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9화 – 십팔검 장우양의 비극
십팔검 장우양의 비극
표국 문 밖이 소란해지더니,
몇 명의 표사와 함께 대표두 강장한이 들어왔다.
술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걸 억지로 데리고 왔는지
그의 얼굴이 빨갰다.
“네놈이 바로 건장해서 강간한 놈이냐?”
당연하겠지만 확인하는 의미로 비류연이 물었다.
“끄윽, 강간? 누가 누굴 강간해, 내가 강간을 당하면 모를까, 강간한다니 감히 어떤 놈이야! 감히 어르신의 함자 석 자를 함부로 바꾸어 부르다니.”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 기세로 강간한, 아니 강장한이 씩씩거렸다. 얼굴이 붉게 타올라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저게 어따 대고 반말이야. 어르신? 지랄 염병에 육갑을 골고루 떠는구먼.”
별 같잖은 놈 다 보겠네 라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비류연이 강장한을 바라보았다. 쌍소리가 막 나올 정도로 비류연의 말투가 거칠어져 있었다.
“저 사람이 술을 좀 과하게 마시면 저리 되니 손님께서는 무례를 이해하길 바라오. 얘들아, 쟤 좀 깨워라.”
보다 못한 국주 십팔검 장우양이가 옆에 있던 표사들에게 명했다. 술은 어떻게 깨우는가? 고래(古來)로 충격 요법, 해장술, 해장국(?), 혹은 술 깨는 비약 등 여러 가지 비법(秘法)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아직도 대중들에게 널리 이용되고 있는 방법이었다. 특히 지금은 한여 름이라 걸릴 건 없었다.
“시원한가.”
국주가 물었다.
“에취!”
물 한 동이씩을 양쪽에서 각각 하나씩 끼얹은 강장한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대답했다. 별로 예의 있는 대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지성 있는 대화의 대답으로 는 합격점 미달이었다.
“우후, 정신이 들었습니다.”
옷매무새를 수습하며 강장한이 말했다. 아직도 전신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사자가 왔군. 그럼 얘기를 해 볼까.”
조금 정신이 든 강장한을 보면서 비류연이 말했다.
“그러지요.”
지금 막, 그것도 술에 취한 채 끌려오다시피 한 강장한으로서는 지금 두 사람의 대치 상황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표국이 공격을 당한 원인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왜 멀쩡했던 표국의 대문이 부서져 있는지, 왜 수십 명의 표사들이 담벼락에 대가리 처박고 쓰러져 있는지, 이 앞의 두 사람은 왜 지 금 대치중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장한은 비류연의 이리이리 하고 저리저리 되었다는 이야기에 자신은 이리이리 하고 저리저리한 적이 결코 없다고 주장했다.
“그 놈이 먼저 저의 명예와 우리 중양표국의 명예를 더럽히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저는 자신과 표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입니다.”
“야,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집단으로 패는 곳에도 명예란 게 존재하나?”
비류연이 빈정거렸다.
“다수가 한 명을 공격하다니, 그런 일은 결코 없었소.”
“흥, 모든 건 흔적이 말해 주고 있다. 계속 발뺌한다 이거지. 좋아, 그럼 딴 사람 이야기도 들어 보자고. 너하고 같이 동행했던 표사 일행은 지금 어디 있나? 그 놈들 족쳐 보면 뭔가 불겠지. 그 놈들에게서도 네놈과 함께 빚을 받아 내야 하니깐.”
“그들은 지금 저기 있소, 저기.”
국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담벼락에 대가리 처박고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표사들이 겹겹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비류연의 주먹에 당 한 사람들로 어떤 방법으로 쳤는지 의식 불명, 혼수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크윽, 이놈들! 증거를 인멸하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한다. 모든 건 흔적이 말해 주고 있다. 네놈이 약해 빠졌으니 떼거지로 뭉쳐서 공격했겠지. 이제 그만 발뺌하고 덤벼 보시지. 덤벼서 그 잘난 엉터리 명예란 걸 지켜 보라고. 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말이야. 이 비겁하고 치사한 놈아.”
“크악, 사람들을 쓰러뜨린 게 누군데 남한테 시비냐. 더 이상의 빈정거림, 용서할 수 없다.”
건장한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 들고 살기 등등하게 외쳤다. 자신의 약점을 덮기 위해서라도 이야기는 간결하고, 대화는 짧고, 행동은 빨라야 될 필요성이 있었다. 더 이상 말이 길어지게 되면 자신이 저지른 일이 탄로 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입막음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것도 되도록 빠르게. 그러나 강장한의 이러한 시도 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 그럼 다시 한 번 그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명예를 지켜 보시지. 나를 상대로 말이야. 이 몰염치, 불구, 비겁 치사한 놈아!”
