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갑작스런 충격에 수로가 터지고 나예린과 비류연은 물살에 휩쓸려 들어갔다. 생각보단 거센 물살에 비류연과 나예린은 처음에는 자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수뢰비(水雷飛)를 연마하며 물 속을 제집 드나들 듯 한 경력이 있었다. 물 속에서 반 시진 버티는 것도 그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일 에 속했다. 그는 수공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의외의 모습을 보인 것은 나예린이었다. 그녀에게 수공은 쥐약이었다. 다른 모든 것이 뛰어난 그녀가 유일하게 못하는 분야가 단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수공 공부였다. 나예린이 수공 공부에 취약한 이유는 재능의 유무보다는 환경의 영향이 더 컸다.
그렇지 않아도 미태가 출중한 그녀가 맨살이 착 달라붙은 피수의(避衣)를 입고 몸매를 뽐낸다는 것은 수천 명의 혈기방자한 남자들을 뇌살시키겠다는 살인 음 모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도 너무 위험이 컸다. 그녀를 어떻게 한번 해볼까 하는 늑대들이 사방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누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 인가. 환관이라 할지라도 믿을 수 없는 판국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공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주위에서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수공이 약했다. 장시간의 잠수는 그녀에게 너무나 치명적이었 다. 호흡에 곤란을 느낀 나예린은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직 수로가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이런!’
비류연은 정신을 잃은 나예린의 손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나예린이었다. 그녀가 질식사하기 전에 이 수로를 빠져나가야만 했 다.
‘절대로 죽게 놔두지 않아! 절대로!’
비류연은 전력을 발휘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사지에 차고 있는 묵룡환 덕분에 그의 헤엄은 수영이 아니라 경공 같았다. 그의 ‘자맥질’은 매번 가라앉을 때마다 바 닥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이 그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파양호에서 30년간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밥을 벌어먹고 살아오던 어부 강씨는 어느 날 사람들로부터 미친 놈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는 진실만을 말했을 뿐인 데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니 강씨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글쎄, 정말이라니깐! 파양호에는 용이 살고 있어! 내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깐 그러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강씨의 말을 무시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보게, 조씨. 내가 분명히 어제 파양호에서 용을 봤다네. 정말이라니깐!”
30년 지기이던 석씨마저도 강씨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자네 요즘 너무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한가 보구먼. 어서 집에 가서 발 닦고 며칠 푹 쉬게나. 며칠 쉬다 보면 나아질걸세.”
석씨의 자상한 충고였지만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난 봤어! 난 분명히 봤단 말이야! 이 눈으로 똑똑히! 파양호에 용과 선녀가 살고 있는 것을!”
그가 절규하듯 외쳤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강씨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난 분명히 봤어… 분명히…….”
그것은 달도 휘영청 밝은 어젯밤 일이었다. 강씨는 검푸른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밤낚시를 하고 있었다.
“푸하!”
검게 물결치는 수면 위로 사람의 머리가 솟아나왔다.
“히에에엑!”
파양호에서 달빛을 벗 삼아 조업하던 어부 강씨는 그만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질 뻔했지만, 30년 된 어부 경력이 그를 이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처음에는 귀신인 줄 착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껴안고 있는 미녀를 보는 순간 그는 귀신이 아님을 알고 안도했다. 그가 여기서 하나 알 수 있었던 사실 은 파양호에는 선녀가 살고 있으며 그 선녀는 수영을 잘 못한다는 것이었다.
물 속에서 불쑥 솟아나온 그 남자는 그에게 한 손을 들어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죠!”라고 인사했다. 강씨도 얼떨결에 허리를 숙여 마주 인사했다. 그가 다시 허리 를 폈을 때 이미 거기에는 남자도 선녀도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어? 어? 엉?”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강씨는 두 사람의 종적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그것을 보고야 만 것이다. 달빛이 비치는 수면을
헤엄치는 길고 거대한 몸통! 그것은 분명 전설 속에나 나오는 용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 크고 기다란 몸통은 설명이 불가능했다. 강씨는 공포에 오금이 저 렸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용은 호수 한가운데가 아닌 뭍으로 헤엄쳐 가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가는 것 같았다.
