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부자원수(怨讐)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지간이었다.
이때 인의 장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가운데로 길이 열렸다.
그리고 열려진 외길로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자 길 좌우의 녹림도들이 다들 부복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산의 소유는 전부 우리의 소유!”
우레와 같은 구호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일종의 연출인가? 광오한 구호로군.’
우락부락한 호목에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 철침처럼 거칠게 자란 수염과 얼굴 여기저기에 보이는 크고 작은 상처들. 그동안 쌓아온 전장의 연륜이 돋보였다.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이 거한이 바로 마랑채 주인이자 녹림칠십이채의 총표파자(총채주를 가리키는 말!)인 광풍마랑 임덕성인 모양이었다.
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 거라니…, 뻔뻔스러울 정도로 광오한 구호였다.
“아버지….?”
임성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 하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뭔가 오해가 있음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만 하는가?’
마침내 임성진은 결심을 굳혔다. 가장 마주치기 싫었던 현실이었지만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은 막아야만 했다.
대표단의 주위에는 지금 폭랑삼십육도 중 외부로 임무를 띠고 나간 18명을 제외한 나머지 18명이 거리를 두고 포위망의 최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폭랑삼십육도 의 사내들은 거칠다. 거친 만큼 너나 할 것 없이 여자를 밝혔다. 그들에게 있어 여자를 밝힌다는 것은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입가에 침이 뚝뚝 떨어지는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류연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 죽인다….’ ‘끝내주는군….’ ‘미치겠네….’ 기타 등등 뭐 그런 생각들일 것이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내고 있는데 못 알아차린다면 눈치 못 채는 쪽 이 이상한 것이었다. 비류연은 포위망의 최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늑대 가죽 옷의 열여덟 명의 음탕한 시선이 심히 마음에 걸렸다.
비류연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한 놈이 나예린을 향해 집중적인 음탕한 시선을 보냈다. 그의 입가에 흐르는 침과 몽롱한 두 눈으로 미루어 볼 때 뭘 생각하고 있는 지 뻔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맡은바 포위 임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어디다 한눈을 파는 건지.
“이봐!”
비류연이 3장 거리에 있는 그들을 불렀다. 그러나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비류연이 부른 것은 그들 모두였다.
짝!
요란하게 뺨따귀를 올려붙이는 소리가 숲 속으로 시원스레 울려 퍼졌다. 그러나 비류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 어? 어?’
“뭐…, 뭐야? “
너무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18명의 폭랑십팔도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소리는 분명 단 한 번 울렸을 뿐인 데 18명 모두가 왼쪽 뺨을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래?”
표행 마차 위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던 비류연이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비뢰도(飛刀) 독문신법(獨門身法)
봉황무(鳳凰舞) 오의(義)
환영의 거울[之鏡]
짝!
이번에는 그들의 뺨이 동시에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오른쪽 뺨에는 선명하게 붉은 다섯 손가락이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귀, 귀신인가?’
18명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두 번째를 대비해 그들은 분명히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비류연이 움직인 기미는 전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어떻게 한 거야?
비류연은 여전히 표행 마차에 앉은 채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비류연이 ‘뭔가’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 중 그 누구도 그게 뭔지 파악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나예린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에는 순간 비류연의 신형이 열여덟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었다. ‘설마…….’
아마도 착시가 분명했으리라. 인간인 이상 그런 움직임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건 경고예요. 다음에는 얼굴에서 흰 구슬 두 개를 뽑아주죠. 그러니…, 두 번 다시 그런 추잡한 눈으로 남의 것을 넘보지 마!”
한기가 몰아치는 경고!
정말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아직도 폭랑십팔도는 사태 파악을 못 한 채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예리한 얼음 칼에 베인 것처럼 서늘했다.
이때 대표단 일행 중에서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와 염도에게로 다가갔다. 그 청년이 말했다.
“노사님! 이 일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너에게?”
염도가 바라본 임성진의 눈은 그동안 애소저회에서 농이나 지껄이던 장난기 가득한 그 눈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두 눈은 결연한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별일이구나. 그러나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자신 있느냐?”
