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0권 20화 – 별의 강 사이로 흐르는 음률

비뢰도 10권 20화 – 별의 강 사이로 흐르는 음률

별의 강 사이로 흐르는 음률

매몰 13일째!

비류연과 나예린은 보검 한상옥령의 빛을 등불 삼아 동혈 내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다지 편한 여정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걸었다. 동굴의 경사는 상당히 제멋대로였다.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길은 제멋대로였다. 어떤 때는 아래로 급격히 경사가 졌 다가 어떤 때는 또다시 위로 급경사를 이루며 가팔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뱀이 지나다니는 길처럼 이 길은 굴곡이 심했다. 상하좌우 모두 마찬가지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게다가 복잡하게 얽힌 미로였다.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귀찮을 정도로 왔다갔다 제멋대로군요. 이것이 만일 자연의 조화로 만들어졌다면 자연은 결코 솜씨 좋은 광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 예요.”

비류연이 투덜거렸다.

“그러네요.”

나예린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동굴의 궤적은 너무나 불규칙하고 걷기 불편했으며, 뒤죽박죽 규칙성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들에게는 어디든 도착점이 필요했다. 뻥 뚫린 동혈의 중간 지점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다시 길을 찾아보죠.”

비류연이 말했다. 어느새 그는 이 여정을 주도하고 있었다. 비류연과 나예린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등불로 쓰고 있는 검을 검집에 집 어넣었다. 잠시 어둠 속에 묻혀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예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어두운 암흑의 지하 공간에 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눈의 착시 현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새파란 빛을 내는 별들이 동혈 좌우 벽과 천정, 그리고 심지어 바닥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마치 은하수가 걸린 밤하늘 같 았다. 그것은 묘한 감동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담아 놓은 듯한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천상이 아닌 지하에 뜬 별들은 영롱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빛내며 명멸했다. 아마 동혈의 암석 속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광물 성분이 포함된 모양이지만 그와 그녀에게 그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단지 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 했다.

“빛이 사라져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참모습이군요.”

비류연의 옆에 앉아 있던 나예린이 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려(美麗)!

나예린이 별을 바라보고 있는 정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렇게 부르리라. 비류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저(地底)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별무리들도 아름 다웠지만, 비류연이 보기에 그 속에 있는 나예린이 더욱 아름다웠다.

밤하늘 가득히 빛나는 별의 휘광, 그 밝기, 그 빛, 그 은은함이 모두 그녀의 몸에 흡수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저 지저의 신비로운 밤하늘 속에 박혀 있는 모든 별빛들의 정수를 모은 것보다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천상의 별들 밑에서나, 지저의 별들 안에서나 한결같이 고결했다.

갑자기 비류연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흥이 절로 솟아나 주체할 수가 없었다. 비류연은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묵금을 집어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자! 이 지하 깊은 곳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과 나예린 소저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 곡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류연이 단 하나뿐인 관객을 향해 인사했다.

“믿지 못하겠군요.”

나예린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비류연이 금을 연주한다는 게 그녀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비류연이 금을 사용할 때는 사람을 후려칠 때뿐이었던 것 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비류연에 대한 편견에 찬 평가였음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디리리리링!

비류연의 손가락이 묵금 위를 뛰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지하의 밤하늘 속에 은하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음율은 차가운 여인의 마음을 녹이는 아주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비류연이 누군가를 위해 진지하게 금을 연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열 손가락이 신들린 듯 묵금 위를 춤췄다.

나예린은 눈을 감고 조용히 자신을 감싸 오는 선율을 음미했다. 감미로운 음율이 그녀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고 어깨에 들어 있던 긴장을 풀게 만들었다. 그제야 날카로워진 신경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나예린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비류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묵직하고 부 드러운 감촉에 비류연의 고개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비류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묵금을 연주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파랗게 빛나는 지저의 별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비류연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계속해서 금을 탄주彈奏)했다. 그녀가 꿈속에서라도 계속 듣기를 바

라는 듯.

