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8화 – 풍전등화와 같은 중양표국의 운명
풍전등화와 같은 중양표국의 운명
쓰러져 있는 당철영의 옆에는 부서진 물통과 부러진 지겟대만이 처량하게 놓여 있었다.
이제 해는 산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고 어둠의 천이 밤하늘에 깔리기 시작하면서,
차가운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헉헉, 사부님, 큰일났습니다.”
“웬일이냐, 소란스럽게.”
남궁상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다급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헉헉, 당삼(唐三)이가, 당삼이가…….”
“당삼이가 뭐? 당삼이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냐, 숨 넘어가겠다.”
“그, 당삼이 아버지는 괜찮지만 지금 당삼이 본인이 거의 돌아가실 뻔하고 있는 중입니다. 꼭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모습입니다.”
“그거 농담이지?”
에이, 설마 하는 마음에 미소 띄운 얼굴로 비류연이 물었다. 하지만 그의 오른쪽 눈썹 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담입니다.”
남궁상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얼굴 표정이 ‘이건 장난이 아니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휘익.”
바람을 탄 비호처럼 비류연이 합숙소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허겁지겁 남궁상이 쫓아오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냐?”
다급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물었다.
“예, 녀석을 찾으러 갔던 저하고 영호가 산 중턱에 쓰러져 있던 당삼이를 발견하고 업고 온 것입니다.”
현운이 옆에 서서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 여자 애들이 당삼을 둘러싸고 간호하고 있는 중이었다. 온몸에 피 칠을 하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 며 칠 전에 죽은 시체가 친구 하자고 해도 하등의 이상이 없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맞고 쓰러져 있었다고?”
“예.”
“그럼 졌다는 거잖아?”
확인하듯이 비류연이 물었다.
“예.”
“내 제자란 놈이 남하고 싸워서 져!”
비류연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돌로 되어 있는 바닥이 땅 꺼지는 소리와 함께 움푹 파여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이었다.
“주위의 흔적으로 볼 때 열 명 이상의 무리가 떼거지로 공격한 것 같습니다. 족적으로 보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대단한 수준의 인물들은 아니었지만, 당삼은 오후 훈련 때문에 매우 지쳐 있었던 상태여서 다수의 동시다발적 공격을 미처 막아 내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태로 보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집단 구타를 한 모양 입니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천행입니다. 마지막 일격은 가하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살았고요.”
지금 현운에게 맡겨진 중차대한 중요 임무는 사부의 화를 일부나마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무슨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긴장된 사태였다. “…원을…….”
“예?”
“의원를 불러!”
비류연이 밤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제자가 맞고 들어왔다. 아니 물 뜨러 갔다가 소식이 없자 찾으려고 제자들을 보냈더니 산 중턱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것을 허둥지둥 옮겨와 의원을 부르고 지금
치료를 하는 중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자기 이름 밑에 있는 제자였다. 그런데 자기에게 맡겨진 제자 중 하나가 일하러 나갔다가 집단 구타를 당한 다음 돌아와 쓰러 진 후 지금 의원의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전신에 타박상과 약간의 검상을 입은 것을 보니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빈 자국이 역력했다. 하나 하나 그 자취가 또렷 하다는 말이었다.
부러진 곳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기적이었다. 금이 가는 한이 있더라도 부러진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묵환을 차고 있어서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고 는 해도 떨거지들한테 당할 녀석이 아니었다. 솜씨 꽤나 있는 무사에게 당한 것 같았다. 물론 그래 봤자 당삼이보다야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 놈이었겠지만, 분명히 싸우다가 당삼이가 잠깐 방심하는 틈에 뒤통수를 갈겨 쓰러지게 한 다음, 집단 구타를 한 게 분명했다. 쥐고 있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제자를 만질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오직 사부밖에 없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근데 딴 놈이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 건방지게 제자를 만졌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 다.
‘감히 어떤 놈이야. 내 제자를 만져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비류연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스르륵.”