“물론입니다. 이 일은 제가 제 손으로 해결지어야만 합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염도는 이내 승낙의 뜻을 표했다.
“그럼 한번 믿어보는 것도 좋겠지. 다시 묻겠다. 자신 있느냐? 저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자신 있습니다.”
임성진의 대답은 확고했다. 염도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위험하다 해도 자신이 나서면 된다는 생각에 큰 부담은 없었다.
“그리고 이 녀석의 눈!’
임성진의 눈은 그 어떤 때보다 확고부동한 의지에 가득 차 있었다. 염도의 마음에 꽤나 드는 눈이었다.
“좋아! 이것도 경험이 되겠지. 이 일은 너에게 맡긴다. 맘껏 해봐라!”
“감사합니다. 맡겨주십시오. 결코 학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임성진은 흰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감싼 채 앞으로 나섰다. 엉켜진 실은 누군가가 풀어야만 한다. 이 엉킴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임성진은 생각했다. 그는 과거에 엉킴과 그 위에 겹쳐진 현재의 엉킴을 풀기 위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윽고 그는 대표단에서 나와 녹림왕과 마주섰다.
“네놈은 누구냐?’
녹림왕 임덕성이 시비조로 물었다. 척 보자마자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 엄청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왠지 모를 불쾌감이 그를 휘감았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오.”
일행 앞에 나선 임성진은 자신의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었기에 임덕성은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에 임덕성은 당황했다. “어라? 저 녀석 언제 목쉬었냐?’
염도가 의아해하며 노학에게 물었다.
“글쎄요? 별안간 감기에 걸렸을 리도 없고, 갑자기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 회의가 들었는지도 모르죠.”
실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 노학이었다.
딱!
징벌은 금세 행해졌다.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소. 흑랑채의 몰살은 우리랑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이오.”
임덕성과 일대일로 대치한 임성진이 외쳤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난 너희 정파 놈들을 믿지 못하겠다.”
임덕성이 싸늘한 표정으로 비웃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또 어디 있소? ”
임성진의 반박은 날카로웠다.
“우리에게는 증인이 있다. 네놈들이 몰살시킨 흑랑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목격자가 말이다.”
“목격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도 않은 일에 무슨 목격자 따위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목격자는 지금 어디 있소이까? 일단 그 목격자를 보았으면 하오.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하지 않겠소?” 임성진의 의문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웃기지 말라는 의미가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럴 수는 없다!”
임덕성은 단번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가 뭡니까? 이해할 수 없는 처사요.”
임성진이 버럭 화를 냈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임덕성의 한마디에 충격을 받은 임성진은 속으로 그 죽은 놈에게 욕을 퍼부었다.
‘우라질!’
이걸로 마지막 남은 실마리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흑랑채 몰살의 의혹을 풀 수 있는 마지막 단서가 그 죽은 놈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전혀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이유가 없소. 우리는 결백하오. 내가 보증하오. 그러니 우리를 보내주시오.”
임성진의 말에 임덕성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듯 말했다.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보증을 한다고 나서느냐? 네놈에게 과연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오!’
임성진은 망설이지 않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임성진의 말에 임덕성은 잠시 할 말을 잊을 정도로 당황했다. 하지만 곧 날카롭게 눈빛을 발 하며 물었다.
“자격은?
“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오.”
녹림왕 임덕성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하찮은 정파 나부랭이가 자신을 희롱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친놈! 네놈이 감히 죽으려고 내게…….”
하지만 분노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임성진이 자신의 얼굴을 두르고 있던 천을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네…, 네놈은!
임성진이 얼굴을 가렸던 천을 풀어헤치자 철석 같은 간담을 지닌 임덕성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왜 자신의 아들놈이 저 정파무리 틈바구니 안에 끼어 있단 말인가?
“소, 소주(小主)! ”
폭랑귀도 모경도 경악으로 입을 쩌억 벌렸다. 그동안 행방불명되었던 임성진이 왜 저곳에 섞여 있단 말인가? 한참 만에야 간신히 놀란 마음을 추스린 임덕성의 얼 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이게 누구야? 4년 전쯤에 가출한 우리 불효자식 아니신가?”
