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이번 대회를 계기로 모든 노고수들이 이 강호에서 사라질 테니깐 말입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미래는 오지 않는 법이지요.
늙은이들의 정점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
천무삼성과 검존의 몰락이 정체된 무림에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피를 공급해 줄 겁ᄂ디ᅡ.
천무삼성의 몰락을 서슴지 않고 공언하는 사람,
다른 이라면 주위의 손가락질과 함께 미친 놈 취급을 받았겠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대공자 그였기에 가능성마저 느껴졌다.
대공자는 수려한 얼굴에 자리한 붉은 입술을 열어 한 자 한 자 또박 또박 말했다.
신(新) . 무(武) . 림.기!
달걀 속에 숨은 의미
천무학관 관주처 안쪽의 한 별실.
호화롭기보다는 단아한 느낌이 드는 방에서 지금 백도의 두 거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바로 백도 무림연합 정천지맹의 맹주 백혼검신 나백천이었다.
무림맹주 나백천의 나이는 벌써 세수 130세, 그 무공이 조화지경에 이르러 100세가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노쇠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의 세월이 쌓아준 연륜이 거대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이제 그는 서 있든, 앉아 있든, 누워 있든,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엄(威嚴)을 뿜어내고 있 었다.
현 무림에서 이런 무림맹주와 동석(同席)하고도 전혀 꿀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을 꼽으라면 바로 백도의 두 중심 중 하나라는 천무 학관 관주 철권 마진가였다.
두 사람은 지금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자단목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무림맹주 나백천이었다.
“이번 화산규약지회는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한 일정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마진가가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하자 나백천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도무지 그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으니 원…….”
도대체 백도 무림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나백천에게 ‘그분’이라는 경칭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분을 믿는 수밖에 없지요, 맹주님.”
나백천은 한숨을 내쉬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대회는 전적으로 그분의 의견을 받아들여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네, 그렇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쉽게도 말이지.”
“네! 아쉽게도요.”
말을 끝낸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깊은 침묵이 강물처럼 흘렀다.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나백천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 다.
“이보게, 마관주! ”
나백천이 부르자 마진가는 잔뜩 긴장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예, 맹주님.”
“난 삶은 달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네. 물론 그 외에도 달걀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요리들을 모두 좋아하긴 하지만 말일세.”
난데없는 달걀 얘기에 마진가는 순간 흠칫 했지만 지체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달걀은 훌륭한 음식 재료죠.”
“그럼 자네는 왜 관도들의 저녁 식사에 삶은 달걀이 하나씩 나오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
“……?”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이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이며, 처녀가 임신했다는 소리란 말인가! 마진가는 선뜻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나 백천의 질문 내용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괜히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다가 개망신당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그러려면 정직이 최고였다. 마진가 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미력한 제가 천무학관의 관주직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허허, 가르침까지야. 기실 알고 보면 별거 아닐세. 그건 바로 예산이 그렇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네. 석식 부식비에 관도 1인당 삶은 달걀 한 개만큼의 예산 이 배정되어 있는 것이지.”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마진가는 순간 머릿속에 광명이 찾아들어 환하게 밝아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 그렇군요. 허허허,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재미있는 의견이로군요.”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지.”
나백천은 잠시 말을 끊고 자신의 앞에 놓인 용정차(龍井茶)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 훌륭한 용정차도 귀빈 접대용 찻값 예산의 화신이지. 이보게, 마관주! 자네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백천이 물었다. 노골적일 정도로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좋은 거죠.”
“……”
아무런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마진가가 대답했다. 노골적인 질문에 노골적인 대답이었다. 지금 주위에 이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는 사실이 하늘의 축복이었다.
마진가의 대답에 나백천은 파안대소했다.
“허허허, 그거 명답이군. 사실은 나도 거의 백년 이상을 살아왔지만 자네의 말이 정답이라네. 현실은 돈 없는 자에게 너무나 냉혹하고 불리하게 적용되지.”
“그리고 돈 있는 자에게는 매우 유리하고 너그럽구요.”
