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비류연 신위
– 나예린과 그녀 부록의 장례식
갑작스런 충격에 수로가 터지고 나예린과 비류연은 물살에 휩쓸려 들어갔다. 생각보단 거센 물살에 비류연과 나예린은 처음에는 자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환마동 붕괴 사고 이후 44일이 지났지만 사람은커녕 시신조차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실종자는 비류연과 나예린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아니 면 그것이 바로 실력인지, 그 엄청난 폭발 사고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없었다.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대신 부상자는 엄청나게 많았다. 개중에는 떨 어지는 낙반에 사지 중 하나를 깔려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현재 집계로는 총 참가자 321명에 사망자 0명, 부상자 151명, 그리고 실종 2명이었다. 그 2명의 실종자가 바로 비류연과 나예린이었다.
매몰된 동굴 아래에서 10일 이후에 피골이 상접한 채 구조된 사람만 해도 20명이 넘었다. 가장 최근 발견된 매몰자는 붕괴된 지 18일 만에 구조된 사람이었다. 그 러나 나예린과 비류연만은 아무리 열심히 삽질을 해도 종적이 묘연했다. 그리고 한 달이 넘어가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포기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져 갔다.
화장대 위에 올려진 두 개의 빈 관도 시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임시방편으로 올려놓은 것이었다. 혼백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이 차려지고 두 사 람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놓여졌다.
고 비류연 신위(飛流神位! 고 나예린 신위(故 羅濊璘 神位)!
그리고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당파 옥현진인의 주도 하에 경문이 읊어지고 경문 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이 타들어 갔다. 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비류연의 죽음 이 아닌 나예린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화르르륵!
이윽고 지전(錢)이 불살라졌다. 불붙은 지전이 재가 되어 허공중에 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만일 이 자리에 비류연이 있었다면 “지전도 돈인데 미쳤다고 태우냐” 며 광분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류연의 관과 나예린의 관을 같이 놓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특히 빙봉영화수호대가 중심이 되어 반대운동에 앞장섰고 수많은 남자 관도들이 그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그것은 죽은 나예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된 주장이었다. 부부도 아닌데 둘을 같이 화장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관 측은 장례식 두 번은 너무 번거롭고 예산도 많이 든다는 이유로 그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현실적인 돈 문제에 처하면, 인간 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몇몇 이들에 의해 단정지어진 나예린의 죽음은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슬픔으로 물들게 했다.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처음부터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들도 나예린의 생존을 믿고 그녀의 구출 작전에 적극 동참했다. 천무학관이 생긴 이래로 백 명이 넘는 일류 고수들로 이루어진 가장 능력 있는 구조대가 만들어졌 다. 그들은 파고 파고 또 파며 삽질에 미친 사람처럼 환마동을 파고 들어갔다. 작업 속도는 눈부실 정도였다. 모두 일류 고수이다 보니 일반 일꾼의 열 배 이상의 능 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즉 일류 고수 백 명이면 일반 장정 천 명에 해당하는 작업 능률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작업 공정 중에 장애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우선 붕괴 지역의 암석이 금강석이라도 되는 양 너무 단단했다. 철이라도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무학관 최고의 검장(劍匠)에게 부탁해 신병이기(神兵異器)에 버금가는 곡괭이와 삽을 긴급히 만들었다. 환마동의 암석은 그 장비를 사용해야만 뚫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웬만큼 기력을 사용해서 곡괭이질을 하지 않으면 가루만 조금 떨어질 뿐, 암석에는 조그마한 흔적조차 생기 지 않았다. 모두 무공을 펼친다는 생각으로 곡괭이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작업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이윽고 일주일이 지났다. 점점 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져 가는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 같은 미녀가 죽는다는 것은 천 하의 큰 손실이었던 것이다. 비류연의 목숨 따위는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비류연의 목숨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았다. 그러나 나예린의 목숨만큼은 어떤 일이 있 어도 반드시 구해내야만 했다. 그들이 임하는 열혈 작업의 힘의 원천은 바로 나예린에 대한 갈망이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동혈을 파고 들어갔다. 빙봉영화수호대와 나예린의 추종자들이 핵심을 이루는 이 구조대는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미친 듯이 일했다. 기관 진식에 조예가 깊은 천기문의 원로 천기수(機手) 도굴군이 작업의 전체 과정을 지휘했다. 굴착 작업의 기본도 모르고 팠다가는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모르기 때 문에 굴파기(도굴군이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노발대발했겠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천기수의 지시에 따라 중간중간 버팀목을 세워 가며 그들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3교대로 열심히 파들어 갔다.
