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불출 나백천
“네가 비류연이라는 아이냐?”
“예!’
비류연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대 무림맹주와의 일대일 개인 면담이었지만 당황하거나 동요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백천은 자신의 앞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는 비류연이 영 못마땅했다. 평상시의 그라면 기개가 있는 당당한 장부’라고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사내대장부가 그 정도 호기는 있어야지!’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중보옥(掌中寶玉)인 나예린만 연관되면 그만 사람이 바뀌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나백천의 비류연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건방진 놈!’
나예린이 비류연을 보통의 일반 남자들처럼 길가의 돌멩이 취급했다면 나백천의 마음도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로서의 예리한 본능은 나예 린이 비류연을 확실히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는 현재 왠지 딸을 도둑맞은 아버지의 심정이었다. 그러니 비류연이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게 당연했다.
나백천은 환마동에서의 생환 이후 나예린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확언을 들었지만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비류연을 불러 일대일 대 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붕괴된 환마동에서 생환해 오다니 운이 좋았구나. 우리 예린이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구나.”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 아이로서는 예의상 해본 입에 발린 말이겠지만, 일단 감사하네!”
나백천이 만면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일단?’
비류연은 순간 무엇인가가 자신의 신경을 긁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왠지 말에 가시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자네 운이 너무 좋아 실력까지 뒤덮을 정도라 해서 운수 대통 격타금이라고 불리운다며? 정말 이번에는 자네의 그 소문의 운수·덕을 크게 본 것 같네.”
운수를 특히나 강조하며 나백천이 말했다. 무림맹주의 말은 한마디로 너가 나예린과 환마동을 무사히 탈출한 것은 운 때문이지 너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류연의 한쪽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는 씨익 웃고 있었다.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천하의 무림맹주라 해도 변함이 없었다. 비류연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백천은 금방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44일 동안 그 안에서 별일은 없었는가? 혹시나…, 남녀가 유별한데 그 안에서 뭔가 입에 담기 부끄러운 그런 일이 있거나 하는 불행한 사태는 없었겠지? 내 자네를 믿어도 되겠나? ”
순간 나백천의 전신으로부터 엄청난 위압감이 한꺼번에 폭출되어 나왔다. 일반 고수라 해도 호흡 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압박 앞 에서도 비류연은 태연자약했다. 게다가 그는 서슴없이 도발까지 망설이지 않았다.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지요!
애매모호한 데다 의미심장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특히 비류연의 입가에 맺힌 많은 일 있었죠. 말을 안 했을 뿐이지만!’이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는 이번 도발의 백 미라 할 수 있었다.
“뭐, 뭐라고?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나백천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단 한마디의 말로 이 천하의 무림맹주를 동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현 강호에 다섯 손가락을 꼽기도 버거울 것이다.
“앗! 혹시 못 들으셨나요?”
비류연이 생글거리며 반문했다. 그 미소는 나백천의 눈에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긴 연세가 있으신데 못 들을 만도 하죠. 다 이해해요. 이해해!’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비류연의 구석구석이 몽땅 싫어지고 있는 나백천이었다.
“제 얘기는 그러니깐 알아듣기 쉽게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비류연은 백도 무림의 맹주를 앞에다 두고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의 본능은 지금 이것을 명명백백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걸 꼭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 그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체면 때문에 폭발하지도 못하고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하며 나백천이 물었다.
“아이~, 그런 걸 어떻게 다 일일이 말할 수 있겠어요? 아·시·면·서.”
비류연은 몸을 살짝 꼬며 얼굴을 붉히는 상징성이 다분한 행동을 취했다. 한 떨기 수줍은 수선화라도 흉내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 이놈이! 알긴 뭘 알아!’
평소 백도 무림맹주의 점잖고 위엄 있는 얼굴을 집어던지고, 또 하나의 얼굴인 팔불출 아버지가 되어 있는 나백천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네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린이는 너 같은 아이가 감히 넘볼 아이가 아니다! 네가 그 아이의 매력에 여지껏 있어왔던 수천의 사람들처럼 사 로잡힌 것은 이해하지만, 오를 수 없는 나무는 미리미리 포기하는 게 좋다. 그 아이는 너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그 아이에게 있어 너는 길거리의 돌멩이만 도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포기하는 게 좋아!
그러나 비류연은 나예린과의 관계에 다른 사람의 그 사람이 비록 누군가의 아버지고 무림맹주라 해도 독창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편파적인 시각을 개입 시킬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제3자의 말에 동요되어 본인의 감정은 확인조차 안 해보고 혼자서 절망에 빠져, 혼자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혼자서 훌쩍거리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실 수 있죠?”
“뭐라?”
“예린의 마음속을 독심술로 아는 것도 아닌데 맹주님이 어떻게 아시는가 하는 거죠.”
비류연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예린이라고! ”
젊은이들 중에 그 누구도 감히 그 앞에서 예린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감히 자신 앞에서 나예린을 정인(人) 부르듯 친밀하게 부르다니! 비류연 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을 품안에 두고 삭이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예린을 예린이라 부르는데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맹주님! 예린은 맹주님의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의 자유의사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살 아 있는 사람이라구요. 왜 예린 자신의 자유 의사를 존중하지 않으시는 거죠? 그녀는 맹주님의 의사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구요. 그러니 예린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짓지 마세요. 그건 예린 이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비류연의 말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이놈이! 감히 노부 앞에서 그렇게 거침없이 말을 내뱉다니 좋은 배짱이구나.”
