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22화 –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어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어

겨울의 문턱, 이제는 제법 쌀쌀한 찬바람이 불어오는 날씨가 되었다. 숨을 내쉴 때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겨울의 초입, 색(色)을 바꿔 입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잎새들도 낙엽이 되어 깔리고, 길을 걸어가면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바스락 바스락 조용히 귓가를 울렸다.

물소리 들려 오는 푸른 파양호를 뒤로하고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거대하고 위압갑을 주는 건물들의 집합체가 모여 있었다. 그 규모는 보통의 마을이나 중소 도시보 다 훨씬 크고 넓어, 파양호의 도시 남창(南昌)과는 전혀 별개의 도시가 따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도시보다도 더 큰 규모를 가진 이 건물들의 집합체를 빙 둘러싸고 있는 담, 아니 담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못하다. 높이 4장, 두께 반 장의, 거대한 사각(四角) 의 암석(巖石)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석조를 담으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차라리 성벽이라고 칭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 높이가 4장은 족히 넘을 듯 보 이는 이 성벽은 마치 오르고 싶어도 오르지 못하는 절벽을 뚫고 싶어도 뚫을 수 없고, 부수고 싶어도 부술 수 없는 철벽을 연상시키는 것이 성체를 방불케 했다. 게 다가 성벽 위에는 반 장의 두께 위로 같은 길이의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을 이용해 사람들은 순찰을 다니거나 정해진 위치에서 경비를 선다. 그러기 쉽게 하라는 목적으로 만든 길이다. 이렇게 크고 넓은 대지를 둘러치고 있는 거대 하고 웅장한 성벽의 가운데 중심부에는, 넓이는 2장, 길이가 3장은 족히 될 법한 검은색 정문이 우뚝 서 있었다. 정문 주위의 성벽은 특히 높았는데 바로 망루가 있 었기 때문이다. 망루의 지붕까지 합친다면 그 높이가 7장은 족히 되어 보였다.

거대한 성채(城砦)처럼 위압감을 내뿜는 성벽의 정문 위에는 금빛 테두리에 검은색 바탕을 띤 거대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판에는 금방이라도 용(龍)이 되어 하 늘로 훨훨 날아오를 듯한 서체(書體)로 천무학관(天武學館)이라는 글씨가 금빛으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삼엄한 기세, 들어서지 않고도 느껴지는 거대함과 장엄함. 인간에게 경외심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또한 그것을 품도록 부추기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이곳의 이름이 바로 천무학관이었다. 배움의 장소라기보다는, 수많은 적들과의 교전과 전투를 염두에 두고 세운 듯한 삼엄함과 엄중함이 이곳에는 있었다. 하긴 백 도 제일의 잠재력과 저력의 상징이기도 한 곳이니 위의 사실들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천무학관 1년 생인 고양시와 백석동은 지금 정문 경비를 서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들이 경비를 맡은 당번일이었다. 천무학관의 경비는 두 명이 조를 짜 정해 진 날짜에 경비를 서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담당 구역은 항시 변한다. 고양시와 백석동도 오늘이 당번일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 게 배당된 위치는 학관 정문 외곽 경비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는 불행이었다.

정문 외곽 경비는 말이 좋아 외곽 경비였지, 사실상 손님 접대부나 다름이 없었다. 정문 밖에서 보초를 서는 것이기 때문에 학관 내로 들어오려는 사람, 나가려는 사람들을 살피고, 연락하고, 방명록을 작성 기록하고 하는 잡스러운 일들을 대부분 도맡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이기도 했다. 최악의 경비 장소, 두 번 다시 맡고 싶지 않은 장소, 나에게 걸리지 않도록 해 달라며 정화수를 떠 놓고 하늘에 비는 장소 중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학관 정문 외곽 경비였다.

지금 그토록 말 많고 탈 많은 장소에 서 있는 고양시와 백석동은 오늘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심하면 학관 내에서 정문 외곽 경비를 맡으면 뼈가 빠 지고, 탈모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나돌겠는가. 심지어 정문 외곽 경비 한 번 맡으면 그 후 일주일 간은 그게(?) 서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남창이 괜히 강호 제일의 도시가 된 것이겠는가? 물론 아니다. 천무학관이 남창에 있었기에, 지금의 백도 무림의 중심지이자 강호 제일의 도시인 남창이 있는 것 이다.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천무학관이니 찾아오는 손님들이 한둘일 리가 없다. 관생 수를 포함한 학관 관계자만 해도 수천이 넘었고, 그 인원을 빼더라도 하 루에 찾아오는 무리는 수백을 쉬이 헤아렸다.

그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검사하기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일일이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일일이 감시하지 않더라도 워낙에 일이 많아 힘들긴 마 찬가지였다.

