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21화 – 헤즐링은 아닐 거야

헤즐링은 아닐 거야

“흡!”

자다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힌 사내가 침대 위에 놔둔 검을 잡기 위해 버둥거리자 복면을 쓴 사내는 흉악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 거렸다.

“이봐, 조용히 해.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

상대는 목에서 섬뜩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이물질을 느끼고 버둥거리던 것을 멈췄다. 또 사실상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상대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느끼 고 있었다. 몸집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이렇듯 엄청난 힘을 내는 것을 보면 보통 실력자는 아닌 듯이 보였다.

“좋아, 그래야지. 자,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성실하게 답변을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알지? 너 하나만 죽는 것이 아니야. 옆에 자고 있는 계집부터 시작 해서, 위층에 잠들어 있는 네 아들, 딸들도 목과 몸통이 분리될걸? 시험해 보고 싶어?”

덩치가 우직한 사내는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좋아, 그래야지. 네가 황실 경비대대장 맞지?”

상대가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을 보며 복면의 사내는 흐뭇하게 미소 짓고는 뒤에 서 있는 복면 쓴 여자에게 말했다.

“봐, 제대로 찾아왔다구.”

그런 다음 그 대대장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부터 질문을 하겠어. 다크 폰 로니에르라는 공작을 알고 있지?”

멈칫거리며 상대가 답변을 안 하자 복면을 쓴 사내는 손바닥으로 상대의 배를 가격했다. 상처가 나지 않도록 신경 써서 손바닥으로 살짝 쳤을 뿐이지만 정말 요란 한 북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우으윽!”

손바닥으로 입이 막혀 있었기에 대대장의 신음 소리는 별로 크게 들리지 않았다.

“치레아 지구 총독을 경비대대장이 모른다면 말이 안 되지. 알고 있지?”

그제야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자네는 이제부터 다크 로니에르 공작이 아닌,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만 나오면 왜 사람들이 친절해지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줘야겠어.”

“그, 그건…….”

상대가 대답을 망설이자 그 복면의 사내는 옆에 잠들어 있는 여인의 이불을 슬쩍 걷어 올렸다. 그에 따라 털북숭이 다리 옆에 곧게 뻗은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고, 조금 더 올리자 통통한 허벅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여자는 아주 깊게 잠들어 있지. 무슨 일을 당해도 모를 거야.”

대대장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당연히 마법을 썼지. 이 집 안에서 마법으로 잠재워 놓지 않은 사람은 너뿐이야. 자네가 보는 앞에서 이년을 천천히 즐기며 죽여줄까?”

““빨리 선택햇!”

“좋다. 마, 말하겠다.”

복면을 뒤집어 쓴 사내가 기대 어린 눈빛을 던지고 있는 가운데 대대장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등장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고작해야 스물대여섯 도 안 되어 보였지. 그런 주제에 자기 아들을 찾아왔다고 난동을 부렸고, 수십 명의 경비병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였다.”

“호오, 난리가 났었겠군. 그런데 그것과 그녀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녀가 그 아이의 어머니라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러니까 황당한 사건이었지. 그자가 찾고 있는 아들이 다크 크라이드라는 여자였으니까 말이야.”

“이봐,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여자가 어떻게 아들이 된다는 거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건 그렇게 소란이 벌어졌으니 대기하던 그래듀에이트들이 출동했다. 하지만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가셔서 그 인물에게 사과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지. 그다음부터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을 찾아오는 인물에게는 최대한 성의껏 대하라는 칙명이 내려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잖아? 황궁이라면 당연히 우수한 근위 기사들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카프록시아를 보유하고 있는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단의 실력은 상당히 뛰 어나잖아?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타이탄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야.”

사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대대장은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때 궁전 내 제1급 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유령 기사단에 타이탄 사용 허가와 함께 스바시에와 치레아에까지 나가 있던 모든 기사들에 대한 소환 명령이 떨어졌었다. 하지만 스바시에로 피신하실 예정이셨던 폐하께서 나타나시면서 일이 간단하게 마무리 지어졌었지.”

“유령 기사단? 크루마 전쟁에 투입되었던 그 시커먼 타이탄을 보유한 기사단 말이냐?”

“잘 알고 있군. 바로 그 기사단이다.”

퍽!

“아니 왜 그러는 거야? 더 물어볼 것이 많았는데?”

“더 이상 물어보면 안 돼. 잠깐만 기다려.”

복면을 쓴 여자는 이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남자의 머리 위에 손을 놓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희뿌연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랩스 오브 메모리(Lapse of Memory : 잘못된 기억)!”

