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15화 – 꿈을 이루어 가는 것

꿈을 이루어 가는 것

“공작 전하.”

“무슨 일이냐?”

노장군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던 크로아 공작은 막사 밖에 서 있는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마법사는 공손하게 크로아 공작을 향해 말했다.

“예, 전방 정찰조로부터의 보고이옵니다.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옵서 오신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크로아 공작의 표정이 확 펴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가히 1개 기사단급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는 구원병이 도착했 다는 말처럼 들렸다.

“오, 그래? 지금 어디 있느냐?”

“아마 저녁쯤에는 도착하실 것이옵니다.”

“잘되었군.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연락이 안 돼 고심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때 앞에 앉아 있던 노장군이 조심스레 말했다.

“전하, 호위병들을 보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야. 별로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지. 대신 오늘 저녁은 좀 맛있는 걸로 준비하라고 일러라.”

“예, 전하.”

마법사가 대답하고 물러가자, 공작은 노장군에게 급히 말했다.

“그녀가 도착했으니까 병력을 좀 더 빼자.”

“예? 하지만 더 이상 빼면 위험할지도…….”

하지만 공작은 상관없다는 듯 지도를 짚으면서 말했다.

“상관없어. 5개만 더 빼는 거야. 그것들을 이 일대에 투입한다면 보급 사정이 좀 더 좋아지겠지. 그녀 혼자만 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메워진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은 최강의 마법사. 더 이상 뭐가 필요한가? 안 그래?”

“예, 지시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전하.”

다크 일행이 크로아 공작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크로아 공작은 휘하의 기사들 및 장군들과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먼 길에 수고가 많았네.”

“수고랄 거야 있나? 멀찍이 떨어진 덕분에 꽤 재미있는 여행이 되었는걸. 덕분에 많이 배웠고 말이야. 참, 내 아버지야, 인사해.”

크로아 공작은 다크의 뒤편에 서 있는 대단한 미남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예, 폐하로부터 말씀은 들었습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뭐, 도움이랄 거야 있나? 아들 녀석 혼자서도 잘하던데…….”

“오는 길에 자네에게 줄 선물도 준비해 왔지. 린넨!”

다크로부터 호명을 받자 린넨 백작은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말안장에 넣어뒀던 술병 중의 하나를 꺼내 다크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크로아 공 작에게 건네줬다.

“오는 길에 구한 건데, 아주 쓸 만해. 자네한테도 마시게 해 주고 싶더군. 디지드라는 술이야.”

크로아 공작은 아무런 상표도 없는 그 술병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디지드를 만드는 마을이 있던가?”

“어? 디지드를 알고 있었어? 그 녀석들은 자기 마을 특산이라고 하던데…….”

“예전에는 여러 곳에서 생산했었지. 디지드는 고구마와 몇몇 약초를 섞어서 만드는데, 코린트가 지배하게 된 후에는 그 녀석들의 입맛에 안 맞는다며 포도주나 브 랜디만 만들게 한다고 들었지. 술이란 것은 판로가 없으면 생산을 중지하게 되어있는 거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 그 생산 비법은 사라지는 것이고. 정말 고마워. 아 주 마음에 드는 선물이야. 자, 들어가서 이 녀석을 같이 마셔 볼까?”

그날 저녁 식사에는 아르티어스와 다크만이 초대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머지 인물들의 경우 공작 두 명이 모이는 자리에 함께 끼일 정도의 위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다크와 함께 크로아 공작의 숙소에 초대를 받았기에 내심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다. 공작, 그것도 크라레스 제국의 실세인 공작 두 명이 모이는 자리 라면 과연 어떤 메뉴가 등장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병사 두 명이 들어와서 큼직한 솥을 하나 놔두고 간 후, 크로아 공작이 손수 그 내용물을 접시에 담아 각자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을 때, 아르티어스의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정체불명의 음식. 대충 걸쭉한 스프처럼 생겼는데 도대체 내용물이 뭔지는 알기 힘든 음식. 허연색이 나는 것을 보면 밀가루도 들어간 것 같았고, 군데군데 채소도 보였지만 얼마나 삶았는지 본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채소가 없다 보니 어떤 게 들어갔는지도 알기 힘들었다.

