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25화 – 바람과 같은 여자 (9권 끝)

바람과 같은 여자

갑자기 크로아 공작이 시체 일곱 구와 함께 황궁의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듣고 토지에르가 달려왔을 때, 공작은 한참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공작의 앞에 놓인 ‘레드 드래곤’이 거의 반 이상 없어졌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빈 병이 놓여 있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챈 토지에르는 무슨 일인가 있다는 것을 직감 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알고 있는 크로아 공작은 이렇듯 대낮에 과음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옵니다, 공작 전하. 그런데 어찌하여 대낮부터 술을…….”

공작은 손짓으로 토지에르에게 의자를 권했지만 별로 유쾌한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이제야 나타났군. 나는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하다네. 그 이유를 아는가?”

“예? 그, 글쎄요.”

“오늘 있었던 일은 들었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기에 토지에르는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기로 공작이 저렇듯 술을 과하게 마실 정도로 나쁜 일이 벌어 진 것은 아니었다.

“예, 이리로 달려오기 전에 통신실에서 온 전갈을 받았사옵니다. 타이탄들끼리 전투가 있었다구요.”

“그래. 전사(戰死) 일곱 명, 아니 여섯 명! 웃기는 일이지.”

토지에르는 도저히 공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일곱 명의 전사자를 내긴 했지만, 사실상 타이탄의 손실은 한 대도 없었기에 그렇게 큰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친히 일곱 구의 시신들을 가지고 온 공작이 왜 여섯 명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내가 아끼던 부하들이 여섯 명이나 죽었네. 그건 들었겠지?”

“예, 들었사옵니다.”

“부하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놈들은 쓸데없는 짓을 했어. 쓸데없는 전투를 벌였단 말일세.”

크로아 공작이 술주정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토지에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런가요?”

“놈들은 애송이 마법사를 지키기 위해, 그 빌어먹을 놈이 통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은 거지. 그동안 그 지옥에 떨어질 마법사 녀석 은 뭐 하고 있었는지 아나?”

토지에르야 그곳에 가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토지에르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공작은 술을 한 잔 따라서 입속에 털어 넣은 후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개자식은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었어. 그 정도라면 통신 마법 따위는 시도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겠지. 물론, 부하들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네. 그따위 것 말해 봐야 별 소용없는 거니까.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겁에 질려서 벌벌 떨면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뒤에서 찌르는 칼에 맞아서 뒈진 거였지. 그런데 내가 아끼 던 부하들은 그 쓰레기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던진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이제야 공작이 왜 술을 마시고 있었는지 이해한 토지에르가 재빨리 대답했다.

“예, 전하.”

일단 토지에르가 알았다고 대답하자, 공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유격 기사단에 5사이클급 마법사들을 배치해라.”

“전하 그것은…….?”

“물론 새로운 타이탄을 좀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뛰어난 부하들과 타이탄들을 잃어야 한다면 나는 아예 타이탄 생산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마법사를 전장으로 돌릴 거야. 통신 마법으로 좌표 한마디만 말했어도 이번 전투는 이길 수 있었어. 그리고 쓸데없이 부하들이 죽을 필요도 없었고 말이야.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나?”

“알겠사옵니다, 전하.”

토지에르가 수긍하고 나오자 공작도 조금 누그러져서 말했다.

“5사이클이 힘들다면 4사이클이라도 좋으니까 새파란 애송이들 말고 좀 더 경험 있는 마법사를 보내 줘. 크로나사 평원은 너무 넓어. 그 넓은 면적을 커버하려면 통신이 잘되어야 해. 이런 식으로 지역적인 전투에서 병력의 열세가 계속된다면 나는 폐하께 크로나사를 포기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릴 수밖에 없다네. 이길 수도 없 는 전쟁을 계속 해 봐야 나중에는 본국까지 위태로워져.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겠나?”

“예, 전하.”

“방금 내가 했던 말은 자네만 알고 있게. 우리 크라레스 군대에 겁쟁이가 있어서도 안 되고 나와서도 안 되네. 알겠나?”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될 수 있으면 빨리 마법사들을 전선에 보내 줘.”

“예, 전하.”

“좋았어, 마법진을 준비해 주게. 전선으로 돌아갈 거야.”

“전하, 오늘은 여기서 쉬시고 내일 돌아가시옵소서. 그리고 기쁜 소식이 도착해 있사옵니다.”

“뭔가?”

“로니에르 전하께서 크루마로부터 5개 사단을 받아 내셨사옵니다. 조금 전에 크루마로부터 제1진 1만 명이 도착했사옵니다.”

“그래? 좋은 소식이군. 그 녀석들 모두 전방으로 보내 버려. 전방에서 며칠 시달려 보면 우리들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로니에르 공작은?” 공작의 물음에 토지에르는 난처하다는 듯 어물쩡 대답했다.

“예? 저, 그게…. 그들의 말로는 어제 이쪽을 향해 떠나셨다고 하온데, 행방이 묘연하옵니다.”

토지에르의 말에 공작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정말 바람 같은 존재라고 느꼈던 것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또 어디에도 구속 받기를 거부하는 바 람.

“훗, 또 어디 가서 놀고 있겠지. 정말이지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아가씨니까 말이야. 하기야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 니 그건 당연한 것인지도 몰라. 아마 며칠 있으면 올 테니 걱정하지 말게. 지금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그녀가 나설 만한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그녀가 필요 없어.”

“예, 전하.”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다. 그것을 보고 토지에르가 황급히 공작을 부축하며 밖을 보고 외쳤다.

“경비병!”

“예, 각하!”

“공작 전하를 방까지 모셔라. 많이 취하신 듯하다.”

“예, 각하.”

토지에르는 공작이 떠난 후 공작이 마시던 빈 술잔에다가 술을 채워 넣고는 냄새를 쓱 맡아 본 후에 입속에 털어 넣었다. 화끈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밑으로 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께서는 바람이라고 하셨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을 도와야 할 겁니다. 그녀를 제어하기 위 한 모든 것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그녀가 나를 죽이려고 들겠지만……. 흐흐흐, 그녀는 절대로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지요. 자, 그녀를 위 해서 건배!”

『<묵향10 : 외전-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