별의 강 사이로 계속해서 은은한 음률이 흘렀다.

매몰 15일째!

“그가 실종된 지도 벌써 보름이구려!”

용천명이 마하령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일부러 사망이 아니라 실종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렇군요.”

마하령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생존 확률은 줄어들고 있소. 이미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마하령이 대답했다. 계속되는 마하령의 무뚝뚝한 대답에 용천명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왠지 환마동 사건 이후 날 대하는 태도가 전보다 더 싸늘해진 것 같은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오?”

용천명의 질문에 순간 마하령이 흠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다시 원래의 무뚝뚝한 상태로 돌아왔다.

“착각이에요! 그런 일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용천명은 피부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란 말인가?”

그는 이유 없는 냉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가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는 거지?”

마하령은 진실을 용천명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날 환마동에서 그녀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림자를 보았다.

처음에 그것은 거대한 살이었다. 뒤룩뒤룩한 살이 그녀의 전신에서 불거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명이 절로 나올 만큼 정말 추악한 모습이었다. 지금 다시 생 각해봐도 진저리가 쳐졌다.

마하령이 힐끔 용천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왜 그때 저 남자의 얼굴이 뒤이어 나온단 말인가…….?

마하령은 그 사실이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그 살들의 난동 다음으로 본 것이 바로 용천명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그 환상을 경험한 이후 마하령은 용 천명을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지만 그건 떠올리기조차 끔찍했다.

용천명을 대할 때 예전에도 좋게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얼굴 마주 보기도 껄끄러울 정도였다. 그녀의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머쓱해진 용천명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실종되고 나니 기분이 어떻소?”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하군요. 이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마하령이 차갑게 대꾸했다.

“앓던 이가 빠진 얼굴 치고는 불만이 가득하구려.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요?”

이유나 알면 이처럼 답답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녀는 요즘 세상 모든 게 불만투성이인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관심 끊어 주시지요.”

마하령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닌 것 같은데…….”

용천명은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매몰 21일째!

벌써 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태양이 뜨고 짐을 알 수가 없기에 그저 몸의 감각만으로 시간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것에도 한계가 있어 동굴 속에 갇힌 지 정확하게 얼마가 흘렀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림짐작일 뿐…..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로 한 줌의 벽곡단만 들고 들어왔지만 이들은 아직 잘 버티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이미 예전에 아사 내지는 동사했을 극 한의 상황에서도 비류연과 나예린은 체력을 유지하며 잘 버티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란 무척이나 끈질긴 생명력과 능숙한 생존 능력의 소유자이자, 험 악하고 극도로 험난한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무척이나 편리한 신체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모금의 물에 의존하여 하루를 버틸 수도 있었다. 거기에 벽곡단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삼주일이 지났음에도 아직 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였다.

“벽곡단도 이번 게 마지막 남은 한 알이에요. 며칠 안에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다면 우린 굶어 죽고 말 거예요.”

비류연이 마지막 남은 두 알의 벽곡단 중 한 알을 나누어 주며 말했다. 벽곡단을 받아 드는 나예린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과연 우리가 여길 살아 나갈 수 있을까요?”

나예린답지 않은 약한 모습이었다.

“그럼요. 걱정 말아요.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그랬잖아요. 전 때깔 좋은 귀신이 되고 싶어요. 여기서 이대로 아사해 때깔도 칙칙한 귀신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고요.”

비류연이 나예린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비류연과 나예린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동굴 탐험을 계속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해진 방향을 향해 계속 해서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생각보다 동굴은 엄청나게 길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이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이 진법 안에 갇힌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예린은 그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인공적인 진은 아닌 것 같아요. 배치나 구조, 그 어느 부분에서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진법이라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규칙성이 없어요.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이 확실해요.”

그녀는 진법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하는 말이니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무척이나 악의적이고 적대적인 구조인 것만은 확실하죠.”

그때였다.

‘응?’

비류연이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비린내 비슷한 것이 풍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이게 무슨 냄새죠?”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생선회를 뜨는 것도 아닐 테고…….”

