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0권 15화 – 나예린의 족쇄

비뢰도 10권 15화 – 나예린의 족쇄

나예린의 족쇄

– 정신적 외상(外傷)

그 남자는 밤처럼 어두운 옷을 입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를 본 독고령의 눈에 처절한 한기(寒氣)가 흘렀다. “크윽!”

그 남자를 본 순간 독고령은 안대를 찬 왼쪽 눈이 불로 지지듯 아파왔다.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한쪽 눈을 빼앗은 남자를. 독고령은 절대로 그를 용 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마음을 농락한 저 남자를! 저 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절치부심(切齒腐心)했던가!

스르릉.

그녀의 검집에서 천천히 검이 뽑혀져 나왔다. 그녀가 뻗은 검극劍極)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와 그의 심장을 겨눴다. 이제 그토록 기다렸던 복수의 기회가 왔다. 하 지만 검극의 살기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독고령은 그 미소가 몸서리쳐질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한때 저 미소에 넘어갔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려 검 끝에 집중했다.

“오늘부로 네놈의 잔상을 내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겠어.”

말을 마친 독고령이 힘껏 도약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검극이 그의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그녀에게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는 전혀 피하려는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왜?”

독고령은 어쩐지 상황이 너무 쉽게 흘러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상대는 이 정도 공격에 맥없이 쓰러질 사내가 아니었다. “크크큭, 이제 마음이 편한가?”

검이 심장을 관통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내는 뜻밖에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심장을 관통한 검날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두 사람 사이는 이제 검 날의 남은 길이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선혈이 검날을 타고 그녀의 손까지 흘러내려 왔다.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피는 그녀의 손을 타고 떨어지며 바닥에 짙은 혈화(血花)를 그렸다.

“후후후, 그렇게 한다 해도 넌 내 손을 빠져나갈 수 없어. 너는 내 꺼야.”

그가 손을 들어 독고령의 턱을 들었다. 사내와 독고령의 시선이 한데 마주쳤다. 설명하기 힘든 이상야릇한 상황이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가 져갔다. 독고령은 거부하려 했지만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내와 독고령의 입술이 천천히 포개어졌다. 그녀의 입 속으로 사내 입 안의 피가 울컥하고 역류했다.

“이것 놔!”

독고령은 사내를 힘껏 밀치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파밧!

그녀의 검이 그의 신형을 두 쪽으로 갈랐다. 그러나 그때 이미 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녀는 사내의 피가 묻었던 손을 바라보고 입가를 만져 보았다. 그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자신의 검 이 그의 심장을 꿰뚫던 느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그녀의 입술은 그의 비릿한 피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 분이었다. 몸서리쳐지는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사부님! 사부님! 사부님!’

그녀는 자신의 마음의 지주가 되는 사부 검후 이옥상을 애타게 불렀다.

‘그토록 잊고자 노력했거늘……..

결국은 아무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자신이 그 일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 마도인에게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굴레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깨달았다.

“예린이는 괜찮을까?”

독고령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깨닫자 불현듯 자신의 사매가 걱정되었다. 이곳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검은 그림자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래! 사부님께 그런 효과를 내는 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걸 이제와서야 떠올릴 수 있다니……. 그런 마도인에게 마음이나 사로잡히고…….? ‘

“나도 아직 수련이 덜 되었구나!”

그때 그녀의 뇌리를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만일 사매가 그 일을 다시 겪게 된다면..

갑자기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왔다.

“안 돼! 다시 그 악몽을 그 애가 겪게 할 수는 없어. 절대로 안 돼!”

독고령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나예린을 찾아야 했다. 지금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여유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된 어둠 속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그 괴물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며 어둡고 무시무시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 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뛰어넘지 않는 한,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마음속에 사는 괴물을 이기기 힘들다. 어둠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 며 받아들이고, 그런 다음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 어떻게 당신이?”

나예린은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눈앞에 자신이 꿈속에서조차 잊으려고 했던 악연(惡緣)을 지닌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사십대 중년 남자의 눈은 그때와 마 찬가지로 정상이 아니었다. 그때도 저 남자는 저렇게 핏발선 광기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모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미모는 너무 어릴 적부터 빛을 발했었다. 그녀의 미모에는 어렸을 때조차 남 자들을 집요한 욕정 속에 빠뜨리는 신비한 마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꽃이 피기도 전에 이미 향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 는 불가사의한 마력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신상에 자꾸만 위험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신비한 향기가 자꾸만 꽃에 벌레들이 꼬이게 만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저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바로 10년 전 저 남자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 일로 나예린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外傷)을 입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의 남성혐 오증은 극에 달했다 할 수 있었다.