“크악,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이다.”
강장한의 인내는 참는 한도의 한계를 수도 없이 넘기는 바람에 모두 바닥나고 말았다. 도를 꼬나 들고 강장한은 겁도 없이 비류연을 향해 돌진해 갔다.
“이야아 압! 받아라!”
“야, 받으래.”
남궁상이 말했다.
“응, 나도 들었어.”
현운이 동의했다.
“겁도 없이 사부님에게 먼저 덤벼들다니. 그것도 칼을 들고 말이야.”
금영호가 말했다.
“어떻게 될까? 저 놈 죽을까?”
“아마 끔찍하게 죽을걸. 죽는다에 내 저녁을 걸지.”
노학이 내기를 걸었다.
“저도 죽는다에 걸겠어요.”
당문의 직손이며, 당철영의 누이동생이라는 이유로 지금 일행들 중에서 가장 살기가 등등한 당문혜가 냉기를 풀풀 날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일순 주위가 서늘해지 는 것 같았다. 이미 그녀의 손에 반병신이 되어 허무하게 쓰러진 표사의 수를 열 손가락을 세 번 접었다 펴도 다 세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의 손에 사정과 용서란 단 어는 없는 것 같았다.
“제가 지면 내일 삼시 세끼를 드리지요. 하지만 저놈은 반드시 죽을 거예요.”
“나도 죽는다에 저녁밥과 내일 아침까지 걸지.”
화산의 조천우가 말했다.
“난 산다에 걸지. 죽이진 않을 거야.”
현운이 말했다. 그리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나는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후식까지 걸지.”
현운이 통 크게 나오자 모두들 놀랐다. 이처럼 식사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매우 중요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되어 있었다. 5개월 동안 어떤 생활을 강 요당했는지, 엄청 수수해지고 소시민적이 되어 버린 그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밥 한 끼에 목숨이라도 걸 기세였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강장한 이 생사(生死)의 갈림길 중 어느 길로 걸어 들어갈 것인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웃고 즐기는 사이에 강장한의 도는 이미 저만치 날아가 반 동강 난 채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발이 지상으로부터 한 뼘 정도 떨어진 상태로, 공중에 뜬 채 사정없이 비류연에게 얻어터지고 있는 중이었다. 얻어맞는 중에 그 힘에 의해 뒤로 밀려나지 않고, 힘이 수직으로 작용해 몸이 한 뼘 이상이나 공중에 뜨게 되 는 무공은 노학이 알기로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자신이 뼈저리게 경험해 보았던 무공, 그것은…….
“삼복 구타 권법(三伏狗打拳法)!”
오한이 드는지 팔을 껴안으며 악몽 속의 단어를 끄집어 내듯 노학이 외쳤다. 팔에 두드러기가 돋는 게, 전에 맞은 곳이 다시 쑤셔 오는 것 같았다. 다시 몇 번의 구 타성 타격음이 들린 후 비류연이 손을 털며 돌아섰다. 이제야 끝난 모양이었다. 강장한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초주검 상태가 된 시체처럼 보이 는, 예전에는 사람이었음이 확실한 물체를 뒤로하고 손을 털며 걸어오는 비류연을 향해 국주 십팔검 장우양이 말했다.
“죽었소이까?”
“반 죽었어.”
비류연이 현재 강가의 상태를 친절하게 얘기해 주었다.
“으.”
“쾅, 젠장!”
“내 밥…….?”
‘내 후식, 크윽.”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통한의 한숨 소리, 땅을 치며 외치는 통곡..
피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꼴을 보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언제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강장한을 반 죽여 놓은 다음 손
을 털고 돌아선 비류연을 향해 국주 십팔검 장우양이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았다. 발검과 입정의 자세가 안정되어 있는 모습이 그가 높은 수준의 일류 고수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우리도 체면이 있으니 이대로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소이다.”
체면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결판을 내어 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요?”
왠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우리 중양표국의 체면도 있으니 그냥 가실 수는 없소이다. 겨우 16명의 무리에게 표국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문이 난다면 누가 우리 중양표국에게 표물을 위탁 하겠소. 그 날로 중양표국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오.”
“아, 그래서 중양표국의 몸보신을 위해 날 잡아 드시겠다 이거군, 칼로 쳐서!”