주문을 끝마친 여자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물어볼 필요 없어. 이제 기억을 뒤헝클어 놨으니까 별 문제 없을 거야. 대충 감을 잡았으니 빨리 여기를 떠나자.”

그들은 은밀하게 그 집에서 빠져나왔다.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은 복면을 벗어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복면 속에 감춰졌던 얼굴은 까미유와 마도사인 지 레느였다. 다크라는 정령 냄새를 풍기는 아가씨를 찾기 위해서는 마법사보다도 정령술을 알고 있는 지레느 쪽이 훨씬 더 적합할 것 같아서 데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복면까지 감춰 버린 상태였기에 천천히 걸어가면서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뭘 알아냈다는 거야?”

“물론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지. 그 소녀를 찾아온 남자,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라고 했지?”

지레느의 물음에 까미유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그랬지.”

“네가 생각했을 때 여러 명의 기사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을까? 그것도 기사들이 상대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정면 대결에서 마법사가 기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무리 6사이클급에 이르는 숙련된 고위 마법사라도 그래듀에이트를 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근위 기사단에 소속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그래듀에이트라면 절대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까미유는 이윽고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궁색하게 말했다.

“그, 글쎄……. 코타스 전하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레느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코타스 공작 정도라면 이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거기에 대해서 반론을 펴는 대신 딴 것으로 물고 늘어졌다.

“그렇다면 타이탄은? 지금 가지고 있는 군사력으로 봤을 때 크라레스가 여기저기에 파견된 타이탄까지 불러들였다면 아마 1백 대가 넘을 텐데, 그 1백 대나 되는 타이탄과 혼자 싸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어?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황제가 직접 나가서 사죄해야 할 상대는?”

물론 없었다. 하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지만 일단 화가 나면 국가 하나쯤 잿더미로 만드는 것은 간단하게 생각 하는 악마 같은 존재. 힘과 공포의 상징. 그것이라면 타이탄 1백 대쯤은 간단하게 해치울 수도 있을 것이다.

“설마, 드래곤?”

“그 설마가 맞을 거야. 그것도 웬만한 국가쯤은 겁내지도 않는 강력한 녀석이겠지.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그 소녀에 대한 궁금증도 풀리게 되지.”

“헤즐링(어린 드래곤)?”

“헤즐링은 아닐 거야. 전에 드래곤 사냥하는 것 못 봤어? 헤즐링은 결코 그녀 정도의 힘을 낼 수 없어. 아마도 헤즐링은 벗어난 드래곤일테지. 그것도 마법보다는 검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변종 드래곤.”

“호오, 그래서 아들이 되었다 딸이 되었다가 하는 거로군.”

“그렇지. 드래곤은 양성체(兩性體)니까 말이야. 또 그녀가 드래곤이라면, 그것도 1천 년 넘게 살아온 드래곤이라면, 그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통 드래곤은 3천 살을 전후해서 새끼를 낳는다고 하니까 아마도 그 드래곤은 3천5백 살은 넘었겠지? 그 정도의 드래곤이라면 코린티아시에 나타 나서 대 학살극을 벌여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놀라운 사실이군. 빨리 쟈크렌 요새로 돌아가자. 공작 전하께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해야지.”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다크는 방문이 열리며 약간 마른 듯한 사내가 들어서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키는 180센티미터는 조금 넘 는 것처럼 보였는데, 금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상당한 멋쟁이였다. 그는 노련한 눈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크라레스에서 새로이 파견된 사신을 슬쩍 바라봤 다. 소녀와 청년, 둘 다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이고 미남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점잔을 빼고 앉아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대사고, 예쁘게 차려입은 금발의 미소 녀는 시녀쯤 된다고 생각하고는 자리에 턱 앉았다.

가레신 후작은 이곳 별궁(別宮)에 마련된 화려하면서도 거대한 응접실에 이들을 놔두고 일부러 상당히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한 후 나타났다. 당연히 구원을 청하기 위해 나타난 인물들은 심리적으로 초조한 법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을 좀 더 초조하게 만든 후 만날 작정을 했었다. 한껏 시간을 끈 후 응접실에 들어와 보니 사신 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도착해 있었다.

뚱보가 올 줄 알았는데 새로운 인물이 도착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뚱보는 크라레스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목이 날아간 모양이었다. 가레신 후작은 불쌍한 뚱보를 생각하며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지만, 간신히 표정을 근엄하게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런 다음 장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단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이 먼저였 으니까.

“반갑소. 머나먼 크라레스에서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본인은 가레신 후작이라고 하오. 와리스 백작이 올 줄 알았는데 그대들은 누구신가요?”

“네놈이 가레신 후작이냐?”

