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1권 8화 – 군자소요검(君子逍遙劍)

비뢰도 11권 8화 – 군자소요검(君子逍遙劍)

군자소요검(君子逍遙劍)

남궁상이 멀뚱한 눈으로 이송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기는 염도도 빙검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야! 얼음탱아! 언제부터 녹림산채 부두목의 실력이 저 정도까지 격상한 거냐?”

빙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오는 검을 나중에 출수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흘려보냈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낸 것이 다. 그 흘리기 동작 또한 깔끔하고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부터 녹림의 위계질서가 이렇게 흐트러졌지?”

염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녹림은 원래 강한 자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게 정석이었다. 학연이고, 지연이고, 혈연이고 다 필요 없었다. 강함을 추구하는 그 들에게 있어 약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죄악이었다.

“허참, 녹림에서 채주보다 부채주가 더 강한 경우는 이번에 처음 보는군.”

우습게도 이 흑랑채 최고의 고수는 흑랑채주 흑랑부 임개가 아니라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특기라고는 유식한 티내는 말재간뿐인 줄 알았던 이송이었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채주를 보좌하는 입장에 있는 본인으로서는 공자의 검을 막을 수밖에 없었네. 양해해 주길 바라네.”

그동안 하늘의 농간 때문인지, 기구한 운명 탓인지 나이답지 않게 많은 산적 패들을 만나본 남궁상으로서도 이송은 처음 접하는 유형의 녹림도였다. 이렇게 정중 한 산적을 그는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다. 이 일은 일종의 정신적 충격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잠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남궁상에게 부디 채주의 주책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는 말로 이송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미안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들고, 다 늙어가면서 어린 아내를 맞이하겠다고 주제도 모르고 억지를 쓰며 주책을 부려도, 맨날 술만 마시고 놀기 좋아하고 싸우기 좋아해도, 술주정이 지극히 심각할 정도로 나빠도, 항상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서 때로는 무모한 일을 자주 벌여도 이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우리 흑랑채의 채주인지라 여기서 죽게 할 수 없으니 이해하시고 납득해 주시길 바라오.”

태연자약한 행운유수(行雲流水) 같은 이송의 언어 난타에 정신적으로 얻어맞은 임개의 얼굴은 점점 더 시커멓게 변해 갔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메 쳐봐도 채주에 대한 권위나 존경심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지 않은가. 그는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디 으슥한 곳으로 멱살을 잡아 끌고 간 다음 밤이 새도록 정신 교육을 시키고 싶었지만 일단 자신은 이송에게 도움을 받은 처지(그것도 구명지은으로!)인지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여기서 조용히 끝내는 게 어떻겠소? 그러는 것이 쌍방에게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만?”

남궁상이 슬쩍 염도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한 대로 염도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염도의 불같은 성격상 이 일을 이대로 덮을 리는 없었다. 아마 그는 좋은 연습 상대가 생겼다고 내심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가하오!”

남궁상은 일언지하에 그 말을 거절했다. 평소 유약하던 그의 모습은 지금 온데간데없었다.

“천무학관 화산규약지회 대표단의 앞길을 가로막고도 아무 일 없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소? 우리의 앞길을 막은 이상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오!”

“처, 천무학관!

“화, 화산지회!

그제야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기름 창고 옆에서 불장난을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집단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똥 밟았다!’

소태 씹은 얼굴로 속으로 그답지 않은 상소리를 내뱉은 이송은 천박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이내 반성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굳게 쥐었다.

요즘 천무학관 대표단들은 돈이 없어 식별 깃발 하나 안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그 깃발만 앞세웠어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을 것을! 일부러 유인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요?’라는 질문이 담긴 의미심장한 시선이었지만 염도는 무시해 버렸다. 염도는 갑자기 등장한 이 검객에 부쩍 흥미가 동해 있는 상태였다. 검을 쓰는 빙검은 아마 자신보다 더 몸이 달아 있을 것이다. 고수나 하수를 파악하는 데는 한 수면 충분했다. 칼을 뽑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고수나 하수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 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저자는 고수였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감춘 절정의 검객이었다.