방문이 열리면서 용하다는 서 의원과 옆에서 조수 역할을 하던 현운이 걸어나왔다. 방 안에서는 약향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당삼이는 온몸에 붕대를 둘둘 만 채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어떻소?”
비류연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 의원도 역시 질세라 나직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 치료비가 좀 많이 나오겠는데요.”
“할인은?”
비류연이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안 됩니다.”
“할부는?”
“역시 안 됩니다.”
“외상은?”
“더욱 더 안 됩니다.”
“조금만 깎아 주면 안 돼? 고객을 향한 밝은 미소와 고객에 대한 다양한 편의 제공은 잠재적 고객과의 지속적인 거래를 통한 밝은 미래와 이익을 보장한다고!” “절대로 안 됩니다. 단돈 일 문이라도 절대로!”
서의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자신도 밥 먹자고 하는 일인데, 함부로 치료비를 깎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번 깎아 주면 맛 을 들여 다음에도 또 깎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지금은 단호해질 필요가 있었다. 서 의원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럼, 받아야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으스러지게 주먹을 움켜쥐며 비류연이 말했다. 온몸에서 살기가 일렁거렸다.
“예?”
서의원의 조심스런 소견과 단호한 태도가 비류연의 다음 행동을 결정 지었다. 비류연의 입장으로 볼 때,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댁이 돈을 좀 많이 내야 할 필요성이 있겠소.”
라는 심오한 뜻을 품은 서 의원의 이 말 한마디가 한 문파의 운명을 좌우하는 언사가 될 줄은, 이때의 서 의원으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웠으리라.
다음 다음 날 오전, 아침 식사 후 아미산 이름 있는 봉우리에 위치한 천무학관 합숙소 앞마당. 이제는 당삼도 차도가 보이는지 혼미하나마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 다. 탁자의 중앙에 앉아 있던 노인이 물었다.
“중국이 확실하겠지.”
“예.”
살이 통통한 청년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강장한이라고?”
“예, 헛소리처럼 혼미한 의식 속에서도 중양표국과 강장한이라는 놈의 이름을 외치는 것을 보니 그 놈들 짓인 게 분명합니다. 실력으로 보아 습격한 놈들 중 대장 격이니 대표두쯤 되겠지요. 하지만 총표두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조그만 일반 표국에서라면 모르지만 중양표국은 이름 있는 거대 표국이니까요.”
그 놈들, 살이 통통한 청년 금영호는 방금 ‘그 놈’이라는 단수형 대신 ‘그 놈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였다. 이 발언은 중양표국도 강장한이라는 놈과 한 통속이 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말이었다. ‘습격’이라는 단어 또한 지금 노인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비류연의 귀를 심히 거슬리게 하는 말이었다.
“이빨은?”
“갈고 있었습니다.”
“그럼 확실하겠군.”
다시 노인이 금영호를 향해서가 아니라 탁자에 앉아 있던 당삼이를 뺀 15명 모두를 향해 물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준비는?”
“완료입니다.”
모두의 손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목도가 쥐여져 있었다.
“갈까?”
다시 노인이 물었다.
“예!”
16명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인원의 무리들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려가고 있는 마을에는 중양표국이라는 역시 결코 작지 않은 표국이 자리잡고 있 었다.
“여기 맞지?”
“예.”
“하긴 번듯하게 여기는 ‘국표양중’이라고 편액에 적혀 있잖아!”
“중양표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겁니다.”
친절하게 현운이 비류연의 실수를 정정해 주었다. 이 당시 중국의 편액은 모두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뜻이 통하도록 쓰여 있었다. 그런 걸 비류연은 좌측 방향에 서 우측으로 편액을 읽었던 것이다.
“아무렴 어때. 뜻만 통하면 되지.”
비류연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예, 뜻이 통해요? 어떻게 통하죠, 절대로 통할 리가 없는데?”
도사가 궁금한 건 왜 그리 많은지, 참을성 없이 현운이 놀라서 물었다.