그의 탄성에는 비릿한 조소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는 복잡한 심정으로 뒤범벅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임덕성의 말에 대표단과 녹림도 양 쪽 모두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임성진이 출현은 양쪽 모두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전개였던 것이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아버님.”
임성진이 포권지례를 취하며 딱딱하게 인사했다.
“평안?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 아직도 4년 전 네놈에게 맞은 멍이 가시지 않아서 말이야. 비올 때마다 욱신욱신 쑤셔서 괴롭구 나, 아들아! ”
웅성거리는 소리가 주위에서 계속 들려왔다.
“그건 아버님이 방심하여 실수해서 그런 거지, 제 잘못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겨우 살짝 스친 것 가지고 너무 그렇게 엄살떨지 마십시오. 왜 하나 뿐인 아들 면박주 고 그러십니까? 부하들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흐흐흐, 아들아, 네놈은 어찌 그렇게 귀엽게 맞을 소리만 하냐? 오늘 한번 죽어볼 테냐? 감히 하늘 같은 아비에게 대들어?”
아들의 투정어린 반항에 임덕성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저거 사건 해결하러 간다고 간 녀석 맞냐?”
염도의 어이없음에 남궁상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의사를 담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그의 눈에도 아무리 봐도 타오르는 불에 기름 부으러 간 것으로밖에는 보 이지 않았다. 염도는 녹림왕 임덕성을 째려보며 으르렁 거렸다.
“설마 며칠 전까지 멀쩡하던 그들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몰살했을 리가 없잖아?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이건 분명히 녹림왕 임덕성이 우리에게 시비를 걸려는 트집이 분명해.”
“죽었습니다.”
“뭐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염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은설란이었다.
“구궁산을 넘어올 때만 해도 그들이 누군지 몰랐는데 그들이 바로 흑랑채 사람들이었군요. 저들 말대로입니다.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뭣이!
염도와 빙검이 동시에 경악했다. 은설란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보았던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저도 그 현장을 봤어요. 참으로 끔찍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일말의 낭비도 없는 전문가들의 솜씨예요. 즉 살인을 밥 먹듯이 한 자의 솜씨였죠. 칼에 피 얼룩이 질 정도로 베어보지 않은 이상 그런 깔끔한 솜씨는 불가능해요. 그리고 그들의 상처는 대부분이 검흔이 아닌 도흔이었어요.”
이야기를 경청하던 염도와 빙검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녹림왕 임덕성이 저렇게 날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는걸!’
아무래도 오늘 일진은 사나울 모양이었다.
녹림왕 임덕성은 열혈의 사나이였다.
좋게 말하면 끓는 피를 지닌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그 실체는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한 자였다. 솔직히 그는 참을성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일부러 감정을 절제할 만한 분별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가식이라 칭하고 배척했다. 그는 웃고 싶을 때는 하늘이 떠나가라 웃고, 화날 때는 산을 뒤엎을 만큼 불같이 분노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맹렬히 분노하고 있었다.
4년 만의 재회였는데도 이 불효자식은 하늘 같은 아비를 공경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이런 인간 말종을 용서할 만큼 그는 착하지 못했다. 그의 행동은 금방 무력이 란 것으로 나타났다.
“오냐, 지난 4년 동안 그 나약한 정파 놈들 사이에서 얼마나 배웠는지 직접 몸으로 보여봐라. 이 애비랑 백 초식을 겨룰 수 있으면 하해와 같은 마음씨로 용서해 주 마.”
임덕성의 두 호목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저희 동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들하고 넌 달라! 그들은 흑랑채의 몰살에 대가를 치러야 해!”
임성진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저흰 흑랑채의 몰살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이들과 계속 함께 있었는데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지금 그렇게 절 근친 살해자로 만들고 싶은 겁니까? 흑랑채주 흑랑부 임개는 제 삼촌입니다. 제가 그분의 죽음을 방조할 리가 없잖습니까!”