비류연과 나예린은 그 냄새의 출처를 따라가 보기로 결정했다. 비류연의 심장 박동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불길한 느낌은 이상하게도 그 적중률이 매우 높았다. 등골이 짜릿짜릿해져 왔다.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점점 더 비린내가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 비류연은 확실히 자신할 수 있었다. 이 어둠 앞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 천만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비류연과 나예린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전진뿐이었다.

“왠지 점점 더 추워지는 것 같지 않아요, 류연?”

나예린은 말대로 공기가 점점 더 차가워지고 눅눅해지고 있었다. 비류연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환경이 변한다는 건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좋은 일이죠. 우린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하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비류연의 말은 두 사람의 현재 상황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한참을 앞으로 전진하던 두 사람 앞에 붉은 불빛 같은 것이 보였다. 두 사람 은 조심스럽게 불빛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그것의 실체를 보았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박혀 있는 두 개의 불타는 듯한 빛깔을 지닌 홍옥이었 다.

그 두 개의 홍옥은 어떤 것의 눈이었다.

칠흑처럼 검은 비늘에 한아름 통나무보다 더 굵은 몸통!

비류연과 나예린의 위치에서는 그것의 전체 길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가리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장난 아니게 길다는 것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헉!”

그것은 바로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검은 비늘의 이무기, 묵린혈망이었다.

비류연은 묵린혈망을 전혀 두려운 기색도 없이 똑바로 쳐다보았다. 상대의 눈을 피하는 것은 자신이 상대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것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이 없었다. 아니 동물이기에 더욱더 그런 것에 민감할 것이다. 비류연은 약육강식의 생존 법칙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세 싸움 에서 밀리는 순간이 바로 저 이무기의 먹거리가 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눈싸움에서라면 비류연은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다. 비류연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맛있어 보이는 놈이로군. 영물 주제에 감히 저승의 입구인 줄도 모르고 이곳에다 둥지를 틀다니, 겁이 없구먼. 아니면 멍청한 건가?”

영물(靈物) 하면 눈에 불을 켜는 강호인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는 천무학관이었다. 아무리 묵린혈망이 용이 되다 만 대단한 물건이라고 해도 두어 번의 칼질로 묵 린혈망을 회뜰만한 능력을 지닌 고수들이 수두룩한 곳이 또한 천무학관이었다. 혈망쯤은 간단히 찜쪄 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만약 혈망이 그들의 눈에 띈다면 단 칼에 몸보신용 내지는 내공 증진용 건강 보조 식품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비류연은 혈망 주변에 다른 관도들이 없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강호란 원래 비정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훌륭한 식품(?)을 발견했을 땐 입이 하나 라도 적은 게 유리했다.

아마 혈망으로서는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귀한 몸에 이런 영약식(靈藥食) 취급을 받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일 터였다.

쉬이이이! 쉬이이쉭!

혈망은 흘러내리는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를 위협적으로 빛내며 두 사람을 위협했다. 천 년 묵은 거목도 단숨에 휘감아 분쇄시켜 버릴 만한 크기를 지닌 엄청난 덩 치였다.

아무래도 동굴은 이 이무기의 거처인 모양이었다.

“이런, 주인이 손님을 반기지 않는 듯하네요.”

이런 돌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류연이 한마디 했다. 아직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대부분 푸대접 받기 마련이죠.”

나예린은 조심스럽게 검에 손을 가져갔다. 여차하면 발검할 기세였다. 혈망의 위협적인 입에서 침 한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치이이익!

그러자 바위가 무언가 타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며 녹아내렸다.

“침을 함부로 뱉다니 예의가 없는 비암이로군.”

이무기 급에 가까운 혈망을 겨우 뱀 대가리 취급하는 비류연이었다.

“아무래도 저 침으로 동굴을 넓힌 것 같군요. 동굴 벽이 미끈거렸던 것이 아마 그런 이유였을 거예요.”

나예린이 말했다.

