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23화 – 사천 제일 옥루주 (1권 끝)

사천 제일 옥루주

주작 단원들이 기적같이 귀환하기 45일 전,

그러니까 주작 단원이 아미산을 떠난 바로 다음 날, 오후. 아미산 한 준봉의 중턱에 있는 자그마한 모옥에서 한 가닥의 하얀 연기가 넘실넘실 춤을 추며, 하늘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모옥으로서는 오랜만에 뿜어 보는 연기였다. 할아버지가 바람 부는 툇마루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뿜어 내는 연기처럼 아스라이 하늘로 올라가는 하얀 연기. 그 연 기의 끝자락에서 지금 한 청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짓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요리였다. 한 5개월 동안은 다른 사람들이 밥을 짓고, 반찬하고, 상 을 차렸는데, 그들이 떠나고 없으니 이제는 그가 직접 밥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맛있는 냄새가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분간은 지금은 떠나고 없는 제자들이 수련의 하나로 산을 뛰어다니며 사냥해 온 고기들이 많았고, 또한 캐내 온 산나물도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당장은 궁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제자들을 떠나 보내기 10일 전부터 평소 할당량의 세 배를 부과시켜 부려먹은 보람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인지 콧노래를 부르며 상을 차리는 청년의 뒤에서 늙수그레한, 하지만 힘이 있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류연아!”

등 뒤를 돌아본 비류연은 물끄러미 사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고개를 약간 옆으로 꺾고 삐딱한 자세로, 그의 시선이 찌를 듯이 노인의 전신 을 훑고 지나갔다. 제자라는 놈이 삐딱하게 서서 사부의 용안을 말없이 째려보기만 하니, 사부는 시건방짐과 동시에 답답함을 느꼈다.

“뭘 그리 빤히 쳐다보냐? 부끄럽게……. 내 안면 빵구나겠다.”

그만 좀 쳐다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목욕했어요?”

목욕? 몸을 씻고 청결히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 같다. 난데없이 엉뚱한 말이 비류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말투를 보아하니 냄새 때문에 물어 본 말은 아니었다. 확 인의 의미였다.

“어, 알았냐? 그래, 어제 때 좀 밀었다. 어때, 오늘따라 백아(白阿)가 더욱 더 새하얗고 뽀송뽀송해 보이지 않느냐. 어제 저녁에 계곡 물가에 가서 수염 좀 빨고, 때 도 좀 뺐지.”

사부는 별거 아닌 일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얘기를 했다. 여기서 사부가 말하는 백아(阿)란 바로 사부의 수염 이름(髥名)을 가리킨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미염 공(公) 관운장을 존경하여 그의 뒤를 잇는 제2의 미염공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부였다.

그래서 사부는 특히 수염에 신경을 많이 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白髮)과 새하얀 백미(白眉), 그리고 아름답고 깨끗한, 단전 아래까지 내려오는 수염은 사부 의 자랑이었다. 그런 탓에 무슨 큰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면 자식 키우는 아버지처럼 신경을 많이 쓰는 사부였다. 한 술 더 떠서, 궁극적으로 자기 수염에 이름까지 지어 붙여 놓는 황당한 짓을 한 사람이 바로 사부라는 사람이었다. 수염의 이름이 바로 백아(阿)! 자신의 신체 일부에 닮은 이름을 부여하다니, 참 기가 찰 노릇이 었다.

“왜 그렇게 요란을 떠셨어요? 다 늙어 가지고 남사스럽게.”

“간만에 출현했잖느냐. 나도 멋 좀 내야지. 좋은 인상과 깨끗하고 수려한 용모는 곧 인기와 직결되니깐 말이다. 인기 관리 차원에서 힘 좀 쓴 거지.”

“예?”

“아, 아니다. 그냥 대충 넘어가.”

뭔가 꺼림칙한게 있는지 말을 얼버무리는 사부. 별로 맛있게 얼버무리지 못한 사부는 다른 화제로 이야기의 대상을 전환시켰다. 사실 이 화제 전환은 비류연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웬일이야? 요즘 자주 안 보이고 돌아만 다니더니 오늘은 밥을 다 하고. 오늘은 해가 동쪽으로 지겠구나. 외도(外道)는 이제 끝냈느냐?”

약간 뜨끔뜨끔거리는 비류연이었다.

“아, 별일 아니에요. 간만에 좀 한가로워서요. 거창하게 외도(外道)는 무슨……. 바람난 아줌마도 아닌데…….”

수상한 사람 보듯 하는 사부의 시선이 비류연의 얼굴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최근 피부 관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비류연으로서는 치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 다.

“너 요즘 한 5개월 간 소홀했잖냐? 맡은 일도 제대로 안 하고, 그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이거라도 생겼어?”

사부가 주책없이도 새끼 손가락을 추켜올려 세운 다음 비류연의 눈 앞에서 까딱거렸다. 하지만 맹렬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하는 비류연, 사부는 엉뚱한 생각 을 의심이랍시고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근거 없는 의심에 휘말려 손해 보고 싶지 않은 비류연이었다.