‘국표양중, 어떻게 해석하면 뜻이 통한단 말인가?
“난 해석을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하거든. 읽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도 말이야.”
쩍, 15명 15개의 입이 쩍 벌어지면서, 모두들 넋이 빠진 듯 멍해졌다. 일순 머쓱해졌는지 비류연이 자신의 뒤통수를 슬쩍 긁었다.
“그렇게 존경의 염이 담긴 눈길로 빤히 쳐다보면 내가 부끄러워지잖아. 자 들어가자고.”
뻥과 쾅,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중양표국의 정문이 날아가 버렸다. 그 충격 여파로 인해 발생한 희뿌연 안개 같은 분진(粉塵) 속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들어왔다. 맨 앞에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턱 밑에 하얀 수염을 기른 나이 5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었고, 그 뒤를 따라 한 손에 목검을 들고서 총총히 따라 들어오고 있는 거의 누더기 일보 직전의 옷을 입고 있는 남녀 혼합의 무리들은 20대의 젊은이였다.
모두들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입고 있는 옷들은 허름했지만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氣)는 칼날과도 같이 벼리어져 있었다. 그 칼날 같은 예기(氣)가 이들이 결코 만만하고 녹록한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었다. 물론 선두에 서서 들어오고 있는 노인은 인피 면구를 뒤집어쓰고 지금 현재 원활 히 사기 행각 진행중인 비류연이었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일련의 무리들은 천무학관에서 영예롭게 뽑혀 아미산 합숙 훈련을 왔다가 하늘의 농간으로 지금은 가 짜 사부 모시고 다섯 달 동안 고생만 죽자고 하고 있는 주작 단원이었다. 원래 16명인 주작 단원이었지만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수는 15명으로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리고 이 빈 자리 한 명이야말로 지금 그들이 중양표국 정문을 매우 정중히 열고 들어오는 이유이기도 했다. 선두에 서 있던 비류연의 입이 열렸다. “가서 국주 나오라 그래.”
명명백백히 시비를 거는 말투였다 양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가슴을 당당히 펴며, 고개를 빳빳이 든 모습이 네까짓 놈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기고만장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웬놈들이냐?”
표국을 지키고 있던 표사 한 명이 겁도 없이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그것도 그 많은 16명 중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맨 앞에 서 있는 좀 삐딱하고 심사가 꼬여 있 는 비류연에게로……. 순간, 비류연이 주먹을 내뻗었다.
“쾅”
“케엑!”
이상한 비명과 함께 덤벼들던 표사는 이만치 솟아오르더니 저만치 날아가 쓰러졌다.
“아, 누구더라……. 아 그래, 그 강장한인지 건장한인지 하는 표두놈도 같이 나오라 그래. 이 어르신께서 볼일이 있다고 말이야.”
여태껏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 1급 비상 사태를 알리는 비상종이 맹렬히 울려 퍼지고 표국 안에 있던 모든 표사들이 연무장으로 집합했다. 대문을 뚫고 들어온 비 류연 일행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중양표국의 연무장이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무기 하나씩을 꼬나쥐고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는 좀 한 가락 하는 놈이라는 것을 증명 하는 듯한, 여기 있는 조무래기들이 입고 있는 옷과는 뭔가 달라 보이는 복장의 한 중년인이 뛰쳐나왔다.
연두색 두루마기의 오른쪽 가슴 위에 새겨진 대(大) 자와 그 밑의 세 송이 연꽃 무늬로 보아 이 표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이 중양
표국의 보통 표사들은 모두 오른쪽 가슴 위에 중양이라는 글자와 함께 연꽃 한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양표국의 대표두입니다.”
금영호가 그를 보고 비류연에게 귀띔해 주었다. 금영호는 집안이 중원 상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한다는 금호 상회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을 통해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다. 그런 후계자 수업 덕분에 이쪽 방면으로는 아는 것이 많았다.
“얘들아, 쳐라!”
