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1권 10화 – 재회

비뢰도 11권 10화 – 재회

재회

날카로운 칼이 허공중에 번뜩였다.

그리고 무엇인가의 살, 혹은 고기라고 불리우는 것이 칼날 아래에 잔인하게 난도질당했다. 칼의 주인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쉬익!

푸학!

서걱 서걱 서걱!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얼마나 많은 칼질이 있은 이후일까…….

진하고 선명한 붉은빛!

칼자국 사이로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내장이 한아름 쏟아져 나왔다.

씨익!

칼을 들고 있는 괴인의 입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그는 잔인하게 손을 뻗어 삐져나온 내장을 잔인하게 잡아뽑았다.

“흐흐흐!”

괴인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묻은 붉은 피를 핥았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화르르륵!

거센 불꽃이 활활 잔혹하게 타올랐다.

“오향장육 10인분 나왔습니다.”

숙수의 외침과 함께 점소이가 잽싸게 요리를 들고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후에야 가져올 셈이냐?”

염도가 강하게 불평을 터뜨렸다. 아직도 가져올 음식은 40인분이 더 남아 있었다. 지금 주방은 대량의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완전히 전쟁이었다.

“헤헤…, 죄송합니다. 손님! 금방,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염도가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얼어붙은 점소이가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헤헤거렸다.

“빨리 하게.”

염도가 흉폭한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순간 오금이 저리는 공포를 느끼며 점소이는 벌벌 떨었다. 그 같은 일반인이 염도 같은 절정고수의 안광을 정면으로 받는 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곳은 어디에나 있는 무척이나 흔한 평범한 객잔은 아니었다. 삼양(三陽) 성내에 들어서자마자 이 성에서 가장 좋은 객잔을 물어 찾아온 곳이었다. 가끔 비가 오 면 부실한 천장에서 물이 새 홍수를 일으키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그런 삼류 업소와는 차별화된, 당당히 일류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는 곳이었다.

순평루(順平樓)!

예산이 넉넉한 천무학관 대표단 일행은 이곳을 오늘의 숙소로 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염도의 독촉에 막 음식 이 나온 참이었다.

“류연이는 어디 갔느냐?”

거의 전세 내다시피 한 식당 안을 빙 둘러본 염도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마을을 둘러본다고 나갔습니다.”

모용휘, 장홍과 함께 앉아 있던 효룡이 대답했다.

“쳇! 또 예린이를 쫓아서 나간 모양이군.”

염도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 아이는 여전히 사람을 피하는 모양이군.’

나예린이 뭔가를 구경하러 일행을 이탈했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 일행들과 어울려 있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예린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아무리 동문들이라 해도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염도로서도 그편이 사람들을 통솔하기가 더 편했다. 특히나 식사 시간에는 더욱더. 더 이상 관도들이 나예린을 훔쳐보다 밥이나 국을 입이 아니라 옷에다가 쏟아 붓는 꼴사나운 모습은 사양이었다.

“휘! 상! 너희들이 나가서 찾아와라. 무슨 말썽이나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염도 자신도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소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예!”

모용휘와 남궁상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저…, 저도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잠시 후, 안절부절 못하던 위지천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절대 두 사람이 만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는 없었다. 온갖 망상이 그의 머릿속 가득히 떠올랐다.

“네가 왜?”

시큰둥한 표정으로 염도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니깐.

염도는 위지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한 마디만 했다.

“일없다. 앉아!”

거부는 용납되지 않는 어조였다. 어쩔 수 없이 위지천은 울상이 되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는 듯 울퉁불퉁 그의 볼이 부어올랐다. 아마 속으 로는 염도의 욕을 무더기로 내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위지천의 기분이 상하던 말든 염도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모양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개인 행동들이 많은 거야? 자, 먹자!”

염도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고는 젓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또 피하는군요!”

사뿐히 내딛던 우아한 발걸음이 움찔 멈추었다.