천무학관은 무의 배움터이기 때문에 학관 방침상 힘을 가진 자라면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 고 있었다. 그러므로 학관 내를 순찰하고, 경비를 서며, 무리들을 감시하고 풍기를 단속하고, 싸움이나 기타의 일들의 처리를 모두 천무학관 관생들이 스스로 업무 를 배분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을 처리한다.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배움터를 지킨다는 것이 바로 천무학관의 정신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그 누구도 함부로 천무학관을 침범하려 한 세력은 없었다. 강호 최강의 잠재력과 저력을 가지고 있는 천무학관을 건드려 봐야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패가망신할 가능성만 농후 했기 때문에 시비조차 거는 문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학관의 경비 상태는 많은 인원을 이용한 삼엄함은 없었다. 몇몇의 당번 경비들만이 번갈아 번(番)을 돌 뿐 이었다.

낮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밤이라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성벽로를 돌며 보초를 서는 사람들과 관내를 돌며 경비를 서는 관생들이 있을 뿐이었 다. 그렇다고 해서 낮에 경비가 할 일이 없이 빈둥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고, 오판이다. 특히 정문 외곽 경비가 그러했는데 학관으로 찾아오는 손 님들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수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고양시와 백석동은 기분이 그리 썩 좋지 않았다. 다른 곳 같으면 하급 무사들이나 맡아서 해야 하는 일들을 자신들 같은 촉망받는 후기지수들이 해야 한다는 사실 이 그들을 못마땅하게 했다. 강호에서는 일단 천무학관에 합격하여 입관했다고 하면, 실력을 만천하에 공인받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런 그들이 하급 무사 나부랭 이들이나 맡아서 해야 할 경비를 맡고, 접대부 같은 일이나 뼈빠지게 해야 하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백석동은 개방의 촉망받는 거지였고, 고양시는 청성파에서 장문인으로부터 직전을 사사받은 제자로 청성 검술을 훌륭히 구사하는 인재였다. 천무학관에 들어왔 다는 것만으로도 일류로 평가받는 것을 볼 때, 그들은 결코 녹록한 존재가 아니었다. 뭐, 그러나 그건 밖에 나갔을 때 얘기고 천무학관 안에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학관 안에서는 씨가 먹히질 않았다. 다들 날고 긴다는 인중용봉(人中龍鳳)의 인재들을 모아 놓은 곳이니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었 다. 특히 그들과 같은 1년 생들은 턱도 없었다. 1년 생은 윗줄 선배들의 밥이자 장난감일 뿐이었다.

경비 임무 중에서도 정문 위의 망루에서 감시하는 내곽 경비 정문 망루 담당은 지붕으로 인해 햇빛을 피할 그늘도 있었고, 가끔은 자리에도 앉아 다리를 펴 볼 수 도 있는 편한 자리였다. 그리고 학관 내부 순찰만 해도 칼 들고 돌아다니기만 하면 되는, 그나마 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편한 자리는 모두 선배의 몫으로 먼저 돌아가고 고양시나 백석동 같은 1년 생에겐 쭉정이로 남은 가장 힘든 일이 배당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전통 이고 관습이었다. 이것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라고 고양시와 백석동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부터 웬 볼일이 그리 많고 급한지 앞 조와 교대한 묘시부터 사람들이 쉴새없이 오가기 시작했다. 학관에서 외부인 출입이 허가되는 시간은 묘시 초(오전 8시경)부터였다.

근데 웬일인지 정오가 다가오고, 해가 창천의 한가운데에 걸리자 다들 점심이라도 먹으러 갔는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고양시와 백석동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오전 동안 처리한 일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 다음 자신들과 임무를 교대할 조에게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현하며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교대 시간까지 앞으로 반 시진 정도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먼저 한숨을 돌린 백석동이 마음의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고양시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대화의 주제는 바로 요즘 천무학관 초미의 관심사인 한 무리의 사람들 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양시, 자네 요즘 주작단에 관한 얘기 들어 보았나? 온 학관 내가 술렁이고 있더군.”

“당연하지, 백석동. 요즘 학관 내 초미의 관심사가 아닌가. 노사들도 요즘 그 일 때문에 고민 많이 하고 있다더군.”

대단한 거라도 아는 양 고양시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겠지. 청룡단이나 백호단, 그리고 현무단은 이미 2개월 전에 돌아와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데, 주작단은 편지 하나 달랑 써 보내고 2개월 동안 감감 무 소식이니 걱정이 태산 같겠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백석동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달랑 한 장 보내 온 편지에는 겨우 끝을 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 주작단 일동’이라고 달랑 한 줄만 적혀 있었다더군. 요즘 관내 회의가 자주 있는 것 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

역시 개방의 제자, 편지의 내용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알고 있는 것이 과연 강호의 모든 정보를 다룬다는 강호 최대의 거방 개방의 제자다웠다.