남궁세가의 백뢰검법 중 절초인 백뢰일시(白雷-矢)를 저리도 가볍게 흘려보낼 자는 많지 않았다. 이송의 검법은 철저한 수비식 위주의 검법이었다. 지금도 남궁 상의 끊임없는 공세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방어만 할 뿐 반격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허점을 내주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의 검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남궁상 의 검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토록 침착하게 연속적으로 수비에 전념할 수 있다니 놀라운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의외인 점은 그자의 검이 사도의 것이 아닌 지극히 정파스러운 검이라는 점이었다. 저런 비효율적인 검법을 사파나 녹림에서 악을 쓰며 익힐 리가 만

무한 것이다.

“도대체 저놈의 정체가 뭘까?

검초를 좀더 보면 내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염도는 눈에 힘을 주어 그의 검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빙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검법인데……?”

남궁상과 이송의 계속되는 비검(比劍)를 보며 빙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정도 검법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다. 직접 목도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적어도 최소 한 들어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저토록 공격이 철저히 배제된 수비 위주의 검법은 이 험한 강호에서는 매우 드문 탓이었다. 좋게 말하면 점잖지만, 나쁘게 말하면 실 속이 없고, 더 나아가 실용성 또한 떨어졌다. 아니 실전성이라 해야 하나…….

남궁상은 계속해서 공격을 해 들어가고 있었고, 이송은 그 공격을 막거나 흘리면서 방어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벌써 20여 합이 지났음에도 불구 하고 이송은 단 한 번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분명 수세에 몰려 방어에만 급급한 것은 아니었다. 하얀 번개처럼 눈부신 속도로 공격해 들어오는 남궁상 의 검을 그는 큰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유효한 공격이 없으니 상대가 제풀에 지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검법이었던 것이다.

저렇게 정직한 검이라니……. 산적답지 않게 야비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산적이 쓰는 검법이 정직하고 공명정대하다니. .? 저 사람이 누가 악명 높은 녹림오패의 흑랑채 부채주라고, 쓰는 검법만 보고 믿어주겠는가.

‘그래 마치 군자처럼..

‘군자처럼 실속 없는 검!’

순간 번뜩이는 섬광이 빙검의 뇌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군자소요검(君子逍遙劍) 이송학!”

그의 입에서 놀라움이 담긴 이름 하나가 터져 나왔다.

“하북십검(河北十劍)!”

덩달아 염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었다. 주위의 웅성거림으로 인해 남궁상과 이송의 비검은 중지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그와 검을 섞던 남궁상 또한 의외라 는 눈빛으로 이송, 아니 이송학을 바라보았다. 군자소요검 이송학이라면 그도 익히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유명인이었던 것이다.

군자소요검(君子逍遙劍) 이송학!

줄여서 보통 군자검(君子劍)이라 불리던 그는 강호에서 가장 정직하고 인자한 검법의 소유자라고 알려져 있던 터였다. 그 실전성이 턱없이 부족한 검법을 가지고 도 사람들은 그를 하북(河北)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열 명의 사람에 올려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검법을 가지고 여태껏 살아있는 것만 해도 그는 놀라운 검 의 천재라는 분석까지 있었다.

공격이라고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운 몇 초식뿐인, 수비식만 잔뜩 있는 불구자 검법(혹자는 이렇게 혹평한다)을 가지고도 여태껏 살아남았으니 이 얼마나 위대 한가.

그러나 그는 몇 년 전 하북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 후 그의 행적에 관한 소식은 글자 한 자도 없었다. 홀연히 사라진 문제의 그날도 그의 방은 깔끔하 게 정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가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나도 그의 행적이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하북 십검의 일인이자 정의문(正義門)의 장로이기도 한 당신이 어째서?”

“여기서 녹림도들이랑 사이좋게 산적질이나 하고 있는 거요?’라는 말이 생략된 질문이었다. 빙검의 질문에 군자도 이송, 아니 군자소요검 이송학의 얼굴에 낭패 감이 서렸다.