“예린, 왜 자꾸만 나를 피하는 거죠? 환마동을 나온 이후 눈에 띄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군요. 도대체 이유가 뭐죠?”

나예린이 고개를 돌려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이목 집중을 피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은 하얀 면사로 가려져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청난 수의 남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수작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처럼 무모했다. 한 조각의 면사로 가려지기에는 그녀의 아름 다움이 너무나 빼어났다.

나예린에게로 다가간 비류연이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순간 무인의 본능이 발휘된 나예린은 비류연의 손을 피한 다음 금나수(擒拿手)를 이용해 오히려 비류연의 손목을 잡았다. 비류연은 애초부터 나예린의 손목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아직까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천상의 미녀에게 손목을 잡힌 비류연은 뛸 듯이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흑흑흑, 예린. 나 이제 어쩌죠?”

“…..”

왜 비류연이 갑자기 저렇게 가식적인 울음을 터뜨리며 울먹거리는지 나예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 무슨 일 있나요? ”

“흑흑흑, 전 이제 장가 다 갔어요.”

나예린은 여전히 이해가 불가능했다.

“이유가 뭐죠?”

비류연의 울먹거림이 한층 더 심해졌다. 마치 절망에라도 빠진 그런 모습이었다.

“방심하는 사이 외간여자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어요. 전 이제 순결이 더럽혀지고 말았어요. 이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장가를 가죠? 흑흑흑.”

비류연의 절망적인 울먹거림에 나예린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자가 여자에게 손목을 잡히면 정조를 잃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군요. 강호인이 아닌 일반 여자가 외간남자에게 손목을 잡히면 그런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지만..

나예린의 의문제기에 비류연의 울먹거림이 뚝 멈췄다.

“무슨 말씀을!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라고요. 남녀는 평등한 거잖아요! 그러니 공동의 책임을 져야죠! 남자만 그러는 건 불공평하다고요!”

순간 언제 울먹거렸냐는 듯 비류연은 강한 어조로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러니 책임져줘야겠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비류연의 말에 나예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참,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실소와 함께 긴장감이 풀어지고 어느새 어색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뭐가 문제인지 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어요? 절 책임져야 하잖아요.”

여전히 책임론을 강조하며 박박 우기고 있는 비류연이었다. 나예린은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류연…, 난 두려워요.”

마침내 나직한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하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죠? “

나예린은 환마동의 환상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아니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고야 만 것이다. 그에 따라 남성 혐오증이 재 발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붕괴된 암흑 안에서 두 사람이 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곳을 나오고 나서 다시 자신을 귀찮게 하는 여러 남자들을 접 하다 보니 그 사실이 확연히 느껴졌다. 때문에 비류연마저 피하게 된 것이다. 환마동 사건 이후 흘러 들어오는 여러 가지 의식에 더욱 민감해졌기 때문에 사람들 사 이에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예린이 비류연을 피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내가 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면 난 보통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되어버려요. 평정심과 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져요. 왠지 그게 내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아요. 전 그 사실이 너무나 두려워요.”

나예린은 면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눈처럼 하얀 면사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가려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 중에서 신비로 움을 더 강조시켜 줬을 뿐이었다.

비류연은 그녀의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 같은 깊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빠져들 것만 같은 깊은 눈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 는 남자는 비류연뿐이었다. 다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면 얼른 외면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이 샅샅이 읽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 실이었다.

그녀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이 일로 상당히 고민했음이 분명한 것 같았다. 비류연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 모습 또한 예린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요? 예린은 지금 그대로도 좋아요. 변화하는 자신 또한 자기 자신임에는 변함이 없죠. 평생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는 자 신은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아요. 꼭 획일적으로 남들과 똑같아질 필요는 없잖아요. 재미없게! 그런 건 너무 평범하 고 단조로울 뿐이라고요. 변화란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니 애써 의식적으로 거부하려 들지 말아요.”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녀에게 해주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잊지 않고 내 이름을 불러줬으니 이것으로 만족할게요. 그러니 나중에 나 책임지는 거 잊지 말아요.”