분노로 가득 찬 나백천의 전신에서 엄청난 무형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박살내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 엄청난 위용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얼굴이었다. 나백천으로서는 비류연의 무모함이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만 하세요!”
문이 벌컥 열리며 공기를 채색하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아름다움의 정수만을 모아 조각해 놓은 듯한 미인은 바로 나예린이었다.
“비 공자! 그리고 아버님! ”
나예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눈빛으로 볼 때 밖에서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백천은 딸에게 이런 체통 없는 모습을 보여준 게 부끄 러운지 딴청을 부렸다. 현존하는 강호 최강의 검객 중 한 명인 그도 딸 앞에서는 한없이 약했다.
“밖에서 다 들었습니다. 이제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나예린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의 아버지를 향했다.
“아버님!”
나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왜, 왜 그러느냐?”
지금 나백천의 모습은 정천맹의 수뇌들이 보면 울부짖을 그런 약한 모습이었다.
“류연은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러니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나백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류, 류연이라고!
개벽 이래로 그 누구도 나예린의 입에서 이렇게 부드럽고 친근한 호칭으로 불린 남자는 없었다. 아버지 앞이라 처음에는 비 공자라 호칭했었는데, 나예린으로서도 무의식중에 나온 호칭이었던 모양이었다.
이 당시 나백천이 받은 충격은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남성불신증에 걸려 있던 딸아이가 어떤 남자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고 자신 앞에서 다 른 남자를 감싸다니…….
이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커 얼떨결에 비류연을 내보내고 만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날 좀더 추궁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배는 나루터를 떠났다.
“크으으윽!”
나백천은 아직도 그날 일을 생각하면 분이 삭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딸애가 말리든 말든 그냥 보내면 안 되었던 걸세. 따끔한 교훈을 내려줬어야 했는데…….”
휙휙!
마진가는 혹시라도 누군가가 이 대화를 들을까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 백도를 관장하는 무림맹주의 권위와 위엄이 한순간에 붕괴되는 현장이었다. 마진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일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다른 모든 일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업무 수행을 하는 맹주였지만 딸 문제 앞에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팔불출로 돌변했다. 이런 나백천의 행동은 마진가로서도 무척이나 골칫거리였다.
“말년에 얻은 외동딸이라 예뻐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 다 이해한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웠겠는가! 게다가 어릴 때의 그 깜찍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사랑스러움이란 그 누구라도 그녀를 예뻐하지 않을 수 없 게 만드는 마력적인 것이었다.
‘기운도 좋으시지, 세수 백세에 딸이라…….’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그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한번 자신도 시도해 볼까 하는 도전 의식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일 뿐이었다. 사실 그도 환갑의 나이에 20대의 딸이 있는 처지였다. 물론 나백천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마진가가 잠시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나백천은 분노를 터뜨리다 갑작스럽게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겨우 만났는데 이렇게 또다시 헤어져 있어야 하다니, 예린아…….”
다 큰 어른답지 않게 훌쩍거리는 맹주였다.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화산으로 떠난 딸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 시라도 빨리 그놈의 정체를 밝혀내야겠네.”
나백천은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 사실 저도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그렇게 버릇없고 예절을 모르는 그리고 배짱 좋게 제자를 키울 수 있는 곳은 현 무림에서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림맹주 앞에서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며, 가끔 가다가 속도 벅벅 긁어놓을 무모함과 배짱을 동시에 겸비한 인물을 키울 만한 곳은 더더욱 드물었다.
따라서 문제는 그렇게까지 제자를 마구잡이로 키우는 데가 전무하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출신도 확실하지 않았다. 천무학관 입학 원서 에 사문도 사부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용케 이런 모호한 신분으로 입관했구나, 라는 생각마저 드는 마진가였다. 아마 그의 신원보증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류연의 신원보증인 란에 기재되어 있는 사 람은 바로 염도였다. 그 점도 무척이나 특이했다. 의심 가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마진가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 감감무소식이다. 어느 날 비류연이 홀연히 나타났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그 아이가 처음 나타났던 곳이 어디라고 하던가?”
“최초로 그 행적이 잡힌 곳은 아미산 밑에 위치한 중양표국이라고 합니다.”
마진가의 입에서 중양표국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백천은 크게 놀라며 입을 열었다.
“호오, 요즘 그 성세를 떨치고 있는 중양표국 말인가? 2년 전부터 갑작스레 급성장을 하더니 요즘은 강호 최대 표국인 중원표국을 위협하고 있다고까지 하더군.”
“네! 맞습니다. 신기한 건 그들이 이토록 갑작스런 성장을 한 것이 그 비류연이란 아이가 나타나고 난 이후부터였다고 하더군요. 시기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 다. 실제로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흐흠…,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하지.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졌는지는 확인해 봐야 알 일이겠지. 그건 그렇고, 그전 행적은 아직도 그 종적을 찾지 못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일단 사천 중양표국을 중심으로 조사를 하도록 하게.”
“네! 아미산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요. 정보 수집과 추적의 달인인 신견대(神見隊)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그 신견대를 말인가?”
“예!”
신견대는 비영각 소속 조직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조직 중 하나였다. 원래는 이 정도 일이 그들을 보낼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금 전 나백 천의 말도 있고 해서 특별히 신견대를 보내도록 결정한 터였다.
“그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부탁하네!”
“심려 놓으십시오. 비영(秘影들이 좋은 소식을 물어오면 좋으련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자신들의 수하가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