마진가가 조심스레 맞장구를 쳐주자 나백천은 빙그레 웃으며 하고자 하는 말을 꺼냈다.
“그렇다네. 특히나 자네나 나같이 큰 조직을 이끄는 사람에게는 돈, 아니 예산(豫算)이란 항상 머리 아프게 하는 귀찮음의 화신이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지요.”
예산 확보란 조직의 운영과 유지 관리를 위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최고 중요 사항이었다. 예산이 받쳐주지 않으면 정의고 나발이고 다 소용이 없어진다. 왜냐하 면 조직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개방이 아니네. 그래서 항상 돈과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가 없다네. 참으로 질기디질긴 속세의 물건이지.”
“또한 가장 무서운 물건이기도 하지요.”
마진가의 대답은 진실이었다.
“그렇다네. 가장 무섭기도 하고, 가장 귀찮기도 한 물건이지. 게다가 골치 아프기까지, 정말 속썩이기에는 완벽한 녀석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내년에 문도들의 아 이가 몇 명 태어날지까지 예상하고 짜야 하는 게 바로 1년 총예산일세. 물론 몇 명이나 죽을지, 그것이 자연사인지, 사고사인지, 전사인지, 과로사인지, 그것도 아니 면 순직인지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 추정, 사망자까지 유추해서 짜야 하는 게 바로 예산이란 괴물일세.”
마진가는 나백천의 말에 적절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니죠. 아이가 태어나면 축의금을, 사람이 죽으면 조의금도 줘야 하지요.”
“그렇다네. 그만큼 비정한 곳이지, 예산의 세계란. 참 웃기지도 않은 일이 이것 때문에 많이 벌어지기도 한다네. 노부는 여기저기서 손을 벌리는 사람들 때문에 골 치가 아파 죽겠다네. 돈 달라는 사람이 좀 많아야지. 내가 백 살이 넘어서 주판이나 튕기고 있어야겠나? 아직도 천겁령의 세력이 뿌리 뽑히지도 않은 이 마당에? 그 런데 사람들은 나를 마치 금고나 전장처럼 대한다네.”
아무래도 지금 나백천은 사건의 해결책보다는 이 문제에 대해 맞장구쳐줄 동변상련의 동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천무학관주 마진가만큼 이 일에 적임 자는 없었다. 나백천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다.
“네. 저도 많이 겪어봐서 잘 압니다. 저번에는 비영각과 천무단에서 예산 배정을 놓고 싸움이 붙었었지요. 비영각이야 은밀하고 비밀스런 임무를 수행하니 그만큼 타부서보다 많은 비용이 들고.. 천무단에서 이해를 안 해줘서 정말 골치가 아팠습니다.”
“원래 더럽고 지저분한 일에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네. 세상이란 참 매정하지. 그리고 왜 그렇게 세상은 돈 없는 알거지에게 그리 심한 반발 작용을 하는 건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맹주님의 고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마진가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자 나백천은 연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예산의 어려움에 대해 열심히 성토하던 나백천과 마진가가 갑자기 자 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갖췄다.
“이제 불평 불만 하소연이 끝났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세.”
“그러지요.”
마진가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연습 비무였고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죽이 잘 맞았다.
“노부는 이번에 환마동의 사건을 겪으면서 한 가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네. 사실 이건 노부가 지난 80년간 계속 생각해 오던 문제이기도 하지. 그러나 아직도 그 해답을 풀지는 못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어보는 마진가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나백천의 표정에서 뭔가 중요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환마동 사건에 쓰인 그 염마뢰(炎魔雷)는 대충 얼마쯤 하는 물건이라 생각하는가?”
“네?”
나백천의 느닷없는 질문에 마진가가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의 엉뚱함을 규탄하는 대신에(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마진가다운 성실함이었다.
“아마 그 정도로 제작 과정이 어렵고, 위력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데다 구하기까지 힘든, 그런 희소가치가 높은 물건은 적어도 금화 다섯 냥은 주어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금액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배 이상으로 뛸 수도 있었다. 불법적인 것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언제나 액면가보다 비싸기 때문이 니까.