비류연은 냉소하듯 신랄하게 말했지만 장우양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소이다.”
국주의 태도도 단호했다. 표국의 앞날을 위해서도 이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것은 체면의 문제를 떠나 이미 표국 존속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힘들여 일구어 온 표국의 존망을 걸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매를 버는군.”
기분이 몹시 상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먼저 오시오.”
비류연의 검지 손가락이 까닥거렸다.
“먼저 가겠소이다.”
국주 장우양은 거절하지 않았다.
검신(劍身)을 정 중앙에 세우고, 예를 표한 다음 장우양이 도약했다. 장우양은 도약과 동시에 검을 뿜어 냈다. 검의 움직임이 마치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꽃잎과도 같았다. 너울거리던 꽃잎 하나가 공중에서 멈추는 순간, 꽃잎은 부르르 떨리며 18개의 검영(劍影)을 공중에 토해 냈다. 낙화하는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만 같은 현란함, 무시할 수 없는 기세와 변화.
“난화검(亂花劍)!”
하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직접 검을 맞대고 있는 비류연이 아니었다. 뒤에서 놀란 외침을 토해 낸 이는 바로 진령이었다. 당사자 비류연은 오히려 여유마저 느껴지 는 모습으로 유유히 서 있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띄운 채.
난화검(亂花劍), 정확히 말해 ‘난화비검십육식’은 아미파에서도 절기로 꼽히는 검법으로 함부로 외인에게 전하는 기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중양표국의 국주 가 아미의 속가 제자라고 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난화검까지 익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국주 장우양이 난화검의 16개 초식 중 어디 까지 익혔는지는 몰라도, 속가 제자라지만 그것은 이름뿐이라고 생각해 외부인이라고 여겨졌던 사람이 난화검을 익혔다는 사실은 진령으로서는 충분히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변화하는 18개의 검영(劍影)으로 보아 난화검을 상승의 경지까지 익혔음을 알 수 있었다. 난화검의 묘용(妙用)과 진가(眞價)는 허와 실의 교차에 의한 현 란함과 화려함이었다. 쏘아져 나오는 검영의 허초와 실초가 뒤바뀌면서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난화검의 묘용이었다.
이 비결은 난화검과 쌍벽을 이루는 난화수에도 함께 적용되는 비결이었다. 이 비결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열여덟의 검영이 그리는 변화는 불가능 했다. 그의 십팔검(十八劍)이라는 별호도 씨팔씨팔 거리면서 욕만 하다가 거저 얻은 이름은 아니었던 것이다. 18개의 검영은 비류연을 향해 매섭게 찔러 들어갔다. ‘있다.”
제대로 들어갔다고 장우양이 생각하는 순간 허깨비를 향해 검을 겨눈 것처럼, 환상을 대상으로 휘두른 것처럼 검이 비류연의 몸을 관통했다. 하지만 장우양의 검 은 비류연의 잔상을 뚫고 지나갔던 것이다. 비류연은 18개의 검영이 난무하는 곳을 시간도 공간도 무(無)로 돌리듯이 피해 들어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우양의 배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무생각(無生脚).”
초식이 상대에게 먹혀 들어간 다음 비류연이 초식의 이름을 말했다. 친절하게 공격하기 전에 초식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까닭은 기술 발동 시간이 초식 이름 석 자를 말하는 시간보다 빠르기 때문이었다. 초식을 말한 다음 공격하면 그 만큼의 시간을 허비(지연)하게 되지 않겠는가. 쾌를 위주로 하는 기술이나 상대의 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접근 기술에게 있어서 초식 이름 외치기는 독약과도 같은 일이었다.
솔직히 초식 이름 외치는 것도 모양은 있어 보이지만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차는 발 차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각법은 비뢰문의 사이 비 무공인 한 가지 권법, 한 가지 장법, 한 가지 각법, 한 가지 지법 중에서 일각에 해당하는 각법으로서, 자연체(自然體)의 상태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가차없이 행 하는 발차기다. 이 각법은 왠지 유령과 같아서 말려들면 피할 수 없고, 맞으면 그 위력이 장난이 아니다.
입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장우양이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타격하는 순간, 집중되는 힘을 많이 뺐기 때문에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큰 부상은 입히지 않았다.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누구한테 손해 배상 청구를 한단 말인가. 그 동안의 수고가 말짱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에 발에 살짝 힘을 뺀 것이다.