“예? 뭐긴 뭐예요? 저녁밥이지.”

아르티어스가 퉁명스레 대답하는 아들 녀석의 상판대기와 무럭무럭 김이 나고 있는 정체불명의 음식을 번갈아서 바라보고 있자 크로아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식이 형편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르티어스 님. 하지만 지금 보급 상태가 좋지 못한 관계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 저녁은 특별한 날이라고 고기도 좀 넣 었는데…….”

“고기? 고기라고는 기름기 하나 안 보이는데?”

고기 조각이라도 들어 있는지 수프 그릇을 훑듯이 살펴보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당혹스런 미소를 보내고 있던 크로아 공작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라비틀어 진 빵 조각을 토막 내어 그들에게 건네줬다.

“그래도 맛은 날 겁니다. 며칠 전에 어떤 백작의 영지에서 징발한 말린 고기가 남은 게 좀 있었는데, 그걸 모두 다 넣었거든요. 하지만 1만 명이 넘는 인원이 먹는 식사다 보니 흔적도 안 보이는 게 당연하겠죠. 빵이 딱딱하니까 수프 안에 넣어서 드십시오.”

“따지지 말고 먹어요. 언제부터 음식을 가렸다고 그래요?”

다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빵 조각까지 넣은 그 정체불명의 음식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속에 밀어 넣은 후 대충 씹어서 삼켰다. 그걸 보고 아르티어스도 억지 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크로아 공작도 그것을 우물거리다가 삼킨 후 말했다.

“입맛에 안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병사들은 모두 이런 것을 먹고 있습니다. 사령관이랍시고 저만 좋은 음식을 먹는다면, 내 밑에 있는 기사들도 좋은 것을 먹으려 고 들 테고, 그렇게 되면 고급 장교들도 그것을 먹으려고 하겠죠. 하지만 음식의 양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니까 병사들의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전 장에 나가면 병사들과 똑같이 먹으라는 말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들은 후 지금까지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크로아 공작은 그 말을 아르티어스에게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음식만 먹고 있을 뿐 공작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대신 다크가 크로아 공작의 말에 응 수를 했다.

“아주 현명하신 아버님이었군. 언제 돌아가셨지?”

“30년쯤 전, 폐하를 피하게 하시려고 몇몇 기사들과 함께 적의 발목을 잡으셨어. 그 덕분에 폐하는 탈출에 성공하셨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들었지. 언제나 전장에서 죽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분이셨는데, 뭐 평생의 소원은 푸셨으니까 여한은 없으셨겠지.”

“자랑스런 아버지로군.”

“그럼, 아주 자랑스러운 분이셨지. 내가 가장 존경하는 기사야. 그리고 내가 가장 되고 싶은 이상형이기도 하고. 밥은 대충 다 먹은 것 같으니 술이나 한잔할까?” “좋지.”

크로아 공작은 디지드의 마개를 딴 후 한 잔씩 건넸다. 그런 다음 잔을 들고는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했다. 옛날 수련하던 도중에 마을로 살짝 도망쳐 나와 조금씩 마셔 봤던 디지드. 평민들이 즐기던 결코 좋은 술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그 향기와 텁텁한 뒷맛이 아련한 추억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보급 사정이 형편없는 모양이지?”

다크가 말을 걸자, 공작은 회상에서 깨어나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7개 사단을 후방에 풀어 놨지만, 원체 점령지가 넓다 보니 그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아쉬운 대로 점령지에서 징발하고 있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 계야.””

아르티어스는 아들과 공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디지드를 조금씩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의 일에 드래곤인 자신이 나설 이유는 없 었던 것이다.

“농민들로부터 뺏으면 말썽이 생기지 않을까?”

“아, 물론 농민들이나 농노들의 것은 빼앗지 않아. 지방 영주들의 주머니를 털 뿐이지. 하지만 녀석들도 우리 쪽으로 식량을 넘기기 전에 창고를 불태워 버리는 실 정이라서 징발도 쉽지는 않아.”

“전쟁이 오래간다면 아주 힘들어지겠군. 머잖아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거야. 그에 대한 대비도 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글쎄, 하루하루도 빠듯한데 그렇게 멀리까지 계획을 잡고 있을 여력이 없어. 우선은 지금 후방에서 새로이 증원되어 배속된 5개 사단을 뒤로 돌려서 차근차근 부 숴 나오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언제 끝이 날지 의문이지.”