“청룡, 백호, 현무 3개 단도 지금 신경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더군. 하긴 2개월이나 더 예정에도 없는 수행을 해 가며 산 속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애 가 탈 만도 하지. 안 그래, 고양시??

“그래, 뭔가 대단한 걸 준비하고 있는 듯하니, 자리 안 빼앗기려면 신경 바짝 세워야 되겠지.”

현재, 아니 여름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주작단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된 초 우등생 집단인 4개의 단 중에서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합숙 훈련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합숙에서 돌아와도 그 사실에는 아무런 변동도 없을 거라고 모두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정에도 없는 주작단의 갑작스런 지연(遲延), 후반기 수업도 빠져 가며 연장된 주작단의 수행에 나머지 3개 단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날 자주 괴롭히던 노학 사형도 주작단에 끼여 갔었는데…….”

아직 감감 무소식이라니 노학이 개방 제자가 맞는지 백석동은 의문스러웠다. 자신보다 겨우 1년 위면서 비럭질해 먹은 짬밥 수가 다르다며 만날 뻐기던 사형 노학 을 떠올려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개방의 제자라는 사람이 2개월 동안 아무런 소식도 보내고 있지 않으니 이상하고도 요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정보는 천무학관으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개방 총타로 보내지는 정보를 말하는 것이었다. 2개월이나 늦어지면 무슨 사연이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총타에 정보를 넣어 줬어야 했다. 그것이 개방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였다. 그런데 와야 될 정보는 오지 않고 학관 으로 온 달랑 편지 한 통이라니, 그것도 다 못 배워서 더 배우고 간다는 미심쩍은 이야기 하나만 적혀 있는….

백석동은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아직 다 못 배웠으니 다 배우고 오겠다는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자신이, 아니 천무학관에 들 어온 새내기들이라면 누구나 일원이 되기를 갈망하는 초 우등생 집단, 사신단(四神團)의 일원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부족함과 모자람을 느끼다 니……. 그것도 안 가르쳐 주는 거라면 몰라도 가르쳐 주는 걸 다 습득하지 못하다니, 의심은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응?”

그때 정오의 짧은 그림자를 아래로 깔며, 학관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 일련의 무리들이 고양시와 백석동의 시야에 잡혔다. 그 무리는 남녀 혼성의 무리로 모두 산발한 머리카락과,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하고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은 채 허리춤에는 각각의 병장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저분한 모습과는 반대로 그 들에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섬뜩한 것이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져 있어 마치 피가 늘어붙은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천무학관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고양시와 백석동이 동시에 검을 뽑으며 외쳤다.

“누구냐? “

“빡.”

백석동의 눈에서 별빛이 반짝였다.

“이게 어따 대고 반말이야!”

누구냐, 라는 외침과 동시에 그들 중에서 특히 지저분한 옷을 입고, 좀더 지저분한 얼굴을 한 사내가 냅다 달려나와 백석동의 대갈통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그 위 력은 무시 못 할 정도였다. 지저분한 사내는 백석동의 버릇없는 입과 혀를 싸잡아 징계한다는 의미에서 백석동의 돌 같은 대갈통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특히 그 사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거지들이 입는 누더기였는데, 특기할 만한 점은 거지 누더기였음에도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전체가 붉은빛을 띠고, 군데군데 검은 얼룩들 이 져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개방의 제자라는 표식을 나타내는 매듭이 맺혀 있었는데 그 수는 여덟(八)이었다. 개방의 8결 제자, 장로급 바로 밑을 차지하는 높은 지위였다. 백 석동 자신의 매듭은 7결이니 낮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보다 윗줄의 지위와 나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7결 이상으로는 자기보다 나이가 적 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아픔, 이 지랄 같은 목소리, 이 엿 같은 행동, 이 모든 것은 그가 익히 잘 아는 느낌이어서 사실 백석동을 놀라게 했다.

“노학… 사형?”

자신의 기억을 확인하는 물음에 곧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인마!”

다행히 백석동의 기억력과 판단력은 그리 나쁘지 않았음이 증명된 축하할 일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성깔 더러운 원수 같은 사형이 돌아왔는데 기뻐 할 일이 무에 있는가. 부려먹기 좋은 후배가 돌아왔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노학 사형이 돌아왔고, 돌아온 그가 16명과 함께라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주작단 16명, 지금 천무학관으로 무사히 귀관(歸館)했다. 안에 통보를 해 주기 바라네.”

주작단의 단주(團主)인 남궁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백석동이 손짓하지 않아도 고양시가 급히 전갈을 전하러 뛰어 들어 갔다. 이 일은 지급(至急)이었 다.