비류연이 살짝 미소 지었다. 나예린은 포근하고 따스한 온기가 가슴에 와 닿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류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그렇게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말아요. 예린은 혼자가 아니에요. 왜 혼자라고 생각하는 거죠?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줄 내가 있잖아요. 내가 허락해 요. 예린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류연……!

비류연의 말은 마법의 언어처럼 나예린의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봄날의 햇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예린은 자신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한겨울의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사막 같았던 그녀의 마음에 따스한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고, 메마른 감정의 불모지에 재생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리 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신비스럽고 생경한 느낌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얼어붙었던 얼음의 강이 사르륵 풀리는 듯한 느낌은.

“걱정 말아요. 그리고 말만 해요. 그것이 어떤 고민이든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세상에서 소멸시켜 버릴 테니까요. 설혹 그것이 옥황상제든 염라대왕이든 간에 산뜻 하게 초전박살을 내버리죠.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엄청 무시무시한 말을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비류연이었다. 너무나 당당한 비류연의 과격 무쌍한 발언에 나예린조차도 흠칫하고 말 았다.

“아니 굳이 소멸시킬 것까지야’라고 생각되었지만 그의 불타는 의지를 말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걸렸다.

“어? 드디어 웃었네요.”

비류연도 함께 웃었다. 면사가 가려져 있지만 그런 것은 비류연의 눈에 아무런 장해물이 될 수 없었다.

“……?”

나예린은 무심결에 자신의 손을 입가에 대보았다.

‘웃어?’

분명 그녀의 입은 웃고 있었다. 또다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왜 항상 이 사람이랑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잠시 대화가 단절되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흘렀다.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은 무척이나 어색한 것 같았 다. 비류연은 한시라도 빨리 화제를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바람이 하늘에 다다랐음인가!

“왜 이러시는 거죠? 길을 비켜주세요!”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미성의 진원지로 향했다. 비류연과 나예린이 앞쪽을 바라보니 쭉 뻗어져 있는 대로 한복판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누구지?’

“어허! 잠깐 차나 마시고 이야기나 좀 나누자는데 왜 그렇게 거부하시오?”

“왜 이러시는 거죠? 놓아주세요!”

자신의 손목을 잡으려는 사내의 손을 여인이 힘껏 뿌리쳤다. 여인은 확실히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지만 귀에 귀지가 가득 틀어 막혔는지 사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뭘 그리 뒤로 빼는 거요? 결코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오. 그러니 너무 경계할 필요 없소이다.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오! ”

나쁜 사람들이 항상 쓰는 상투적인 말이었다. 옆에 있던 남자 중 하나가 거들었다.

“우린 모두 팔대 세가의 자손들이오, 우리랑 어울려 해(害)를 보는 일은 없을 거요. 그러지 말고 잠시 차나 마시며 담소나 나누는 게 어떻소?” 가문은 여자 꼬시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뭔가 이 남자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언제나 강간범이나 흉악범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였다. 그들 말대로만 됐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험난하게 되었겠는가?

“공자님들! 그만 해주십시오. 저희 아가씨께서 곤란해하십니다.”

여인의 마부가 앞으로 나서며 사내들을 말리려 들었다.

“아랫것은 나서지 말라! 건방지다! ”

백색 비단 옷을 입은 청년이 마부를 깔아보며 호통을 쳤다. ‘네까짓 천한 것이 어딜 방정맞게 함부로 나서느냐!’라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것은 남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들의 눈빛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당황하던 기색이 역력하던 마부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지며 그의 눈이 차가운 한광을 발했다.

“뭐, 뭐냐? 감히 천한 것이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

마부의 한광에 순간 흠칫한 백의청년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불같이 화를 냈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던 것이다. 점점 더 차가운 한기를 내 뿜으며 마부가 한 발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그 앞을 여인의 손이 가로막았다.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부는 항의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여인의 의지는 완강 했다.

