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4화 –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

전 세계는 의외의 사태에 경악했다. 처음부터 크루마가 코린트와의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가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 때문에 가장 놀랐던 것은 정작 크루마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크루마는 동맹국들을 향해서는 이길 수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막대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감언이설로 그들을 꼬드긴 것일 뿐, 처음부터 크루마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크루마의 수뇌부들은 코린트의 선발 공격대를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 낸 후, 지루한 장기전으로 몰고 가다가 휴전 협정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코린트가 미란 국 가 연합 전선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전쟁 때문에 진이 빠져서 휴전 협정에 서명만 해 준다면 크루마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휴전이 가능하려면 먼저 사력을 다해서 1차 공격대를 막아 내든지, 아니면 그들을 격퇴해야만 했다. 물론 크루마로서도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은 분명했다. 코린 트의 근위기사단과 금십자, 은십자 기사단을 막는 데 희생이 적다면 오히려 그게 사기(詐欺)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런 후에 코린트가 전쟁에 지칠 때 쯤, 혹은 의외의 피해에 경악해서 이번 전쟁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권력 투쟁의 암투에서 밀려 버린다면, 그때부터 슬쩍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휴전으로 몰고 가면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1차 공격진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데 있었다. 그것도 크루마가 생각하지 못했던 대승을 거뒀다. 코린트의 기사단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 고는 전선에서 재빨리 후퇴하여 쟈크렌 요새로 향했고, 이동 속도가 떨어지는 군대들은 크루마 기사단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코린트 기사단의 패퇴가 던지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제 코린트는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고, 최전선에서의 패퇴 덕분에 잘못하면 쟈코니아 지방의 일부까지 잃을 가능성마저 안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예정에는 없지만 슬며시 탐욕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막아 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코린 트 땅의 일부라도 뺏으려고 들게 되는 것이다.

코린트는 편의상 쟈코니아, 코린토비아, 스웨인, 크로나사라는 거대한 네 개의 지구로 나뉘어져서 관리되고 있었다. 그 네 지역의 경계는 강이거나 산맥이었기에 국경선으로 삼기에도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크루마로서는 그 네 개의 땅덩어리 중에서 최소한 크루마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 쟈코니아 평원만이라도 차지하 려고 드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예상을 뒤엎고 크루마가 코린트의 대군을 막아 낸 것은 둘째 치고, 이제 입장이 뒤바뀌어 코린트 내로 진격해 들어갈 준비를 시작하자 곤란한 입장에 처하 게 된 것은 미란 국가 연합이었다. 미란 국가 연합이 양 대국의 전쟁에서 크루마의 손을 들어 준 이유도 지금의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뿐, 절대로 양 국의 균형이 파괴되기를 원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국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그사이에 위치한 미란 국가 연합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도 이제 손을 떼는 것에 찬성입니다.”

지그프리트 데 가므 3세는 원탁에 둘러앉은 왕들을 쭉 둘러본 후 예상대로라는 듯 말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본인 또한 더 이상 크루마를 도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오. 문제는 크루마가 본국에서 발을 빼는 것을 용납해 주느냐 하는 것인 “데…….”

“용납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본국의 피해는 막심합니다. 주 전장이 되어 버린 가므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뛰어다녔으니 엉망진창이 된 상태고, 또 전화에 휩쓸려서 국민들의 피해도 엄청납니다. 그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본국 기사단이 너무나 약화되었다는 것이죠. 라이오네 기사단이 전멸했고, 또 중앙 기사단은 보유 타이탄을 반 이상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전후 복구 사업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현실을 크루마에 인지시켜야만 하죠.”

“그건 자네 말이 맞아. 양 대국의 전쟁에 끼여 싸웠으니 그 정도 피해는 당연하겠지. 또다시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을 대량으로 구입해야겠군.”

“노획한 타이탄 중에서 저희들 몫으로 떨어진 것들과, 고물이 된 본국 타이탄들을 해체한다면 라이온 20대와 타이거 30대 정도는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알 카사스에 주문을 하긴 했는데, 현금 인도 조건을 요구하더군요. 그들도 이번 전쟁이 예상외로 풀려가기 시작하자 매우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큰일이야. 만약 일이 잘못되어 크루마가 쟈코니아 지방을 차지하고 앉아 버린다면 우리들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는 거지. 크루마가 원정에서 패배한 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의장, 동맹 협약을 좀 더 철저히 해 두고, 크루마와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가므 의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좋겠군. 동맹국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지. 자네가 힘 좀 써 주겠나?”