도저히 사신들이 뱉을 수 없는 천박한 말을 내뱉는 소녀를 가레신 후작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도대체 그 얼굴에서 나온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 로 투박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크흐흐흐흐…, 안 그래도 네놈을 찾았었는데…….?”

소녀가 손을 앞으로 쭉 뻗었을 뿐이었는데, 넓은 탁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가레신 후작의 몸뚱이가 자석에 끌리듯 쭉 끌려 나왔다. 가레신 후작은 있는 힘을 다 해 서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저지하려 했지만 소녀에게 끌려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힌 가레신 후작을 바라보며 소녀가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잘되었군.”

갑자기 후작의 몸이 날아가서 소녀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히는 희한한 구경을 한 가레신 후작의 뒤편에 서 있던 두 명의 경비병들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 의 행동은 가레신 후작에 의해 저지되었다. 가레신 후작은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 희한한 경험을 통해 미네르바가 말했던 ‘그녀’가 떠올랐던 것이다. “멈춰라.”

그런 후 가레신 후작은 앞의 소녀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로니에르 공작 전하십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여 인정하자, 가레신 후작은 맹렬하게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상대는 키에리드 발렌시아드를 패배시킨 이 시대 최강의 검객이었기 때문이다.

“저, 로니에르 공작 전하. 이번에 파병한 본국의 병력 때문에 약간의 오해가 생긴 모양이온데, 귀국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본국의 어려움도 생각해 주십 시오. 헤헤, 저희들은 국경의 긴장 상태만 풀리면 최소한 10개 사단쯤 파병해 드릴 겁니다. 아직도 코린트의 주력 부대가 회군하지 않고 쟈크렌 요새에서 호시탐탐 이쪽을 노리고 있는 관계로, 국경에서 병력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제발 그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상대의 눈은 이해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더욱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본국의 주력 기사단은 쟈크렌 요새 전방에 배치 중입니다. 물론 레디아 근위 기사단은 수도로 복귀했지만, 나머지 2개의 기사단은 전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요. 그리고 최전선에는 20개 보병사단과 7개 용병 사단, 10개 기병 연대가 깔려 있습니다. 코린트의 주력 부대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만 약 귀국에서 요청하신 대로 10개 보병 사단을 빼낸다면 전선에 큰 구멍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이쪽도 새롭게 입수한 쟉센 평원을 장악하고, 또 확실한 본국의 영토 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병력이 꼭 필요합니다. 쟉센 평원은 이번에 전공을 세운 많은 귀족들에게 새로운 영지로 하사되었고, 또 새로운 영주들이 자신의 영 지를 장악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자신이 내뿜는 살기에 질려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고 있는 가레신 후작을 노려보고 있던 다크는 슬쩍 힘을 주면서 털어 버렸다. 살짝 힘을 쓴 것처럼 보였지만 가레신 후작은 붕 날아가서는 한쪽 벽에 철퍼덕 처박힌 후 완전히 뻗어 버렸다.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비병을 향해 다크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 녀석은 회담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한 것 같아. 봐, 벌써 뻗어 버렸잖아. 너 빨리 가서 의사를 불러오고, 그리고 나하고 회담할 좀 더 튼튼한 녀석도 불러 와.”

지적당한 경비병은 그녀가 여태껏 뿜어내고 있던 살기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기회는 이때라는 듯 재빨리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다크는 이제 혼자 남아서 한껏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비병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봐, 크루마의 예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목이 좀 마르니까 음료수, 아니 술을 좀 가져와. 아버지는 뭐 드실래요?”

“나? 차 한 잔하고 뭐 맛있는 음식 좀 가져오라고 해. 이 몸뚱이를 유지하려면 열심히 밥을 먹어 둬야 하거든.”

“들었지? 음식하고 술, 차 한 잔이야. 술은 독한 것일수록 좋아. 알았어?”

“예.”

그 경비병도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첫 번째 경비병이 사라진 후 조금 지나서 다크가 앉아 있는 방 사방에는 근위 기사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궁전 내에서 싸우는 것이었기에 중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만약을 대비해서 정원에도 세 명의 기사가 타이탄을 꺼낼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시녀들이 들어와서 음식과 술, 차를 놔두고 재빨리 사라졌다. 다크는 술잔 가득 술을 부은 후 한 모금을 음미하면서 마신 다음 아르티어스를 바라 봤다. 아르티어스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며 우선, 차부터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보고 다크는 농담이라 도 하듯 생글거리며 말했다.

“독약이 들어 있을 거예요.”

“푸악! 쿨룩, 콜록! 뭐라고?”