그녀의 시야에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예린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한 여인을 소위 ‘찝쩍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찝쩍거리는 남자들의 행색을 살펴보니 평범한 동네 깡패나 일반 불한당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들의 허리에 차여 있는 값비싸 보이는 명검은 그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비단 옷은 그들이 꽤나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라는 것을 뜻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분명 무림세가의 자제들 같은데 저런 무례한 짓을..

나예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응? 아…, 아니!’

비류연은 그녀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대노하고 말았다.

“옥황상제든 염라대왕이든 산뜻하게 초전 박살 내버리죠.’

이렇게 빨리 약속을 이행해야 될 때가 올 줄은 그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비류연은 아무래도 그 약속을 실제로 실행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가 성큼성 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더러운 손 이제 그만 치우시지. 아가씨께 민폐라고!’

“웬 놈이냐?”

너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은 악당들의 대사라 쥐꼬리만 한 참신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라? 소저는? ”

비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비록 남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놀래기는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여기서 만날 거라 생각지 못한 인물이었기에 두 사람의 놀람 은 더욱 컸다.

“어머!”

두 사람을 발견한 미성의 주인공이자, 불행한 현 상황의 주인공인 그 여인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반색하며 기뻐했다.

“류연, 예린!”

그녀는 바로 사중화(中花)은설란이었다.

미녀에게 찝쩍거리고 싶은 것은 동서고금의 거의 대부분 남자들의 기본 욕구 중 하나, 아니 철저히 본능에 입각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거칠고 막돼먹은 남자들일수록 이 증세가 심각하다.

망나니 건달들이자 무뢰배들이 은설란 정도의 눈 돌아가는 미모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만일 혹시 행여라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망나 니 건달들의 쥐똥만 한 인내심을 너무 과대평가한 망상일 것이다.

그런데 꽤나 ‘전(錢)’있게 차려입은 도련님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걸 보니 그들이 아무래도 이번 경쟁(?)의 최종 승리자들인 모양이었다.

“이런 건방진 놈! 이놈! 네 눈에는 이 몸들이 보이지도 않으냐?”

평범한 안부 묻기 따위에 자신들의 존재가 한참 동안 무시당하자 그들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노옴?”

뚜두둑.

비류연의 고개가 천천히 불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마치 녹슨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참 버릇없는 주둥아리님이로군요. 조금은 예의를 가르쳐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네요.”

비류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어졌다.

“이놈, 우리가 누군지 알고 감히 까부는 게냐?”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백색 비단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방금 전 은설란의 마부를 향해 무례하다 욕을 한 바로 그놈이 었다. 이 불한당 집단은 쪽 수가 합이 다섯이었다. 저 거만함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보아하니 짐작대로 한가락 하는 무림세가의 자손인 모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아래위로 대충 한번 훑어본 비류연이 대꾸했다.

“뭐 그 몰골을 보니 일일이 떠벌이고 다니지 않아도 집안과 배경의 힘이 곧 자기 자신의 힘인 줄 착각하시는 얼간이 도련님 한 묶음이 분명한 것 같군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비류연이 해줄 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이…, 이 자식! 그…,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정곡을 찌르는 비류연의 말에 다섯 명의 얼굴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멍멍 짖음은 비류연의 귀에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일 뿐이었다.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 “

“무릎을 꿇고 이마가 깨질 때까지 사과해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재미가 없을 것이다.”

다섯 명이 너나 할 것 없이 분노의 외침을 토해 냈다.

“허어! 요즘은 진실을 말하면 모욕으로 간주당하는 세상인가 보군요.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져서야. 쯧쯧쯧.”

비류연은 다섯 명이 내뿜은 살기어린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서 뉘 집 개가 짖나, 라는 그런 태도였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도련님들의 타오르는 분노 에 기름을 퍼부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미친개가 발광을 하든 지랄을 하든 자기와는 하등 관계없다는 태도였다.

“어?”

그때 뭔가를 생각해 낸 듯 갑자기 비류연의 손가락이 사내들의 머리 수를 세었다.

