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1권 15화 – 신무림기

비뢰도 11권 15화 – 신무림기

신무림기

– 역사를 바꾸려 하는 자

“이걸 언제까지 배워야 하죠?’

심하게 까져서 피가 배어 나오는 작은 손이 보였다.

“가장 쉬워질 때까지!”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대답이 흘러나왔다.

“검은 어떻게 휘둘러야 하죠?”

“가장 빠르게!”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사람은 어떻게 죽여야 하죠?”

쉽게 대답할 성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답변은 너무도 쉽게 흘러나왔다.

“가장 간단하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요약하듯 말했다. 여전히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말투였다. 그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주는 힘이 있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먼 지가 되어 흩날려버릴 정도의 공포!

“가장 간단하고,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쉽게! 넌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잠시 눈을 감고 있자 과거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단편적인 과거 기억 속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치사한이 헐레벌떡 보고하 러 들어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죠?”

딱딱하게 굳어 있는 치사한의 태도로 볼 때 최소한 좋은 소식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했다.

“실패로군요.”

감정이 전혀 묻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였다. 치사한은 송구스러워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치사한의 허리가 직각으로 접혔다.

“사슴들의 피해 상황은? “

질문을 받은 치사한은 차마 하기 싫었던 말을 겨우 내뱉어야만 했다.

“저, 전무합니다.”

순간 치사한은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느낀 전율은 그것 이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그렇게 강했었나요? 녹림총채의 공격을 받고도 전혀 피해가 없을 만큼?’

질문을 하는 그 목소리에는 순간 평정심을 잃었는지 약간의 놀라움이 묻어 나왔다. 치사한은 차라리 그들이 그 정도로 강했다면 보고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거라 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전면으로 붙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외의 변수가 있었습니다.”

“변수? 그 변수를 찾아내어 미연에 막는 것이야말로 군사의 임무가 아니었던가요?”

치사한은 차가운 얼음송곳이 심장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대공자의 위압감은 엄청났다. 치사한은 떨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전서를 통해 받은 내용 을 정리하여 보고했다. 대공자는 차갑게 가라앉은 밤의 호수 같은 눈을 빛내며 그저 차분히 듣기만 했다. 치사한의 보고가 끝나자 대공자도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녹림왕의 아들이라…….”

정말 예기치 못한 변수였다. 어떻게 천무학관 무리 안에 그런 자가 끼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멀쩡히 화산까지 보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공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치사한은 대공자의 눈치를 보며 쥐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억겁같이 느껴지던 침묵이 깨졌다.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최후의 방법을 쓰도록 하지요.”

마침내 대공자의 결정이 떨어졌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남의 칼로 자신의 적을 상하게 하는 책략. 보통 자신은 두 손 놓고 놀며 적으로 또 다른 적을 상대하여 어 부지리(漁父之利)를 얻는 책략을 가리킨다. 어떤 학자는 손 안 대고 코풀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가 실패로 끝난 이상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미 준비는 모두 갖춰놨습니다. 하지만 얼마간의 희생은 불가피할 겁니다.”

대공자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수해야겠지요. 보고에 의하면 이번 동행자 중에 천하오검수의 1인과 천하오대도객의 1인이 한 명씩 끼어 있다고 하던데…, 빙검과 염도라면 무명 쟁쟁한 강호 의 영웅이자 고수! 과연 그들을 상대로 십이혈마대가 얼마만큼 최소한의 손실로 버텨낼 수 있을까요?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십이혈마대가 저희의 비밀 전력이라 해도 빙검과 염도의 보호를 뚫고 그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는 힘들 겁니다.”

치사한의 말에 뭔가 있다는 생각에 대공자가 물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벌써 방법을 강구해 두었다는 이야기겠군요?”

“도움을 구했습니다. 옛분들에게!”

순간 대공자의 몸이 움찔했다.

“옛분들이라면? 설마 본인의 허락 없이 그자들을 움직였단 말이오?”

“죄,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저의 독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조치라 여겼습니다.”

