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2화 – 판타지 영웅의 대결
판타지 영웅의 대결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알 수 없어?”
제임스의 채근에 리카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모두들 새벽에 한꺼번에 공간 이동해 버렸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일찍 일어나서 식사 준비한다고 난리를 치기에 뭔가 일이 일어날 줄은 알았지만, 몽땅 공간 이동 할 줄은 저도, 스타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임스는 난처해하는 리카에게서 시선을 돌려 큼직한 마법진 두 개를 살펴보고 있는 스타키를 보고 말했다.
“뭐 좀 알아낸 것이 있나?”
“예, 저기 있는 마법진은 초장거리 이동용입니다. 저쪽에 쓰인 문자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봤을 때 아마도 저건 크라레스로 이동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만든 지 꽤 된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본국에 뭔가 보내기 위해 만든 거겠죠. 그리고 여기 있는 게 오늘 아침에 만든 겁니다. 장거리 이동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먼 거리는 아 닙니다. 그리고 저쪽에 쓰인 문자로 봤을 때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제임스는 스타키의 추리를 듣고는 옆에 서 있는 까미유를 향해 말했다.
“북쪽? 혹시 가므가 아닐까?”
하지만 까미유도 그걸 정확히 알 수는 없었기에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녀를 이렇게 추격할 필요가 있을까? 모두들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써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잖아? 며칠 동안 잠복해서 감시 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어. 대상을 두세 명 정도로 압축하기는 했지만 원체 마법 트랙들이 널려 있는 데다가, 감시가 치밀해서 숨어들 수도 없었잖아. 내 생각에 는 지금은 돌아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그녀를 다시 추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또 그녀를 추격한 덕분에 크루마를 도와준 국가들 중에 크라레스도 끼어 있다는 의외의 소득도 얻었고 말이지.”
“너는 아버지의 성격을 잘 몰라서 그래. 한 번 뱉은 말은 꼭 실천하시고야 말지. 우리가 만약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죽이려고 드실걸?”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계속 추격하는 수밖에. 일단 스타키의 말대로 가므 왕국에 가 보자. 뭔가 단서가 있겠지.”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자 까미유는 리카를 향해 말했다.
“이봐, 리카.”
“예, 백작님.”
“본국에 통신해서 가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좌표를 알려 달라고 해. 그리로 이동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지. 참, 그리고 제임스.” “왜?”
“여기 크라레스의 기사단도 침투를 못 하고 기회만 봤었는데, 크루마군의 최대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가므 왕국에서는 접근이 더 어렵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지. 여러 나라의 군대가 모이다 보면, 상대방의 기사들 얼굴을 잘 모르게 되니까 침투의 여지는 더 클 수도 있지. 일단 본국에 연락해서 위치를 파악 한 후, 시내로 가서 살라만더 기사단의 복장을 구하자. 쓸 만한 옷 가게에 주문한 후 돈을 좀 많이 준다고 하면 빨리 만들어 줄 거야. 그런 다음 가므에 가서 살라만더 기사단인 척하면서 탐색하는 거야. 어때?”
“흐음, 그게 좋을 것 같군. 이봐, 리카. 빨리 본국에 연락해 봐.”
“예, 백작님.”
그날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신호로 양 군대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물론 태양을 등지는 크루마 기사단에 비해 그것을 마주 보는 코린트의 기사단이 약간 불리 했다. 하지만 서로의 대치가 완전한 동서는 아니었기에 약간의 각도가 있어서 정면으로 해를 마주 보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듀에이트에 이르는 고수들에게 있어 태 양빛을 마주 보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거기에다가 전투 직전에 태양빛을 어느 정도는 가려 주는 신성 마법에 의한 도움까지 있었기에 두 시간가 량은 태양이 내뿜는 강렬한 빛 때문에 지장을 받을 염려는 없었다.
양 군(兩軍)은 근위 기사단을 중심으로 격돌했다. 그리고 그 근위 기사단의 가장 선두에는 양 군 모두 최고의 검술을 지닌 인물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키에리 드 발 렌시아드 대공은 지축을 울리며 다가드는 엄청난 수의 타이탄들 앞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검은색 타이탄을 볼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땅을 디딜 때마다 땅이 푹푹 파 이며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키에리는 앞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엄청난 덩치의 타이탄을 보며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게 없다는 것이 저 큰 덩치를 보니까 느껴지는군. 안 그래?”