“그런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

더 이상은 세고 싶어도 셀 머리가 없었다. 비류연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보아 도저히 풀지 못하는 난제라도 만난 사람 같았다.

“어라? 아무리 세어봐도 다섯 마리뿐이네. 팔대 세가면 나머지 세 마리가 더 있어야 할 텐데? 나머지 세 마리는 어디 갔지요?”

인간 이하의 축생 취급을 서슴없이 해버리는 비류연이었다. 자격이 없는 놈들이 깝죽대는 꼴을 그는 가장 혐오했다.

“이…, 이놈이…….”

마침내 다섯 마리, 아니 다섯 명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네놈 하나 찢어 죽이는 데는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챙!

“결투다! “

가운데 서 있던 백의청년이 검을 뽑으며 외쳤다. 갑자기 비류연의 가려진 눈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쏘아져 나온 한기에 백의청년은 흠칫하고 말았다.

“어?”

“어?”

“어?”

“어?”

“어?”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가 다섯 명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자네 왜 장난하고 그러나?”

녹의청년 하나가 옆에 있던 황의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하하하…, 자네는 왜 그랬나?”

황의청년도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하하, 그러는 자네는? “

옆에 있던 백의청년이 같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사람들이 짓궂기는, 하하하!”

황의청년은 두 사람의 어깨를 동시에 두드렸다. 그들의 입은 지금 쉴새없이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웃는 것이 아니라 잔뜩 굳어져 있었다. 좀 전에 비류연의 웃음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발산된 날카로운 예기가 그들은 원래 있던 곳에서부터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자신들이 세 발자 국이나 뒤로 물러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큭큭, 쿡쿡쿡!”

갑자기 비류연이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나예린은 비류연이 화가 몹시 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 화가 났을 때 비류연은 항상 저런 식으로 웃었다.

그를 화나게 하는 것, 그것은 누차 얘기하지만 끔찍한 재앙이었다.

“이 애송이가 검을 함부로 뽑다니! 과연 그 검 끝에 실린 무게를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가문의 후광에 안주하는 너 따위가?”

비릿한 조소가 흘렀다.

백의청년은 벙어리라도 되어버린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류연, 그만둬요. 표식을 보니 아무래도 남궁세가의 자제 같아요. 더 이상 시비를 일으키는 건 좋지 않아요.”

나예린이 백의청년의 옷에 수놓아진 표식을 알아보고 비류연을 말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발생시켰다.

“풋! 푸하하!’

기어코 참지 못하고 비류연은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킥킥! 팔대세가의 생각 없이 사는 녀석들인 줄은 알았지만 남궁세가의 자식이라니…, 너 혹시 남궁상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냐?”

순간 검을 쥔 청년의 손이 살짝 떨렸다. 마음이 동요되자 검도 떨리다니 아직 턱없이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네놈이 어떻게 그분을 아느냐? 그분은 나의 사촌 형님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다.”

청년의 이름은 남궁호!

남궁상은 그가 가문의 또래 중에서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존재였다. 물론 비류연은 그런 청년의 기분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류연은 고압적인 자세 로 남궁호를 바라보았다.

“큭큭큭, 알고 보니 낙오자였군. 그럼 이건 나름대로 낙오자의 방탕함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몸부림인가?”

저 나이에 이러고 있다는 것은 천무학관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나타나는 사람의 반응은 단 하나뿐 이었다.

“이놈! 죽여버린다.”

남궁호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검광을 뿌렸다. 하지만 비류연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비류연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나한테 시비를 걸다니…. 좋은 배짱이로군. 하지만 아직 부화도 못한 달걀 주제에 감히 덤빈단 말이냐? 삼천년은 더 수련하고 와라!

비류연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으로 깜찍한 놈들이 아닌가! 발로 자근자근 밟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나, 검과 몸과 마음이 제각각 따로 노는 주제에 감히 나에게 덤벼? 정말 간덩이가 부었군.”