국주가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지는 것을 본 총표두 쾌창 등여운과 부총표두 섬연창 등여호가 참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이 두 명은 처음부터 국주와 함께 나타났던
무인들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형제 사이였고, 모두 창술의 달인이었다. 국주가 직접 나선 만큼 잠자코 있었지만 일격에 나가떨어진 이상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놈.”
“이놈.”
형제라서 그런지 공격시 내뱉는 기합도 똑같았다. 쾌창 등여운, 섬연창 등여호. 그들의 비기인 5단연쇄격은, 다섯의 변화가 모두 다른 시차를 두고 찔러 들어오기 때문에 파(破)하기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게다가 좌우 동시에 발현되는 5단연쇄격의 합공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위협 적인 것이었다.
개인으로 따지면 중양표국에서 그 실력이 국주 십팔검 장우양보다 밑이었지만, 합공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국주보다 더 강한 것이 그들의 무공이었다. 그들의 합공 은 국주인 십팔검 장우양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등여운의 묵빛 창이 5개의 변화를 간직한 채 비류연의 오른쪽 측면을 향해 찔러 들어왔고, 그와 같은 재질, 같은 색깔의 창을 잡은 등여호가 비류연의 왼쪽 측면을 향해 역시 같은 기술인 5단연쇄격으로 창을 놀리며 공격해 들어왔다.
두 명의 일류 고수의 좌우 동시 공격, 게다가 둘의 무기는 모두 창(槍). 지금 맨손인 비류연보다는 공격 유효 사정거리가 훨씬 길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이 바로 코 앞에 다가올 때까지도 비류연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비류연의 몸까지는 앞으로 삼촌(三寸 : 약 10센티).
그때였다. 갑자기 비류연이 양손을 머리 위로 교차하는 동시에 왼발을 오른발 뒤꿈치 쪽으로 옮기며, 그 힘에 의해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순간 비류연 주위로 강렬한 돌풍이 부나 싶더니, 공격해 오던 등여운과 등여호의 자세가 돌풍의 힘에 의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무처럼 비류연 쪽으로 공세(攻勢)가 휘말려 들어가더니, 오른쪽 측면으로 찔러 오던 형 등여운의 창은 가슴 앞쪽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고, 동시에 왼쪽 측면으로 찔러 들어오던 동생 등여호의 창은 비류연의 등쪽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갔다. 그리고…….
”퍽.”
머리 위로 올려져 있던 비류연의 양손이 수도(刀)로 변하더니, 공격해 들어온 등여운과 등여호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다섯 번의 변화를 모두 써 보지도 못한 채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한 집에서 살며,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한 사부를 모시며, 한 가지 무기를 들고, 한 무공을 배웠던 두 형제는 한시(時)에 땅바 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곳에서 가장 강하다는 총표두와 부총표두 형제의 합공을 막아 낸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둘을 쓰러뜨린 다음 비류연이 한마디했다. “초식 이름名). 없음(無〕!”
아무렇게나, 단지 필요에 따라 몸을 움직인 것뿐이니 초식명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양표국의 말단 표사부터 대표두를 거쳐 총표두에 국주까지 모 두 비류연과 그 제자 일행에 의해 땅바닥에 뻗어 버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얻어 터져 쓰러져 있는 국주에게 의기양양 다가간 비류연이 그의 귀를 잡아댕기며 큰 소리로 말했다. 말이 소리지 장우양의 귀에는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렸다. “어때, 정신이 들어? 맞으면 아픈 건 누구에게나 인지상정인 거지. 그건 그렇고,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 그 강간한이란 놈, 너무 예의가 없었지. 어른 들 말씀을 중간에 막 끊고 말이야. 이래서 아랫사람 교육은 잘 시켜야 되는 거야. 교육이란 중요한 것이거든. 아랫사람 교육이 잘 안 되었다는 것은 모두 다 자네 책 임이지. 그건 그렇다 치고 말이지, 당했다던 피해자인 내 제자 말이야, 사천당문의 직손이야. 알고 계셨어? 당문 말이야, 다 앙 문! 내가 듣기로는 독과 암기의 명가, 그들이 쓴 독에 당하면 한 줌의 핏물밖에 남지 않고 그들이 던지는 암기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고 하던데, 당신도 들어 봤지? 사천의 일세(勢) 당문, 사천당가(泗 川唐家)를 말이야. 이름이 꽤 쟁쟁하더군. 내 귀가 울릴 정도로.”
