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3화 – 나는 약속을 지켰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다크는 한가로이 앉아서 자신이 매우 즐기는 술인 ‘레드 드래곤’을 마시고 있었다. 잔이 비면 옆에 서 있는 기사가 재빨리 채워 넣고 있었다. 이때, 미네르바가 땀 에 후줄근하게 젖은 채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그녀는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는 다크를 보고 더욱 열불이 치솟는지 검을 뽑아 들고는 다크를 향해 겨누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왜 키에리를 살려 보낸 거지? 중간에 불청객들이 끼어들었다고 하지만 너는 충분히 그럴 실력이 있었어. 추격전에 참가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키에리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아냐?”

그때의 상황은 미네르바가 따질 만도 했다. 다크의 실력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 주는 키에리와의 격투를 시종 유리하게 전개해 나가다가 드디어는 헬 프로네의 왼쪽 깊숙한 곳에 검상을 만들었다. 그 정도 검상이라면 장갑판은 물론이고, 본체를 거쳐 그 안에 타고 있던 키에리에게까지 검상을 입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미네르바는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단 한 번만 더 검을 들이대면 키에리의 목숨은 끝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세 대의 붉은색 타이탄이 나타났고, 황당하게도 다크는 그들과의 전투를 포기해 버렸다. 총사령관이 중상을 입은 관계로 이때를 기점으로 코린트 기 사단은 후퇴를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가 후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미네르바는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할 수 없었다. 붉은색 타이탄들과 흑기사들을 중심으로 크루마 군의 추격을 저지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매우 질서 있는 후퇴였기 때문이다.

원래가 전과가 가장 극대화되는 시점이 정면 대결이 아닌 후퇴하는 적에 대한 추격전이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강력한 방어진을 형성하면서 후퇴하는 적들을 향 해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했다가 상대방 붉은색 타이탄 두 대한테 걸려서 목숨까지 잃을 뻔한 후 열이 뻗쳐서 돌아온 것이다.

다크는 ‘레드 드래곤’을 다시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검을 내려놔. 죽고 싶지 않다면..

미네르바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그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힘과 광기가 그녀의 눈동자에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황급히 검을 집어넣었다. 상대는 키에리도 당할 수 없었던 검의 고수. 타이탄이라도 가져다가 기습 공격을 하지 않고서는 없앨 가능성 이 없었다. 미네르바가 검을 집어넣은 후에야 상대의 눈동자는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크는 또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신 후 약간 비웃는 듯한 어 조로 말했다.

“훗, 나는 분명히 약속을 지켰다. 너는 분명히 상대를 밀어붙일 때까지 키에리를 막아만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 또한 약속했었지. 키에리를 막아 주겠다고 말이야. 틀렸나?”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나는 막아 줬어. 나로서 할 일은 다 한 거야. 키에리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약속의 내용에는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

“그렇게 억지부리지 마. 그 녀석이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위협이 돼. 앞으로 세울 모든 작전에 키에리의 전투력이 포함되어야 하니까.”

그 말에 다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자, 자……. 그 녀석을 내가 살려 주고 싶어서 살려 준 것은 아니었어. 너도 봤겠지만 격전의 와중에 그 시뻘건 놈들만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마 죽일 수 있었겠지. 너도 상대해 봤다면 그 녀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텐데?”

미네르바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두 대의 적색 타이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방의 실력도……. 그때 미네르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그건 알아. 둘 다 마스터급. 그리고 한 명은 거의 마스터에 근접한 인물이었지.”

“그런 패거리들을 뚫고 들어가서 키에리를 죽이라는 것은 나한테 조금 무리한 부탁이 아닐까?”

물론 상대의 말을 믿을 정도로 미네르바는 순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찬찬히 상대의 눈을 쏘아봤다. 맑고 투명한 눈, 도저히 무술을 익혔다는 것 자체 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해 보이는 눈이었다. 일단 상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후퇴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괜히 동맹국끼리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 는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하지.”

“그 사과는 받아들이지.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었어. 키에리를 위해 건배.”

또다시 술을 입속에 털어 넣고 있는 소녀를 보며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서둘러 말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나는 이만 가 볼 데가 있어서 말이야.”

“어디 가는데?”

“왜 붉은색 타이탄들이 우리 쪽 진영에서 뛰어나왔는지 알아 봐야지.”

총총히 사라지는 미네르바의 뒷모습을 보며, 다크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미네르바의 뒷모습을 향해 잔을 살짝 쳐들면서 말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수확도 함께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꿀꺽!”

다크가 빈 잔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기사는 또다시 잔을 채워 넣고 있었다. 그런 기사를 지긋이 바라보며 다크가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하.”

“이번 전쟁의 끝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소신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모를지도 모르지. 술수가 이렇듯 판을 치니 뒤 수를 읽기가 참 힘드니까……. 통신 마법진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옛, 전하.”

잠시 후 그 기사는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하러 달려왔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 천천히 일어서서 술이라고는 전혀 한 방울도 마신 것 같지 않은 걸음걸이로 막사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소녀가 이 자리에 앉아서 마신 술은 거의 한 병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오, 까만 토끼. 웬일인가? 자네가 통신에 다 나오고 말이야.”

토지에르는 싹싹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전하. 일은 어떻게 되셨사옵니까?”

“뭐 어떻게 되기는…, 키에리는 지금쯤 상처 입은 야수가 되어 있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승리하셨군요.”

“당연히.”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축하할 필요는 없어. 원래 저런 녀석은 죽여 버려야 개운한데 말이야.”

“잘하셨사옵니다. 제가 드린 부탁을 잊어버리지 않으셨군요.”

토지에르는 미소를 띠고 말했지만 다크의 대꾸는 매우 퉁명스러웠다.

“뭐, 마지막 순간에 운이 좋아서 떠오른 것뿐이야. 그때 잠시 멈칫하니까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들이 달려들어서 녀석을 구출해 갔지. 그건 그렇고, 전황은?”

“예, 크로아 공작 전하께서는 전선을 돌파하고 맹진격 중이십니다. 전황이 매우 순조롭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녀석들한테는 지금 마스터가 세 명에 키에리까지 있어. 그런데 키에리를 살려 뒀으니 루빈스키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을까?”

토지에르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신다면.”

“호, 그런 계획이었군.”

“예,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빨리 회군하시옵소서.”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