나백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것은 곧 그것이 아주 값비싼 물건이라는 이야기지. 금화 다섯 냥이라…. 그 정도 거금이면 개방의 3개 분타 정도는 1년은 족히 먹여 살릴 수 있겠 군.”
“그들이라면 그걸로 10년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슬쩍 웃으며 마진가가 맞장구쳤다.
“그렇다면 말일세. 그런 물건을 한두 개만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런 막대한 돈이 천겁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늘에서 뚝 하고 돈벼락이라도 떨 어지는 걸까?”
“…..”
그제야 마진가는 나백천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를 강력하게 후려갈기고 싶었다.
“이런 돌대가리! 그걸 아직까지 생각하지 못하다니!’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나백천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 천겁혈세(天劫血洗) 이후 종적을 감춘 천겁령(天劫靈)의 후신이라고까지는 말 못 하지만, 일종의 전진 비밀 활동 기지인 천겁우(天劫羽)의 운영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은 어디에서 충당되는 걸까? 게다가 천우는 문자 그대로 깃털일 뿐이고, 더 큰 몸통의 배후가 있다면 그 몸통의 유지를 위해 더욱더 큰 자금이 필요할 걸세. 조직이 은밀해지면 은밀해질수록 유지비는 더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세상에 비밀 유지만큼 힘든 것은 없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어딘가에 그들의 조력자가 있다는 얘기군요. 그들에게 막대한 양의 황금을 대주는 돈줄이 말입니다.”
나백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네. 그것도 아주 큰 재력의 소유자가 그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음이 분명해. 아마 우리도 익히 잘 아는 조직임이 분명할 거야. 다만 문제는 우리가 그 조직이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의 이름만 알 뿐 속 알맹이는 모른다는 것이지. 문제는 용의선상에 오른 조직이나 문파 중 어느 곳이 바로 그곳이냐 하는 것인데, 중원 상계는 사실 우리의 힘이 만족할 만큼 미치는 곳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긴 하지요.”
무인에게 있어 상인들이란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무인들이 먹고 자는 모든 일상 생활 용품이 그들 상인의 손을 통해 무 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또한 상인이라 생각하여 얕잡아볼 수도 없었다. 관부를 포함해 수많은 무림방파에 직·간접적인 연을 맺고 있는 상인들의 잠재된 힘은 정천맹조차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만큼 막강했기 때문이다.
“천겁령이 그때 강호를 피로 휩쓸면서도 전장이나 표국이나 요식업계 같은 상권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들도 사람인 이상 밥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들이 땅을 파면 저절로 황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 이상은 말일세. 사람은 검만으로 살아갈 수 없어. 돈이 없다면 조직도 세력도 소용이 없다네. 조금 전에도 내가 자네에게 하소연했듯이 노부가 매년 가장 많이 머리를 쥐어뜯을 때가 정천맹 예산 분배 시기라는 것을 잘 알지 않나.”
“주위에서 아무나 아귀처럼 손을 벌리니 그 고심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예산을 분배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 정도 조직을 운영할 1년 예산을 모으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일세. 한 백 배 정도 더 어렵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거야. 물론 우리 같은 거대 세력이야 이미 뻗어놓은 무수한 가지들이 있어 열매를 맺는 데 큰 불편이 없지만 말일세.”
“그런데 그 가지를 가진 게 우리만은 아니라는 그 말씀이시군요?”
나백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들이 예산 없이, 즉 돈 한 푼 없이 백 년을 버텨왔다는 터무니없는 농담을 믿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애석하게도 세상의 거의 모든 가치는 대부분이 모두 돈으로 환산이 가능하니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니겠나. 사람의 목숨도 돈으로 환산되는 이 판국에 돈 없이 백 년을 지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 지. 백 년 동안 지하에 은둔해 오던 그들이 땅을 파서 거기서 나온 돈으로 조직을 운영해 온 것은 아닐걸세. 분명 그들의 뒤를 봐주는 상권 조직이 있을 거야! 그것을 찾아야 오리무중(五里霧中)인 천겁우, 그들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네.”