임성진의 논리 정연한 반박에 임덕성은 움찔했다. 아들의 말은 한 마디도 틀린 부분이 없었다.
“흥! 정파 놈들에게 세뇌되어 그런 막돼먹은 짓을 했을 수도 있지!
임덕성의 말에 임성진은 딱하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억지쓰지 마십시오. 이미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습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죠. 아버진 언제나 그랬어요. 왜 남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알 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느냔 말입니까!”
“닥쳐라! 네 녀석이 무얼 안다고 까부느냐! 난 아직 널 인정 안 했어. 그러니깐 날 납득시키고 싶으면 덤벼봐라. 네놈이 날 이길 실력이 된다면 그때 가서 네놈 말을 믿겠다.”
“좋습니다, 좋아요! 아버지가 하라는데 자식이 따라야죠!”
감정이 격해진 임성진은 자신의 곤을 으스러질 정도로 굳게 움켜잡았다.
“어디 그 늙은이에게 배운 막대기질이나 좀 볼까?”
“자식의 사부님을 함부로 늙은이라고 비하 발언 하지 마세요. 그리고 막대기질이 아니라 곤법입니다. 곤법! ”
아버지도 아들도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둘 사이의 관계에 부자지간이라기보다는 원수지간을 대입하는 편이 주위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 오히려 편할 것만
같았다.
“와라!”
“갑니다!”
오라면 못 갈 줄 아냐는 눈빛을 빛내며 임성진이 도약했다.
“이야아압! 성광일시(星光一始)!”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임성진의 곤이 임덕성을 향해 쭉 뻗어 나갔다. 바야흐로 철천지원수 같은 부자지간의 피 튀기는 혈투가 시작된 것이다.
“수준 있는 공방이로군.”
부자간에 벌어지는 공전절후의 비무를 지켜보며 염도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패도 대 붕곤의 대결인가? 초식 하나하나마다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힘과 힘의 싸움이라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군.”
빙검이 짧게 평했다.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어.”
임성진은 마치 미친 늑대처럼 달려드는 임덕성의 도기 앞에서도 굳건한 방어를 유지하며 찌르고 들어올 허점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잠깐씩 허점을 틈타 반격하는 임성진의 일초 일초에는 붕곤답게 거대한 힘이 실려져 있어 임덕성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붕결(崩訣)이란 모든 것을 힘으로 눌러 으스러뜨리고 부숴버리는 방법을 뜻한다. 즉 힘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무결이었다. 패(覇)와 붕(崩)은 힘을 추구한다는 점에 서는 같지만 그 쓰임새는 확연히 구분지어질 만큼 틀렸다.
꽈꽝! 꽝!
무지막지한 힘과 힘의 격돌이 계속되었다.
붕곤은 느리고 패도는 빨랐다. 그러나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느린 것 같으면서도 빠른 임성진의 곤이 쉴새없이 몰아닥치는 도기속에서도 용케 수비를 잘 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을까요?”
나예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물론 괜찮죠. 절대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부자간의 대결인데 아무리 정신 나간 부자지간이라도 정도 이상의 심각한 결과를 야기하지는 않을 거예 요.”
비류연이 침착하게 나예린을 안심시켰다.
“아마 얼마나 심오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승부의 관건일 지도 모르겠네요. 서로 공수의 방식이 달라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판가름이 날 거예 요.”
임성진은 곤 주위에 보이지 않는 막을 형성시켜 놓은 채 그것을 이용해 아버지의 패도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부자지간은 부자지간인가 봐요.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웃고 있으니…, 아마 자신들이 웃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걸요!”
비류연의 눈은 정확했다.
지금 임덕성은 4년 동안 놀랄 만큼 향상된 아들의 실력에 경악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4년 전에는 비록 방심해서 한 방 먹기는 했지 만 그것은 말 그대로 기습, 실력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운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실력으로만 놓고 따져도 자신과 겨루어 전혀 손색이 없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들이 강해졌다는데 싫어할 아버지는 몇 가지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없었다.
임덕성은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비의 권위를 생각해서라도 질 수는 없었다.