주인의 말에 크로테아는 묵직한 저음으로 답했다. 크로테아의 경우 예전의 주인들이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꽤나 입이 거친 타이탄들 중의 하나였다.
<맞아. 네 녀석도 안목이 제법이군. 적기사를 봤을 때 정말 놀랐었는데, 저 타이탄의 엑스시온은 그보다 더 출력이 커. 아마도 내 느낌이 틀리지 않는다면 3.01 정 도일 거야.>
“하! 3.01이라고? 정말 대단하군. 그라세리안은 절대로 2.5 이상의 타이탄은 만들어질 수가 없다고 했었는데, 저걸 만든 놈은 도대체 누구야?”
키에리가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양 군은 급속도로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크로테아의 검에서 푸른색 빛줄기가 검은색 타이탄을 향해 날아갔고, 그 검은 타이탄의 검이 타오르듯 엄청난 광채를 뿜어낸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은색 타이탄은 크로테아가 뿜어낸 빛줄기를, 간단하게 타오르듯 빛을 발 하는 검을 이용하여 허공으로 튕겨 낸 후 그대로 뛰어올랐다. 아니 엄청난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을 정도로 먼 도약 거리를 생각한다면 뛰어오른 게 아니라 날아올랐 다고 보는 게 옳았다.
파칭!
큰 검은색 타이탄이 헬 프로네를 향해 뛰어들면서 순간적으로 검과 검이 부딪치며 엄청난 소리를 뿜어냈다. 특이한 점은 양쪽의 검이 모두 타오르듯 엄청난 빛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쪽이 부딪침과 동시에 크로테아는 엄청난 충격에 뒤로 쭉 밀렸다. 거의 90톤이나 나가는 헬 프로네가 긴 자국을 내며 뒤로 밀 려난 것은 순전히 상대방의 무게가 훨씬 더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냥 휘두르는 검을 막았다고 해도 충격이 컸을 텐데, 그 무게를 온전히 다 실어 도약해 오는 상대 의 검을 막았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검은색 타이탄은 방패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헬 프로네보다 거의 60톤이나 더 무거웠던 것이다.
<제기랄! 엄청난 압력이야. 저렇게 무지막지한 무게가 실린 검은 처음이다.>
크로테아가 투덜거리자 키에리도 거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정말 아찔하군. 육중하게 생겼으면서도 원체 먼 거리를 뛰어오르기에 혹시나 적기사처럼 중공장갑(中空裝甲)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야. 저거 완전히 통짜 쇠라구. 그런데도 어떻게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는 거지?”
적기사는 두터운 방패가 없다는 약점에서 생기는 방어력 저하를 우려하여, 어깨와 등 부분에 아예 방패 역할을 할 수 있는 2차 장갑판 위에 방패 역할을 하도록 상 당한 거리를 띄어 놓고 3차 장갑판을 붙여 놨다. 그래서 얼핏 보면 상체에 상당히 두터운 중장갑을 걸친 1백 톤이 넘는 타이탄처럼 보이지만 실지 무게는 95톤이었 다.
물론 그렇게 해 놓은 이유는 적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충격 흡수에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기사가 각종 비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만큼, 다 양한 상황의 전투에 고루 사용할 수 있도록 코타스 공작이 고안한 최신 기술이었다. 그 덕분에 적기사는 일대일뿐만 아니라 다 대 일의 집단전에서도 상당한 위력을 낼 수 있는 꽤나 다목적 타이탄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 말했잖아, 이 멍충아. 저 녀석의 엑스시온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출력이 높다고. 최소한 이쪽보다 50톤은 더 나가는 것 같다. 검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위험해>
서로 간에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격투는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탐색전의 형식으로 몇 번 검을 교환했지만, 서로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 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청난 실력이군. 저런 놈을 상대하라고 페트릭과 크리스틴을 보냈으니, 가서 죽으라고 한 것과 똑같았지. 제기랄!”
<젠장!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이쪽이 조금 속도에서 우세하다고 해도, 저쪽은 무게가 월등하게 무거워.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게 키도 크고, 검의 길이도 길다.> “그 정도는 벌써 파악하고 있어. 도대체가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키에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상대를 공격했다. 하지만 적과의 실력은 거의 대등한 상태. 오히려 속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서 유리한 적 에게 은근히 밀리는 기색까지 보이고 있었다. 실컷 칼부림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검과 검이 부딪쳤을 때는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크로테아는 상당한 노력을 해야 만 했다.