“예, 좋은 소식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아, 부탁하겠네. 그리고 크루마가 본국에 마수를 뻗을 우려도 있으니 그 대비책도 생각해야 하네. 아르곤과 동맹을 맺는 것은 어떨까?”

“아르곤은 곤란합니다. 원래 아르곤은 동맹을 맺는 조건에 자국의 크로노스교를 포교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꼭 집어넣습니다. 그 때문에 아르곤과 동맹을 맺었 던 세 개의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종교를 악용하여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반목을 부추겨 내전이 발생하게 한 후 동맹국의 입장에서 내전을 수 습해 준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투입, 결국은 그들을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런 전례가 있는 만큼 아르곤과의 동맹은 절대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크라레스는 어떨까? 이번 전쟁에서 예상외의 힘을 발휘한 크라레스와 외교적으로 가까워진다면 큰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크라레스도 가까운 동맹국 이 거의 없으니 말이지. 그들이 본국과의 동맹을 받아들인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크라레스는 잃었던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본국에 매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이제부터 전 세계를 코린트 혼자서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야흐로 한동안은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가 도래하겠죠.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하려면 뛰어난 우방이 많을수

록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부로는 힘을 키워야 할 때죠.”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키에리드 발렌시아드 대공. 대 제국 코린트가 자랑하던 최고의 검객이었지만 지금은 출혈 과다로 인해 의식조차 잃은 채 죽은 듯이 누 워 있었다. 이 위대한 검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깊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다행히 멈춰 있었다. 처음 키에리의 상처를 직접 봤던 노마법사에게 상대 타 이탄의 검이 조금만 더 깊이 들어왔다면 아마도 허리가 두 토막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깊은 검상이었다. 상처 위에 놓여 있던 노마법사의 빛 나던 손이 천천히 빛을 잃어가자 초조한 안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제임스는 재빨리 노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는 상대의 정신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서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은 어떠시냐?”

“예,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하지만 치료가 좀 늦었기에 회복하시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체력입니다. 만약 보통 기사였다면 생 명을 건지기 힘들었을 겁니다.”

상대의 말에 제임스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수고했네.”

“아닙니다. 저로서는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강렬한 치료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노마법사의 얼굴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는 거의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전장을 이 탈하기 위해 무리하게 마나까지 끌어올렸고, 어느 정도 안전한 지역까지 탈출했을 때는 그야말로 생명이 경각에 이른 상태였었다.

“이제 딴 사람에게 맡기고 좀 쉬게나. 너무 피곤해 보이는군.”

“예.”

제임스는 문밖으로 나서는 노마법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까미유를 바라봤다. 까미유는 방금 전에 들었던 믿어지지 않는 소식 때문인지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임스는 천천히 까미유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제대로 위로를 못 해 줬군. 정말 안 됐네.”

까미유는 창밖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하지만 자네 어머님의 시신은 지금 코린티아시로 운구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믿어지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겠지. 죽은 사람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네. 아무리 마법이란 것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아니지, 되살릴 방법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는 깜짝 놀란 듯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게. 고인(故人)은 보내 드리는 것이 예의야. 흑마법에 의존해서 고인의 영혼을 붙잡는 것은 오히려 그분을 더욱 욕되게 하는 짓이지.”

까미유는 창문틀을 두들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세게 두들긴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벽이 흔들렸고, 나무 장식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정말 엄청난 힘이었다. “제기랄!”

“자네 어머님의 복수는 아버님께서 하셨다고 했으니 아마도 편안하게 천국으로 가셨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 하겠지. 자네한테 부탁이 하나 있네.”

“뭔가?”

제임스가 부드럽게 묻자, 까미유는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만이라도 나를 좀 혼자 있게 해 줄 수 없겠나?”

지금은 혼자 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임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네.”