비류연이 한심스럽다는 투의 말대로 남궁호의 실력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류연의 기준에서 그렇다는 거지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 인다는 것은 아니었다.

비류연은 남궁호의 찔러 들어오는 검을 가볍게 피하며 슬쩍 옆으로 접근해 살짝 다리를 걸었다. 그러자 그는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땅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남 궁호는 입 안 가득히 한 움큼의 모래를 삼켜야만 했다.

“쯧쯧쯧, 겨우 다리를 건 것만으로도 맥을 못 추다니…….”

비류연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같이 어울려 놀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것도 인연인 것 같으니 그렇다면 인생의 선배로서 내가 교훈을 하나 가르쳐주지. 강호의 쓰디쓴 교훈과 철칙을!”

비류연이 호기롭게 외쳤다.

“강하지 않으면 죽는다! 이게 바로 강호의 철칙이다. 가끔은 가문의 배경도 통하지 않는 때가 있다는 걸 명심해 둬라. 비명횡사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몸소 체험해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개구락지처럼 널브러져 있는 남궁호를 내려다보며 비류연이 말했다. 남궁호는 수치심에 전신이 불에 덴 듯 달아올랐다.

“이, 이…,이노오옴!!”

동료가 엎어지는 것을 보고 분개한 또 한 명의 팔대세가 도련님이 비류연의 시선이 돌아간 틈을 타 정정당당하게 검을 찔러 들어왔다. 그자 역시 팔대세가의 하나 인 제갈세가의 직계손이었지만 비겁함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털 난 양심의 소유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꼭 눈이 있어야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수련 여부와 정도에 따라 눈에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물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소리, 공기의 진동, 차가운 살기 등등 자연계에 존재하는 이런 여러 가지 정보들이 비류연에게 검이 어떤 방향에서 날아오는지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비 류연이 살짝 몸을 한 번 틀자 그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정말 미숙하기 짝이 없는 검법이었다.

그리고 살짝 손목을 한 번 가격하자 제갈무는 치욕스럽게도 검을 떨구고 말았다.

“뭐야 이거? 기초도 전혀 안 됐잖아!”

비류연은 어이없어하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그의 복부에 주먹 한 방을 먹였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당하자 나머지 세 명은 체면치레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 명은 검으로, 또 한 명은 도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주먹으로.

“정말 비겁하군요.”

은설란의 말에 나예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널브러지게 하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고찰이 이 시각 한 남자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비류연은 몇 번씩이나 더 손과 발을 수고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하고 올바르며 이의 없는 널브러짐’인가 연구하기 시작했다. 남궁호와 제갈무가 검 한번 제 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맥없이 나가떨어지자 도련님들은 명예고,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일제히 비류연을 향해 달려들었기에 연구 재료는 걱정할 필요 가 없었다.

“이건가?”

비류연이 만지작거리자 그를 향해 맹렬히 주먹을 내뻗었던 황의사내 언개정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사람의 몸이 만(卍)자를 그렸다. 그는 권법으로 이름 높은 진 주언가의 직계로 실력 또한 가문에서 인정받고 있는 처지였지만 비류연의 손 안에서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퍽!

벌렁!

비류연이 발길질을 한 번 하자 그의 다리를 동강내기 위해 도를 휘둘렀던 하북팽가의 팽연우는 배를 움켜쥐고 허공에서 한 바퀴 맴돌았다.

“아니면 이런 건가?”

퍽!

공손세가의 직계손인 공손승우가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아니야! 이럴 수도 있는 거야. 고리타분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고를 얽매일 필요는 없지.”

비류연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뚝우뚝!

뿌드득!

“으아아악!”

“그, 그만! 제발.”

그러는 동안에도 비명은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무심하게 귀를 닫고 자신의 할 일에만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나에 열중하는 사 람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누가 그랬던가?