그는 점점 더 공격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저기서 더 강한 공격을 행하다니 괴물은 괴물이로군요.”
임성진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물론 임성진이 녹림왕 임덕성의 광풍마랑도를 잘 알고 있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광풍마랑도법은 임성진이 어릴 때부터 한 8년 정도는 어쩔 수 없이 강제 주입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도법이었다. 그도 한때는 한 손에 소랑도를 들고 이것을 배웠었으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운명을 바꾸어줄 만남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다른 길로 이끌어줄 참스승을 만난 것이다. 옛날부터 그는 산적질이 싫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스승과의 만남으로 인해 점점 증가되어 가다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서는 그렇게 곤을 놀려서는 안 되지. 이건 비무가 아냐. 실전이란 말이야. 안이한 생각을 먹는 즉시 죽는 거다! 알겠냐?.
정신없이 비무를 하다 무의식중에 자식에게 충고까지 하는 임덕성이었다.
‘내가 왜 그딴 말을 했지? 내가 정말 슬슬 진짜로 미쳐가는 건가?’
임덕성은 웃기지도 않은 일이라 치부하며 아예 그런 생각을 묵살해 버렸다. 이들 부자는 공수전환이 거듭될수록 흐르는 땀 속에서 자신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부자는 싸우면서 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둘 다 바보로군요! ”
가만히 지켜보던 비류연이 내린 간단한 결론이었다. 냉동되어 있던 부자간의 사이가 전신에서 흐르는 땀과 투기와 열기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바보 부자는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 바보 부자는 아무래도 한 번에 끝장을 볼 모양이로군.”
빙검이 말했다.
“그러니깐 힘만 무식한 바보 소리를 듣는 거겠지.”
한심하다는 투로 염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점은 자네랑 닮았군.”
“뭐야?”
빙검의 한마디에 염도는 발끈했다.
“헉헉헉, 짜식이 제법이구나. 그동안 머리 좀 컸다고 반항이냐? 예전엔 올챙인 줄 알았는데 이제 뒷다리쯤은 자랐구나!”
“헉헉헉, 아버지도요. 몇 년 안 보는 사이에 늙다리가 된 줄 알았는데 노친네가 아직도 정정하시네요.”
녹림왕 임덕성은 왠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즐거운 듯 말했다.
“임마! 난 아직 청춘이야! 너 이제 몇 개 남았냐? 헉헉헉.”
그 말에 대꾸하는 임성진도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뭔가 맺혀 있던 것이 확 풀린 듯 상쾌하기만 했다.
“헉헉헉,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아버지는요? ”
“나도 하나 남았다.”
이미 수십 번에 걸친 공수 전환으로 쓸 수 있는 초식은 모조리 쓴 마당이었다. 이제 서로 남은 것은 비장의 절초인 최후 초식 하나뿐이었다.
“어쩔래? 끝까지 해볼 테냐?”
“물론이죠.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좋다! 과연 내 아들이구나. 오늘 한번 끝장을 보자.”
“좋습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바보 부자!”
멀리서 지켜보던 비류연이 한마디했지만 이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주 선 두 사람이 최종 초식 준비에 들어갔다. 무서운 기세가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었 다. 주변의 기운이 두 사람 사이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자의 대결에 점차 그 대미(尾)가 다가오고 있었다.
콰쾅!
천지가 진동하는 격렬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이 사정없이 고막을 때렸다. 열혈 바보 부자답게 끝장 보는 것도 요란하고 화려했다. 요란했던 만큼 자욱한 먼지들이 가라앉고 나서야 장내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최종 초식까지 몽땅 털어냈음에도 불 구하고 두 사람은 끝내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물론 두 사람 다 필사의 각오로 임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임덕성이 봐준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콜록콜록, 이런 후레아들 놈! 4년 전 때렸던 데를 또 때리냐? 게다가 그때보다 훨씬 더 아프구나. 에잉, 나쁜 놈!
“콜록콜록, 아버지야말로 아들 모가지 짜를 일 있습니까? 그렇게 무식하게 도를 막무가내로 휘두르면 어쩝니까? 좀 보고 휘둘렀어야지요. 이 아들 아직 장가도 못 가봤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총각귀신 만들 일 있습니까?”