“후후! 그렇다면 꽤 능력 좋은 광부인데요?”

확실히 광부로 보자면 엄청나게 능력이 탁월한 혈망이었다.

“어이 이봐, 뱀 선생! 차라리 두더지로 전종(轉種)하는 게 어떻겠나?”

비류연이 대놓고 혈망을 놀렸다. 그는 애당초 겁이란 게 없었다.

쉬에에엑!

혈망의 기세가 더욱더 등등해졌다. 말뜻은 못 알아듣지만 그 안에 포함된 조롱 섞인 어투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겠군요.”

여전히 마주친 시선을 풀지 않은 채 비류연이 말했다.

“뭘요?”

“저거 좀 멍청하게 생긴 것 같지 않아요?”

비류연이 조용하게 나예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의외로 혈망의 청력은 좋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영물이다 보니 사람 말까지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비류 연의 무모한 행동은 잠자는 이무기의 역린(逆鱗)을 철솔로 벅벅 긁는 행동이었다. 용은 못 됐어도 역린은 있는 모양이었다.

쉬에에엑!

한 아름에 안지도 못할 굵기를 지닌 혈망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멍청하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나 본데요?”

묵린혈망의 위협적인 행동은 다른 인간이라면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행위였지만 비류연이라는 이 무신경한 녀석에게는 별 무소용이었다.

“항상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하죠. 잘못하면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자신의 목을 겨눌 수도 있으니까요.”

나예린이 자상하게 충고했다. 그러나 비류연이 이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났다.

“용은커녕 이무기도 되지 못한 비암 녀석이!”

비류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콰아아아!

쉬에에에에엑!

아무래도 혈망은 비류연의 빈정대는 어투를 알고 광분한 게 분명했다.

비류연은 처음 보는 미지의 생물 – 그것도 꽤나 사납고 인간 한두 명쯤은 한입에 꿀꺽할 수 있을 것 같은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앞에 두고 자신의 친 화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몸이 도시락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묵린혈망을 어르고 달랠 필요성에 대해 그는 매우 부정적이었 다. 그러다가 잡아먹히면 자기만 엄청 손해 아닌가. 게다가 그는 항상 사냥꾼의 입장이었지 사냥감의 입장이었던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동물 조련 사의 입장에 있었던 적도 없었고, 이런 괴상한 생물의 친구가 될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온몸으로 적대감을 표출시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이빨을 번뜩이는 저 행동을 호의로 해석하는 바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가 취할 행동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단순명쾌한 해답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럴 짬도 없었다. 적으로 간주된 존재를 앞에 두고 망설인다 는 것은 자기 목숨을 위험 속에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쉬에에엑!

화가 난 묵린혈망이 쏘아진 화살처럼 튕기며 날아 들어왔다.

비류연의 손에서 한줄기 뇌전이 빛줄기처럼 날아갔다.

쉬익!

그의 행동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팅!

하얀 은빛 섬광의 빛줄기는 묵린혈망의 이마를 꿰뚫을 기세로 날아갔지만 허무하게 혈망의 이마를 맞추고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동굴 천장으로 튕겨나갔다. 별 하 나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라, 어라?”

자신의 실패를 전혀 예상치 않고 있던 비류연으로서는 경천동지할 만한 돌발 사태였다.

“아무리 3성 공력밖에 싣지 않았다고 하지만, 저런 비암 한 마리 잡지 못하다니……. 제법 단단한 먹거리로군!”

한 방에 혈망이 뒈지지 않자 비류연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고 보니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괜강호신비영물도감(江湖神秘靈物圖鑑)좭이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묵린혈망의 비늘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질기 며, 그 강도와 탄력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강해진다고 말이에요.”

나예린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거 무척이나 기분 좋은 정보로군요.”

비류연은 웃어 보였지만 여유만만하게 웃을 만큼 좋은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쒜에엑! 쉬에에엑!

비류연의 조롱과 도발에 혈망의 눈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불길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기세였다.