용의 그림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강씨는 배 위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용을 만나고도 무사한 데 대해 용왕님께 감사를 올렸다. 사실 그것은 용이 아니라 묵린혈망이며 살아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채로 비류연의 뇌령사에 끌려가는 중이라는 것을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 류연은 분해해서 팔면 돈이 될 게 분명한 혈망을 상황의 어려움을 핑계로 버려두고 올 만큼 녹록하지는 않았다.
비류연은 일단 정신을 잃은 그녀를 끌고 물가로 나온 후, 마른 땅에 그녀를 눕혔다. 코에 손을 대봐도 숨쉬는 기색이 없었다.
이럴 땐 설왕설래(舌往舌來), 인공 호흡밖에는 없었다.
일단 그녀를 반듯하게 땅에 눕힌 비류연은 그녀의 우아한 목을 뒤로 젖혀 기도를 확보했다. 수뢰비를 익히면서 물을 열두 양동이 이상 먹고, 수십 차례의 익사 위 기를 넘기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비류연은 인공 호흡과 응급 조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원래 인공 호흡은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의 힘으로 심장을 압박해야 하지만 무공의 고수인 비류연은 나예린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일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봉긋 한 가슴 사이에 손을 대고 가볍게 기를 불어넣어 주면 그만이었다.
스윽!
비류연이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가슴 사이로 가져갔다. 여태껏 그 누구도, 그 어떤 남자도 감히 범접치 못한 성역에 지금 감히 무례하게도 첫발, 아니 첫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쿵쿵!
갑자기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지고 피가 빨리 도는 듯 비류연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라? 어라? 이거 왜 이러지?”
전에는 없던 독특한 생리 현상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비류연은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했다.
비류연은 나예린의 가슴 부분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기를 불어넣었다. 기를 통해 심장을 압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평소 비류연을 아는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르 겠지만 그는 흑심을 품고 잠시 손을 옆으로 옮긴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비류연은 허가도 받지 않고 그런 짓을 할 만큼 막돼먹은 놈은 아니었다.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입과 입을 통해 공기를 폐 속으로 넣어 주는 일이었다. 당연히 입맞춤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의 시야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예린의 홍옥(紅玉) 같은 입술이 들어왔다. 비류연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쿵! 쿵! 쿵! 쿵! 콩닥, 콩닥, 콩닥.
심장 박동이 전보다 두 배 반 정도는 더 빨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왜 이래? 정말 이러다가 심장 파열로 죽는 거 아냐?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그러나 심장의 이상 박동 정도로 하던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비류연과 나예린의 입술이 한데 겹쳐졌다.
후욱!
비류연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에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고 공기를 불어넣었다. 물론 이때 그녀의 코를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비류연은 심장 압박과 숨 불어넣기를 번갈아 가며 반복했다. 원래 교본대로라면 십오 대 일의 비율로 심장 압박과 숨 불어넣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비류연 은 무공의 고수인지라 그 절차를 매우 간소화할 수 있었다.
가슴 애무(?) 그리고 인공 호흡… 인공 호흡 다음 순서는……?
‘당연히 설왕설래(舌往舌來)지!’
비류연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물론 인공 호흡에 그런 절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류연이 혼자만의 추가 절차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콜록 콜록!”
나예린이 기침을 하며 물을 토해냈다. 곧 그녀에게 호흡이 돌아왔다. 순간 비류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그는 절대로, 결단코 자 신만의 추가 절차를 실행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진짜로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예린! 예린! 정신이 들어요, 예린!”
비류연이 계속해서 나예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심연의 결계를 뚫고 그녀의 의식 수면 위까지 도달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도 비류연 에게는 그 약간의 시간 소요를 기다릴 인내심이 있었다.
“…류연?”
그녀의 눈꺼풀이 떠지며 밤하늘의 별무리를 담아 놓은 듯한 검은 보석 같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밤하늘의 별이 담긴 호수에 비류연의 얼굴이 비쳤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우리 살아난 건가요?”
“물론이죠! 죽으려면 아직 3,4백 년은 더 있어야 할걸요?”
“그것 참 다행이군요.”
아직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나예린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그 어떤 값진 보석보다도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한순간에 사람의 영혼을 매료시키는 그런 미 소였다.
“당신을 보면 항상 웃게 되는군요.”
나예린은 자신이 평생 동안 지은 미소보다, 비류연을 만나고 지은 미소의 횟수가 더 많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