제임스는 까미유에게 물러서면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키에리를 바라봤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 꼴이 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데, 까미유는 아마도 한층 더할 것이 분명했다. 제임스는 천천히 방을 나서서 현재 작전실로 쓰이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작전실은 지방 영주가 사용하던 요새(要塞)였기에 제법 넓었다. 각 곳에는 영주의 사병들이 배치되어 길 안내를 하고 있었고, 많은 수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군데 군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주력 기사단은 쟈크렌 요새로 후퇴했지만 전장에서 상당히 이탈해 있는 이곳에 일부가 남아서 생존한 기사들을 구출하고 있는 중 이었다. 이들이 자리 잡은 요새는 전술상 별로 중요한 요충지도 아니었기에 한동안은 크루마 쪽에서 신경을 쓰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녀석들이 뿔뿔이 후퇴하는 코 린트의 군대들을 사냥하고 있는 그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살아 있는 기사나 마법사들을 구출해 내야 했다.

제임스가 작전실에 들어서자 한 마법사가 그를 보더니 재빨리 다가와서 말했다.

“최신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각하.”

“뭔가?”

“예, 놈들이 파괴된 타이탄에서 끌어 모은 본국 오너들이 약 40여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외에 포로로 사로잡은 기사들이나 마법사들까지 합하면 1백여 명이 넘

고요.”

부하의 말에 제임스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답했다.

“전과가 대단하군. 그래 처리는?”

“일단 지금은 여력이 없으니까 가둬 뒀다가 나중에 엘프리안으로 보내 세뇌한다고 하더군요.”

‘세뇌’라는 말에 경악한 제임스가 거의 부르짖듯 말했다.

“세뇌라고? 그건 국제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사악한 짓이야.”

국제법은 코린트, 크루마, 아르곤, 알카사스, 타이렌 제국의 대표자들이 모여 오랜 시간 협의하여 제작한 법규였다. 그렇기에 국제법은 약소국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이 아닌, 강대국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지독한 악법이었다. 물론 몇몇 나라만이 모여 쑤군거려서 만든 것이었기에 꼭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약소국에 서 그걸 어겼을 때 주위의 강대국이 그 나라를 침략하는 데 매우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예, 그렇죠. 하지만 크루마로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1백여 명에 이르는 기사나 마법사들을 순식간에 키워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한 반 년 정도만 공을 들이면 세뇌가 가능한데 녀석들이 그걸 포기하겠습니까? 그것도 오너급이 40여 명인데.”

“그들이 갇혀 있는 곳을 철저히 알아 봐라.”

“옛, 후작 각하.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쪽으로 와서 보십시오.”

“뭔데 그러나?”

마법사는 넓게 펼쳐져 있는 지도로 제임스를 안내했다. 그 지도 위에는 깃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는데, 그 대부분에는 크루마군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 고 그사이에 외로이 포위된 형국으로 남아 있는 붉은색 깃발이 버티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제1근위대를 중심으로 탈출에 성공한 기사단들을 호위하여 쟈크렌 요새에서 재편성에 들어가 있었고, 이곳에 남은 것은 제2근위대의 일부와 제3근위대였다. 물론 이들 모두를 제3근위대장인 제임스가 지휘하고 있었기에 제3근위 대를 뜻하는 붉은색 깃발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뭔가? 지도 상으로는 별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제임스의 의문에 마법사는 제임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저 밑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크라레스가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전에 침공을 개시한 모양인데, 이쪽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중요한 때였기에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지금에야 알려 오신 겁니다.”

제임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규모는?”

“3개 기사단, 약 1백여 대입니다. 침공군의 좌, 우측에는 검은색 타이탄들로 이루어진 유령 문장을 붙인 기사단, 그리고 중앙에는 근위 기사단, 후방에는 콜렌 기 사단이 뒤를 받치는 형식입니다. 각 기사단 간의 거리는 30킬로미터, 침공군 총규모는 3개 기사단, 2개 중장보병사단, 4개 경장 보병사단, 2개 기병 사단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규모는 아니군.”