어라? 대표두라는 놈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다짜고짜 쫄짜들에게 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닌가. 상담과 토론, 대화와 타협에 의한 사건의 유려한 해결책 모색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식한 놈이 틀림없었다. 다짜고짜 위에서 치라니 쫄짜들은 치러 들어오고 비류연과 그의 제자들은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막기라는 자기 방어의 한 수단으로 폭력이 행사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쳐들어 온 쪽, 비류연 일행은 나중에 변명했다.
비류연은 거침이 없었다. 비기나 오의(奧義)는 쓸 필요조차 없다는 듯 맨주먹 하나만으로 적진을 종횡무진 누비며 다니고 있었다. 그의 손에 불행히도 걸려든 중 생들은 저만치 날아가 담벼락에 대가리 박고 죽은 듯이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끌고 온 자칭 제자 15명들도 마찬가지였다. 당하거나 밀리기는커녕 닥치는 대로 상대를 때려잡았다. 이들은 들어가기가 하늘에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고 험 난하다는 천무학관에 당당히 입학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지난 5개월 간 정체도 묘연한 자칭 사부, 비류연에게 휘둘리고 혹사당하면서 지옥의 수련을 거친 존재들 이었다. 지금 그들 손에 차인 묵환도 그들을 별다르게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웬만큼 한다는 절정 고수가 아니라 조무래기 정도는 벗을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 였다. 그들 15명이 들고 있는 목검 아래에서 무수한 중양표국의 표사들이 피를 뿌리며 기절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덧 담벼락에 처박히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이 증가하고 있을 무렵 중양표국에서 날고 긴다고 하는 일류라 불리는 고수들이 등장했다.
“웬놈들이냐!”
조금 전에 등장한 연꽃 세 개짜리는 잊어 버리고 말하지 못한 대사를 마침내 내뱉었다. 원래 자기 문파에 낯선 아저씨들이나 아줌마 혹은 남녀 노소, 또는 처녀 총 각, 혹은 임산부나 노약자가 쳐들어왔을 때는 우선 대치 상태를 유지한 다음, 상대방과의 대화를 위해 ‘웬놈이냐!’라고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정석(定石)이었다. 그런 데 맨 처음 등장한 표국의 대표두가 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싸움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지 않고 계속되고 말았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기에 저희 초라하고 볼품없는 표국에 쳐들어오시게 되었는지 그 숭고하시고 고결하신 연유(緣由)를 이 아둔한 자들에게 설명해 주시기를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라고 정중하게 물어 봐 그 전에 먼저 자기 소개부터 하고 요즘 애들은 예의가 없다니깐 도무지 돼먹지가 않았어.”
비류연은 상대방이 정중하게 질문해 오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반말로 지껄이니깐 더욱 심통이 났다. 하지만 저 긴 말을 중간에 한 숨의 호흡도 없이 순식간에 내뱉다니, 순간 주위가 모두 조용해졌다. 가운데 서 있던 중년인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돋았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끝내 비류연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적어도 비류연은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답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저기.”
비류연이 손가락으로 산을 가리켰다. 그 산의 이름은 아미(峨嵋)였다. 국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미에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아미산에 도적 떼가 있을 리도 없고, 어느 도적 떼가 겁도 없이 아미파의 영역에서 도적질을 하겠는가?”
국주의 의문은 쌓이고 쌓여 높아져만 갔다.
“그래, 무슨 일로 오신 것이오?”
“무슨 일로 왔냐고 아주 좋은 질문이오 그 질문이야말로 댁들과 우리들이 처한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하고 핵심적인 질문이오 응 당 처음부터 그렇게 물었어야지!”
“그렇게 쉼표도 없이 말하면 힘들지 않소?”
“당연히 힘들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국주가 물었고, 비류연은 당연한 걸 왜 물어 보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듣다가 상대가 지칠 것을 걱정할 만큼 비류연의 말은 길고, 빠르고, 쉼 없고 난해했다. 듣는 사람의 정신을 헷갈리게 할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이야기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모양이었다.