“화난 거 같죠?”

비류연의 물음에 나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 맞았는데 기분 좋을 리가 없죠!”

휘이이익!

비류연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마도 약간이나마 상대에게 감탄한 모양이었다.

“칭찬해 주지. 내 비뢰도를 정통으로 맞고도 말짱했던 건 네놈이 처음이야. 물론 성별을 구별할 수 없으니 그냥 ‘놈’이라고 해두자고.”

다시금 그는 싱긋 웃었지만, 이격(二擊)째도 공격을 실패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헛손질의 쪽팔림을 경험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그러나 혈망도 한 방은 맞았지만, 두 방째는 양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타오르는 붉은 보석 같은 눈을 빛내며 뜻밖의 간식거리를 향해 피처럼 붉은 혀를 낼 름거렸다. 생각보다 간식거리의 반항이 심했다.

좀더 자신의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쉐에에엑!

날카롭고 가는 소리와 함께 혈망이 아가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비류연을 한입에 삼켜 버릴 듯한 기세였다. 쏘아진 화살보다도 더 빠른 속 도! 마치 비호가 덮치는 듯했다.

그 빠르기는 충분히 빨랐고, 칭찬해 줄 만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비류연은 비호처럼 달려드는 비호(?)도 여럿 잡아본 유경험자였다. 그것이 혈망에게는 불행이었 다. 비류연은 잽싸게 몸을 비틀어 혈망의 식사 절차를 허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친절하게 반격도 잊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다시 한 번 뇌전이 번뜩였다. 푸른 불꽃은 강력한 방전을 일으키며 화려한 음향을 동반한 채, 혈망의 미끈하고 늘씬한 몸뚱어리에 강력하게 작렬했다. 파파파팟!

“키에에에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이는 비명성이 들려왔다. 혈망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심하게 몸부림쳤다. 격심한 용트림 같았지만 실제로는 뱀트림이었다. 콰쾅쾅쾅!텅텅텅텅!

몸집이 큰 만큼 몸부림 또한 굉장했다. 후두둑 돌가루가 떨어지고 동굴 전체가 진동했다. 이러다가 혹시 무너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다 들 정도였다. 연신 머리 위 로 떨어지는 돌가루를 손사래로 털어내며, 나예린을 보호한 채 비류연은 눈을 빛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생매장 감이다!’

그의 본능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류연! 조심해요.”

걱정스런 얼굴로 나예린이 외쳤다. 그녀 역시 검을 빼들고 여차하면 비류연을 거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비류연 혼자서 상대하도록 그냥 둘 생각인 모양이었다.

“가장 짧고 가장 신속하고 가장 간단하게! 그리고 가장 쉽게!’

비류연의 눈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의 손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의 정신은 강철도 뚫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있었다.

비뢰도(飛雷刀) 오의(義)

검기(劍氣)

생사(生死)

섬뢰창

어두운 암흑 속에서 순백의 보석 가루가 빛나고, 찬란한 백색 번개가 묵린혈망의 입 속을 향해 날아갔다. 혈망은 뇌전을 먹거리 음식처럼 시식하는 꼴이 되고 말았 다. 섬광처럼 날아간 뇌전이 요사스럽게 낼름거리던 혈망의 두 갈래 혓바닥을 더욱더 낼름거리기 좋게 네 갈래, 여덟 갈래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혓바닥을 타고 식 도로 들어간 비뢰도는 혈망의 소화 시간을 단축시켜 주려는 듯 식도와 위장과 창자를 헤집어서 한 개의 소화기관으로 만들어 버렸다. 심하게 말하면 혈망의 입과 항 문 사이엔 그 어떤 소화기관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한바탕 비뢰도의 광란의 난도질(?)이 끝나고 나자, 혈망은 열여섯 개의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먹는 대로 바로 줄줄 싸는 진짜 특이한 영물(?)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천 년 조금 덜 묵은 영물이라 해도 이런 강력한 공격을 견뎌낼 리가 없었다.

키에에엑!