드디어 주작단이 천무학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오의 짧은 그림자를 바닥에 깔면서 핏빛 붉은 옷을 입고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분명히 아미산 밑 중양표국 앞에 서 비류연과 헤어질 때만 해도 분명히 좀 더럽기는 하지만 흰색 계통이었던 옷이 붉디붉은 핏빛 옷으로 변한 사실은 그들의 여정에 많은 이야기가 있었음을 묵묵히 말해 주고 있었다. 천무학관을 떠난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백석동은 호기심이 많았다. 궁금증도 많았다. 같은 얘기지만 의문점도 많았다. 그건 그가 몸담고 있는 개방의 거지라면 대부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적 특징이 기도 했다. 정보가 생명인 개방으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제는 장 부자 댁에서 아들 결혼식이 있었고, 오늘은 진 가장에서 진 대인 60세 돌파 기념 환갑잔치가 있고, 내일은 강부자 댁에서 상(喪)이(?) 있을 것이며, 모 레는 조 가장 손자 돌잔치가 있을 거라는 등의 정보들을 자세히 알아야 비럭질해 먹는 데 용이하지 않겠는가. 이런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현재 천 무학관 2년생인 점창파 장문인의 금지옥엽인 장 모 양이 오늘 무슨 색의 속곳을 입었는지, 며칠째 입고 있는지, 일주일에 몇 번을 빠는지, 그리고 그녀의 월경 주기 (月經週期)는 며칠인지까지도 알아 내어 수집하고 있는 곳이 바로 개방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빵빵한지, 허리는 얼마나 잘록한지, 엉덩이는 또 얼마나 탱탱한지, 그녀의 가슴 둘레, 허리 둘레, 둔부 둘레의 삼부 수치 (三部數値)까지도 알아 내는 게, 아니 알고 있는 게 바로 개방의 정보력(情報力)이었다. 여가 선용 활동으로 그런 쪽의 정보를 눈에 불켜고 수집하는 거지들이 많았 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백석동도 그 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거지였다. 이런 쪽의 정보는 개인 은밀 신상에 관련된 자료이므로, 특히 여인의 것은 일급 비밀로 취 급된다고 한다.

여기에 조금 더 맛을 보여 주면, 현재 청성파 장문인의 첫째 며느리가 현재 임신 몇 개월 째인지, 혹은 뱃속에 든 애가 아들인지 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갈 때까 지 가 보면, 뱃속에 든 애는 정말 아빠 애는 맞는지? 까지도 알고 있다고 하니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정보 수집 능력이라는 힘이 너무 지나치게 커지다 보니, 강호 사람들 중에서, 개방을 귀(耳)가 허(虛)한 놈들, 개방 방주 귀는 당나귀 귀, 하면서 욕하기도 하는 것이다. 정보 빼면 남는 건 대가리 수하고 깨진 쪽박밖에 없다는 개방이다 보니, 그들에게 있어서 끝없는 호기심과 정보에 대한 욕구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 른다.

그래서, 백석동은 자신이 놀란 사실에 대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하늘 같은 선배가 줄줄이 서 있고, 성질 개 같은 사형까지 끼여 있었지만, 그런 일에 굴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학은 대답해 줄 것이다. 성질이 지랄 엿 같다고 해도 문규(門規), 아니 방규(規)를 어길 사람은 아니 었기 때문이다. 개방의 7결 제자인 자신이라면 특급 빼고는 일급 기밀까지는 접근이 허락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는 노학에게 정보를 요구하고 들을 권리가 있었 다. 그 정보(情報)가 특급(特級)이 아닌 이상.

처음 백석동이 놀라워한 것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원래 붉은색 옷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붉은색 염료가 사람들의 피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 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작 단원들의 옷, 군데군데에 있던 검은 얼룩들은 바로 피가 굳으면서 생긴 자국들이었다. 혈향을 내뿜는,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있는 그 들을 보는 백석동의 시선은 기이할 수밖에 없었다.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궁금증이라는 석 자(字)의 글자가 안구(球) 깊숙이 각인(刻印)되어 있었다. “선배님들, 그 옷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백석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해 미쳐 돌아가실 지경이니, 빨리 설명 좀 해 달라는 얼굴이기도 했다. 피식, 그의 질문에 현 운은 씨익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친구 남궁상을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니 쳐다보았을 것이다.

“정말 대단했었지?!”

밑도 끝도 없는 현운의 말에 남궁상이 동의를 표하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큰일날 뻔했었지.”

“맞아. 난 죽는 줄 알았다니깐?”

노학이 깝죽대며 끼였다.

“그때, 국주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란…….”

장우양의 얼굴 색과 표정을 떠올리며 금영호가 피식 웃었다.

“저도 난감했었어요, 갑자기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튀어나오다니…….”

진령도 그때의 일을 기억해 내면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끄집어내었다.

“그래, 어떻게 알았는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더군.”

당철영이었다. 그의 손은 수많은 이의 인생(人生)을 거두어 간 손이다. 함부로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았음(?)을 그들은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근데, 그 맨 처음 달려나왔던 패거리의 두목처럼 보이는 놈은 좀 이상하게 생겨먹었더군.”