“아아! 조사께서 일익을 담당하신 환마동을 내 손으로 헤집게 될 줄이야…….?”
사람의 육신이 아닌 정신을 가둔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환마동 계획에 천기문의 조사(祖師)도 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 환마동은 천기문의 전대 문주 환신군 조을환과 당가의 전대 가주 천환신수 당유기, 그리고 제갈세가주 만통 선생 제갈천우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정도로 완전히 무너진 이상 복구는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광속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구조 작업을 보며 사람들은 막연한 희망을 불태웠다. 8일째와 10일째와 12일째까지 속속 매몰자들이 생존한 채 발견되자 그들의 희망은 더욱더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은 꽤나 무심했다. 아무래도 남자들의 정성은 여자들의 정성에 비해 천지신명의 앞에 도달하는 속도가 느린지도 몰랐다. 하늘이 남녀 차별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억하심정이 들 정도로 그녀의 자취는 발견되지 않았다. 연쇄 붕괴된 긴 동굴을 모두 뚫고 들어가 봤지만 이상 하게도 그녀와 떨거지 부록 비류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고일로부터 벌써 한 달하고도 14일, 해가 뜨고 지기를 마흔 네 번 반복했다. 한 달이 지난 그 시점에서 이미 그녀의 생존에 대한 희망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식량 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그들도 그녀가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괴로워도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의 체력에는 분명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들은 이미 그 한계를 돌파해 버렸기 때문이다. 구조 활동에 열을 올리던 이들의 어깨에서도 차츰차츰 힘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말은 안 했지만 이제 비류연과 나예린의 생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우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을 깨닫자 그들은 생의 허무함과 비애를 함께 느껴야만 했다.
드디어 두 개의 관이 올려진 화장대 위에 불이 놓여졌다. 불길은 삽시간에 커지며 두 개의 관을 집어삼키고 석양보다 짙은 붉은빛을 뿌리며 활활 타올랐다. 이글거 리는 불길 한쪽에서는 백도무림맹 맹주 나백천이 체통도 체면도 잊은 채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있었다.
“예린아, 예린아……. 사랑스런 널 누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예린아…….”
마진가가 위로해 주려고 했지만 나백천의 얼음 같은 시선만 되돌아 올 뿐 손쓸 도리가 없었다. 나백천이 늙어서 만년에 겨우 얻은 외동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 지 않은 소중한 아이였다.
장중보옥(掌中寶玉)! 손 안의 보석처럼 애지중지 길러 왔는데… 그런데 그 딸이 죽어 버린 것이다. 그 슬픔과 분노의 심정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천우(羽)의 소행이라고 했던가?”
차츰 나백천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진가 정도의 초고수조차도 몸을 흠칫 떨 정도로 강력한 살기였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금지된 병기인 천겁령 독문뇌탄인 염마뢰를 쓸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니까요. 그들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이런 천인공노할 짓거리 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그것을 환마동 안에서 폭파시킨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참가자들 중에 간세가 있을 수 있단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 모두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마진가의 말대로 환마동 시험 참가자는 모두 비영각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백천의 눈에서 엄청난 살기가 폭사되었다.
“내 맹세컨대 그놈들을 이 세상에서 몰살시켜 버리고야 말겠네. 그리하여 그들의 피로 딸아이의 죽음에 조문(弔問)하고자 하네!”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전 강호가 떨쳐 일어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땅히 그러셔야죠.”
마진가가 대답했다. 과연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이 거인의 분노를 받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두고 볼 일이었다.
“류연! 자네같이 죽여도 죽여도 절대 죽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죽다니 믿을 수가 없네.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날 것만 같던 자네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다니…….”
장홍은 활활 타오르는 불가에 앉아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다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둘을 잃은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모용휘는 굳은 표정으로 타오르 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은설란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숙맥인 모용휘는 그녀를 달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당황한 채 뻣뻣하게 서 있었다. 반대 로 효룡은 통곡하는 이진설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눈물샘은 장마에 터진 둑처럼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으아아아앙! 언니! 언니! 언니!”