아르티어스는 기껏 한 모금 마셨던 차를 브레스 토하듯 뿜어낸 후 기침을 해 댔다. 다크는 그걸 보고 방글거리며 말했다.

“독약이요. 한 방울이면 큼직한 말(馬)도 죽일 수 있는 독약이 아주 많죠. 아마 그걸 넣었을 걸요?”

아르티어스는 음식들을 향해 재빨리 용언으로 해독 마법을 펼쳤다.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런 표정으로 할 수가 있는 거냐? 에잇 제기랄! 밥맛 떨어지게 하는군. 해독(解毒)!”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하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다크가 말했다.

“그걸로 해독이 끝난 거예요?”

“물론이지. 용언의 힘은 위대한 것이란다.”

“그러고도 해독 안 되면 어쩌려구요.”

“그러고도 안 되면 본체로 돌아가면 그따위 독쯤이야, 나한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지. 그런 다음 나한테 독을 먹인 놈들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야.” “쯧쯧, 그런 결과가 안 생기기를 빌어야겠군요. 그런데 인간 세상에 간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안 그랬어요?”

“물론 그랬지. 하지만 그것은 나한테 피해를 안 줬을 때 얘기지. 호비트 따위가 감히 나한테…….?”

인간들은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불렀지만, 인간 외의 것들, 그러니까 엘프나 드워프, 오크, 오우거, 트롤 따위는 인간을 호비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들을 몬스터라고 싸잡아 낮춰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생각하며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호비트잖아요.”

아르티어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아아, 호비트와 아들은 분명히 다른 거지. 암, 다르고말고. 호비트는 호비트고 아들은 아들이야. 그건 그렇고 이거 참 맛있구나. 쩝쩝..

한참 아르티어스가 맛나게 먹고 있을 때 미네르바가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쟉센 평원에 설치된 사령부에 있다가, 이 불청객에 대한 보고를 받고 즉시 달려온 것이 었다. 그리고 미네르바를 따라서 매우 날카로운 눈매를 한 기사 세 명이 함께 들어와 그녀의 뒤에 섰다. 미네르바는 방 안을 쓱 둘러본 다음 말했다.

““반갑군.”

미네르바는 의자에 앉으면서 저 구석에 처박혀서 뻗어 있는 가레신 후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옮겨서 치료해 줘라.”

“옛!”

한 기사가 가레신 후작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보지도 않고, 미네르바는 시선을 다크에게로 고정시키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인사치고는 상당히 거칠군. 그래 무슨 일로 왔지?”

다크는 답변은 하지도 않고 술을 쭉 들이켠 후 말했다.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그쪽에서 벌어진 전쟁에는 이쪽에서 열성을 다해서 도와줬는데, 이쪽 전쟁에는 그쪽에서 영성의 없게 도와주는 것에 화가 났을 뿐이야. 다급하게 구원병을 청하 는데 고작 5천 명이라니. 너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글쎄…, 우리는 5천 명이라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의 기사단은 엄청나게 강하잖아. 그런데 뭣 때문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지? 그리고 이쪽에 여유 가 있다면 도와주겠지만, 이쪽도 급하다구.”

“호오, 그러셔?”

다크는 미네르바를 한참 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진짜 급한 게 뭔지 가르쳐 줄까?”

“좋을 대로.”

“후회하지는 마.”

미네르바는 상대의 위협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절대로 후회는 안 해.”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다크의 검이 날았다. 도대체 언제 뽑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검이었고, 일단 금빛 검광이 휙 지나간 후에야 미네르바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 수 있었다. 황급히 회피하면서 검을 뽑기는 했지만 미네르바는 일단 자신에게 피해가 없었기에, 상대가 첫 번째 공격을 위협용으로 한 것으로 이해했 다. 그런데 뒤에서 철퍼덩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절대로 뒤에 서 있는 그녀의 호위 기사들이 그녀를 돕기 위해 검을 뽑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 어느새?”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쓰러지는 소리라는 것을 파악한 미네르바가 경악하는 사이, 다크는 그녀를 향해 이죽거렸다.

“그다음은 네 목이야. 그리고 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 녀석들을 다 죽일 거야. 그다음이 이 황궁을 박살 내는 것이지. 이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위급하다 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다크는 검을 휘둘렀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엄청난 불꽃이 번쩍였다. 미네르바는 검끼리 부딪치는 충격에 뒤로 밀려나면서도 간신히 막아 냈지만 그녀의 손은 충격 때문에 반쯤은 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상대는 겨우 한 손으로 휘둘렀을 뿐인데 그 충격은 양손 검의 충격 이상이었던 것이다.

