더욱 뛰어난 검술들을 익히기 위해 발렌시아드, 로체스터, 크로데인 가문에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 기에 키에리와 그 친구들이 가진 권력에 대한 비판 세력을 모으기는 매우 힘이 들었다. 최고의 검술 실력을 지닌 인물들은 모두 다 세 가문에서 키워 내고 있었고, 또 검술을 익히고자 하는 인물들은 그 세 가문과 어떤 형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로체스 공작은 자신의 동료들을 문관들에게서 찾았다. 검술을 익히지 못한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나 평민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은 많았다. 또 그들 은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었던 인물들이었기에 아주 손쉽게 그로체스 공작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들로서는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을 길이 그것 외에는 없었기 때 문이다.
똑똑..
“은십자 기사단장 투르넨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큼직한 문이 위병들에 의해 열렸고,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당당한 체구의 사내가 실내로 들어섰다. 그 사내는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후 작을 바라본 후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것은 절대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보내는 인사는 아니었다.
“오랜만이외다, 다리엔 후작.”
“마중 나가지 못해 미안하외다. 이리 앉으시지요. 이봐라, 차를 내오거라.”
투르넨 후작이 자리에 앉자 다리엔 후작은 일부러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렇듯 빨리 와 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래, 몇 명이나 거느리고 오셨소이까?”
“일단 선발대만 거느리고 왔소. 하지만 내일 2진, 그 다음 날 3진이 도착할 예정이오. 모두 다 도착하면 내 휘하 기사단의 절반이 될 것이오. 이곳에 오기 전에 로체 스터 전하께 설명을 약간 듣기는 했지만……. 일을 어떻게 벌이려고 하는 것이오?”
상대의 무례한 어투에 약간 자존심이 상한 다리엔 후작은 품속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투르넨 후작의 눈썹이 약간 꿈틀했고, 미세하지만 그의 손이 검 있는 곳으로 살짝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쏘아 내는 듯한 눈빛은 상대가 이상한 것을 꺼냈을 때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두 토막 내 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투르넨 후작을 의식하며 다리엔 후작은 약간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이렇듯 갑작스레 행동한 것은 분명한 자신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집어넣을 때와는 달리 다리엔 후작의 손은 천천히 품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손에는 봉인된 편지가 한 장 들려 있었다.
“그게 뭐요?”
“자, 읽어 보면 알 거외다.”
투르넨 후작은 슬쩍 편지를 받아서 그 봉인을 살펴봤다. 봉인은 비밀스런 편지를 보낼 때 밀랍으로 봉투의 닫히는 부분을 막고, 그 위에 인장(印章)을 찍어 놓은 것 을 말한다. 이때 인장의 경우 그 가문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반지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 인장의 모양이 황실의 것임을 알아본 투르넨 후작의 손 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봉인을 뜯고 내용물을 자세히 읽어 본 투르넨 후작은 편지를 다시 다리엔 후작에게 건네주며 퉁명스레 말했다.
“어이가 없군. 전쟁터라고는 가 보지도 못한 그대가 사령관이라니……. 뭐 그것이 칙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내 작전은 간단하오. 타이탄이라는 병기가 개발되기 이전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군대들을 이동시키고 포진시키는 수많은 기법들이 발전했었소. 그리고 그 것은 마법사나 강력한 무술을 지닌 소수의 기사들에 의해 더욱 복잡해지고 발전했었지. 하지만 타이탄 이후에는 어떻소? 타이탄의 수가 별로 많지 않다는 그 이유 때문에, 또 타이탄은 타이탄 외에는 적이 없다는 그것 때문에 결국에는 타이탄들끼리의 격투로 결말지어졌소. 그렇다 보니 전략이나 전술 따위는 써먹을 이유도 없 어진 것이지.”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이 뭐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타이탄이 등장한 후에는 닭대가리들이 전략이나 전술을 세워 놨다고 하더라도 타이탄 부대만 강하다면 승리가 가능하다는 말이오.” 무인들을 깔아뭉개는 듯한 말에 자존심이 상한 투르넨 후작이 역으로 꼬집었다.
“지금 당신 자신을 닭대가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오?”
분명 은십자 기사단의 반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적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강력한 타이탄 전력을 가지고 적과 싸우겠다는 말이니까 투르넨 후작의 말에도 일리 는 있었다.
“하하하, 그대도 정말 만만찮은 사람이군. 나는 은십자 기사단을 본격적으로 투입해서 대규모 타이탄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소. 지금 그로체스 전하께 필요한 것 은 시간과 승리요. 그렇기에 너무 갑작스럽게 승리를 거둬 버리면 안 되지. 크루마를 없애기에 충분한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시간을 끌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오. 내 말 이해하겠소?”
“이해 못 하겠소. 나는 예로부터 전쟁은 속전속결이 최고라고 배웠소.”
“이해 못 한다면 어쩔 수 없소. 어쨌건 지휘권은 나에게 있고 당신은 내 지휘에 따라 움직여 주면 되오. 이건 이해하겠소?”
“나는 당신 같은 닭대가리가 아니니까 그 정도는 이 편지를 봤을 때 벌써 이해하고 있었소. 그럼 일이 있을 때 부르시오.”
당당한 체구를 꿈틀거리며 밖으로 사라지는 무인을 보며 다리엔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투르넨 후작이 거대한 기사단을 호령하던 인물이니만큼 자신의 밑에 두 기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리엔 후작은 책상으로 돌아가서 털썩 주저앉은 후 그 위에 놓여 있던 서류 중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그가 이곳에 와서 읽은 보고서들 중에서 매우 흥미 있게 읽은 몇 안 되는 서류들 중의 하나였다. ‘크로사나 전투 집행 명령서’라고 쓰인 그것은 마법사 라진느가 총사령관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의해 작성했다고 기 록되어 있었다. 거기에 기록된 전투 방식은 철저한 게릴라전이었다. 상대방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전진의 속도를 둔화시키고, 적이 산발적인 공격을 막지 않을 수 없도록 기사들을 분산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그러면서 뛰어난 기사 몇 명으로 이루어진 특수 부대로 그들을 각개 격파하는 것이 요점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시간을 끄는 데 있어서 매우 뛰어난 전략이었다.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상대는 자신들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게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 는 것이다. 그 자신도 바로 이 전술로 적과 싸우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왔기에 다리엔 후작은 이 전술이 가지는 이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철십자 기사단으로부터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작전에 따라 두 차례 타이탄을 내보냈지만 적 기사를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격파 당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리엔 후작은 그 보고서를 읽어 보기는 했지만 그것에 그렇게 신경 쓸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등급이 낮은 철십자 기사단의 타이탄 한 대를 적 타이탄 두세대가 협공했다면 당연히 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강력한 기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때문에 자신은 은십자 기사단의 정예들을 부탁한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