노학이 말했다. 그는 정말 왜 일채의 채주라는 작자가, 그것도 중양표국이라는 십대 표국의 표물을 털 정도의 배짱을 가진 도적들의 두목이 하필 그런 몰골을 하고 있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것도 그랬지. 덮쳐서 깡그리 털어 간답시고 뛰쳐나온 그 뭣이냐, 그래, 그 호골챈가 하는 산 도적 집단의 두목이라는 놈이, 눈 한쪽을 퍼렇게 물들이고 딱지가 채 떨어지지도 않은 찢어진 입술을 하고 있었으니 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더군.”

금영호도 노학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금영호는 좀 우습다는 듯이 가볍게 얘기했지만, 듣는 백석동으로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호골채(虎骨寨)요? 그거 녹림 72채 중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놈들 아닙니까?”

백석동이 놀라움의 탄성을 발하며, 입을 쩍 벌렸다.

“그래, 녹림 72채 중 하나지. 비록 그 자리가 말석이라도 말이야.”

그의 감탄사에 노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호골채가 녹림 72채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만약 노학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녹림 72채, 이름에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산채가 72개나 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귀찮아서 언제 다 그걸 외우고 있겠는가, 72개나 되 는 걸. 그래서 딴 사람들은 녹림 72채 중에서도 이름 있는 유명한 산채 몇 개만 알 뿐 저 밑, 식탁 끝 말석으로 가면 어느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다. 노학이니깐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는 당당한 개방의 8결 제자였다.

“아무튼 큰 싸움이었어. 그리 강한 놈들은 아니었지만, 대가리 수가 있었으니깐. 대가리 수만 믿고 마구잡이로 달려들더군. 뭐, 녹림 72채라는 이름도 거기에 한몫 했겠지. 우리들은 몰라도 표국 쪽 사람들이 부상자는 있어도 사상자가 없었다는 것은 천운이었어. 놈들이야 반병신으로 잘 만들어서 쫓아 보냈지만…. 노학이 덧붙였다.

“두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니깐 알아서 흩어지더군.”

가끔씩 한마디 주어지는 대사를 인생의 낙으로 알고 살아가는 화산의 조천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했다. 이 낙마저 없으면 그는 있어야 할 가치가 없어지 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단칼은 무슨, 두 번에 베었지.”

조천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에 있는 곤륜의 이자룡이가 냉큼 꼬투리 잡고 한마디했다. 자신들의 존재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었 기 때문에 소홀함이 없었다.

“……”

일공은 끝내 대사가 없었다.

“두 번?”

“아, 그래. 천우 자네가 첫 번째 칼질로 그 놈의 오른팔을 어깻죽지부터 댕강 자르고, 두 번째 칼질로 그 놈의 차올리는 오른쪽 다리를 허벅지 윗줄에서 싹둑 잘랐 잖아. 오른팔과 오른다리, 균형이 안 맞게 자르다니, 자네 너무했더구먼.”

신난다는 듯 한 번의 기회를 더 잡은 곤륜의 이자룡이 몇 마디를 더했다.

“뭐가 너무하다는 거야?”

“너무하지 않고. 오른팔과 오른다리, 그렇게 같은 쪽을 동시에 잘라 버리면 그 사람 어떻게 목발이라도 집고 생활할 수 있겠는가. 왼팔로 목발을 집었으면 내딛는 다리는 오른다리가 되어야지, 어떻게 왼팔로 목발 집고 왼다리를 내밀 수 있겠는가. 오른팔을 잘랐으면 반대편 왼쪽 다리를 잘랐어야지. 그래야 균형이 맞잖아. 동 시에 같은 쪽을 자르다니, 평생 침상 신세 지라는 이야기와 뭐가 다른가. 생각을 하고 잘랐어야지, 쯧쯧쯧.”

“뭣이.”

당한 놈이 불쌍하다는 듯 연민의 눈빛으로 입을 다시는 이자룡을 보며 조천우가 발끈했다. 화가 꼭대기까지 오른 모양이었다. 곧 터질 것 같은 화를 하산(下山)시 키게 하기 위해 남궁상이 중재를 하고 나섰다.

“이보게들, 싸우지 말게나. 그만 화 풀라고. 우리끼리 싸워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남궁상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 놓았지만 아직 화가 삭지 않은 듯 조천우가 씩씩거렸고, 이자룡은 혀를 날름거렸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둘이서 쿵짝쿵 해 가며 담당 대사를 늘리는 둘이었다.

“그래도, 사상자가 없었던 게 정말 다행이었어요.”

조용히 남궁산산이 말했다. 그 점은 그녀로서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던 점이었다.

“하지만 피는 많이 봤지.”