혈망이 요란하게 몸체를 뒤흔들며 동굴 벽 쪽에 몸을 부딪쳤다. 그러는 것도 잠시… 혈망이 힘을 다한 듯 바닥에 추욱 늘어졌다. 팔백년 가까이 살아온 영물의 허 망한 최후였다.

“이런! 내가 좀 심했나? 혹시나 몸 안에 있는 내단(內丹)이 상하지는 않았겠지??

약간의 가책을 느낀 비류연이 자책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혈망을 향해 다가갔다. 내단이 상하지 않았기를 빌면서..

“쳇! 내단(丹)은 없나?”

그의 말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하고 뱃속을 뒤져봤건만 눈 씻고 찾아봐도 코딱지만한 내단도 없었다. 생각보다 수련이 덜 된 놈인 모양 이었다.

“그동안 수련이나 열심히 하지. 쯧쯧쯧.”

안타까운 듯 비류연이 혀를 찼다.

“만일 내단이 있었으면 비싸게 팔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무림인들처럼 내단을 보면 복용해서 내공을 증진시킬 생각보다 그것을 고가에 팔아먹을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 비류연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비류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단은 없어도 영물의 피는 꽤나 효험이 있다는 말을 풍월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은 허기를 때울 필요가 있었다. 천무학관의 우등생인 나예린이 독성의 유무를 확인시켜 줬다.

“흠! 독성은 없는 것 같군요. 이대로 먹어도 별 문제 없을 것 같아요.”

나예린이 묵린혈망의 피를 손가락 끝으로 찍어 혀로 맛본 다음 말했다. 다행히 독성은 없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며칠째 벽곡단만 먹고 지내 왔으므로 혈망의 피 라도 마셔야 했다. 만일 책대로라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피 냄새가 비릿하기는 했지만 생존을 위해 마시기로 했다.

혈망의 피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뱃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전신에 활력이 되돌아오는 듯했다. 확실히 묵린혈망의 피 는 효과가 있었다. 책에 적힌 묵린혈망의 효능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분간은 식량걱정을 안 해도 될 듯했다.

매몰 26일째!

“이런!”

혈망의 시체와 그 뒤로 이어지는 동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비류연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류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나예린이 물었다.

“……”

비류연은 그녀의 질문에 금방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잠시 후 비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볍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뱀대가리가 우리에게 마지막 복수를 한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서… 설마?”

“네! 아무래도 마지막 최후의 뱀트림을 하면서 자신이 다니던 출입구를 막아 버린 것 같아요. 어디를 둘러봐도 그 녀석이 드나들던 곳이 없어요. 그리고 더 이상 뒤로 이어지는 동혈도 없어요.”

그것은 정말 최악의 소식이었다. 나예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묵린혈망을 쓰러뜨리고 겨우 출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제기이일!”

비류연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죠!”

매몰 34일째!

그 후 일주일하고 하루가 더 흘렀다. 비류연은 그동안 이곳저곳을 뒤져보며 빠져나갈 만한 구멍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암석이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어 어느 방향 에 출구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으우훼에취!”

코가 간질거리는 바람에 비류연이 크게 재채기를 했다. 긴 반향음이 동굴 전체를 울리며 되돌아왔다. 순간 비류연은 자신의 머리를 강타하는 생각에 전율할 수밖 에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비상함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럴 수가! 난 왜 이리 똑똑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미소년 천재인 것 같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 튀어나오는 법! 빼어난 사람은 자신의 자질을 어떻게 해도 숨길 수가 없는 법이었다.

아직 마지막에 쓸 수 있는 수가 하나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몰 44일째!

그 후로 10일 동안 비류연은 계속 혈망의 피를 주식으로 삼아 자신의 기를 벽 안으로 쏘아 보내고 있었다. 기의 진행과 반사로 벽의 두께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만일 벽의 건너편에 공동이 있다면 쏘아 보낸 기는 벽 너머의 끝부분에 부딪쳐 되돌아올 것이다. 그것으로 벽 전체의 두께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매몰 현장에서 빠져나올 때도 비류연은 이 방법을 썼었다. 그런데 혈망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으로 잠시 잊고 있다가 재채기를 계기로 다시 생각이 났던 것이다.

