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의 기연
•첩첩산중疊疊山中)
“여기가 어디죠?”
“글쎄요? 하지만 일단 산 것 같군요.”
벽을 뚫고 뛰어든 곳은 새로운 동굴이었다.
생명을 건 도전의 종착지 또한 무척이나 생경한 또 다른 동굴이었던 것이다. 이제 동굴은 지긋지긋했지만 사람 인생이란 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비류연은 새로운 동굴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곳이 환마동이 아니라는 것이군요.”
같은 동굴이기는 했지만 이곳은 환마동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 이곳은 환마동에 비해 동굴 표면이 매끄럽고 습기가 많았다. 게다가 환마동은 인공적인 냄새가 강한 데 반해 이곳은 자연적인 냄새가 강했다. 때문에 비류연은 누군가 내기를 건다면 절대 자신들이 방금 전까지 파묻혀 있었던 환마동이 아니라는 데, 놀 랍게도 전 재산을 걸 용의도 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도대체 어딜까요?”
이 장소가 자신들이 있던 곳과 전혀 색다른 곳이라면 그것은 불안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환마동 안에서는 구조를 기대할 수 있어도 자신들조차 모르는 이상야릇한 곳에 떨어진 이상 구조대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구출될 가능성에서 한 발자국 더, 아니 두세 발자국 정도 더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녀의 몸에 한기가 찾아왔다.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흐흐흐! 으하하하!”
너무나 극한 상황에 처한 탓에 정신이상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녀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류연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나 갑작스런 웃음에 나예린은 일순간 흠칫하며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분명 여자였다.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나요?”
솟구쳐 오르는 불안감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녀는 평상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우린 엄청 횡재한 것인지도 몰라요.”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횡재요?”
그녀 입장에서는 비류연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비류연의 정신 상태가 건재한지 살피려는 듯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겉으로만 봐서 는 아직도 제정신인 듯했다. 그게 얼마나 오래갈지는 의문스러웠지만 말이다.
“이 으스스하고 춥기만 한 동굴에서 무슨 횡재라는 거죠?”
“이런, 이런! 그렇게 매사를 부정적으로 단정하시면 안 되죠. 왜 왠강호기담기(江湖奇譚記)좭 같은 책에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전설의 고수가 깊은 동 굴에 감춰둔 금은보화와 절세 기연에 관한 전설! 우린 그 소문만 무성하고 직접 확인할 기회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기연(奇緣)을 오늘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지도 몰라요. 확률적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놀랍지 않나요?”
물론 나예린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긴 놀랐지만 그것은 경탄이 아닌 경악이었다. 물론 그녀의 경악은 보화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전설의 실현에 대한 경 악이 아니라, 비류연의 엉뚱하고 괴상하기까지 한 사고방식에 대한 경악이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
그것이 비류연에 대한 나예린의 평이었다. 비류연은 아직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거기엔 아마도 ‘축하한다! 노부가 만든 시험을 통과하다니! 너의 능력을 인정하고 여기에 나의 유훈과 나의 유산을 남긴다. 강호를 위해 요긴하게 쓰도록 하 라!’라는 글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죠.”
마치 경극 배우처럼 과장된 몸집을 섞어 가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는 완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건 분명 천 년 전의 전설적 무인이 남긴 유산이겠군요?”
말의 내용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전혀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비꼬는 기가 역력했지만 그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분명 전설적인 무공비급과 천하무적이 될 수 있는 영약이 각기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구요?”
여전히 나예린의 어조는 단조로웠다.
“그럼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돈, 돈, 도온……. 대 선배께서 후배를 위해 남겨 두신 막대한 금은보화를 빼놓을 수가 없지요. 혹시나 자신과 인연이 닿은 후 배가 배를 곯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을 테니 금은보화가 분명히 함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영화로운 황금빛은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빛을 변치 않 고 간직해 오고 있겠지요, 아아!”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황금의 휘황찬란한 빛을 망막 앞 가득히 펼쳐 놓은 비류연의 몽롱한 눈은 꿈과 환상, 망상과 억측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지금 그는 너무 현실을 한 가지 사실로 단정적으로 몰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까지 만만하지 않았다. 인생이란 수십 수백 수천 가지의 가변적 변수를 내포하고 있었 다.
비류연이 좋다고 해서, 그가 진심으로 바란다고 해서 열망과 소원이 형태를 갖추고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잔혹하다고까지 불리는 ‘현실’이라는 장벽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너무나 진지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바람에 나예린은 그에게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왠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불현듯 그녀의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황금, 비취, 홍옥, 마노, 묘안석, 진주, 수정, 금강석, 자수정, 돈 돈 돈…….”
노래하듯 자신의 상상 속의 보물들을 흥얼거리며 발걸음도 가볍게 비류연은 앞으로 나아갔다. 나예린은 하는 수 없이 그의 가볍게 날 듯한 발걸음을 뒤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10일 동안 겨우 몇 알의 벽곡단으로 끼니를 때웠음에도 불구하고 비류연은 힘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 기로 했다. 그편이 더 현명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런데 진짜로 여긴 어딜까요?”
나예린이 보검의 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가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묻혀 있었던 환마동이 아니라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겠군요. 습기나 온도차가 전에 있던 곳과 비교해 너무 심해요.”
그의 말대로 이곳은 습기가 높아 전체적으로 축축했고, 동굴 전체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동굴은 인공적인 산물이 아니라 아무래도 자연산 같아요.”
비류연이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며 말했다. 나예린이 동굴벽 한 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옥지가 벽을 한 번 훑자 손가락 끝에 투 명한 액체가 묻어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끈적끈적하고 미끌미끌한 점액질이었다.
스르륵!
점액질을 두 손가락 사이에서 비비자, 손끝이 미끄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게 뭐죠?”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지금 당장 그 질문에 답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군요.”
“그렇군요!”
대답은 간단했지만 그녀의 육감과 용안은 강력한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용안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절대 이 일을 그냥 무심히 지나치지 말라고!
“좀더 걸어 볼까요?”
불안감 때문에 지금 여기서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어두운 동굴 안은 길고도 깊었다. 친절하게도 뒤가 꽉 막혀 버려서 갈 길은 앞쪽뿐이었다. 선택의 여지 가 없었다. 비류연과 나예린은 주위에 신경을 기울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동굴은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척 불규칙적이고 정신없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동굴의 길이 하나만큼은 범상치 않았다. 비류연과 나예 린은 무한의 나선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어둠의 나선 위를 묵묵히 걷는 일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없군요.”
바람이 없으면 출구가 막혀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면 진행 방향을 감에 의존해 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운은 하늘에 맡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