금영호의 말에 모두들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정말 피를 많이 봤다. 머리 수만 믿고 쳐들어오는 놈들을, 살생을 자제한답시고 사지(四肢) 중 하나만 골라 끊었던 것이다.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피를 덜 본 것은 아니다. 사지 중 하나를 잘랐으니 그 단면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난전(亂戰) 중 에서 그대로 뒤집어써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끼리 주고받는 알 수 없는 대화들을 들으며 백석동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묵묵히 듣는 것뿐이었다.

주작 단원이 겪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그들이 중양표국의 표행과 동행하여 남창을 향하여 오고 있었는데 사천의 경계로 들어서는 산 속에서 대략 500명을 헤아리는 산적 떼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매복 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중양표국의 뒤에는 아미파가 있다는 것을 녹림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중원 십대 표국을 모르고서, 어찌 도적질을 하겠는가. 그것을 알면 서도 그렇게 덤비는 것을 보면 단단히 각오하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산적들은 행선지를 알아 내어 매복을 하고 있었다.

표물을 빼앗으려고 대기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미친 듯이 덤벼들었고, 주작 단원들이 그들을 막는 사이 표사들은 표물을 지키기 위해 대열을 정비했다. 하지만 아 무도 주작단 16명의 저지선을 뚫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지 중 하나를 잃고 내뺄 뿐이었다. 그렇게 반수 가까이를 병신으로 만들어 놓으니 그 놈들 중 두목으로 보이 는 놈이 나섰다. 하지만 웃긴 게 한 산채의 주인이라는 자(者)가, 그것도 십대 표국의 하나를 털려고 했던 자들의 두목이 시퍼렇게 멍든 오른쪽 눈과 덕지덕지 딱지 가 내려앉아 유난히 붉고 지저분해 보이는 입술을 하고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가 막혀 웃은 그 웃음을 비웃음으로 알았는지, 이에 발끈한 산적 두목이 달려들었고 화산의 조천우가 나서서 그를 상대했다. 조천우의 가벼운 두 번 칼질에 두목 은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은 채 부하들에게 실려 갔고, 사기를 잃은 산적들은 기세를 잃고 물러갔다. 주작 단원 부상 전무(全無). 표사 몇 명만이 약간의 부상 을 입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무사하셨군요. 정말 천행(天幸)입니다. (노학 사형만 빼고…….)”

“천행은 무슨, 다 실력이지.”

심려의 말에 찬물을 끼얹으며 얄미운 말을 지껄이는 노학이었다. 저러니깐 존경을 못 받지, 라고 백석동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가 더 큰 문제였어.”

현운이 약한 미소를 띄우며 남궁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그렇지?’라는 물음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남궁상은 다시 한 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주작 단원 전원이 ‘맞다’는 의미의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예, 두 번째요?”

현운의 난데없는 말에 머리 속으로 무수히 의문 부호를 그려 보았지만, 백석동 그 자신이 사건을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사건 당사자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정보에 대한 갈망과 끝없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그 자신이 개방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한 번 더 있었지, 습격이.”

뒷말을 흐리며 금영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날도 역시 지금과 마찬가지로 무척 맑은 날씨였다.

“습격은 한 번 더 있었어. 이번에도 역시 매복이었지. 우리들로서는 놈들이 어찌 그리 잘 알았는지 의문스럽기만 했어.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이번엔 저번의 호골 채보다 인원이 거의 2배나 넘는 1000명이 떼거지로 덮쳐 들었어. 그때는 좀 망막하다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야.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밀려오는데 자네라면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우리들은 이번에도 피식 웃었어. 왜 그랬냐고? 너무 웃겼거든.

이번에는 말이지, 두목처럼 생긴 놈은 멀쩡한데 그 옆에서, 입은 행색이나 모양새가 나 부두목이오, 라고 얼굴에 적어 놓은 산적 놈의 몰골이 지난 번 만났던 호골 채(虎骨寨)의 채주 패호(覇虎) 중광과 똑같았기 때문이야. 시퍼렇게 멍든 눈과, 딱지 앉은 붉은 입술. 어디 하나 틀린 게 없더군. 꼭 같은 사람에게 당한 모습이었지. 그의 시퍼렇게 멍든 눈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지. 그 위치와 크기, 그리고 색상, 모든 걸 종합해 볼 때 같은 사람에게 같은 시기에 당한 게 틀림없었어. 응?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고?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에게 당한 자국이라면 멍은 이미 사그라졌어야 했다고? 한 달을 넘게 가는 멍이 어디 있냐는 말이지.

하지만 있었어. 같은 시기에 당하지 않았다 뿐이지 같은 사람에게 당했을 수도 있잖아……. 뭐, 사람이야 돌아다닐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으니깐. 하지만 틀림없이 같은 시기에 당한 거야. 잡아서 족친 놈이 얘기해 주더군. 한 달 보름 전에 어디론가 놀러 갔던 부두목이, 시퍼렇게 멍든 눈과 터진 입술을 하고서 돌아와 이 습격 계 획을 짰다는 거야. 그러니깐 같은 시기가 틀림없었지. 한 달 반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는 멍이라? 분명히 범인은 어떤 고명한 수법을 사용했을 거야. 그렇지 않고 서야 그럴 수 없지.