나백천의 두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저히 100세가 넘은 노인의 눈빛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가득한 눈이었다.
“상당한 도박이군요, 그 조력자에 있어서는……. 전 여태껏 상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는 기문(奇聞 : 기이한 이야 기)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박인 줄 알고 뛰어들었다가 쪽박 차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네. 약간의 충성과 좀더 큰 공포와 어마어마한 보상에, 예를 들어 강호상권의 독점 같은 것 말일세. 그 런 거대한 이익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세. 전쟁이 나면 당연히 엄청난 양의 물량이 필요해지고 그 어마어마한 물량들은 하늘에서 유성우 떨 어지듯 떨어지지는 않지. 그러면 피가 내를 이루고 바다를 이루건 말건 이익을 보는 무리가 생겨나게 마련이라네. 천겁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번의 싸움은 싸움이라 부르지 못하고 전쟁이라 불러야 할걸세. 아마 그런 규모일거야. 그 피바람 속에서 자신의 잇속을 굳세게 차리는 이가 분명 나올 테지!’
나백천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말을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이 있으니 그것을 떠받드는 것일세. 아무런 이익도 없이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숨어서 천겁령의 그림자를 따르겠는가. 그 어둠의 그림자가 가 진 악마적인 매력이란 게 있기 때문이지.”
“그것은 공포일 수도 있지요.”
마진가가 지적했다.
“물론 그것도 배제할 수 없지만 노부는 이익 쪽이 더 크다고 생각하네. 야망을 가진 사람은 가끔 엉뚱한 짓을 잘 저지르지. 사고 판단이 달라지거든. 상인이란 이익
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는 존재들일세. 이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지.”
“그런데 과연 이렇게 용의주도하게 그들의 뒤를 봐주는 곳은 어디일까요?”
“애석하게도 사람을 풀어 면밀히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네. 영리한 놈들이야.”
“만일 우리들이 그 꼬리를 잡는다면…….”
마진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지난 수십 년간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천겁령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천겁령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을걸세. 단 한 가지 예외적 상황에 처하지 않 는다면 말일세.”
“그 예외적인 상황이라 하심은……?”
순간 나백천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안광이었다.
“그건 당연히 ‘그’가 살아 있을 경우라네.”
“그가!
순식간에 마진가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청명한 하늘에 소나기가 내리기 전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았다. 만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상 최악의 사태가 될 것이다. 그동안 숨죽인 평화 속에서 지내온 강호가 과연 그 사상 초유의 사태를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그는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이라는 가정일 뿐이라네. 그런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네. 그날 같은 피의 바다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네. 그러기에는 난 너무 늙었 어.”
“저도 동감입니다.”
“아니야, 자넨 잘 모를걸세. 그건 겪어본 사람들만이 아는 아주 끔찍한 기억이지. 떠올리기조차 치가 떨리는 그런 끔찍하고 참혹한 기억! 내 기억에서 어느 한 부 분을 제거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서슴없이 100년 전 그날의 기억을 뇌리 속에서 싸그리 제거할 걸세. 그러면 밤에 잠을 자기가 한결 수월해질 테니깐 말일세. 그리고 더 이상 그자에 대한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될 테고 말이야. 난 아직도 문득 문득 그날의 꿈을 꾸곤 한다네. 그날의 벌판은 마치 피의 바다처럼 붉었지…….”
나백천의 잔뜩 굳어지고 찌푸린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는 그만 또다시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가급적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노력하던 그날 의 일을 말이다. 그런 참극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잠시 침묵하던 나백천은 금세 평정심을 회복하고 끊었던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현 강호에 은밀히 침투된 천겁령의 뿌리는 너무 깊다네.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삭초제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네. 노부는 이제 너무 늙어서 제초 작업 하다가 허리가 삘 것 같단 말이야.”
나백천은 다시 여유를 찾은 모양이었다.
“하하하, 그러나 저는 아직 맹주님이 늙었다는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 100년은 더 정정하실 것 같군요.”