“아니, 여자는 무슨. 괜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여자 아니면 뭐냐? 밤에도 잘 돌아오지 않고 외박은 빈번하고, 세끼 꼬박 챙겨 주기는 했지만 여기서 지은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지어 가지고 왔잖아. 게다가 음

식 맛이 너의 맛이 아니었다. 뭐, 그 동안 술을 자주 사다 바친 것은 용서해 줄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음식들은 분명히 여자의 손맛이었어. 그러니, 순순히 자 백해라.”

식은땀이 이마에 맺히는 비류연이었다. 그 동안 잦은 외박, 외출, 외유를 무마시키기 위해 줄기차게 술을 사다 바쳤는데 이제 그 효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정말 아니라니깐요, 여자는 무슨, 주책스레…

전술상 발끈거리며 아무 일도 아니었다, 라는 태도로 말끝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비류연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사부가 말했다.

“어, 그건 뭐냐?”

“예, 뭐요?”

“왼쪽 옆구리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그거 말이야.”

흠칫, 순간 비류연의 신경이 급속히 팽창하여 금(琴)에다 걸고 연주해도 될 만큼 팽팽해졌다.

“아니, 뭐가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내 눈은 틀림없어. 귀신을 속이지 감히 날 속이려 들어. 좋은 말로 할 때 바른대로 불어라.”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 사랑하는 제자가 아니라면 아닌 겁니다. 그냥 솜이 삐져 나온 것뿐이에요. 그저 솜이…….”

하지만 지금 비류연이 입고 있는 옷은 무명옷, 솜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대충 얼버무리며 급히 돌아서는 비류연의 품으로부터 순간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배 신이었다. 운명의 여신은 그를 배신한 것이다.

“툭.”

묵직해 보이는 소리, 예쁜 비단,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비단 주머니라고 한다. 알록달록한 붉은 빛과 그 위의 화려한 자수가 놓여 있는 꽤 비싸 보이는 주머니였 다. 현재의 비류연의 생활 상태로 볼 때 분명한 사치품이었다. 그러니 사부로서는 그 출처와 내용물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의 두 눈에서 섬광이 번쩍거렸다. 번쩍이는 섬광의 강도는 사부의 귀가 방금 난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포착해 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소리는 바로 돈 소리라는 것을…….

“다 늙어서 귀는 밝아 가지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일을 무마시킬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웬 거냐?”

고압적인 목소리, 대답 안 하면 실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물씬 풍겨 있는 목소리였다. 비류연은 난처했다. 아직 사부의 실력 행사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 족했기 때문이다. 비뢰도의 마지막을 완성시키지 못한 이 시점에서, 사부의 실력 행사를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이거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깐요. 그냥 단순한 사례예요, 사례, 상대로부터의 자그마한 마음의 표시죠.”

“마음의 표시치고는 꽤 묵직해 보이는구나.”

사부는 여전히 수상스럽다는 시선을 찌릿찌릿 보냈다. 비류연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비류연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무마시켜야만 했다. 밝 은 내일을 위하여!

“아니, 저, 있잖아요. 강해지고 싶다는 애들이 있었거든요. 자꾸 저한테 강해지고 싶다고 조르는 거예요. 제가 사부님 제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한 강함 한다는 걸 알더라구요. 울고불고 매달리는데 거절할 재간이 없더라구요. 제가 마음이 좀 여리잖아요. 그래서, 강해지게 해 줬죠. 사부님 제자가 그런 것도 못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역시 강해지기 위해서는 시련이 최고 아닙니까?”

“그래서?”

“아,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 좀 했죠. 걔들 좀 강해지게 해 주세요, 라구요. 그랬더니 부탁받은 사람들이 참 고맙다면서 이렇게 돈까지 쥐여 주더라구요.”

“응? 네가 그들한테 돈을 주면 줬고 사례를 하면 했지, 어떻게 부탁 받은 그쪽에서 너한테 돈을 쥐여 주고 사례를 하냐? 그쪽에 부탁한 네가 사례를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글쎄요? 그렇게 깊은 것까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그쪽에서 그런 걸 알려 주어서 참 고맙다고, 그런 훌륭한 일을 하다니 복 받아야 된다고 해서요. 이건 조 그만 사례니깐 받아 달라지 뭐예요. 정보료라나 뭐라나. 그들에게 시련을 내려 주는 데 적극 동참하겠다면서 슬그머니 집어 준 거예요.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더라구요. 아 그래서, 제가 아니 어떻게 아는 사람들을 강하게 해 줄 사람들에게 돈을 받을 수 있겠냐며, 극구 사양하는데도 자꾸 주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이렇게 받아 온 거예요. 그 동안 사부님께 소홀했던 죄라도 갚을 겸, 사부님 좋아하시는 옥루주라도 한 병 사 드릴 까 하구요.”

“옥 루 주!”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옥루주 한 병이라는 소리에 침이 꼴딱거리며 넘어갔다. 비류연의 공략은 성공한 듯 보였다.

“예, 옥루주요. 그것도 20년짜리 알짜배기라구요. 그게 좀 비싸잖아요. 그 동안 사부님께 효도도 못 했는데 오늘에서라도 조금이나마 하려구요. 저녁에 제가 장을 봐 오면서 사 가지고 올게요. 이미 홍아루에 주문을 넣어 놨습니다.”