임성진도 지지 않고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이 자식이! 아직도 애비한테 반항이네? 그리고 누가 너 같은 놈에게 시집오겠다는 머리 빈 계집이 있겠냐? 일찍 냉수 먹고 속 차려라!’
“저주 퍼붓지 마세요. 전 반드시 장가갈 겁니다.”
“어쭈, 이놈이. 아직도…, 자꾸 반항하면 네놈이 일곱 살 때까지 이불에 쉬한 거 다 까발리고 다닌다?”
“그…, 그런 비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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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가라앉으려 하던 먼지가 다시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이나 침을 튀기며 티격태격거렸다.
“바보!”
비류연의 관전평은 짧고도 명확했다.
“이 일은 녹림칠십이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요. 아마도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조작한 끔찍한 음모라 생각되오. 지금은 갈 길이
바빠 완전히 우리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지는 못했지만, 지금부터 천무학관과 정천맹이 전력을 다해 이 사건을 조사할 것이외다. 기다려주시오. 그리고 우리를 믿어 주기 바라오.”
“좋소! 믿고 기다리겠소. 그리고…….”
임덕성이 전음으로 몇 마디 말을 더 전했다. 빙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오!”
“고맙소.”
임덕성이포권지례를 취하자 빙검도 따라 인사했다.
“쳇! 하고 싶은 대로 아무데나 가서 마음대로 살아라!’
빙검과의 대화를 마친 임덕성이 임성진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아버지…….”
“어디 가서 아비 망신시키지나 말고! 싸우면 반드시 이겨라!
말을 하던 녹림왕 임덕성의 눈가가 묘한 빛으로 일렁거렸다. 임성진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가슴에서 치솟아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 다.
“물…, 론…, 이…, 죠.”
“그만 가봐라!
귀찮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임덕성이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길을 열어라! 그리고… 전원 검례(劍禮)!”
폭랑귀도 모경이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외쳤다.
바다가 반으로 갈라지듯 포위하고 있던 무사들이 양쪽으로 쩌억 갈라지며 주루룩 길 양 옆으로 나열해 서기 시작했다. 그 행렬은 대홍산 산길이 끝나는 곳까지 계 속해서 이어졌다. 단 한마디 명령에 따른 이런 일사불란함이 지금의 마랑채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그들의 일사불란한 이동과 재배치는 마치 군대를 방불케 했 다.
3천명의 장한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무기를 가슴에 들어 검례를 표하자 그만한 장관도 드물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이들과 정면으로 맞붙었다면 아마 양쪽 다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산 밑까지 이어지는 그 행렬은 마치 이들의 무운을 빌어주는 것 같았다.
“좋은 아버지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던 임성진은 옆에서 들려온 빙검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예?”
“아까 마지막에 무의 극의를 추구하는데 출신 따위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겠냐고 하더구나.”
“그러니 내 아들내미를 잘 부탁하오!”
빙검과 마지막 나눴던 전음이 바로 그런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자식의 출신이 혹 악영향을 미칠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임덕성이 그런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썼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빙검도 임성진의 출신을 문제 삼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임성진은 그동안 가슴속에 쌓였던 앙금이 한순간에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빙검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나타냈다. 임성진은 저쪽에서 여전히 뒤돌아 서 있는 임덕성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울부짖듯 외쳤다.
“아버지!”
임덕성은 그 소리에 움찔했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왜? 나 귀 안 먹었다.”
돌아선 채 여전히 퉁명스런 어조로 임덕성이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임성진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의 이번 인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 인사는 거칠기는 했지만 따뜻했다.
“시끄럽다. 빨리 가!
부끄러운 건지 쑥스러운 건지 임덕성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귀로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가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와 합쳐졌다. 합쳐진 발자국 소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료들이랑 함께 산을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지면을 울리던 수십 개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그의 귓가에서 멀어져가다가 종내에는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바보 아들 놈!
툭 내뱉는 그의 어조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