“댁의 표국에 강장한인지 건장한인지 라고 하는 놈이 댁의 표국 표사로 있다는데 사실이오?”
비류연은 딴엔 나름대로 정중하게 물어 본 것이다. 반말도 보통 때보다 적게 섞여 있었고…….
“그렇소. 강장한이란 이름의 사람이 우리 표국에서 대표두라는 직책을 맡고 있소이다.”
“그 사람이 최근 3일 사이에 아미산에 다녀온 적이 있지요?”
“그렇소이다. ‘아미파’에 예물을 받치러 올라간 적이 있소이다.”
국주는 ‘아미파’ 이 석 자를 특히 힘주어 발음했다. 우리 뒤에는 아미파가 있으니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어느 누가 이 사천 땅에서, 그것도 아 미산 바로 코 밑에서 ‘아미파, 이 석 자를 경원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있을 것인가. 그런 계산으로 국주는 ‘아미파’ 석 자를 강조해서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것에나 예외는 있는 법. 국주의 기대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비류연의 귀에는 아미파, 이 석 자가 도무지 관심 밖이었다.
“맞군 바로 그 강장한이라는 표두와 그 일당들이 댁의 표사들이었군 그 일당이 아미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사소한 이유를 트집 잡아 내 제자 놈 한 명을 상대 로 10명이 넘는 다수가 떼거지로 덤벼들어 내 사랑하고(?) 아끼는(?) 소중한(?) 제자를 그 애가 반 죽도록 집단 폭력을 행사한 사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온 것이오 지금 그 애는 피떡이 되어 실려 돌아와 치료를 받고 방에 누워 있소이다 그 때문에 내 제자 놈은 절대 안정 2개월 집중 치료 3개월 정기 치료 6개월 후유증 발생 위 험 과다의 중상을 입었고 그에 따라 엄청나고도 막대한 양의 치료비가 소모될 것 같소이다 게다가 그 강가란 놈은 자기 혼자서 내 제자를 상대하기 벅차자 자신 실
력이 딸리면 물러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가리 수로 밀어붙여 내 제자를 둘러싸고 집단 폭력을 행사했소이다 그럼으로 이에 나는 그 강가 놈 의 처벌과 징계를 원하오 또한 내 제자와 내가 받은 정신적 육체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바이오.”
역시 쉼표와 마침표가 없는 말이었지만 역시 마지막 말이 가장 중요한 말이었고 또한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바로 돈과 복수였다.
“야, 절대 안정 1개월 아니었어?”
금영호가 의문을 표시했다.
“집중 치료는 1개월이었지 아마……?
현운이 말했다.
“예, 그리고 정기 치료는 3개월이었어요.”
남궁산산이 말했다.
“후유증 발생 위험은 지극히 극소. 절대 안심이었잖아.”
“나도 그 의원이 가슴 탕탕 치며 자신 있게 말하는 걸 옆에서 들었는데…….
남궁상이 자신이 목격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솔직히 증언했다.
“으음,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언제 당삼의 상태가 악화되었지? 그런 얘긴 없었는데…….”
뒤에서 제자들이 수군거렸지만 비류연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럴 리가 없소이다. 강 대표두는 우리 표국에서도 광명하기로 이름 난 사람이오.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국주의 머리 속에는 이틀 전 아미파에 갔다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강 표두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가벼운 상처였지만 전 신의 상처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어서 의혹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상처가 병장기가 아닌 꼭 시정잡배한테 무방비 상태로 얻어터질 때나 생기는 상처 비슷한 것이 었기 때문이다. 만일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중양표국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이 아닌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강 대표두는 어디 있나?”
국주가 옆에 있던 총관에게 물었다.
“지금 외출하고 없습니다.”
“지금 당장 찾아 오도록 하게!”
그리고는 비류연과 그의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외출중이라고 하니 강 대표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떻소이까?”
“그렇게 하지.”
여유 있게 비류연이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