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하는 자와 배반당하는 자
마진가가 조심스럽게 나백천을 불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맹주님! “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나예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망언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느냐’는 뜻이 듬뿍 담긴 못마땅한 얼굴로 나백천은 마진가를 바라보았다. “뭔가?”
마진가는 표정을 잔뜩 굳힌 채 무언가 최고로 중요한 기밀이라도 얘기할 듯한 태세였다. 강철의 성을 연상케 하는 구릿빛 거한의 두 눈은 지금 이 순간 심상치 않 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순간 나백천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차는 맛있었습니까?”
이 한마디를 내뱉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던 것일까?
“물론 맛있었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래야만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마진가의 손가락이 불현듯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헉!”
나백천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 이럴 수가!!! ”
나백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시뻘게지더니 그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샘솟듯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그 감정의 정체는 명백한 배신감이 었다. 격렬한 배신감이 아니면 도저히 떠오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 자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
그의 눈은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부릅떠져 있었다.
“세상은 잔혹하니까요.”
마진가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사, 사람이 방심한 틈을 타…,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전혀요!”
마진가는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하의 냉혈한도 그처럼 당당하게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빈틈을 보인 맹주님의 잘못이지, 그 빈틈을 포착하고 찔러 들어간 저의 잘못은 아니지요. 전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무심한 말투, 극도로 감정이 배제된 어조였다.
“크윽!”
나백천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극심하게 일그러졌다. 여전히 그는 명백한 배신감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무학관주 마진가의 손가락이 움직인 그곳! 그곳에는 자신의 장(將)을 잡아먹기 위해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포(包)가 시퍼런 이빨을 번뜩이고 있었다. 자신의 장은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상 태였다. 진퇴양난에 사면초가가 딱 어울리는 그런 형국이었다. 어쩐 일인지 차(車)가 졸(卒) 앞에서 어슬렁거리기에 냉큼 먹었건만 이렇게 될 줄이야.
외통수!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나백천은 내심 경악성을 토해냈다. 아무리 탈출구를 찾아보려 용을 써봐도 확실히 마진가의 포는 그의 장을 위협하고 있었다. 아니, 숨통 을 끊어놓을 최후의 일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자신의 장을 호위하는 사(士)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지 오래였고, 아무리 장기판 위를 훑어봐도 장군을 위해 장렬히 한목숨을 바칠 장수들 또한 눈 세척하고 바라 봐도 없었다. 도망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백천은 망연자실했다.
“뭐하십니까? 장입니다. 포로 장을 잡았으니 포장인가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마진가가 말했다. 약올리고 있음이 명백했다.
대답은 없었다. 나백천은 일시적으로 말을 상실한 사람 같았다. 무림맹주의 정신적 공황 속에서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자 천무학관주는 느닷없이 주위를 태평스럽게 두리번거렸다.
“맹주니임~.”
두어 번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마진가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백천을 불렀다. 하지만 나백천은 치명적인 사지에서 생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 무림맹 맹주를 역임하고 있는 이 사람은 한참 후에야 천무학관 현임 관주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무슨 일인가? 불렀나?”
그는 마진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진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신견대를 불러야겠습니다.”
“무슨 화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여전히 그의 시선은 장기판을 떠나지 않았다.
“예, 실종 신고를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장기 두는 사람이 실종된 모양입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 눈앞에 계셨는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가 않는군요.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분은 저희 천무학관의 가장 소중한 손님이시자 정파무림을 떠받치는 기둥이시니 무슨 사고라도 당했다가는 강호 전체의 크나큰 손실이지요.”
싱글벙글 웃으며 마진가가 말했다. 참고로 그의 양쪽 시력은 자랑은 아니지만, 300장 밖의 사물도 분간할 만큼 무척이나 좋았다. 그러나 나백천도 백전노장이었 다. 이 정도 도발에 간단히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지금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의 마수에 빠져 탈출구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네. 그러니 굳이 신견대를 부를 필요는 없다고 보네!”
차분하지만 쌀쌀맞은 목소리로 나백천이 대답했다. 그에게는 아직 최후의 한 수,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그의 눈이 비장감에 가득 물들었다. 별안간 무림맹 주는 눈을 돌려 천무학관주를 쏘아보았다.
‘헉!’
그 무시무시한 눈길에 마진가는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생사결(生死決)을 벌이려는 무사의 기개가 느껴졌던 것이다.
“헤헤헤, 이보게? 진가…….”
칼날 같은 예기가 번뜩이던 화강암 같던 그의 얼굴에 순간 봄날의 산들바람 같은 미소가 어른거렸다. 그의 주위를 감싸고 돌던 위엄과 존재감과 경외감은 어느 순 간 휴가를 떠났는지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백천은 한없이 부드럽고 친근한 목소리로 마진가를 불렀다. 맞잡은 두 손에는 비굴함마저 넘쳐흘렀다.
“안 됩니다.”
마진가가 정색하며 말했다.
“어허! 이 사람!”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강경한 거절이 이어졌다.
“정말 한 수만 물러주면 안 되겠나?”
“절대로 안 됩니다.”
“내,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도?”
나백천은 지금 권력과 타협하라고 마진가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진가의 태도는 완강했다.
“제가 제일 경멸하는 사람이 권력에 굴복하는 사람입니다. 전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어허…….”
나백천은 혀를 찼다.
“자네 너무 고지식하구만. 이 세상에는 아직 경로사상이라는 게 보란 듯이 살아 있다네.”
권력과 배경을 사용하고도 실패한 나백천은 이제는 나이를 무기로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이 세상이 두 쪽 나면 그때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네 너무 야박하구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그것뿐입니다.”
“딱 한 번만인데 어떻게 안 되겠나?”
무림맹주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작전명 ‘동정심 유발’이었다.
과연 천하의 현 백도 무림 맹주의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마진가는 생각해 보았다. 자신과 있을 때 이외에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적이 없 었다. 물론 나예린 건은 예외로 치고, 타인에게 있어 나백천은 여전히 위엄 있고 강인한 백도 무림의 기둥이었다.
나백천의 작전은 이미 여러 곳에서 꽤나 호평을 받고 있는 작전이었지만, 상대의 방어는 철벽과도 같았다. 마진가는 그의 손이 철권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강 철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크윽! 쇠고집은!
“되도록이면 지조가 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졌네! 다음 전장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마침내 나백천은 뼈아픈 패배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기대하지요.”
대답하는 마진가에게는 승자의 여유가 보였다. 나백천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내일 있을 다음 격전지에서 만회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 전장은 바로 우주 (宇宙)였다.
반상 위의 우주!
바로 바둑이 다음 격전지였다. 이날의 승부는 나백천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술값은 나백천의 몫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향음을 건 상층 지도부의 거액 도박이라니! 만일 알려졌다가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다행히 지금 그들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위병도 자신 의 충복이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진가는 마음놓고 이 승리를 만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