국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모를 리가 없었다. 사천 땅에 존재하는 무림문파 아니 전 강호 무림에서 독과 암기의 대명가 사천당문을 모르는 사람이 어 디 있겠는가. 더욱이 여기는 사천 땅, 그 누구보다도 당문의 위력을 잘 알고 피부로 느끼고 있는 장우양이었다.
더군다나 당했다는 제자가 정말 당가의 직계라면, 아미파에 도움을 요청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도움을 요청할 대의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당문이 쳐들어와 중양 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아미파는 움직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들에게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아미파와 자신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상황들을 국주 장우양은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비류연은 모르고 있었다. 그 동안 계속 산 속에 처박혀 있거나 고작 대장간이 있는 마을에서만 생활 한 비류연이었으니 사천당문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냥 아무렇게나 주워들은 것들을 되는 대로 약간의 과장과 허풍(風)을 섞어 지껄인 것뿐이었다. 하 지만 사천 땅에서 표국질해 먹고 사는 중양표국의 국주 장우양에게 있어서 그것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그, 그게 정, 정말이오?”
“당연히 정말이지. 내가 지금 거짓말할 군번이냐? 지금 저쪽에는 그의 누이동생도 함께 와 있어. 확인해 보고 싶음 확인해 봐. 그 대신 뒷일은 책임 못 져. 쟤 지금 폭발 직전이거든. 당신이 묻다가 쟤 터지면 아무도 못 말려. 쟤가 또 한 성질 하거든. 집에 가서 일가친척 다 이끌고 쳐들어올지도 몰라. 그래도 해 볼래?”
비류연은 밝고 건강한 미소를 지으며 장우양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 끝이 없어 보이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지금 장우양의 심신을 업장처럼 짓누 르고 있었다. 확인?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 사천 땅에서 사천당문을 적으로 돌리거나,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은 절대로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 었다.
확인해 보았다가 진짜라면 더 문제였고, 가짜라면 또 어떡할 건가? 방법이 없었다. 이미 깨질 대로 깨져, 상황은 모두 종결된 후가 아닌가. 게다가 저 자신감과 실 력으로 보아 사실임이 틀림없었다.
“제,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국주가 물었다. 일견해 보기에는 비류연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니, 비류연이 인피 면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장우양은 존댓말을 사용한 것이다. 생기(生氣)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장우양의 얼굴은 점점 해쓱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될지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비류연이 오른손을 장우양의 코 앞에 내밀며 말했다.
“아까 말했던 내 제자와 나, 그리고 내 제자의 친구들과 그의 가족, 친지, 친족 분들이 입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바이오.”
처음 얘기할 때는 없었던 제자의 친구와 그 가족, 친지, 친족 분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추가 항목으로 더 늘어나 있었다. 쌍방 합의 성사의 노력 과정 중에 발생한 힘의 사용과 그에 따른 땀에 대한 보상이 더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국주 장우양으로서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이상 일이 커진다면 그 날 은 정말 대문에 못 박고 간판 내리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시커먼 잿더미에 시체 더미만 남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드, 드리겠습니다. 그, 그 대신 오늘 일은 좀 없었던 일로……”
국주 장우양은 말끝을 흐리며 힘겹게 말했다. 비류연이 거절하면 어쩔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장우양으로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떻게든 이 일을 무마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이지.”
“팡”
“헉.”
계약서에 도장 찍듯이, 국주 장우양의 등에 호쾌하게 손도장을 찍으며 승낙했다. 이렇게 해서 비류연은 중양표국으로부터 자신과 제자와 제자의 친구와 가족 일가 친지가 입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양의 보상비를 뜯어 낼 수 있었다. 얼마를 받아 냈는지는 오직 비류연만이 알 뿐 일절 공개하 지 않았다. 남들이 알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우히히.”
흐뭇한 미소, 조금은 이상한 웃음 소리, 언제 째질까 두려운 입술, 손에 들려 있는 묵직해 보이는 자루, 눈에 보이는 자루 외에도 비류연의 품에는 제자들 몰래 꼬불 쳐 둔 ‘전표(錢票)’라는 이름의 종이 쪼가리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제자 중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종이에 적힌 액수가 보따리에 넣어져 있 는 액수보다 많다는 사실도……
비류연과 그의 제자들은 모든 분풀이를 끝낸 뒤 밝은 마음으로 훈련소를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을의 중턱을 넘어서는 길목, 산은 화려한 붉은빛과 아름다 운 노란빛으로 옷을 바꿔 입고,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 어느새 바람마저도 서늘해지고 있었다. 오직 태양만이 마지막 남은 따뜻한 빛을 대지에 내리쬐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도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