갑자기 전신을 덮치는 으슬으슬한 한기에 치사한은 몸을 바짝 긴장했다.

‘이, 이런 중압감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축축이 흘러내렸다. 치사한은 아예 대공자의 형형한 안광을 쳐다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흐흠, 독단이라…….?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

치사한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빌었다. 대공자는 그런 그를 힐끗 일별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꼭 필요한 조치라 해서 모든 독단적 행동이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 저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무척이나 싫어하지요.”

심장이 얼음송곳으로 무수하게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엄청난 압박감에 치사한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독단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여겨지는군요. 하지만 두 번은 결코 반갑지 않을 겁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그럼요. 명심해야죠!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다면요!”

입가에 씨익 드리워진 미소가 그렇게 살벌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뼈 속까지 오싹해지는 한마디였다. 치사한은 오늘 염라대왕의 집무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해 봤으니 호강했다 할 수 있으리라.

“군사, 혹시 멈추어진 바퀴가 왜 구르지 않는 줄 아나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대공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치사한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자세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겉모양새는 분명 존대이지만 대공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듣는 사람에게 한없는 정신적 압박을 주었다. 계속해서 그를 보좌하는 치사한도 이것만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대공 자의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지는 듯한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걸까?’

도무지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얌전히 경청하는 게 장땡이었다. 함부로 아는 척하며 나섰다가 잘못하면 본전도 못 찾고 대량 실점할 수도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치사한이 대답했다. 항상 주인에게 조언해야 하는 입장인 그에게 모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대답이었다.

“당연히 그것이 멈춰 있기 때문이지요.”

치사한은 그런 건 세살배기 어린애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목소리 높여 주장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그는 아직은 제사를 지내줄 자손들이 없었다.

“강이 왜 멈춰 있는지 아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둑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지요.”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걸까? 치사한은 여전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 무림도 정지된 마차나 정체된 강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거대한 마차는 백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흑천맹과 정천맹, 마천각과 천무학관이라는

오래된 녹슨 두 쌍의 바퀴에 의지한 채 굴러가고 있지요. 새로운 바퀴로 바꿀 생각조차 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게다가 이 강은 전대고수라는 이름표를 줄줄이 달 고 있는 노령고수들의 둑으로 꽉꽉 막혀 있지요. 그들은 새로운 물이 흘러갈 자리를 방해하고 있어요.”

현 무림의 양극 체제가 지금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여기는 일반론과는 정반대되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혁신적이고 또 파괴적이었다.

“나는 그 둑을 터뜨리고 싶어요. 물은 흘러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고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죠. 고인 물은 썩게 마련 아니겠어요? 천겁을 막겠답시고 마 천각과 천무학관을 세웠지만 이대로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입니다. 이론 수업만으로는 절대 한계 이상으로 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시련이 없으면 사람은 강해지지 않죠. 그런 것은 단지 지루하기만 할 뿐이죠. 나는 물론이고 그분에게도…….”

그분이라는 말에 치사한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그분은 존재만으로도 그를 움츠리게 만들 수 있는 존재였다.

“받으세요.”

대공자가 품안에서 책자를 하나 꺼내 치사한에게 던져주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허공을 날아간 책자는 정확히 치사한의 손 위에 수직으로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치사한은 얼른 빠른 속도로 받은 책자의 안을 살펴보았다.

“이, 이것은? “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책자 아닙니까?”

무언가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을 줄 알았던 책자는 알고 보니 단순한 백지뭉치일 뿐이었다. 치사한은 왠지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쾌감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왜요? 흰 백지 덩어리라 불만인가요? 희대의 절세비급쯤 되어야 만족할 수 있었나요? 단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는 그런 신비한 비급 같은 것 말이죠? ”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불측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게다가 세상에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없지요. 무협지도 아니고 말입니다.”

치사한은 만면에 자신의 주특기인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책자가 곧 필요하게 될 겁니다.”

대공자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제 아둔한 머리로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우둔한 머리를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

치사한의 간청에도 대공자는 창밖의 드높은 파란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안으로 드넓은 창천이 빨려 들어왔다.