그러나 인생의 우여곡절(迂餘曲折)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오늘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송학은 길게 한숨을 토 해 내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후우…, 본래 난 성격이 원만해 패배를 당해도 별 느낌이 없을 줄 알았지요. ‘나 같은 군자는 하찮은 승부욕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난 나 자신을 훌륭하게 제어할 수 있다. 꼭 승부에 승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항상 되뇌이고 또 되뇌이고 있었지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패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승부에 집착하 는 나약한 인간인 줄 깨달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자가 누구였소이까?”

빙검은 군자소요검 이송학이 누군가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은 귓동냥으로도 들은 적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그자는 한 소년이었습니다.”

“소년?”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은 갑자기 심장이 뜨끔해 왔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두 사람은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계속 경청하기로 했다.

“그것도 손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당한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그제야 전 제가 얼마나 좌정관천(坐井觀天)한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닫게 되었지요. 그는 아직 스 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소년이었습니다. 어리지만 아주 차가운 인상의 소년이었습니다. 자식뻘도 안 되는 소년에게 손 한번 제대로 못 쓰고 당하다니 정말 내가 이 세 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푸욱, 푸욱!

염도와 빙검은 이송학의 입이 열릴 때마다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그의 구구절절한 말에 그들은 금세 동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왠지 남의 이 야기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세상을 헛살아 온 게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요.”

음! 음!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칼을 물고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왠지 치욕을 당한 것 같았지요. 놀림을 당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은 아마 제가 그 소년이 전력을 다하지 도 않고 나를 제압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한낱 소년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당해야 했으니 참으로 수치스러웠지요.” 조금 더 듣다가는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저토록 구구절절하고 가슴 울리는 사연은 처음 들어보는 염도였다. 냉큼 달려가 그를 와락 껴안아주고 싶었 다. 주위의 눈만 없었으면 그는 정말 충동적으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이해해! 다 이해해! 그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 내 잘 알지! 친구!’

그러나 그는 극도의 자제심과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또 참았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혹시 그 소년이 자네보고 자기 제자가 되라고 터무니없는 강요는 하지 않던가?”

다급한 목소리로 염도가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의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또다시 동문사형제가 늘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에 염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닐세! 계속하게! “

염도는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이송학의 과거를 더듬는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소년이 그러더군요. 난 너무 틀에 얽매어 고지식함에 빠져 있어서 발전이 없다고요. 그 틀을 깨지 않는 이상 더 강해지기는 무리라고 하더군요. 그 후로는 며칠 간 기억이 잘 나지 않더군요. 아마 무작정 집을 나서서 정처 없이 걸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정신이 드니 이 무리 안에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죠. 그런데 귀 하들은 누구시오?”

이송학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쓰고 있던 삿갓을 벗었다. 평상시에 인상착의가 너무 눈에 띄어 삿갓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이송학은 자신에게 이 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인은 천무학관의 총노사를 맡고 있는 빙검 관철수라 하오.”

빙검이 그제야 자기를 소개했다.

“염도다! “

무뚝뚝한 염도의 소개였다.

“컥! 그, 그럼 당신들이 그 유명한…”

사색이 된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소개를 들은 산적들 대부분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몇몇 산적은 사레가 심하게 들린 듯 연신 기침을 해댔다. 심장이 안 좋은지 심장을 움켜쥐고 갖은 인상을 다 쓰는 산적도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시도하려 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그 비난의 화살은 모두 채주 임개를 향했다. 다른 사람과 마 찬가지로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 있는 임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얼음과 불은 절대 섞이지 않고 같이 다니는 법이 없다고 들었었는데…….”

때문에 이송학은 순간적으로 이 두 사람이 그 유명한 두 사람이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빙검이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세상엔 가끔 피치 못할 사정도, 예외도 있는 법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 예외가 사람 여럿 잡을 뻔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었다.

“휴우~”

임성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기 차례까지는 오지 않을 듯했다.