효룡은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독고령의 외눈에서도 피 같은 눈물 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복수할 것을 그녀의 빈 관을 두고 맹세했다. 그녀의 꽉 쥔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작단원들은 허탈한 눈으로 화장대를 바라보 았다. 그들은 여전히 비류연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니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표현이 그들에게는 더욱 어울렸다.
“내가 꼭 배후를 밝혀내 자네의 원한을 풀어주도록 하겠네. 그러니 저승에서 편히 쉬게나!”
장홍은 술에서 슬픔을 달래는 방법을 찾은 듯했다. 계속해서 술이 목구멍을 타고 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이 전혀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젠장! 마셔도 마셔도 소용이 없구나. 이제는 술 먹고 취하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는 호리병을 입에 물고 아예 병나발을 불었다.
꿀꺽! 꿀꺽! 꿀꺽!
그의 목젖을 타고 쉴 새 없이 술이 들어갔다. 한참을 마셔대자 마음이 착잡해졌고, 그제야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뒤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 났다. 그 그림자가 물었다.
“누구 장례식이에요?”
“자네 장례식!”
장홍은 무의식중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고도 그는 취기 때문인지, 자신이 누구에게 대답을 하고 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어, 그래요? 조의금(弔意金)은 많이 거두었나요?”
그림자의 관심은 장례식보다는 조의금 쪽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 인영은 그게 가장 궁금한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리 많이 거둬들이지 못했네. 조촐할 뿐이지. 반면 나예린 소저 쪽은 난리도 아니라네.”
나예린의 관이 놓인 쪽은 조문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자들을 좀 손봐줄 필요가 있겠네요. 이건 능력의 문제를 떠나서 성의의 문제로군요.”
뚜둑! 뚝!
손마디를 꺾으며 그림자가 말했다. 그 그림자는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부족한 조의금을 제자들의 영업력 부족 탓으로 돌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는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장소를 찾다가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이곳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 그러게나. 응?”
한참이나 비류연과 말을 나누던 장홍의 눈이 그제야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류… 류연!”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장례식장이 떠나갈 듯 진동했다. 그만큼 그의 경악과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장홍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
“뭐라고?”
“무에야?”
“아니 왜?”
“제길!”
뜻밖의 경악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방에 흩어져 나름대로의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장홍에게로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목소리의 근원지인 장홍에게로 향했던 그 시선은 그의 뚫어질 듯한 강렬한 시선을 멋쩍게 받고 있는 비류연에게로 향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저 자식이 왜 살아 있지?”
‘어라? 죽은 거 아니었나? 어떻게 살아남았지??
‘오! 신이시여! 저에게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망할 놈의 하늘! 엿이나 먹어라!’
등등의 황당무계와 환장하겠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 대부분은 바로 나예린의 추종자들이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죠, 류연?”
천상의 음률 같은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비류연의 등 뒤로 이어진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사박사박!
월광이 은은하게 부서지는 창백한 뺨!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흑단 같은 머릿결, 물기를 머금어 몸에 착 달라붙은 옷 사이로 보이는 우아한 곡선 사람들의 눈은 이 신비스런 광경을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는 듯했다. 가려졌던 비류연의 등 뒤에서 우아한 걸음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것은 바로 빙백봉 나예린이었다. 한 달 이상의 고립된 생활과 열악한 환경도 그녀에게서 아름다움의 눈부신 빛을 빼앗아 가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은 너무나 고혹적이었 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일제히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나 비류연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보였던 반응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사람들이 들끓 고 있었다.
“오오! 예린아!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나백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예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분명히 귀신이 아닌 실체였다.
“네! 아버님! 다녀왔습니다.”
나예린이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오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드리나이다!”
나백천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부녀간의 감격적인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비류연은 잠시 부러운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지만 그 부러운 눈빛은 금세 사 라졌다.
나예린이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자 비류연은 자신과 나예린의 옷을 말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던 중 이곳의 불길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비류연은 은밀한 곳에 묵린혈망을 숨겨 놓고 나예린과 함께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설마 그 불길이 자신과 나예린의 관을 태우는 불길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비류연에게도 그를 반겨줄 사람들은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사부!”
염도가 독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안 죽고 살아와서 무척이나 아쉽죠?”
비류연이 한쪽 눈을 찡끗했다.
“아, 아닙니다…….?”
지금 염도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자신이 지금 기쁜지 슬픈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부림 받았던 것과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죽음에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해야 마땅하거늘…….?