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이야기 들어보았나요? ”

“물론입니다.”

그 옛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무슨 뜻인지도 잘 알겠군요? ”

“물론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때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거의 잔재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과 거와의 단절만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해석과는 조금 괘를 달리하는 독특한 해석이었다. 그러나 크게 틀린 점은 없었다. 옛부터 전해져 내려온 속담이라 해서 꼭 한 가지 방식만으로 단일하게 해석되어야 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요는 그 안에서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이나 삶의 지혜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요즘 강호의 피가 너무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요, 현 무림은 너무 많은 피가 정체되어 있어요. 지금 강호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웬만한 고수 들은 아직도 대부분이 100년 전 사람들이에요. 바로 천겁혈세에서 살아남은 바로 그들 말입니다. 전전대 고수여야 할 사람들이 그저 전대 고수로 끝나고 그중 아직 도 살아서 영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게다가 지나간 세월만큼 연륜도 쌓이고 그 영향력이 거대해지자 그들의 존재는 점점 더 커져갔지요. 그러다 보니 그들의 거대한 존재는 후배들의 앞길을 완전히 가로막고 말았어요. 그들을 뛰어넘는 것 자체가 불경처럼 느껴지도록 온갖 치장을 다해놓았죠. 약육강식, 적자생존 의 이 세계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죠.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위해 얼른 길을 열어줘야죠.”

“녹슨 마차는 새 마차에 자리를 내주는 법이지요. 늙은 범은 젊은 범에게 산중왕의 자리를 내주는 게 인지상정이죠. 뼈마디에 녹이 슬어서 어디 제대로 사냥이나 할 수 있겠어요? ”

치사한은 대공자의 말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연신 맞장구를 쳤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천겁혈세의 주역들이라 해도 이제는 거의 다 폐물들 아니겠습니까!”

“흥! 그때 겨우 목숨만 구걸받은 주제에 아직도 잘난 척을 하고 있으니 언어도단이죠. 그래서 이번 화산지회는 아주 성대한 대회가 될 겁니다.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역대 최고의 대회, 이번 대회는 그 화려한 불꽃으로 무림에 생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겠지요.”

“흐흐흐, 재생을 위한 파괴로군요.”

치사한의 말에 대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이번 대회를 계기로 모든 노고수들이 이 강호에서 사라질 테니깐 말입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

면 미래는 오지 않는 법이지요. 늙은이들의 정점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 천무삼성과 검존의 몰락이 정체된 무림에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피를 공급해 줄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행방불명된 태극신군 혁월린과 은거중인 패천도 갈중혁만 제거할 수 있다면! 강호의 질서는 다시 천(天)을 중심으로 재편(再編)되리라.’

아직 그는 무신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볼 만한 대회가 되겠군요. 전 벌써부터 심장이 뛰어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천무삼성의 몰락을 서슴지 않고 공언하는 사람, 다른 이라면 주위의 손가락질과 함께 미친 놈 취급을 받았겠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대공자 그였기에 가능성마저 느껴졌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매운지 작은 고추가 매운지, 갓 자란 생강이 매운지 이번 기회에 판가름이 날 겁니다. 그리고 그 날 새로운 무림 역사의 장이 열리겠지요.”

“아참, 한 가지 잊고 묻지 않은 게 있는데 군사의 서도(書道) 솜씨는 어떻습니까?”

갑작스럽게 대공자가 물었다.

“명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남 보이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조만간 그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오겠군요. 군사가 할 일은 간단합니다. 그 안에 글을 채워 넣는 것이지요.”

치사한은 대공자에게서 아까 받은 책자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 빈 책자에 무슨 내용을 채워 넣으면 되는 것입니까?”

치사한의 질문에 대공자는 허공을 보고 알 수 없는 표정을 한번 지었다. 희미한 미소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하고 치사한은 도무지 대공자의 본심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윽고, 대공자는 수려한 얼굴에 자리한 붉은 입술을 열어 한 자 한 자 또박 또박 말했다.

“신(新)·무(武)·림(林)·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