“제법이군. 내 공격을 막아 내다니. 그 검 꽤 좋은 것인 모양이지?”

둘이서 검을 뽑아 들고 싸우고 있는데도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음식을 먹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둘의 격돌은 엄청났다. 안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응접 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타이탄을 불러내고 있었고, 아직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인물들도 별궁 내에서 타이탄을 꺼내고 있었다. 별궁이라고 하지만 크루마의 재력을 과시하듯 엄청나게 크게 지어져 있었기에 그 안에서 타이탄을 끄집어내도 머리가 부딪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상시처럼 과시용으로 꺼내 놓는 것과는 달리 이 안에서 전투를 벌인다면 완전히 이 별궁도 박살이 날 것이 분명했다.

금빛 검광이 대기를 가를 때마다 미네르바를 도우려고 달려들었던 기사들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이때 벽을 뚫고 타이탄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워낙 좁은 장소에 아군들과 적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서 섣불리 손을 못 쓰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세 명의 기사를 간단하게 해치우고 자신을 향해 달려 들어오는 다크를 향해 외쳤다.

“잠깐! 구원군을 주겠어.”

다크는 또 다른 기사를 베려고 하다가 순간적으로 멈춘 후 뒤로 빠졌다. 미네르바의 ‘잠깐’이라는 말 때문에 기사들도 분노의 눈빛을 뿜어내고는 있었지만 미네르 바의 뒤편으로 슬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에 구멍을 뚫고 들어왔던 타이탄도 천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얼마나 줄 수 있어?”

미네르바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물어왔다.

“얼마나 필요해?”

“5개 사단. 아마 그 정도면 아쉬운 대로 될 거라고 토지에르가 그러더군.”

“겨우 5개 사단을 빌려 달라고 여기서 목숨을 건 모험을 한거야?”

“호오…, 이제야 겨우라는 말이 나오는군. 사람이 5만 명인데 말이야. 그리고 나는 절대로 목숨을 걸지는 않아.”

미네르바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기를 빨리 치워라. 그리고 부상자들을 빨리 신관에게로 보내.”

그제야 기사들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의 동료들을 업고 신관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대충 끝나자 그녀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물러가라.”

부하들이 주춤주춤 자리를 피하고 나자 미네르바는 자신이 앉았던 피 묻은 의자를 치워 버린 후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일단 내 부하들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해. 내일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1만 명씩, 5일에 걸쳐 보내 주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이쪽도 여유 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아이, 아버지. 내 술 마시지 말아요. 독약이 들어있다니까요!”

모처럼 멋진 식사를 끝낸 아르티어스는 이제 찻잔에다가 다크가 마시던 술을 한 잔 가득 부은 후 마시다가 뿜어낸 후 투덜거렸다.

“푸웁! 또 독약이냐? 그런데 너는 왜 멀쩡한 거야?”

아르티어스가 뿜어낸 술은 미네르바의 옆으로 지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다크는 미네르바가 조금 더 옆쪽에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단 지나간 일이고 자신은 아버지에게 질문을 받고 있었다.

“나야 이따위 독약에 어떻게 될 정도는 아니죠. 하지만 아버지는 다르잖아요.”

“제기랄, 그래 잘난 아들 둬서 오늘 하루에 두 번이나 독약을 먹을 뻔하는군.”

아르티어스는 투덜거리면서 이번에는 미네르바의 눈을 의식한 때문인지 용언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재빨리 주문을 외운 후 시동어를 외쳤다.

“카운터액팅 포이즌(Counteracting Poison)!”

마법의 대상이었던 찻잔과 술병에서 희뿌연 푸른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일단 해독이 끝났다고 생각한 아르티어스는 방금 전의 그 예의에 벗어난 행동을 만회 하려는 듯 찻잔을 들고 우아하게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다크는 생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말이었어요.”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확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미네르바도 키득거렸다. 아르티어스가 노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크는 뻔뻔스레 그걸 무시하며 미네르바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보답은 바라지 마. 5만 명의 증원군은 여기 황궁을 박살 내는 대신 받은 것뿐이니까.”

“훗! 그게 가능했을까? 여기에 모인 기사만 몇 명인 줄 알아?”

“물론 알고 있지. 일단 일은 잘되었으니 이제 돌아가는 것이 좋겠지.”

“뭐야? 벌써 가는 거야?”

아직 찻잔의 술을 반도 못 마신 아르티어스가 재빨리 그것을 입속에 털어 넣으며 투덜거리자, 다크는 이 철없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그럼 여기에 얼마나 더 있다가 갈 생각이었어요? 덕분에 맛있는 밥을 먹었잖아요. 빨리 가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