비류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이 날아갈 듯 기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말로 설 명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옆에서 소태 씹은 표정으로 있는 인상 없는 인상 다 쓰고 있던 빙검도 이하동문이었다.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한 번 생환을 축하드립니다. 무사하셔서 기쁘군요.”
정말로 기쁜지 속마음은 열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럴 수는 없고 비류연은 그들이 정말로 자신의 생환을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염도와 빙검이 생환 인사를 마치자마자 효룡과 장홍을 포함한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후다닥 허둥지둥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주작단원들이었다. 그들은 기쁨과 슬픔, 원망과 억울함 등 각양각색의 표정을 담고 그 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비류연은 그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꼭 조의금 문제에 대해 걸고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동굴 안은 어땠나?”
마진가가 물었다. 기적적으로 생환한 비류연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꽤나 안락했다 할 수 있지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절세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손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 니지요. 아마 누군가는 황금 백만 냥의 돈을 주고 이 경험을 대신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잠자코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던 남자들의 복장을 뒤집는 소리였다. 비류연의 말에 무슨 상상들을 하는지, 다들 움찔거리며 안달복달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끊어져 가는 자신의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자신들의 질투심과 비류연의 무공 실력을 열심히 재가며 마음을 억누르는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아직도 화 장대의 불길은 맹렬했다. 이들은 마음 같아서는 비류연을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던져 넣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감히 비류연을 던져 넣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까?
“자네들의 생환은 정말 기적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군. 천운이 자네들을 도왔군. 노부는 하늘에 수십 번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네! 노부가 아끼던 조카딸 까지 무사히 돌아왔으니 말일세! 자네의 덕이 큰 것 같군!”
마진가가 경탄하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긴 했죠. 실력이 더 좋았지만요.”
비류연이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뭐든지 물어 보게나!”
“저희들은 합격인가요?”
시험으로부터 꽤나 시간이 흐른 후였기에 비류연은 그 사실이 궁금했다. 너무 늦게 나온 것은, 그것도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온 것은 실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건 시험에 합격했다면, 슬슬 강호 구경도 해보고 싶은 참이었다.
“자넨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나?”
마진가는 비류연과 나예린의 합격 불합격의 당락 여부를 알려주기 전에 물었다.
“내가 반드시 뛰어넘어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내 자신입니다.”
비류연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마진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비류연은 그 외의 또 하나를 본 것이었다. 잠시 생각 하던 비류연이 이윽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그 안에서 아름다운 한 명의 선녀를 만났죠. 나를 향해 미소 지어주는 차가운 선녀를 말입니다.”
마진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합격일세! 물론 나예린도 마찬가지네!”
그러고 나서 잠시 뜸을 들인 후 마진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 보세!”
“네! 뭐든지 물어 보세요.”
그러자 마진가는 심각한 얼굴을 하며 그의 귀에 대고 은밀히 속삭였다.
“정말 저 안에서 아무 일도 없었나?”
“예린아!”
“네, 아버님!”
나백천의 부름에 나예린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 아비가 하나 궁금한 게 있구나!”
나백천의 말은 살얼음판을 걷는 사람처럼 매우 조심스러웠다.
“무슨 일이신지요?”
“혹시나 저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냐?”
아버지의 질문에 담긴 저의를 파악한 나예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나예린은 당장 대답할 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나백천은 나예린은 경직된 반응에 딸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혼자 지레짐작 해 버렸다.
“호… 혹시나 그 호로 자식이 너에게 설마 찝쩍이기라도 했더냐? 설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나백천의 걱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동안 자기 딸의 미모에 홀린 남자들이 자제력을 잃고,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어떤 일들을 저질러 왔는지 익히 잘 알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걱정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나예린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버님!”
그러나 나백천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더욱더 의심만이 증폭될 뿐이었다. 나예린이 대답을 하면서 얼굴을 붉히다니… 딸의 얼굴에 쳐져 있던 얼음이 한 겹 녹는 느낌이었다. 부모의 감은 의외로 날카로웠다.
“혹시라도 욕을 당했으면 이 아비에게 숨김없이 말하거라! 내 그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늑대 밥으로 던져줄 것이다.”
천하의 무림 맹주가 딸 사랑에 눈이 먼 팔불출 아버지라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버님! 더 이상 절 곤란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화가 난 나예린은 몸을 돌려 나백천 앞에서 사라졌다.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는데…….”
아버지는 부모 나름의 직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밝혀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딸이 무사히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44일 만의 기적적인 생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