“그렇다면 대책이 없는 거야?”

“아니, 대책은 있어.”

“어떤?”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오지. 첫째, 놈들은 여기저기에서 공격해 들어오기는 하지만 소수야. 둘째, 녀석들은 각 영주의 소속 부대로서 분산되어 활동 하기에 일관된 명령 체계가 없지. 셋째, 녀석들은 모든 보급을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해야만 해. 그것 때문에 첫째처럼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넷째, 각 지방에 흩어진 영주 직속의 부대들이기에 검술에 능한 인물은 없어. 자, 그렇다면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조금씩 디지드를 마시면서 크로아 공작의 말을 듣고 있던 다크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관된 명령 체계가 없다면 하나하나 다 부수는 수밖에 도리가 없잖아? 그리고 검술에 능한 인물이 없는 데다가 소수라면 이쪽은 기사 몇 명을 내보내면 될텐데…”

“대충 그렇게 답이 나오겠지?”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이쪽에서 기사단을 분산시키면 녀석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기사단을 투입해 올 거야. 파견 기사들로부터 올라온 보고서에 의하면 철십자 기사단의 타이 탄도 두 번 나타났었지. 물론 격퇴하긴 했지만, 녀석들이 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은십자나 금십자 기사단을 동원해 온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 거야.” “기사단을 분리시킬 수도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지?”

“물론 기사단을 분리시키기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큰 규모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 벌써 유령 기사단 쪽에 명령해서 오너 셋, 그래듀에이트 둘, 기사 넷, 마법사 한 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 5개를 내보냈지.”

다크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효과는 있던가?”

“물론, 효과는 좋았어. 하지만 본진의 전투력이 너무 약화되는 것 같아서 그게 문제지. 그런 때 자네가 와 준 거야. 그 덕분에 나는 그런 부대 5개를 더 만들어서 내 보낼 수 있었지. 이제부터 전세가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할 거야.”

“잘되었군. 그러면 나는 여기서 그냥 앉아만 있어도 모든 게 끝난다는 건가?”

“아니지, 그러다가 놈들이 오면 싸워 줘야겠지. 그건 그렇고, 토지에르에게서 연락이 왔었는데 크루마와 코린트가 휴전을 했다고 하더군. 혹시 들었나?” “아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주 위험해. 코린트는 주력 부대를 이쪽으로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거든.”

“대책은 있어?”

“토지에르의 말로는 와리스 백작을 크루마에 보내어 따질 거라고 했지만, 글쎄…,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야.”

“와리스 백작을 보내 어떻게 하려고?”

“일단 전쟁 도중에 발 뺀 것에 대한 사과는 받아야 하겠지.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원군을 얻어 내야 할 테고……. 물론 그 녀석들이 원군을 파견해 준다고 해도 정식 적인 원군은 힘들고, 아마도 자네가 했던 것처럼 정체를 숨긴 기사단쯤이 되겠지.”

“뭐, 잘되겠지. 그런데 이런 식의 게릴라전은 여기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군. 크라레스의 강력한 기사단이 힘을 못 쓰는 것을 보면 말이야.”

크로아 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사단만 강하면 뭐하나? 원래 기사단을 받쳐 줄 강한 군대도 필요한 거야. 보급로를 확보하고, 점령지를 지킬 군대가 말일세. 시시각각 보급로를 위협받고, 기 사단이 뚫고 들어간 대지의 반의반도 통제하지 못하는 군대라면 정말, 흐휴……. 힘들군. 토지에르의 말로는 지금 새롭게 용병을 모집 중이라고 하던데, 여기를 통 제할 만한 군대를 확보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크로아 공작이 투덜거리자 다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자네나 토지에르는 지금 꿈을 이뤄가고 있잖아? 저 예전부터 목표로 해 왔던 꿈을 말이지. 내 앞에서 죽는 소리 해 댄다고 해도 자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피곤해도 기분은 좋으면서 딴 소리 하지 마.”

크로아 공작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나? 하지만 꿈을 이뤄가는 것은 정말 힘든 작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