“예, 그런데 문제는 본국 동십자 기사단 제5분대를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궤멸시키고 돌파했다는 것이죠. 그들도 상당한 정예 부대를 보낸 모양인데, 지금 현 시 점에서는 그들을 저지할 만큼 강력한 기사단을 지원하기 어렵습니다. 크로나사의 중앙 도시 크라레인시에 동십자 기사단과 지방 수비대가 집결 중이지만 과연 그 들을 막아 낼 수 있을지.

“로체스터 공작 전하로부터의 지시는?”

“예, 약소국의 침략 따위에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맡은 바 임무를 빨리 처리하고 합류하라는 전갈이셨습니다.”

이 순간 제임스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모든 것에 ‘크라레스’가 걸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크 크라이드, 아니 다크 로니에르라는 그 소녀도……. 순간 그 소녀가 크라레스에서 파견된 기사단 사령관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 지급(至急)으로 로체스터 공작 전하를 불러라.”

“예?”

“빨리 해.”

“하지만…, 여기서 통신 마법을 쓰면 잘못하면 포착당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쪽에서 걸어 온 것을 받는 형식이었기에 상관없었습니다만, 이쪽에서 저쪽 을 부른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정기 연락 시간까지 기다리심이 어떻겠습니까?”

“정기 연락 시간이 언제지?”

“50분 남았습니다. 한 시간 단위로 연락을 취하고 있기에…….”

사뿐한 걸음걸이로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를 보며 미네르바는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걸음걸이를 보니 별로 마시지는 않은 모양이군.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 왔어.”

“무슨 일인데?”

“우리 쪽에서 튀어나온 빨간색 타이탄. 본국에 연락했더니 크라레스에서 너를 추격해 온 녀석들이더군.”

“나를 추격해 왔다고?”

“응, 그 녀석들 뻔뻔스럽게도 살라만더 기사단원인 척하면서 모든 걸 넘겼던 모양이야. 크라레스와 본국의 동맹은 1급 비밀이었기에 모두들 대충 조사하고 넘겼

었던 모양인데……. 그 녀석들이 코린트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커 코린트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여력이 남아 있다면 크라레스는 끝장이야.”

본국이 끝장난다는 말을 하는데도 다크의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상대의 평온한 얼굴이 미네르바의 신경을 건드렸 다.

“아아…, 그 얘기였군. 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왔지.”

“무슨?”

“나는 지금 본국으로 돌아가야 해. 작별 인사를 하러 왔지.”

“잠깐, 코린트가 만약 크라레스가 이쪽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쪽으로 신경 쓰지 못하게 여기서 전투를 크게 벌이면 돼. 돌아가서 본국을 지킬 필요는 없다구.”

“지키는 게 아니라 싸우러 가는 거야. 이미 본국의 기사단이 크로나사 평원을 가로질러 진격 중이거든.”

“잠깐, 코린트라는 적을 앞에 두고 두 패로 나누어서 작전을 벌이겠다는 것인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있어. 아무리 이번에 패배했다고 하더 라도 코린트의 저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

“그건 너희들 사정이겠지. 내가 있는 한 본국이 패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 그래지에트 황제는 지금 국가 총동원령을 내렸어. 그런 상황에서 공작이나 되는 내가 빠 질 수는 없지.”

상대가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자 미네르바는 깊숙이 숨겨두고 있던 최후의 카드를 꺼내 놨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군. 크라레스 황태자가 우리나라에 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미네르바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아직도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별 감흥 없이 대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미네르바는 좀 더 강도 있게, 상대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는……. 크라레스 황태자가 몸성히 본국에 돌아가기를 바라나?”

다크는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뭐, 황태자가 크루마에서 객사(客死)하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상대의 말에 오히려 미네르바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상관없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뭐, 황제한테는 아들이 하나 더 있으니까 대를 잇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설혹 둘 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황제 노릇을 할 사람은 아마도 수십 명은 줄을 서 있 을 거야. 원래 아무나 앉혀 놓으면 황제 노릇은 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이제 대답이 되었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던 미네르바는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제기랄! 너는 기사가 아니야. 너 따위는 기사가 될 자격도 없어.”

“호호호…, 물론이지. 나는 처음부터 기사 따위 될 생각도 없었어.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너도 마찬가지라는 거지. 그럼 잘 있으라구. 건투를 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