순수한 순백색의 소녀에게 치명적인 얼룩을 묻히려 한 이는 바로 항상 믿고 따르고 의지하던 그녀의 숙부였다. 평소에 그는 존경할 만큼 정의로운 무림인이었다. 그러나 그날, 어린 그녀에게 그는 단지 한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어,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죠?”

그녀는 계속해서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욕정에 가득 찬 눈을 한 채, 광소(狂笑)를 흘리며 그녀를 향해 한 발 두 발 다가오고 있었다.

“흐흐흐, 너의 두 눈동자는 양귀비꽃처럼 매력적이고, 너의 미소는 독(毒)보다 더 치명적이야. 그 순결한 눈이 나를 미치게 해. 너의 진주 같은 순백의 피부, 석류처 럼 새빨간 입술, 흑단처럼 검은 눈동자… 흐흐흐. 예린아, 난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구나. 참을 수가 없어!”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관객의 동의 없이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숙부의 눈이 추악한 욕정으로 번뜩이고, 사악하고 뒤 틀린 욕정으로 뭉쳐진 사념(念)이 그녀의 눈을 통해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짐승의 눈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나예린은 숙부의 마음 밑 바닥에 존재하는 그의 본성을 보았다. 오직 자신의 쾌락만을 생각하고 다른 모든 것은 고려하지 않는 추악하고 이기적인 짐승의 본성!

그녀는 가장 가까운 혈육 중 하나인 숙부에게서 그런 짐승의 모습을 본 것이다. 어린 그녀가 그 충격을 견디기는 무리였다. 나예린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서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에게 검이 있다면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약한 그녀가 물리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몸이 마음대로 되 지 않을 때는 마음이 현실을 왜곡시킨다.

그녀의 마음은 본능적인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싶었다.

“자, 이리 온. 착하지. 자, 이리 와 이 숙부의 품에 안기렴. 나의 작은 새야.”

‘꿈이야… 이건 꿈이야.”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가 다가올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가 한 살씩 적어져서 다시 열 살 때의 나약한 소녀가 되고 있다고 느꼈다. 열 살 때 겪었던 악몽이 다시 눈앞에 재현되고, 그날의 자신이 지금 현재의 자신에게로 투영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온몸 구 석구석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저벅 저벅 저벅.

그녀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가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어둡고 추한 욕망을 번들거리며 다가올 때마다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지금의 그녀는 빙백봉이란 이름 높은 검 객의 제자이자 검후의 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열 살배기 겁 많은 소녀일 뿐이었다. 그녀의 애검은 얼어붙은 듯 전혀 뽑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턱!

나예린의 등이 동굴 벽에 닿았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이제 그 자는 그녀의 눈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자,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구나. 자, 이리 온. 나의 작은 새야.”

‘그래! 사부님께 그런 효과를 내는 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걸 이제와서야 떠올릴 수 있다니……. 그런 마도인에게 마음이나 사로잡히고…….? ‘

“나도 아직 수련이 덜 되었구나!”

그때 그녀의 뇌리를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만일 사매가 그 일을 다시 겪게 된다면..

갑자기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왔다.

“안 돼! 다시 그 악몽을 그 애가 겪게 할 수는 없어. 절대로 안 돼!”

독고령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나예린을 찾아야 했다. 지금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여유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된 어둠 속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그 괴물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며 어둡고 무시무시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 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뛰어넘지 않는 한,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마음속에 사는 괴물을 이기기 힘들다. 어둠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 며 받아들이고, 그런 다음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 어떻게 당신이?”