참으로 형이상학적인 자세였다. 어떤 천축 요가 수행자도 감히 해내지 못할 고난이도의 형상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뒤엉켜 이런 기이한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는 사실에 신비로움마저 느껴졌다. 사람의 발과 손을 단 한 곳도 부러트리지 않고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게 할 수 있다니 사람들은 인간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경외심마저 느꼈다. 그러나 비류연은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떤 모양새가 되어야 진정한 널브러짐일까? 쓰러짐이랑 다른 차이를 어떻게 확연하게 보일 수 있을까?’ 비류연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어렵군, 어려워!

난해하고 심오한 고찰에 몰두하는, 참선하는 고승처럼 비류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때 소위 그 널브러짐 당해 있는 남궁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너무 나 불행했다. 오늘,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차분히 나누어 찾아왔어야 할 불행이 한꺼번에 몰려오기라도 한 듯이. 휙 던져질 때 과일 상자에 박치기를 했는지 향긋한

과일 내음와 함께 남궁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 이게 어찌된 일……?”

주변에 펼쳐진 성대한 난장판을 보며 남궁상이 물었다. 모용휘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류연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비류연을 찾는 일은 무척이 나 간단했다. 객잔을 나오자마자 가장 소란스러운 곳으로 발길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지금 뭘 하…, 신 겁니까?”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남궁상이 물었다. 이런 소동을 일으켜봐야 이득될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응? 나? 여기서 잠시 구조 작업을 하고 있었지.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행동은 무척이나 힘들고 번거로운 일인 것 같아.”

비류연이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저기 저 소저 말…,

,씀입니까?”

남궁상의 손이 은설란을 가리키며 해명을 요구했다. 그도 그녀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비류연은 고개 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구한 것들은 저기 바닥에 여기저기 누워 있는 달걀들이지.”

“네? 그게 무슨. .?”

“문자 그대로 내가 오늘 초상치를 젊은 목숨들을 살려주었다는 말이야. 안 그래요, 할아버지?”

비류연이 느닷없이 고개를 휙 돌린 곳은 방금 전 찝쩍대는 도련님들을 말리던 마부 노인이었다. 은설란이 타고 온 마차를 모는 이 노인은 처음에는 이 느닷없는 질 문에 일순 흠칫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소인 같은 하찮은 마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나저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

“그래요? 그렇다면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비류연의 웃음섞인 대답에 은설란은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마부 노인이 도대체 뭘 어쨌다는 거지?’

남궁상은 여전히 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 불능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의문부호들이 사이좋게 춤을 췄다.

그때였다. 저쪽 과일가게 과일들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청년 하나가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 그가 거기에 처박혀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눈처 럼 새하얗던 그의 백의는 짓이겨진 과일들로 인해 알록달록 여러 가지 색깔로 염색되어 있었다. 겨우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몸 여기저기 를 만지고 있는 것을 보면 온몸의 뼈마디가 쑤신 듯 아픈 것 같았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청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이 아는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의 눈엔 그가 마치 구세주 처럼 보였을 것이다.

“혀…, 형님! ‘

남궁상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고, 그의 얼굴은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란했다.

“아니 너는 둘째 작은 아버지의 둘째 호(虎)가 아니냐! 네 몰골이 어찌 그 모양이냐?”

남궁상의 걱정어린 질문에 힘을 얻은 남궁호가 비류연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내심 복수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니깐 저 작자가…….”

퍽!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던 남궁호는 남궁상의 온화하고 적절한 조치에 다시금 침묵하고 말았다.

‘설마…, 못 들었겠지?’

얼른 비류연 쪽을 바라보니 그는 지금 모용휘와 함께 은설란이랑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성공인가?

[무슨 일 있었냐?]

바로 그 순간 그의 귓가를 때리는 전음성,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남궁상은 화들짝 놀랐다.

[네에? 하하하, 아무 일도 없습니다. 없었어요! 그럼요, 정말입니다.]

당황한 남궁상이 전심전력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으래?”

대사형의 돌려졌던 고개가 다시 원상 복구되자 그제야 남궁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우~!”

사촌 동생을 생명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한 남궁상의 신속한 조치는 칭찬받아 마땅했다. 물론 남궁호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