“이, 이십 년(二十年)!”

20년이라는 숫자에 눈 동그랗게 뜨며 침 꼴딱 삼키는 사부였다. 옥루주는 사부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지만 비싸서 자주 마시질 못했다. 그것도 숙성 연도 3년 이하 의 옥루주였다. 20년 산이라면, 언제 사부가 마셔 보기라도 했겠는가. 사천 제일주(泗川第一酒) 홍아루(紅阿樓) 비주秘酒) 옥루(玉漏) 20년(二十年)이면 아미 일

대, 아니 사천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최고 품질의 술이다.

숙성 비법은 절대로 공개되지 않는 홍아루 극비 중의 극비이다. 그 맛이 얼마나 어지간하면 아미의 계율도 옥루 앞에선 효험을 잃는다, 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겠는 가. 옛날부터 홍아루에서 옥루를 마시다가 잡혀 올라가 계율원에서 벌을 받은 아미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미가 여인 중심의 문파라고는 하지만 남 제자가 아 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미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남 제자를 받기 시작했고, 여 제자들보다는 위상이 낮지만 강호에서는 절대 무시 못 하는 실력을 가진 존재들이 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옥루의 맛과 향에 혹해 금주(禁酒)의 계율을 깨고 산을 내려와 몰래 마시다가 계율원 집법당에 끌려 올라가는 사건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종종 있 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옥루인 데다가 20년짜리면 상품(上品) 중에서도 극상품(極上品)이었다. 술을 밥보다 좋아하는 사부에게는 제격이 아닐 수 없었 다.

입이 가로로 쭉 째지는 사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움의 고개를 끄덕이는 사부였다. 이것을 보며 이제 위험은 지나갔다고 생각한 비류연은 이마의 땀을 훔쳐 냈다. 일이 제대로 무마된 것 같았다. 옥루주가 좀 비싼 술이긴 하지만, 그 동안의 일과 어제의 일을 무마시키는 데 들인 희생치고는 외려 싼 느낌마저 있었다. 아, 사실 옥루 20년이면 상품 중의 극상품이고, 사천 제일주라는 이름답게 그 가격은 장난이 아니었다. 가격으로 따지면 옥루주 20년 산은 금엽(金) 서너 장이 오 갈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일반인들은 평생 가도 마셔 보기 힘든 술인 것이다. 그럼에도 적은 희생을 운운한 것은 비류연이 홍아루紅阿樓)에서 옥루주를 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 다고 해서 비류연이 사부에게 공갈을 쳤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분명히 옥루주를 가져다가 사부에게 바칠 예정이었다. 그에게는 어제 위에서 말한 아는 사람들 과 만났을 때 좋은 말(?)을 통해 얻어 온 옥루 20년이 한 병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란 다정다감한 대화를 통한 의사 교환을 말한다.

“아, 어서 올라가시죠, 사부님.”

점심상을 다 차린 다음 비류연은 얼른 사부를 재촉했다. 이럴 땐 상대가 딴 생각 못 하게 빠릿빠릿하게 행동하는 게 최고였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잘 넘어가는 듯하던 사부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어, 류연아. 그런데 너 소매에 빨간 게 묻었구나?”

맛깔스럽게 차려져 있는 상의 양끝을 잡고 있는 비류연의 소매에는 사부의 말처럼 빨간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걸 발견한 사부가 비류연에게 물어 본 것이었다. “아, 이거요. 안면이 적은 사람들과 다정다감한 대화를 통해 의사를 교환하다가 좀 묻은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그래? 내가 보기엔 누구 얼굴을 으깨다가 뭐가 튄 것 같은데.”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비류연은 사기 없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흠, 그래?”

자신의 밝은 미소 앞에서도 아직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있는 사부가 좀 불만스러운 비류연이었다.

“다 늙어서 의심은 많아 가지고…….?

비류연은 마음 속으로 사부를 씹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살살하고 다녀라. 네가 때리면 2~3개월 간은 멍도 안 없어지잖니.”

살살이라는 단어가 사부의 입에서 나오다니 세상 말세라고 느껴졌다. 사부 사전에 ‘살살’이 어디 있고, ‘적당히’가 어디 있는가? ‘정도(程度)’라는 단어도 없는 사 전(辭典)이 사부 사전이다. 그건, 그 동안 근 10년을 같이 보내 온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사부가 한 말도 본심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마 제자 앞이라 서 모양 잡으려고 그런 게 틀림없었다. 이런 사실들이 불만이었지만, 비류연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사부님.”

“그래, 그래. 근데 감자 조림은?”

“예, 물론 준비했어요, 사부님.”

“그래, 그럼 어서 올라가자꾸나.”

희색 만연, 생기 발랄한(?) 얼굴을 하며 사부가 말했다. 두 사람은 툇마루에 올라가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상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가을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주작 단원들이 아미산을 떠난 다음 날 오후, 아미산 한 준봉의 중턱에 위치한 모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비뢰도』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