이제 비류연이 믿을 건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만큼 쉽게 탈출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비류연은 10여 일 동안 동굴 이곳 저곳을 쉴 새 없이 두들기 고 다녀야만 했다.

“어라?”

톡톡!

비류연은 다시 한 번 기를 침투시켜 보았다. 그러나 반복된 일련의 행위도 그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시켜 주지는 못했다.

“얼래? 거참…….”

그는 혀를 찼다.

“뭐가 잘못됐나요, 류연?”

비류연의 인상 쓴 얼굴에 불길함을 느낀 나예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닌데 너무 얇아요. 분명 반대편에 공간이 있는 것 같긴 해요.”

“그럼 저번처럼 뚫으면 되지 않나요?”

의아스럽다는 투로 나예린이 물었다.

“그러면 간단하죠. 그런데 저 반대쪽이 단순한 빈 공간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죠.”

저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길 부수면 펑 하고 터질지 모른다는 거죠. 아무래도 이 벽 뒤에 수맥이 흐르는 것 같아요. 이걸 부수기 전에는 각오가 필요할 것 같네요.”

비류연이 물끄러미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나예린은 비류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번 맡겼던 목숨 다시 한 번 류연에게 맡기죠.”

그녀의 대답에 비류연은 밝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저당 잡으신 목숨! 반드시 돌려드리죠. 분실한 다음에 위약금을 물고 싶지는 않거든요. 두렵지는 않아요, 예린?”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류연은요?”

“후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아직은 죽음이란 게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죽을 것 같지도 않네요. 제 생명력이 좀 질기거든요.”

“그래요? 무척이나 믿음직스럽군요.”

비류연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그녀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여유에서 비롯된 힘인지도 몰랐다.

“여긴 다른 건 다 참겠는데 내 혀를 즐겁게 해주는 맛난 것들을 먹어볼 수 없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참을 수 없이 애통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빠져나가면 그 유명 한 광동팔미와 북경진미를 맛보기로 결정했죠.”

과장된 동작을 취하며 비류연이 말했다.

“광동팔미와 북경진미를 맛보려 해도 우선 이곳을 탈출한다는 조건이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 그녀는 탈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식량도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는지라 뭔가 수단을 취해야만 했다. 벽곡단이 떨어진 지는 이 미 오래였고, 이제 묵린혈망의 피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예린! 만일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북경진미와 광동팔미를 같이 먹을까요?”

“좋아요.”

나예린이 선선히 대답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나예린이 대답했다.

비류연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점찍은 암벽 앞에 섰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심각한 얼굴로 나예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린, 혹시 잊은 것 없어요?”

“뭐가요?”

나예린은 눈치가 없었다. 비류연은 잠시 실망했다.

“다시 한 번 생사를 건 도전을 하기 전에 행운의 여신의 축복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신님??

비류연의 물음에 나예린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런 걸 꼭 해야 하나요?”

“그럼요!”

망설이지 않고 비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불가(不可)!”

비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차란 꼭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 절차를 수시로 어기는 장본인이 바로 비류연 자신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마침내 나예린이 동의한 것이다.

나예린은 살짝 비류연의 입에 입술을 맞추어 주었다. 행운의 여신의 축복이었다. 나예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차갑고 냉정하다는 세평(世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비류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오늘이 마침 44일째군! 이건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하늘의 시험인가?’

우연이라면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

‘저번의 사십사도 나를 어쩌지 못했어!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야! 그런게 만약 운명을 좌우하는 돛대라면 내가 이 손으로 부숴 주겠어!’

콰아아아앙!

마침내 비류연의 주먹이 푸른 뇌전으로 화해 암벽에 작렬했다.

콰콰콰콰콰!

뻥 뚫린 구멍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물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