“허허허, 그렇다면 자네의 기대를 저버리기가 내 너무 미안하지 않나! 제초 작업에 늙은이를 앞세우다니 젊은 사람이 너무 심술 맞구만!
“하하하, 저도 벌써 환갑이 넘은 몸 입니다. 이제 슬슬 늙어갈 때이지요.”
60세 환갑의 나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며 일반인들에게는 장수했다는 소리를 듣는 나이였다. 그러나 무림인인 나백천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 다.
“이런, 이런. 우리 항렬의 사람들은 그걸 환갑이라 쓰고, 청춘이라 읽는다네. 한창 힘쓸 나이의 사람이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야 쓰나.”
환갑 나이의 마진가가 그의 눈에는 아직도 젊은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실 환갑을 넘은 나이라 해도 마진가의 머리에는 흰머리, 새치 한 올도 찾아볼 수가 없었 다. 그렇다고 그가 검은 물로 염색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 피부에는 아직도 탄력과 생기가 넘쳐흘러 40대라 해도 충분히 믿을 정도였다. 누구도 그를 보 고 환갑이 넘은 노인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화산에 도착하면 그 아이들 무척이나 당황하겠지?”
나백천이 약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마진가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항상 생각해 왔던 사실과 다른 사실을 접하면 처음에는 당황하겠죠. 항상 그래 왔듯이 말입니다.”
“그나저나 그 아이들이 화산규약지회의 진정한 의의를 깨달았으면 좋겠군.”
“저도 동감입니다. 너무 치솟는 혈기에 휩싸이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그럼 보는 눈이 어두워질 테니까요. 그럼 자칫 잘못해 이 대회의 본질을 놓치게 되겠죠. 너무 싸움이나 전쟁이나 비무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무사히 도착하면 좋을 텐데..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이런 바람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번번이 무산되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통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관주, 사실 노부에게는 지금 이 일보다 더 큰 의혹이 하나 존재한다네. 가슴 아픈 일이지.”
“말씀하십시오.”
긴장한 목소리로 마진가가 대답했다. 말을 이어나가는 나백천의 동요를 그로서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천겁령의 배후를 캐는 것보다 더 이 거인을 이토록 동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관주!”
나백천이 입을 열자 마진가는 서둘러 대답했다. 내심 두려움에 떨면서.
“마, 말씀하십시오!”
“설마 그 몹쓸 놈이 환마동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 예린이에게 무슨 못된 헛짓거리를 한 건 아니겠지?
“네?”
‘앗!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표정 관리에 실패한 마진가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 그게 무슨……?”
그는 차마 그 뒷말을 이을 용기가 없었다.
“왠지 그 아이의 분위기가 거기서 나온 이후 너무 바뀐 듯해서 그렇다네.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침중한 나백천의 말에 마진가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때 아무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딸아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직감은 뭔가, 무슨 일인가 있었다고 외치고 있네, 외치고 있어!”
나백천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마진가는 뭐라고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 신경과민인 게 아닐까요?”
딸 이야기는 나백천과 언쟁을 가급적 회피하는 게 좋다. 어떤 일에도 침착하고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는 이 거인도 딸 문제에서만큼은 쉽게 이성을 잃고 마는 것이 다. 게다가 충분히 그런 의혹을 품을 수 있다는 것도 마진가는 공감했다. 여태껏 나예린에게 그런 일들이 어디 한두 번 일어났었던가? 그런 류의 사고에 몇 번이나 휘말릴 뻔했었는지, 이미 숫자 세기도 포기한 상태였다. 나백천의 의심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만일 우리 예쁜 예린이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내 그놈을 가만두지 않겠네. 만에 하나, 아니 천만에 하나, 그런 일의 낌새라도 있었다고 한 다면 그놈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질 각오를 해야만 할 거야. 암! 내가 어떻게 키워온 아이인데 그런 놈팡이에게 그 애가 해를 입도록 놔둘 수 있겠는가. 그때 예린 이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았을 것을..
그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씨근덕거리고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