전장의 모든 타이탄들은 언제부터인지 전투를 멈추고 있었다. 엄청난 두 고수들끼리의 격전이 전장의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의 대결은 사실 상 이번 전투의 승패를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검은색 타이탄이 승리를 거둔다면 총사령관을 잃은 코린트의 패배로 끝날 것이고, 키에리가 승리를 거둔다면 두 명의 마스터를 상대할 수 없는 크루마의 패배로 끝날 것이다.
“호호홋! 제법 쓸 만한 녀석이군. 제법인데?”
자신의 공격을 재빨리 피해 내는 적을 보면서 느낀 다크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태도가 안드로메다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견 안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다. 네가 전력을 다했다면 벌써 저 녀석을 박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시간을 끄는 거지?>
“멍청하기는 이게 바로 재미라는 거야. 카렐 외에는 상대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제법 쓸 만한 상대가 또 나타났잖아. 그냥 죽여 버리기는 솔직히 좀 아까운 놈이 군.”
<원래 격투라는 것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되어 있다.>
“그건 나도 알앗!”
캉!
또다시 양쪽의 검이 굉음을 토해 내며 부딪치자 이번에도 헬 프로네는 형편없이 뒤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은색 타이탄이 도약을 했다. 물론 끝장을 내기 위해 앞으로 도약한 것이 아니라 뒤로 도약한 것이었지만.
““머리 좀 들어.”
다크의 말에 안드로메다는 기가 차다는 듯 되물었다.
<뭐? 지금은 전투 중이다.>
“상관없으니까 들어. 내 말 안 들을 거야?”
마지못해 안드로메다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터운 로브의 모자가 깊숙이 눌려져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곧이어 모자를 뒤로 젖히자 그녀의 청순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키에리 또한 상대가 자신을 향해 도약해서 끝장낼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이탄의 머 리를 드는 것을 본 후, 자기 타이탄의 머리 또한 열어젖혔다. 키에리는 드러난 상대가 의외로 어린 소녀라는 것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이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대 제국 코린트의 총사령관이자 근위 기사단장,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공작이다.”
키에리의 힘 있는 목소리가 끝나자, 뒤이어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크 폰 로니에르라고 하지.”
“다크 폰 로니에르? 가만있자…, 크라레스에서 갑자기 등장한 총독 이름이군. 그대는 크라레스에서 왔는가?”
키에리의 말에 다크는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기억력이 대단하군. 나 같으면 기억도 못 할 텐데.
“크라레스에 당신 같은 인재를 키워 낼 만한 능력이 남아 있었는가? 그리고 그런 타이탄을 제작해 낼 저력(底力)도.”
상대의 말에 다크는 생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크라레스 따위가 나를 키워 낼 수는 없지. 나는 다만 약속 때문에 도와주고 있을 뿐이야.”
“도와줄 뿐이라고? 그대 같은 인재가 우리 코린트를 도와준다면, 크라레스 국왕이 약속한 것의 열 배는 더 줄 수 있다. 어떤가? 그대가 몸담기에 크라레스는 너무 작은 나라가 아닌가?”
다크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작다면 크게 만들면 되겠지.”
“대단한 자신감. 거기에다가 실력까지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살라만더 기사단은 그대 휘하의 기사단인가?”
그 말에 다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번 전투를 위해 황제가 잠시 빌려 줬을 뿐, 나는 치레아 총독일 뿐이야.”
“오래전부터 퍼져 나오던 의문이 사실이었군. 아무리 계산해도 노획한 타이탄 수가 맞지 않았기에, 치밀하게 조사를 했었는데도 용하게 그걸 숨기고 있었군.” “그거야 내가 한 게 아니니 잘 모르겠군. 자…, 이제 다시 싸워 볼까? 관중들이 승부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청기사의 거대한 머리통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 청기사의 거대한 덩치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든 대결이 그러하듯 키에리와 다크의 대결도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키에리는 그랜드 마스터인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상대를 공격했고, 또 방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보다는 상대가 조금 더 뛰어난 고수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엑스시온의 출력 차이에서 오 는 단순한 파워 부족이 아니라, 검객으로서의 기술이 상대에게 떨어진다는 것이 자부심 높은 키에리에게 상당한 좌절감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어깨 에는 국가의 존망이라는 커다란 짐이 지워져 있었다. 바로 그 짐이 키에리로 하여금 패할 가능성이 높은 격투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능력 이상의 실력을 뿜어내게 만들고 있었다.