어쨌든, 부두목이란 놈은 그랬다 치고 두목인 그 용골채(龍骨寨)의 채주란 놈은 만만찮은 놈인 것 같았어. 패룡이란 별호를 가지고 이름이 우악이란 놈이었지. 산 도적 주제에 용(龍) 자를 쓰는 건방진 놈이었어. 그래도 그 놈은 너도 알다시피 녹림 72채 중에서도 중간은 한다는 용골채를 떠맡고 있는 녀석답게 꽤 강했지. 뭐, 저번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놈도 별수 없었어. 귀두도를 휘두르며 겁 없이 달려들던 패룡(覇龍)이라는 놈도, 당삼(唐三)이가 던진 돌멩이 세 개에, 동시에 천(天), 지(地), 인(人)을 뚫리고 저 세상으로 가 버렸지. 상중하 단전을 동시에 꿰뚫렸다는 얘기야. 죽는 건 당연했지.

근데 이번엔 이 산 도적 새끼들이 두목을 베어 넘겼는데도 마구 달려들더라고. 우린 좀 당황했지. 두목만 골로 보내면 다들 알아서 물러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두 목이 베여 넘어갔는데도, 복수한답시고 덤벼들다니……. 하는 수 없이 우리가 다시 놈들을 저지했어. 그런데 우리 저지선은 뚫리지 않았지만 우회에서 표물을 치는 놈들이 자꾸 나오더라고. 우리로서도 그 놈들은 어쩔 수 없었지. 앞에서 몰려오는 놈들 막아 내기도 손이 모자랐거든. 떼거지로 덤벼드니 원… 저지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어. 넓지 않은 산길이어서 겨우 막아낸 거야. 평야에서 덤벼들었으면 우리들로서도 위험했지. 그랬다면, 우리들은 몰라도 표물과 표사들은 무사 하기 힘들었을 거야.

뭐, 그래도 역시 중원 십대 표국이란 이름은 허명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더군. 국주 장우양은 쌓아 놓은 불만을 풀기라도 하듯 검을 휘둘러 대더라니깐. 그 동안 쌓 인 게 많았었나 봐. 일반 표사들도 2인 1조를 이루어 싸우는 게 졸개 산적한테 칼 맞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 그런데도 그 놈들은 머리 수 믿고 계속 덤벼들었어. 표 사 애들이 가끔씩 위험해지면 당삼이가 암기를 던져 구해 주곤 했지, 안 그랬으면 피해가 꽤 컸을 거야. 이래저래 애들 구하다 보니 당삼이는 암기가 떨어져서 땅바 닥에 널린 돌멩이를 잡아다가 던졌지. 그래도 그거 한 개 맞으니깐 다들 픽픽 쓰러지더군. 뭐, 암기가 없이도 맨손으로 후려치니깐 찍소리 못 하고 꼬꾸라지긴 마찬 가지였지.

뭐? 왜 아까부터 당삼, 당삼 거리냐고? 아, 당삼은 당철영이의 별명이야. 우리들은 모두 당삼이라고 불러. 그렇다고 해서 행여 너도 철영이를 당삼이라고 부를 생 각은 꿈에도 하지 마. 쥐도 새도 모르게 저 세상으로 여행 떠나는 수가 있으니깐. 우리는 수뇌부만 중점적으로 찾아 베어 버렸어. 그 눈 주위가 파란 부두목도 무사 하진 못했지. 한 반쯤 베어 넘기고 반병신에 불구자로 만들어 놓았더니 놈들이 그제야 설설 물러나더군.

끈질긴 놈들이었지. 꽤 힘든 싸움이었어. 표사들 중에선 부상자도 많이 나오고. 하지만 표사들 중에 사상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기적이었어.” 기적이라는 말과 함께 금영호는 긴 이야기를 끝냈다.

“그땐 좀 서늘했어, 등짝이.”

현운이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머리 수만 믿고 속절없이 당해 쓰러져 가는데도 계속해서 덤비더군.”

노학이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표사들이 많이 다쳤지. 표국의 타격이 컸어.”

“이 옷도 그때 염색된 것이구요.”

달 그림자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모용취가 말했다. 그녀의 기념비적인 첫 대사였다.

“암기가 부족해 돌멩이를 주워 던졌지만, 뭐 그런 놈들이야 장돌 하나면 충분하니깐.”

당철영이 말했다. 그도 그때 톡톡히 활약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중양표국에 상당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리라.

“베어 버린 게 반, 도망간 게 반이었지. 각각 500명 정도 될 거야.”