나예린은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눈앞에 자신이 꿈속에서조차 잊으려고 했던 악연(惡緣)을 지닌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사십대 중년 남자의 눈은 그때와 마 찬가지로 정상이 아니었다. 그때도 저 남자는 저렇게 핏발선 광기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모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미모는 너무 어릴 적부터 빛을 발했었다. 그녀의 미모에는 어렸을 때조차 남 자들을 집요한 욕정 속에 빠뜨리는 신비한 마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꽃이 피기도 전에 이미 향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 는 불가사의한 마력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신상에 자꾸만 위험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신비한 향기가 자꾸만 꽃에 벌레들이 꼬이게 만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저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바로 10년 전 저 남자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 일로 나예린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外傷)을 입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의 남성혐 오증은 극에 달했다 할 수 있었다.

순수한 순백색의 소녀에게 치명적인 얼룩을 묻히려 한 이는 바로 항상 믿고 따르고 의지하던 그녀의 숙부였다. 평소에 그는 존경할 만큼 정의로운 무림인이었다. 그러나 그날, 어린 그녀에게 그는 단지 한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어,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죠?”

그녀는 계속해서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욕정에 가득 찬 눈을 한 채, 광소(狂笑)를 흘리며 그녀를 향해 한 발 두 발 다가오고 있었다.

“흐흐흐, 너의 두 눈동자는 양귀비꽃처럼 매력적이고, 너의 미소는 독(毒)보다 더 치명적이야. 그 순결한 눈이 나를 미치게 해. 너의 진주 같은 순백의 피부, 석류처 럼 새빨간 입술, 흑단처럼 검은 눈동자… 흐흐흐. 예린아, 난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구나. 참을 수가 없어!”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관객의 동의 없이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숙부의 눈이 추악한 욕정으로 번뜩이고, 사악하고 뒤 틀린 욕정으로 뭉쳐진 사념(念)이 그녀의 눈을 통해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짐승의 눈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나예린은 숙부의 마음 밑 바닥에 존재하는 그의 본성을 보았다. 오직 자신의 쾌락만을 생각하고 다른 모든 것은 고려하지 않는 추악하고 이기적인 짐승의 본성!

그녀는 가장 가까운 혈육 중 하나인 숙부에게서 그런 짐승의 모습을 본 것이다. 어린 그녀가 그 충격을 견디기는 무리였다. 나예린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서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에게 검이 있다면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약한 그녀가 물리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몸이 마음대로 되 지 않을 때는 마음이 현실을 왜곡시킨다.

그녀의 마음은 본능적인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싶었다.

“자, 이리 온. 착하지. 자, 이리 와 이 숙부의 품에 안기렴. 나의 작은 새야.”

‘꿈이야… 이건 꿈이야.”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가 다가올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가 한 살씩 적어져서 다시 열 살 때의 나약한 소녀가 되고 있다고 느꼈다. 열 살 때 겪었던 악몽이 다시 눈앞에 재현되고, 그날의 자신이 지금 현재의 자신에게로 투영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온몸 구 석구석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저벅 저벅 저벅.

그녀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가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어둡고 추한 욕망을 번들거리며 다가올 때마다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지금의 그녀는 빙백봉이란 이름 높은 검 객의 제자이자 검후의 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열 살배기 겁 많은 소녀일 뿐이었다. 그녀의 애검은 얼어붙은 듯 전혀 뽑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턱!

나예린의 등이 동굴 벽에 닿았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이제 그 자는 그녀의 눈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자,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구나. 자, 이리 온. 나의 작은 새야.”

“감이요?”

“네, 감이요. 좋아하는 사람이 그 어떤 미로 안에 갇혀 있다고 해도 전 찾아낼 수 있어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죠. 음하하하하!”

다시 한 번 비류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대답에 나예린은 살포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당한 그의 대답에 미처 그 대답이 뻥이라는 사실을 나예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진실은 알고 보면 매우 간단했다. 실은 비류연이 나예린의 옷자락 끝에 뇌령사를 매달아 놨던 것이다. 그 는 그 뇌령사의 뒤를 쫓아 나예린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말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휘이이잉!

갑자기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고마워요.”

그녀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만년빙정이 한순간 녹아내리는 듯한 찬란한 빛 같은 미소였다.

“그런데 비 공자도 환상은 아니겠죠?”

이곳에서는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실제인지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렇게 생생하고 싱싱한 환상 보셨나요, 나 소저?”

비류연의 싱싱함을 강조한 대답은 그녀가 횟집에서 주문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것도 그렇군요.”

나예린은 비류연의 출현으로 자신이 왜 안심이 되었는지 마음속으로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