퓨캉!
거대한 검이 가로지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크로테아가 소드 스토퍼로 간신히 막은 것은 좋았는데, 그 엄청난 무게에 밀려 한순간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중심을 잃고 순간적인 무방비 상태에 빠졌을 때, 상대의 발이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 크로테아의 오른발을 가격했다. 크로테아는 이제 완전히 중심을 잃고 굉음을 울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검이 쓰러져 있는 크로테아의 몸통을 노리고 수직으로 날아왔다.
키에리는 나뒹굴어지는 그 충격에 몇 군데 멍이 들었지만, 그것이 아프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크로테아의 검보다 1.5배는 크고 두 배는 두터운 것 같은 검 이 쏜살같이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에리는 반사적으로 크로테아를 움직여 뒤로 뒹굴었다. 하지만 상대의 검이 미치는 범위는 키에리의 예상보다 더 욱 넓었다. 상대의 공격권을 채 벗어나기도 전 키에리는 허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불로 지진 듯 뿜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상대의 검이 크로테아 의 왼팔을 거쳐 2차 장갑과 1차 장갑을 관통한 것도 모자라서 본체를 뚫고는 키에리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간 것이다.
키에리는 이제 자신이 끝장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상태에서 몇 바퀴 더 구른 후 재빨리 몸을 일으켰을 때 어느 결에 상대 또한 자 신을 향해 다가와서는 높이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키에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탈피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성이 없는 것인가 따위를 생각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었다.
크로테아가 자신의 공격권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웬일인지 검은색 타이탄은 검을 든 채 동작을 멈추고 있었다. 몇 초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키에 리가 탈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언제 상대가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키에리는 상대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후 방어 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때, 키에리의 눈에 이쪽을 향해 거추장스러운 크루마 타이탄을 베어 버리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시뻘건 색의 타이탄 세 대가 보였다. 격투에 정신 이 팔려서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키에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기사들은 그 검은 타이탄과의 거리를 맹렬한 속도로 줄여 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 검은색 타이 탄이 마지막 일격을 키에리에게 먹이지 않은 것은 그 붉은색 타이탄들의 존재를 눈치 챘기 때문인 듯 느껴졌다.
“큭큭큭…, 나도 아직 죽을 때는… 아닌 모양이군.”
키에리가 자조 어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붉은색 타이탄들은 이미 도착해서 검은색 타이탄을 향해 검을 날리고 있었다. 무작정 뛰어든 것처럼 보였지만 붉 은색 타이탄 두 대는 검은색 타이탄의 좌우로 뛰어들며 양쪽에서 검을 날렸고, 또 다른 한 대는 엄청난 높이로 도약하여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거대한 검은색 타이탄은 도저히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위로 도약했다. 두 개의 검이 자신이 있던 위치를 훑는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몸은 허공에 있었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붉은색 타이탄을 걷어차 버렸다. 굉음을 토해 내며 흉갑 부위를 걷어차인 붉은색 타이탄은 위쪽으로 붕 날아가서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로 이때 두 대의 붉은색 타이탄은 헬 프로네의 좌우에 자리를 잡았다.
“빨리 피하세요, 아버지. 여기는 저희가 어떻게 막아 볼게요.”
제임스의 외침에 키에리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깊은 상처에서 계속되는 출혈로 인해 지금 그는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고 있었지만 강력한 의 지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쿨럭…, 헛소리. 너희들이나 피해라. 도, 도저히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야.”
제임스는 뒤에 나뒹굴었던 타이탄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그쪽을 향해 말했다.
“오스카, 아버님을 부탁한다.”
“예, 대장!”
오스카가 헬 프로네를 향해 걸어가는 그때 제임스와 까미유는 적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부상을 당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키에리가 전역(戰域)에서 이 탈할 때까지 저 괴물을 잡아 둬야 했다. 마나를 끌어 모으자 붉은색 타이탄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한 검은 가슴을, 한 검으로는 머리 부분을 보호하며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있을 때, 어이없게도 검은색 타이탄은 그 거대한 검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타오르듯 광채를 뿜어내던 그 거대한 검은 빛을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대들을 뒤로한 채 크루마군의 진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