일일이 세어 봤다는 말투로 현운이 말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백석동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가 놀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그래서 백석동은 지금 충분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 그의 입은 턱이 빠져라 딱 벌어져 있 었다.

“1000명과 싸워 이겼단 말입니까? 고작 16명이서…….”

“1000명은 무슨, 500명이지. 쓰러뜨린 사람들은 말이야. 그리고 16명이 아니야. 표국 사람도 100명은 넘었으니.”

금영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근데 그 놈들은 뭘 믿고 그렇게 덤벼들었단 말입니까?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구요? 당장은 어찌되겠지만, 그 후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 녹림 72채로서도 아미파 (峨嵋派)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탐탁치 못한 일일 텐데요?”

백석동으로서는 당연히 떠오르는 의혹이었다. 아무리 녹림 72채의 힘이 강하다고는 하나 아미파를 적으로 돌리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아미파를 상대한 다 함의 의미는 일개의 문파를 상대한다는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아미파와 그에 동조하는 모든 세력과의 싸움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그건 말이지 그 습격은 호골채하고 용골채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고 하더군. 몇 놈 잡아다가 물어 봤지.”

끼여 들듯 노학이 말했다. 몇 놈 잡아 족친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적당히 만져 주니, 상대는 알아서 술술 잘도 불어 주었다. 그 적당의 기준이 도대체 애매모호했 지만……..

“예? 그럼 더욱 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아니 호랑이 간을 삶아 먹었지, 어떻게 중원 십대 표국의 하나인 중양표국과 그 뒤를 떡하니 버티고 있는 아미파를 상대 할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녹림 72채의 배경도 없이 일 개 산채만으로 말입니다. 아미파와 시비가 붙을 게 불을 보듯 뻔한데요. 죽으려고 용을 쓴 거라면 참 더럽게 썼군요.”

“아, 놈들로서는 그게 마지막 일이었다고 하더군.”

금영호가 설명해 주듯이 말했다.

“예?”

“그 건을 마지막으로 손을 떼려고 했대. 산적질 그만둔다고. 표물 턴 다음에 그걸 배분해 가지고 잠적하려고 했었나 봐. 이번 건수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번 일만 성공하면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 그래서 모든 인원을 다 끌고 쳐들어온 거야. 산채를 지키는 인원까지 모조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만큼 대단한 물건이 운반중이었단 말입니까? 한 산채의 운명을 걸 만큼?”

“응, 나도 나중에 들었는데 그 뭐라고 하더라……. 동쪽 끝에서 가져온 그래, 고려 청자, 원래 고려 상감 어쩌고 청자인데 줄여서 고려 청자라고 부르지. 그걸 세 개씩이나 운반하고 있었다더군. 얘기를 들어 보니 그 중 하나를 팔면 하나의 성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거야. 특히 이번에 운반했던 건 그 고 려 청자 중에서도 극상품(極上品)이라는 이야기지. 그 정도면 운명을 걸 만했지. 가질 수 있다면 평생을 놀고 먹을 수 있었을 테니깐.”

“쩍.”

백석동은 입을 쩍 벌렸다. 겨우 술 담는 곳 아니면, 단순한 장식품 정도로만 생각해 온 도자기 하나의 가치가 성을 살 가치라니. 거지 주제에 언제 그런 거 본 적이

나 있고, 들은 적이라도 있겠는가. 그저 놀랄 뿐이었다.

“야, 입 찢어지겠다. 그리고 입 냄새 나니깐 입 닫아.”

노학이 입을 딱 벌리고 서서 충치 개수는 몇 개인지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백석동에게 면박을 주었고, 금영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문제야. 매복 따위야 이 일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문제는 왜 그들이 전 인원을 이끌고 매복해 있었냐는 거야. 전 인원을. 그것도 산채를 지킬 사람 도 남겨 놓지 않고 말이야. 그 놈들은 우리들이, 아니 중양표국이 뭘 운반하는지 알고 있었어. 우리들조차 모르고 있었던 걸 그 놈들은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 깐 전 인원을 동원해서 산채의 모든 걸 걸고 덤벼들 생각을 한 거야.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무리씩이나.”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드는 금영호였지만 무엇인가 있다는 것만이 어렴풋이 느껴질 뿐 그것은 매우 흐릿하고 희미하기만 할 뿐이었 다.

“분명 국주는 극비리에 이 일을 추진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도 알아 내어 산채의 사활을 걸고 덤벼들다니…….”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는 금영호였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지독히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백석동을 보며 금영호는 웃어 보였다.

“나도 그것이 알고 싶네.”

금영호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그들의 귀환을 축복하는 푸른빛으로 끝없이 높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창천에서 내리비치는 태양은 오늘따라 따 스하기만 했다. 대문 안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란스러움과 함께 수백의 사람들이 그들을 보려고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돌 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천무학관으로.. 정말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